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믿을 친구, 납뜩이 조정석

 

<건축학개론>에서 조정석이 맡은 역에는 이름이 없다. 대신 그 역할은 '납뜩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대사 중에 "납득이 안된다"는 말을 습관처럼 쓰기 때문이다. "에? 납득이 안 되네. 납득이. 아니 대학생이 연예를 하라고 대학생활 하는 거지 대학생이." 재수생인 그는 친구 승민(이제훈)이 대학까지 가서 연예도 제대로 못하는 걸 '납득이 안 간다'고 말한다.

 

 

'더킹 투하츠'(사진출처:MBC)

여자친구에게 속내를 고백하지 못하는 승민에게 납뜩이는 제 딴에 방법이라고 술 마시고 무조건 대시하라고 알려준다. "근데 너한테 술 냄새가 팍! 나잖아. 어떨 거 같냐. 어떨 거 같애. 일단은 쫀다고. 납득이 안가잖아. 납득이. 갑자기 찾아 와서 술 냄새? 어 이건 뭐지? 낯선대?" 여기서도 그는 '납득이 안간다'는 습관적인 말을 사용한다.

 

물론 그가 납뜩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 습관적인 말투 때문은 아니다. 그는 어딘지 사회에 잔뜩 불만을 갖고 있다. 그는 아마도 납득 안가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툭툭 던지는 것만 같다. 영화는 특별히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지만, 그가 말하는 방식, 그가 친구 승민과 얘기하는 장소, 그의 대사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생활 등이 그 이유를 에둘러 알려준다. 그는 재수생이고 독서실에 다니며 그다지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싱숭이와 생숭이라 이름붙인 여자애들(중학생인 듯하다)이 독서실에 같이 다니고 입으로는 연애박사지만 실제로는 영 아닐 것 같은 인상이다.

 

한마디로 납뜩이는 어딘지 한참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처럼 보인다. 대학도 가지 못했고 당연히 제대로 된 연애도 별로 못해봤다. 강북이라는 공간에 딱 어울리는 그런 캐릭터. 그런데 그 납뜩이가 순수한 친구 승민이에게 어두침침한 골목길에서 조언이랍시고 던지는 말들 속에는 거칠지만 따뜻한 정이 느껴진다. <건축학개론>에서 강남과 기득권을 표상하는 재욱(유연석)이란 인물이 있었다면 납뜩이는 정확히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가진 것이 없어 초라해지는 이 승민이라는 어설픈 청춘에게 납뜩이는 뭐든 도움이 되기 위해 조언을 해준다. 그 조언이 엉터리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거기에 '납득되는' 이유는 그 마음을 읽기 때문이다. 납뜩이는 승민의 진정한 친구라는 것. 결국 기득권자들이 가져가버리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투덜대고 불평을 쏟아내면서도 친구라는 것만으로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존재. 재욱이라는 기득권자에게 결국 빼앗기고 만 사랑으로 오열하는 승민에게 납뜩이가 던지는 한 마디는 그래서 가슴 저릿하게 다가온다. "힘내..새꺄.."

 

아마도 이렇게 짧은 순간에, 주연도 아니고 조연으로, 게다가 대사도 그리 많지 않은 배역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석을 보면서 '넘버3'의 송강호를 떠올리게 됐던 건 그 미친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심에 서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 주변인이라는 점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더 흔드는 인물로서 '납뜩이'라는 캐릭터가 조정석이라는 배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정석은 짧은 대사지만, 특유의 맛깔 나는 발성으로 납뜩이라는 존재를 순식간에 우리 뇌리 속에 새겨 넣었다. 아마도 뮤지컬 배우 출신이라는 점이 그 특유의 리드미컬하고 정확하게 여겨지는 발성을 만들지 않았을까. 부리부리한 눈에 앙다문 입은 제 아무리 껄렁대도 그 안의 단단한 내면을 읽게 만든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는 그렇게 조정석이라는 연기자를 우리에게 납득시켰다. 어딘지 믿음이 가는, 나를 이해해줄 것 같은 친구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더킹 투하츠>에서 왕 재하(이승기)를 지키는 타협이란 없는 고집스런 인물 은시경(조정석)으로도 이어진다. 물론 재하와 은시경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주종 관계지만, 여기서도 은시경은 그 표면적 관계를 넘어선다. 즉 그 누구하나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재하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모두가 재하를 비난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자책할 때 은시경은 이렇게 말한다.

 

"남들 말에 휘둘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전하는 이미 강하십니다. 제가 본 전하는 많이 예민하십니다. 또 진지한 것도 싫어하시고요. 하지만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다 상처도 많아 확 나가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지레 허허실실 가면을 쓰고 계세요. 이제는 그걸 벗어달라는 겁니다. 콤플렉스도 많고 얕보는 사람도 많지만 전하는 이미 저에겐 세상에서 가장 힘센 왕이십니다. 부디 더 당당해지세요. 전하."

 

이것은 '납뜩이'의 연장선으로서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하반신 불구가 된 공주 이재신(이윤지)과의 로맨스에서 그의 직책으로서의 딱딱함과 고집스러움이 묻어난 무표정한 얼굴이 사적인 감정으로 살짝 움직일 때 우리는 그의 마음에 납득되고 만다. 철저하게 캐릭터가 잘 분석된 연기와 단단한 발성, 그리고 연달아 잘 맞아 떨어진 배역은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앞으로도 납뜩이로서 우리에게 자리할 지도 모르겠다. 어떤 배역이든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는.

풍경이 스토리를 압도하는 <사랑비>의 문제점

 

파란 담쟁이 넝쿨이 주는 청춘(靑春)의 파릇파릇함, 촉촉이 내리는 비의 질감,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노란 우산, 그 우산 속의 연인... <사랑비>의 첫 장면은 이 드라마가 얼마나 감성을 자극하는 예쁜 그림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미대 앞 작업실 안에서 창밖으로 처음 인하(장근석)가 윤희(윤아)를 발견하는 장면도 그렇다. 미대 앞 벤치에 앉아있는 윤희에게서는 광채가 흐른다.

 

 

'사랑비'(사진출처:KBS)

아마도 첫 만남의 그 강렬하고도 빛나는 순간을 포착해내려는 윤석호 PD의 연출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하와 윤희가 만나는 70년대 교정의 풍경에 머무르지 않고, 2012년 두 사람의 자식인 서준(장근석)과 하나(윤아)의 첫 만남으로도 이어진다. 홋카이도의 아름다운 설경은 그 순백의 배경 위에 선 인물들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이른바 다이아몬드 스노(흩날리는 눈가루가 빛에 간섭되어 마치 다이아몬드가 떨어지는 것 같은 효과를 주는 것)나 몽환적인 느낌의 온천도 마찬가지다.

 

<사랑비>는 분명 압도적인 색과 빛의 대비로 이루어진 영상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토리상으로도 이미 의도된 것들이다. 왜 굳이 인하가 미대생이며 그 아들인 서준이 포토그래퍼인가가 그것을 설명해준다. 이 두 인물은 <사랑비>의 영상을 상당부분 만들어내는 그림과 사진을 표상한다. 70년대의 풍경이 인하가 그려내는 그림이라면(그가 생각하는 추억처럼 아련한), 2012년의 풍경은 서준이 찍어낸 사진이다.

 

물론 이들 캐릭터는 그림이 주는 아날로그적인 느낌과 사진이 주는 디지털적인 느낌으로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풍경의 차이는 70년대의 3초와 2012년의 3초의 대비를 통해 제시되는데, 전자가 3초 만에 빠지는 사랑을 얘기한다면, 후자는 3초 만의 누군가의 마음을 빼앗는 사랑을 얘기한다. 전자가 운명적이고 수동적인 3초라면, 후자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3초다. <사랑비>는 캐릭터의 대비를 통해 70년대와 2012년의 다른 사랑을(그러면서도 같은) 보여주는 드라마다.

 

그런데 막상 이 '3초'의 대비로 대변되는 두 캐릭터의 성격적인 차이를 빼놓고 보면 이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태도는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70년대 인하가 친구인 동욱(김시후)과의 우정 때문에 윤희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2012년 서준도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의 어머니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70년대와 2012년, 무려 3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들은 헤어짐의 이유를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지 못한다. 그림에서 사진으로, 수동적인 3초가 능동적인 3초로, 순정 캐릭터가 까도남 캐릭터로 바뀌었음에도 이들의 사랑을 하는 방식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서준이나 하나 같은 요즘 세대가 부모 세대의 사랑을 반복하고 있는 이 상황은 과연 현실적인 것일까. 부모들의 빗나간 사랑의 수레바퀴에 억눌려 뭐 하나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 이 풍경은 그래서 지나치게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즉 <사랑비>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사랑도 바뀌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려는 드라마다. 그래서 그 과도한 의도 속에서는 지금 세대의 어떤 톡톡 튀는 캐릭터라고 해도 그저 과거의 사랑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이야기가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이유는 이미 강한 주제의식 속에 스토리가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비>의 그림들이 예쁘긴 하지만 어딘지 꾸며진 듯한 '살롱사진'의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토리가 주제의식 속에 갇혀 있듯이, <사랑비>는 예쁜 그림이라는 미적인 연출 속에 드라마가 갇혀 있다.

 

그림과 사진으로 대변되는 캐릭터 설정, 파릇파릇한 청춘의 캠퍼스 교정의 풍경, 예쁜 정원, 카페, 미술 작업실, 동해 바다, 홋카이도의 이국적 풍경, 수목원이라는 공간 등등, 이 작품은 윤석호 PD가 축조해 놓은 풍경화나 정물화를 먼저 상정해놓은 듯한 인상이 짙다. 그리고 그 위에 이 그림의 최고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모델이 서 있다. 장근석과 윤아다. 바다를 배경으로 윤아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재현하고, 장근석이 그녀를 사진에 담는 장면은 그래서 윤석호 PD의 영상에 대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예쁘긴 하지만 어딘지 꾸며진 듯한.

 

이것은 스토리가 이 압도적인 풍경화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거꾸로 압도적인 풍경화에 대한 매혹이 스토리를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일까. 오랜 세월을 지나 중년의 인하(정진영)가 홍대 앞에서 비를 맞으며 윤희(이미숙)를 다시 만나는 그 장면이나, 여행을 떠난 서준과 하나가 그 여행지에서 인하와 윤희를 만나는 그 장면이 극적이고 미적인 느낌을 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런 공간에서 갑자기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스토리적인 부실은 어쩔 수 없다.

 

살롱사진에 대한 매혹은 그것이 미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미적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의 미적인 특징은 물론 영상 연출이 차지하는 바가 적지 않지만 결국 스토리적인 정교함과 디테일에서 나오는 것이다. 스토리의 디테일을 영상을 통해 심리적인 것까지 포착해내면서 그 이야기의 힘을 부여해주는 영상연출이야말로 진정으로 미적인 것이 아닐까. 마치 문장의 유려함에 빠졌을 때 자칫 글이라는 매체의 본분을 잊을 위험이 있듯이, 영상의 아름다움 또한 스토리를 종속화하고 가둬버리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70년대 사랑과 2012년의 사랑, 그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주라는 괜찮은 기획의도를 갖고 있는 <사랑비>. 거기에 맞는 새로운 스토리의 부재가 이 작품을 살롱그림처럼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넝쿨', '뿌리', '최고' 작가의 공통점은?

 

'넝쿨째 굴러온 당신', '뿌리 깊은 나무', '최고의 사랑'. 이 세 작품을 쓴 작가들의 공통점이 뭘까. 바로 예능작가 출신이라는 점이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쓴 박지은 작가는 KBS '사랑과 전쟁', '멋진 친구들', '이색극장- 두 남자이야기' 등 코미디와 시트콤을 쓴 경력이 있다. '뿌리 깊은 나무'의 김영현 작가는 '사랑의 스튜디오'와 '테마게임'을 거쳤던 예능작가 출신이다. 또 '파스타'를 쓴 서숙향 작가는 '주병진쇼'를 거쳤고, '환상의 커플', '미남이시네요', '최고의 사랑' 등 쓰기만 하면 히트를 치는 홍자매 역시 예능에서 잔뼈가 굵었던 작가들이다.

 

 

'최고의 사랑'(사진출처:MBC)

이들은 모두 예능 작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 이외에도 비슷한 점들이 많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작품에는 연기력 논란이 없다는 점이다. 아니 연기력 논란은커녕 오히려 작품을 거치면서 배우의 가치가 급상승한 경우가 더 많다. 한예슬이 지금껏 배우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홍자매가 쓴 '환상의 커플'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여전히 나상실 캐릭터에 대한 잔상이 강하게 남아있다. 윤제문, 송중기, 한석규, 장혁, 신세경 거의 모두가 미친 존재감이었던 '뿌리 깊은 나무'도 마찬가지고, 현재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주목받는 김남주나 유준상도 마찬가지다.

 

이렇다 보니 이들 작가들과 작업하려는 배우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조금 연기력이 약하다 싶은 배우들조차 그들 작품을 하고 나면 특유의 존재감을 갖게 되니 안 그럴 수가 없을 게다. 이것은 예능 출신 작가들 특유의 캐릭터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물론 드라마 작가들 역시 캐릭터에 집중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예능 출신 작가들은 캐릭터 발굴이 하나의 일상처럼 되어 있다. 누구든 카메라에 들어오면 그들의 특징에서 하나의 캐릭터를 뽑아내는 것이 그만큼 훈련이 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기존 드라마 제작에서 작가와 배우가 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즉 기성 드라마 작가들은 물론 배우와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배우에게 요구하는 면이 더 많다. 작품의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배우의 손동작 하나 대사 토씨 하나까지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김수현 작가와 작업한 배우들의 진술을 통해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것인가를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예능 출신 작가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작업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즉 배우가 캐스팅되면(본래 의도와 달리 다른 배우가 캐스팅되는 경우도 있다) 그 배우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오히려 캐릭터화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분히 예능의 방식이다. 특히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경우 출연자의 캐릭터화는 임의로 만들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본래 출연자에 내재된 개성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여러 모로 예능 출신 작가들의 작품에서 왜 연기력 논란이 적고, 캐릭터가 유독 눈에 띄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가 먼저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것을 배우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과, 배우가 가진 장점이나 개성을 작가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와 잘 조화되게 하는 방식. 물론 어느 것이 더 좋고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캐릭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은 이들 예능에서 잔뼈가 굵어 드라마로 넘어온 작가들에게 배우들이 몰리는 분명한 이유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배우가 아닌 타 분야의 연예인들의 연기 분야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어서인지, 최근 들어 드라마계에서 (캐릭터를 잘 살려주는) 예능작가들에게 부쩍 러브콜을 던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작금의 드라마들은 점점 예능적인 코미디와 상황극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진지한 드라마의 대중성은 그만큼 낮은 게 현실이다). 예능작가들은 본인이 하는 일에 비해서 대우는 낮은 편이다. 그래서 시트콤 하나만 써도 예능과는 다른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제반 상황들을 고려해본다면 앞으로 예능 출신 작가들의 드라마 작가 진출이 빈번해질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실제로 그 움직임은 지금도 가시화되고 있다.

<신만찬>의 출생비밀 집착 뭐가 문제일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신들의 만찬>은 도대체 주제의식이 있기는 한 걸까. 적어도 소재에 대한 나름대로의 시도를 한 적이나 있는 걸까. 애초 <신들의 만찬>에 기대했던 것은 그 요리라는 소재가 가진(최근 요리 한류로 이어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을 보라. 요리라는 소재는 뒷전이 된 지 오래고 끊임없는 그 놈의 '출생의 비밀' 타령으로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허우적대고 있는 꼴이다.

 

 

'신들의 만찬'(사진출처:MBC)

드라마 초반 요리 대결에 대한 에피소드가 몇 개 나오고 나서는 끊임없이 4각 멜로(그것도 인물들이 그럴 듯한 이유 없이 이리 저리 휘둘리는)가 반복되더니, 이제는 끝없는 핏줄 타령이다. 잃어버렸던 자식의 귀환, 그것을 막으려는 키워진 자식의 갖은 악행, 기억을 잃어버린 엄마. 드라마는 인물들이 엄마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도돌이표로 집어넣는다.

 

그나마 이야기에 개연성이라도 있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자식 고준영(성유리)이 엄마인 명장 성도희(전인화)를 추락시키려는 백설희(김보연)의 음모를 막는다는 이유로, 아리랑에 들어와 성도희와 각을 세우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꼭 그런 방법밖에 없을까(이 상황은 그래서 억지로 저 <하늘이시여>의 기묘한 모녀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그렇게 돌아온 고준영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 판단하고 이를 온몸으로 막으려는 하인주(서현진)의 모습도 너무 전형적이다.

 

이것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드라마 코드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다. 왜 등장인물들은 이 핏줄의 틀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까. 하인주는 왜 굳이 그토록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면서까지 성도희의 딸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걸까. 이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다. 하인주는 이미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능력도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는 왜 여전히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아기 상태에 놓여져 있는 걸까.

 

이것은 고준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타고난 요리 실력의 소유자이고, 생존력 또한 뛰어난 인물이다. 물론 어린 시절 잃어버린 부모 때문에 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녀 역시 이제는 어엿하게 독립적으로 성공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 여전히 '엄마'를 외치며 눈물 흘리는 아이로 퇴행하고 있는 것일까.

 

출생의 비밀 코드도 적절히 활용되면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극적 장치로 쓰여질 수 있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 코드 그 안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는다. 이 시대는 물론 핏줄이나 혈연 같은 운명적인 틀로 인해 삶이 고착되는 비극적인 현실을 안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그런 시대는 아니다. 과거에 발목 잡히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 적어도 그것이 드라마가 보여줘야 할 비전이 아닐까.

 

<신들의 만찬>은 이미 성장한 사람들이 모두 아이 때로 퇴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준영과 하인주의 대결은 그래서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결국은 순혈을 가진 고준영이 그렇지 못한 하인주를 이기는(이것은 태생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으로 드라마는 치부한다) 이 게임 속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친 딸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일뿐이다. 이 얼마나 유아적인가.

 

과거 <제빵왕 김탁구> 역시 출생의 비밀을 드라마 코드로 활용했지만 적어도 그 드라마는 그 안에 성장의 과정을 집어넣었다. 출생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으로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은연 중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신들의 만찬>은 어떤가. 고준영은 성도희의 순혈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재능을 부여받는다. 한 번 냄새만 맡아도 그 재료와 요리 방법까지 꿰뚫는 이 신의 재능은 오로지 그녀가 좋은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반면 오로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그 자리를 버텨온 하인주는 고준영의 등장만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이 드라마는 설마 제 아무리 노력해도 핏줄 잘못 타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과연 21세기에 어린이 드라마가 아닌 성인들의 드라마에서 버젓이 내놓고 할 이야기일까. 얼개도 느슨하고 메시지도 공감하기 힘든 <신들의 만찬>은 그래서 그 어떤 막장드라마보다 더 막장스럽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도대체 이 불순한 드라마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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