'적도', 시각장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우리는 눈을 통해 얼마나 진실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눈이 있기 때문에 진실은 오히려 가려지는 것이 아닐까. '적도의 남자'는 주인공 선우(엄태웅)가 눈이 멀게 되는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을 뜨고 있을 때 선우는 장일(이준혁)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선우가 그 실체를 보게 된 것은 바로 그가 눈을 멀게 되는 사건을 통해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세계 속에서 선우는 차츰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적도의 남자'(사진출처:KBS)

그 세상은 냉혹한 공포와 분노이면서, 동시에 따뜻한 마음이기도 하다. 공포와 분노는 성공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친구마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장일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세상이고, 그 따뜻한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구원처럼 손을 내밀어주는 지원(이보영)이라는 인물로 표상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담는 '적도의 남자'는 두 가지 장르를 담는다. 선우와 장일의 관계가 풀어져가는 복수극이 그 하나고, 선우와 지원이 점점 진심으로 다가가는 드라마틱한 멜로가 다른 하나다.

 

'적도의 남자'가 초반 부진을 털어내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복수극과 멜로라는 두 가지 씨줄과 날줄이 바로 '눈을 멀었다'는 그 설정을 통해 절묘하게 엮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각장애라는 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적도의 남자'는 상투적인 복수극과 상투적인 멜로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드라마에는 시각장애라는 설정에서만 가능한 극적인 상황과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선우가 못 보기 때문에 장일이 선우를 대하는 섬뜩한 실체가 더 부각되고, 안마 실습을 하면서 아버지를 죽게 한 진노식 회장(김영철)과 선우가 대면하는 극적인 장면이 가능해진다. 보이지 않는다는 선우의 장벽을 세워두자 그 앞에 이 철면피 같은 인간들이 하는 섬뜩한 짓들이 부각되는 식이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바라봐야 한다. 아마도 선우의 복수극은 그래서 이 못 본다는 설정을 뒤집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못 본다고 생각했던 선우가 사실은 그들의 치부를 보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복수의 서막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못 본다는 설정을 단지 이런 복수극으로만 활용했다면 이 드라마는 자칫 너무 건조한 느낌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설정이 멜로에도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선우가 스카프를 사면서 옆에 따라온 지원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그렇고, 연주회장 앞에서 난 자동차 사고 소식을 들은 선우가 지원이 다친 줄 알고 안 보이는 와중에도 그녀를 애타게 찾는 장면이 그렇다. 불 꺼진 방안에서 선우가 지원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은 또 얼마나 시적인가. 또 눈이 보이게 된 선우가 지원과 다시 만나는 과정이 아련하게 이어지는 것도 과거 시각 장애를 겪었던 사실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시각장애라는 설정이 장르적으로 훌륭한 장치라는 것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이 설정은 그 자체로 이 드라마의 메시지에 접근한다. 보지 못하는 선우라는 존재가 겉으로만 번지르르 한 세상의 더럽고 잔혹한 치부를 제대로 바라보고, 허위와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진실된 사랑을 찾게 된다. 이는 또한 보지 못하는 자와 보는 자로서 선우와 장일이라는 두 인물의 대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보지 못하는 선우가 보는 장일보다 더 진실 되고 따라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 이것은 상황 자체만으로도 전해지는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 보지 못하는 남자와 보는 남자,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진 구원 같은 여자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해준 연기자들의 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준혁은 연기의 재발견이다. 이준혁은 순간순간 욕망에 따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거짓말을 하고 행동하는 이 섬뜩한 장일이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주었다. 지원이라는 구원자의 역할을 연기한 이보영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껏 그다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보영은 이 역할을 통해 그 투명할 정도로 순수한 매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적도의 남자'는 엄태웅의 존재감이 깊이 각인된 드라마임에 분명하다. 그는 왜 그가 엄포스라고 불리는가를 이번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었다. 투박해 보이지만 진짜 선우라는 캐릭터가 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그 자세에서 우리는 이 인물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이 절절한 진심이 담긴 엄태웅의 연기가 받쳐주지 못했다면 자칫 이 드라마는 그저 답답하게만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엄태웅이 있어, 이 시각장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더 섬뜩하고 더 절절하게 여겨질 수 있었다.

예능과 시사 교양 모두 실종된 MBC

 

'MBC 뉴스데스크'는 한때 뉴스 프로그램의 간판 격으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특유의 권력에 굴하지 않는 따끔한 멘트와 시각들이 소외된 서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 출신들은 모두 스타로 자리매김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건 이제 옛말이 된 것 같다. 지금의 뉴스데스크는 편성시간이 확 줄어버렸고 심지어 주말의 뉴스데스크는 단 15분이 고작이다. 대신 '세상보기 시시각각'이라는 VCR물이 뉴스의 빈자리를 때우고 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MBC는 'PD수첩'에서 '시사매거진 2580' 그리고 '100분 토론' 같은 인기 시사 프로그램들이 유독 많았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렸거나 본질을 잃고 마치 물 타기를 한 듯 프로그램 색깔이 흐릿해져버린 게 사실이다.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이 이런 상황이니, 교양 프로그램인들 온전할 리가 없다. 'MBC스페셜'은 금요일 밤을 대표하는 다큐 프로그램이자, TV 다큐의 성공사례로 지목되었지만 언젠가부터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물론 파업 여파가 더 그 변화를 극명하게 보이게 해준 것일 게다. 하지만 이미 파업 이전부터 이런 변화는 눈에 띄게 일어났다는 것. 즉 이 변화가 파업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파업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방송, 특히 현실에 민감한 시사나 교양 프로그램이 통제 받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방송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국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프로그램이 자칫 그 눈과 귀를 막을 수도 있다. 파업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좀 더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함이다.

 

뉴스와 시사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이 다를 수 없다. 예능은 그저 웃음을 주는 것으로 현실과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치부되기도 하지만, 어디 그런가. 지금의 예능은 현실과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대중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지 못하게 된다.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은 대표적이다. 11주째 결방의 이유도 분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파업에 대해 지지하는 대중들의 마음도 분명하다. 우리는 그저 방영되기만 하는 '무한도전'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웃음과 감동 그리고 의미를 주는 '무한도전'이 보고 싶은 것이다.

 

'무한도전', '황금어장', '놀러와', '우리 결혼했어요' 등등의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건 모두 제대로 된 프로그램들을 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외주로 채워 넣은 '일밤'이나 MBC측에서 겨우겨우 채워 넣은 방송이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타이틀만 같다고 같은 프로그램이 되는 건 아니다. KBS의 '1박2일'이 파업 와중에 편집 인력 몇을 투입해 만든 프로그램이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 되어버리는 건 그 때문이다.

 

남은 건 본래부터 외주로 채워지던 드라마들뿐이다. 그것도 자체 제작하는 주말드라마, '무신'과 '신들의 만찬'은 질적인 면에서 완성도가 너무 떨어지는 드라마들이다. 때 아닌 신파 설정으로 70년대 드라마를 보는 듯한 '무신'과, 이해할 수 없는 멜로 구도의 급변으로 논란마저 겪고 있는 '신들의 만찬'은 한때 드라마 왕국으로 군림하던 MBC의 위상을 옛이야기로 만들어버린다.

 

뉴스의 편성이 줄어들고, 시사교양 프로그램도 사라지고, 예능도 없고, 드라마마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방송. 이것은 어쩌면 파업이 아니라도 잘못된 인력운용으로 파행되는 방송사가 보여줄 풍경 그대로일 것이다. 케이블만큼도 볼 게 없는 작금의 MBC는 그래서 이 본질적인 문제를 그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식'의 인력운용과 버티기로 일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 그토록 방송이 하고 싶은 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일선에서 벗어나 있는지, 또 그토록 제대로 된 방송을 보고 싶은 대중들이 긴 시간 동안 결방을 참고 있는지 MBC는 생각해봐야 한다.

스펙사회에서 생존하려는 청춘들의 몸부림

 

‘패션왕’의 강영걸(유아인)은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주인공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주인공이라고 하면 주로 선의 입장에 서 있게 마련이고, 겉으로는 까칠하게 굴어도 여성을 보호해주는 인물이며, 심지어 복수를 할 때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친다거나 하는 비열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으로서의 정당성(적과는 다른)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패션왕'(사진출처:SBS)

하지만 강영걸은 자신에게 모든 걸 의탁하고 지지하는 가영(신세경)을 사장이라는 명분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지나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또 재혁(이제훈)에게 복수하기 위해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 가영을 그의 회사에 파견근무 보내고 거기서 안나(유리) 대신 디자인을 하게 시키지만, 결국 가영이 한 디자인을 자신이 상표등록 하는 방식으로 재혁의 뒤통수를 친다. 그는 결코 우리가 흔히 봐왔던 드라마의 주인공과는 다르다. 그래서 한때 강영걸은 민폐 캐릭터로 불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강영걸은 이렇게 물불 안 가리는 캐릭터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강영걸과 정반대에 서있는 인물들에게서 찾아진다. 재혁의 아버지인 정만호(김일우)는 자식에게조차 실적이 우선인 인물이다. 그는 자식이 사업에 실패해도 ‘자기 돈’ 아까운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뭔지 알아?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하는 인간들이야.” 이렇게 말하는 그는 노력이나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인물이다. 모든 것이 결과로 드러나는 이른바 ‘스펙사회’의 전형.

 

흥미로운 건 ‘스펙사회’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또 다른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재혁은 그런 아버지 정만호를 거의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또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영의 디자인을 안나가 한 것처럼 돈으로 사려고 한다.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돈으로 가로채는 이런 방식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과정이 없고 결과만을 보는 스펙사회가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정만호와는 달리 재혁이 그나마 괴로워하는 건과정을 만들어내고 있는 가영이란 청춘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는 스펙사회의 공포에 질려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춘의 순수함을 갖고 있다.

 

앞뒤가 꽉 막혀버린 이 ‘스펙사회’의 틀을 놓고 바라보면 강영걸의 과도해 보이는 행동들이 이해된다. 도대체 공정하고 정의로운 공자님 같은 방식으로 이 스펙사회와 대적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강영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한다. 비열해져야 한다면 비열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이고, 그래야 가영 같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도 챙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란 걸 그는 알고 있다.

 

재혁과 안나가 이 스펙사회의 기득권자로서 과정 없이 결과에만 집착하는 한계를 드러낸다면, 거꾸로 영걸과 가영은 애초부터 출구가 막혀 결과를 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재혁과 안나는 과정을 찾아야 하고, 영걸과 가영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한계를 넘으려면 재혁과 안나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하는 반면, 영걸과 가영은 스펙사회에서 몸에 새겨져 버린 패배주의를 넘어서 자신들만의 자존감을 되찾아야 한다. 이미 능력이 입증되었지만 여전히 ‘짝퉁 인생’을 살아가는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강영걸이 그토록 비열하게까지 그려지고, 재혁과 안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토록 안쓰럽게 여겨지며, 가영의 언제든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눈물이 가슴 한 구석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 이 모든 풍경들이 우리네 스펙사회 청춘들의 자화상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래 ‘장치나 프로그램을 만들 때 필요한 성능’ 따위를 지칭하던 ‘스펙’이란 말이 공공연히 인간에게 사용되고 있는 이 사회. ‘스펙사회’는 그래서 그 자체로 이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준다. ‘패션왕’을 보다보면 이 끔찍한 스펙사회에서 질식당하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실감하게 된다.

김구라 하차는 이의 없지만, 그 후는?

 

정신대 발언은 확실히 심했다. 10여 년 전 그것도 인터넷 방송에서 아마도 정신없이 내뱉은 말 중의 하나일 테지만, 그래도 지나쳤다는 건 분명하다. 따라서 김구라의 잠정은퇴 선언은 당연하고 또 적절한 행동으로 보인다. 다소 거친 직설어법에도 불구하고 김구라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 년 전의 그 말 한 마디는 이 모든 공감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김구라는 방송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방송을 한다 한들 공감을 잃어버린 말들은 대중들에게 다가가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있어 김구라가 과거에 인터넷방송을 통해 얼마나 심한 독설을 날렸던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김구라는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면서 끊임없이 과거에 자신이 상처 주었던 연예인들에게 사과를 했다. '절친노트'는 사실상 이것을 프로그램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구라는 이 방송을 통해 문희준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절친이 되어 이제는 같이 방송을 챙기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정신대 발언은 김구라가 연예인들에게 날린 독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그저 사과를 통해 화해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방송을 당분간 접고 자숙의 시간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유독 김구라에게만(정확히 말하면 연예인들에게만) 이렇게 엄밀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김구라처럼 과거의 발언이 문제라면, 꽤 많은 현업의 정치인들도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왜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까.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김구라가 4.11 선거의 정치적인 희생양처럼 보이고, 나아가 이를 계기로 문화 전반에 보수적인 재갈을 물리려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일 게다.

 

김구라가 한 과거 발언의 수위는 도를 넘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상파에 와서 그가 만들어낸 방송 프로그램의 화법 자체를 폄하하긴 어렵다. 토크쇼에서 호스트와 게스트가 저들끼리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말만 골라 하던 방식에, 시청자(관객)가 듣고 싶은 말과 질문을 끼워 넣은 게 김구라식의 화법이었다. 물론 이 화법은 초반에 너무 거칠었던 게 사실이다. 시청자들이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어찌 보면 그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저들의 이야기만을 듣고 있는 것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들끼리 홍보를 위해 주고받는 말들에 점점 식상함을 느끼게 되면서(왜 수동적으로 저들 하고 싶은 대로 굴러가게 놔두는가) 김구라식의 화법에 공감을 갖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구라가 한 과거의 발언은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여기에 대해 명백히 책임을 지고 넘어가야 한다. 따라서 김구라가 하차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김구라 하차로 인해 그 여파를 몰아 자칫 방송 전체가 위축되는 것은 큰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과거 하던 보수적인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물론 막말을 하는 건 문제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에 자기 검열을 거치는 것도 문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제 갓 벗어나서 트여진 말문이 다시 막힐 수 있다. 방송의 화법은 그저 웃고 떠드는 것 같지만,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그걸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김구라의 하차는 당연하지만, 그 여파가 우려되는 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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