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킹 투하츠', 이승기에 맞춤인 이유

 

'더킹 투하츠'에서 재하(이승기)는 왜 항아(하지원) 앞에서 자꾸만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걸까. 자신을 거부한 항아에게 철저히 복수하겠다며, 그 마음을 빼앗은 후 헤어져 평생 잊지못할 상처를 주겠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실행에까지 옮기지만 재하는 막상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항아를 보고는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진다. 거기서 진심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용히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하려는데, 불쑥 항아가 "약혼을 하겠다"고 하자 또 마음이 바뀐다. "너랑 왜 내가 약혼을 하겠냐"며 독설을 날린다.

 

 

'더킹 투하츠'(사진출처:MBC)

도대체 왜 재하는 이토록 변덕이 심한 걸까. 사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의 제목하고도 관련이 있다. 재하의 갈등은 항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재하는 제목처럼 두 개의 심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 하나는 남한의 왕제로서의 심장이고, 다른 하나는 한 남자로서의 심장이다.

 

그가 모의 훈련 중에 항아를 향해 총을 쏘는 상황은 이 재하라는 인물이 가진 두 개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남자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 나라의 왕제로서 인질이 되어 국익에 손실을 줄 바에는 총을 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물론 모든 게 모의훈련으로 드러났지만, 후에 재하는 항아와 행군을 하면서 그 때 상황을 얘기한다. 자기의 마음도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이것이 한 남자로서의 심장이 전하는 말이다.

 

재하는 이 두 개의 심장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래서 남자로서 항아라는 알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에게 흔들리다가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오래도록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점, 게다가 복잡한 정치적인 사안들과 맞물려 있는 결혼이라는 문제에까지 다다르면 또 마음 한 구석이 흔들리게 된다. 자신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제로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 그는 또 개인이 아닌 왕제로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장에서 갑자기 항아가 약혼을 하겠다고 발표해버리자, 그 즉시 부인할 수 없는 게 왕제로서의 그의 마음이다(거부하면 이것은 남부 간의 불편한 관계로 이어진다).

 

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왕제, 재하라는 역할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때론 완전히 개념 없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떤 순간이 오면 왕제로서의 근엄함을 유지하는 진중함으로 돌변해야 한다. 이것은 멜로 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날라리처럼 행동하다가도 때로는 마음을 찡 울리는 진심이 묻어나야 하는 인물이 재하라는 캐릭터다. 다행스러운 건 이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이미 이승기는 드라마와 예능, 가수 활동을 하면서 겪었다는 점이다.

 

그의 첫 이미지는 '황태자'였다. 그것도 누나들의 로망으로서의 황태자. 하지만 그 황태자가 '1박2일'이라는 예능을 통과하면서는 형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가 되기도 하고, 때론 허술함이 드러나는 허당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찬란한 유산'을 통해서는 개념 없던 황태자가 진솔한 청년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서는 사랑을 알아가는 순수한 청춘을 연기하기도 한다. 또 홀로 '강심장'을 맡았을 때는 이제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짓궂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킹 투하츠'는 이승기에게 이 황태자의 진중함과, 막내이자 허당으로서의 가벼움을 동시에 품게 하는 드라마다. 이 작품 속에서 이승기는 때론 지독할 정도의 악동의 모습이었다가 또 순간 진중한 모습으로 돌변해 그 악동 이면에 있는 왕제로서의(황태자의 삶으로서의) 쓸쓸함을 드러낸다. 이 두 가지 이미지의 통합은 '더킹 투하츠'의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왕제 재하라는 캐릭터의 연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더킹 투하츠'는 지금껏 가수이자 연기자이자 MC로 활약하며 다양한 모습을 끄집어냈던 이승기에게 이 이미지들을 통합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진중함과 가벼움, 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황태자의 탄생. 이것이 '더킹 투하츠'에 이승기가 맞춤인 이유다. 이승기는 지금 진정한 '킹'이 되기 위한 '투하츠'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니까.

'건축학개론'을 통해 보는 연기력 논란의 실체

요즘 영화계의 화제는 단연 '건축학개론'이다. 첫사랑에 대한 멜로를 시공간을 활용해 '건축적'으로 잘 축성한 이 영화에서 단연 주목을 끄는 배우는 이제훈이다. 첫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절망을 그는 앙다문 입과 순수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잘 표현해냈다. 그런데 이 연기 잘하는 신예답지 않은 신예(물론 그는 영화 '파수꾼'이나 '고지전'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준 배우다)가 처음 '패션왕'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는 심지어 연기력 논란마저 겪어야 했다.

 

사진출처: 건축학개론

'패션왕'에서의 재혁이라는 캐릭터는 '건축학개론'의 승민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인물이다. 승민이 순수함과 따뜻함 그 자체라면 재혁은 노련함과 차가움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초반 그 차가움을 드러내기 위해 표정을 잘 보이지 않았던 데서 연기력 논란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본인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려 한 것일 게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장르는 어딘지 영화와는 달리 '연기하는 톤'이 드러나는 걸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장 연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몰입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특정 공간에서 완전 몰입해 감상하는 반면(그래서 집중도가 더 높다), 드라마는 생활의 공간 속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슬쩍슬쩍 보기도 하는 장르다. 그러니 뭔가 연기가 보이지 않으면 안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다행스러운 건 이제훈이 차츰 드라마에 적응하며 악역으로서의 재혁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한 건 이 단단한 신예는 분명 앞으로 배우로서 확실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거라는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해를 품은 달'에서 연기력 논란에 휘말렸던 한가인은 확실히 '건축학개론'에서는 제 옷을 입은 편안한 느낌이다. 이것은 드라마와 영화의 장르적 차이라기보다는(그녀는 이미 둘 다 충분히 경험했다) 사극과 현대극의 차이 때문이다. '해를 품은 달'에서 첫 사극 연기로서 한가인은 많은 단점을 드러냈던 것이 사실이다. 대사의 톤을 맞추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역할에 동화되지 못하고 흉내 내는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달랐다. 완성도가 지상과제인 영화와 순발력이 더 요구되는 드라마적인 차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연기자들의 몰입도에 따라 그 연기력이 달라보였을 것이지만, 이처럼 장르적인 차이와 그로 인한 작업방식의 차이에 의해 연기자들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다. 물론 이제훈과 한가인의 연기력을 이런 식으로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확실히 이제훈이 보여주는 연기는 더 오래 연예계에 발을 담아왔던 한가인보다 훨씬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영화와 드라마가 가진 장르적 차이가 우리가 흔히 통칭해서 부르는 '연기력 논란'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또한 드라마의 연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즉 지극히 드라마적인 드라마들(예를 들면 가족드라마나 일일드라마 같은 관습적인 연출을 하는) 속에서 캐릭터들은 조금씩은 과장되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기도 조금은 연극 톤으로 과장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는 영화 같은 드라마들은 사뭇 다르다. 이들 드라마들은 과장된 연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연출 속에 녹여내려 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친구로 나온 납뜩이 역할의 조정석이 '더킹 투하츠'에서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에서 말 그대로의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멜로라는 틀 속에서 오히려 이 가난한 동네에 살아가는 청춘들의 우정으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은 그것을 껄렁한 농담으로 보여준 조정석의 단단한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볍게 여겨지던 납뜩이가 '더킹 투하츠'에서는 은시경이라는 시종일관 진지함을 드러내는 원칙주의자로 변신한다. 여기에 아무런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조정석의 연기력이 밑바탕 되어 있는 것이지만, 또한 영화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더킹 투하츠'라는 드라마의 연출이 기여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건축학개론'에서 말 그대로 재발견된 수지는 연기력이라는 것이 단지 연기자의 능력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잘 말해준다. '드림하이'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드라마 속에서 수지가 보여준 그 어떤 배우로서의 매력보다 '건축학개론'의 서연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듯 싶다. 한편 엄태웅은 '건축학개론'에서 조금은 세파에 찌든 나이든 승민을 연기한 것보다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의 광기어린 연기가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아마도 연기력보다는 캐스팅과 캐릭터에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이처럼 연기력 논란은 단순히 연기자의 문제로만 지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르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고, 드라마든 영화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내고 있느냐는 연출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은 제작자의 문제가 가장 크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같은 연기자들이 연기를 했지만 연기력 논란은커녕 배우를 재발견시키고 있는 '건축학개론'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까.

'더킹 투하츠', 이 시뮬레이션의 동력은

'더킹 투하츠'는 기묘한 멜로드라마다. 남남북녀. 상투적인 설정이라고 말할 지 모르겠지만, 남측을 상징하는 왕제 재하(이승기)와 북측을 상징하는 북한특수부대 여자1호 교관 김항아(하지원)가 서로 부딪치고 싸우면서 차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이 멜로의 과정은 그래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처럼 보이지만, 갈라진 남과 북이 이루었으면 하는 멜로 같은 관계(통일을 결혼처럼 꿈꾸는)처럼 읽히기도 한다.

 

'더킹 투하츠'(사진출처:MBC)

서로 다른 정치적, 문화적 환경 속에 살아온 이 두 남녀가 부딪치는 장면에서 흥미로운 두 가지 소재가 보인다. 그것은 '빨갱이'와 '소녀시대'다. 세계장교대회(WOC)의 단일팀으로 묶인 남북 장교들은 같이 훈련을 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경험하지만, 그 과정에서 넘을 수 없는 상대방의 금기를 건드리기도 한다. 남측이 그토록 '빨갱이'라고 세뇌시켰던 북한사람과 북측이 그토록 미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배척했던 자본주의 문화가 그것이다.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접한 북한의 리강석(정만식)이 그 매력에 빠져들자,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은 듯 재하는 그 사실을 갖고 짓궂은 장난을 친다. 하지만 남측에서는 작은 농담일 수 있는 이 이야기는 리강석이라는 북한 장교에게는 치욕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머릿 속 깊숙이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의식적인 반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강석은 결국 재하를 죽이려 들고, 그 상황은 모든 남북의 장교들이 서로 총을 겨누게 되는 상황으로 비화된다.

북측에 소녀시대라는 금기가 있다면 남측에는 '빨갱이'라는 금기가 있다. 마치 남북 간에 갑자기 교전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실제상황으로 꾸며진 마지막 미션에서 김항아는 재하와 일행들을 데리고 남측 군사분계선까지 탈출시키려고 하지만 재하가 이를 믿지 못하는 것은 이 뿌리 깊은 '빨갱이'에 대한 세뇌가 작용한 탓이다. 자신을 납치해 남측에 무언가를 요구할 거라고 판단한 재하는 결국 김항아를 향해 총을 쏘고 자신도 자결하려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미션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만, 결국 '빨갱이'라는 장벽은 소녀시대라는 장벽만큼 남북 사이를 갈라놓는 금기였다는 게 드러난다. 물론 결국 이 남남북녀는 최종 미션으로 새벽 행군을 함께 함으로써 서로의 마음에 그어진 선을 넘고 단일팀을 유지하지만.

'더킹 투하츠'는 그 설정 자체가 그렇지만 하나의 시뮬레이션으로서 재미를 만들어낸다. 국제정세로서의 남과 북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치환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총을 겨누기도 하지만 차츰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그 과정에서 '빨갱이'와 '소녀시대' 같은 문화적 금기를 두고 벌어지는 대결과 그 선을 넘는 장면은 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진 벽 하나씩을 허무는 장면처럼 시뮬레이션 된다.

멜로란 결국 남녀 간의 사랑과 그 사랑을 막는 장애가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하는데, 이 남북관계를 남녀관계로 치환해 만든 멜로는 그래서 남북의 대중정서가 그 장애로 작용한다. 재하와 항아가 결혼할거라는 소문이 뉴스로 발표되자, 북한군 특수부대 장교와 어떻게 남측의 왕제가 결혼을 하냐는 남측 국민들의 반감이 바로 그 장애 요소다. 재하는 이 부분을 연설을 통해 남북의 문제가 아니라 한 남자의 한 여성에 대한 진심으로 되돌려놓는다. "제가 사랑했습니다. 국민들의 마음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적을 사랑해온 나의 마음에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꾸짖어주시길 바랍니다."

'더킹 투하츠'가 그리는 것은 물론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우리가 갖고 있는 통일에 대한 지지만큼 바람직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 시뮬레이션은 힘을 얻게 된다. 여기에 김봉구(윤제문) 같은 외부적인 위기상황(남북을 갈라놓으려는)은 이 두 사람이 하나로 뭉치는 또 다른 명분과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실 시뮬레이션 하나만 보면 그 흐름이 뻔하게 나와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눈을 떼기가 어렵다. 그 팽팽한 재하와 항아 사이의 긴장감 있는 멜로의 과정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그 결과를 못내 보고 싶은 마음도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멜로를 남과 북의 상황으로 시뮬레이션한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동력이다.

'사랑비' 시청률 5%가 전부는 아니다

'사랑비'의 시청률은 5%에 머물러 있다. 배용준을 잇는 차세대 한류스타라는 장근석과 K팝의 중심에 서 있는 소녀시대의 윤아, 그리고 1세대 한류의 선봉장 역할을 한 '겨울연가'의 윤석호PD와 오수연 작가, 게다가 방영 전 이미 일본에 80여억 원의 외화를 벌어들였다는 성과까지. 이렇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성공요소로 지목되는 것들이 많은 드라마로서 5%라는 시청률은 가혹할 정도다.

 

'사랑비'(사진출처:KBS)

그러나 더 가혹한 건, 5%라는 시청률이 아니다. 그 5%라는 수치 정도의 작품성으로 이 작품이 치부되는 현실이다. 시청률 추산이 대중적인 호불호를 드러내는 것은 맞지만, 이미 TV시청률이 중장년층들에게 편향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이고, 또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작품성이 좋다는 등식은 이미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사랑비'에 대한 비판 여론을 보면, 5%라는 시청률에 지나치게 경도된 느낌이 있다. 이것은 거꾸로 '해를 품은 달'이 실제 작품의 완성도는 한참 떨어졌지만 40% 시청률을 넘어선 것만으로 마치 작품성이 좋았다는 착각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실제 작품은 어떨까. '사랑비'의 드라마 전개는 느리다. 그래서 마치 한참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이야기가 폭주하게 된 드라마들(언제부턴가 이런 자극이 우리 드라마의 시청률을 견인해왔다)을 보던 눈에 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완행열차를 탄 풍경 같은 드라마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전개가 빠르다고 작품의 완성도가 높은 건 아니다. 그건 자극의 문제다.

'사랑비'는 그런 점에서 자극이 별로 없는 드라마다.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보면 여타의 폭주하는 드라마들이 다이내믹한 서사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사랑비'는 서사가 아닌 서정에 더 집중하는 드라마다. 멜로드라마로서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이런 전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사랑비'는 그래서 서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 얘기가 없는 것 같다(혹은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다). 하지만 서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르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의 고저와 강약을 섬세하게 느낄 때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마치 서사 중심의 소설과 서정적인 시의 차이라고나 할까.

70년대식 첫사랑이 주는 느낌도 답답하게 다가올 수 있다. 왜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을까. 왜 당장 전화해서 마음을 전하지 못할까. 하지만 이것은 2012년 현재적 관점에서의 생각이다. 휴대폰으로 언제든 전화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시대의 정서와 아직도 편지를 쓰던 시대의 정서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왜 그 답답한 70년대식 첫사랑을 보여줄까. 그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멜로'라는 장르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은 어쩌면 바로 이런 즉각적으로 '연결'되는 미디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부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 가진 우연성과 운명적인 느낌들은 미디어들에 의해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인스턴트식 사랑의 시대에 '멜로' 같은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는 장르는 어딘지 잘 맞지 않아 보인다. 멜로가 사극 같은 이야기(운명적 사랑이 가능하다) 속으로 자꾸만 도망치거나, 로맨틱 코미디처럼 유머로 바뀐 것(운명적 사랑이 유머처럼 그려진다)은 다분히 이런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사랑비'는 이 사라진 시대의 멜로를 마치 서랍 속에 구겨 넣었던 편지처럼 꺼내 읽는다. 시청률 5%와, 그 시청률 수치만큼으로만 곡해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 대한 혹평들은 그래서 이 시대가 얼마나 사랑을 달리 읽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언젠가부터 사랑은 소리치고 대놓고 말하고 주장하고 쟁취하는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아닐까. 4회까지 다뤄진 이 아련한 70년대식 구식 첫사랑은 그래서 2012년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유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비'가 단순히 그 70년대식 구식 사랑에 대해 추억만을 담은 드라마는 아니다. 5회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2012년식의 사랑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70년대 식 구식 사랑과 2012년식의 신식 사랑 사이에 표현은 달라졌어도 그 바탕에 깔린 비슷한 정조를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미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디지털 환경 속에 내던져져 있지만(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아날로그를 희망하기도 한다. 빈껍데기 같은 허무한 즉석 사랑의 연속 속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추억하기도 한다. 마치 시대는 달라졌어도 여전히 내리고 있는 '사랑비'처럼.

'사랑비'는 느리지만 바로 그 느림의 미학이 지금 2012년 우리네 속도에 경도된 드라마들에 오히려 의미를 던져주는 드라마다. '사랑비'의 사랑은 구식이지만, 바로 그 구식이기 때문에 작금의 인스턴트식 사랑 속에서 하나의 판타지이자 희망이 되기도 한다. '사랑비'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내뱉는 대사들,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그 말은 비트로 쪼개지는 이 시대의 삶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사랑비'에 내려진 5%라는 시청률은 제작자들 입장에서는 차분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작품성 이외의 문제들이 뒤엉켜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같은 시적인 영상의 드라마는 그 매체적인 차이 때문에 오히려 집중이 안 될 수가 있다. 영화라면 집중해서 보겠지만 드라마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달라진 매체 환경과 멜로의 관계에서 전술했듯이, 어쩌면 정통 멜로라는 장르 자체가 우리에게는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렸을 수 있다. 또 한류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거꾸로 반감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한류가 거의 일본의 소비자들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현실은 드라마가 그들만을 겨냥하고 있다는(그래서 국내 팬들은 소외되었다는) 곡해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5%라는 시청률로 '사랑비'라는 드라마를 전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70년대가 초반 4회를 차지하고 또 그 정조가 후에도 이어질 것이지만, 그렇다고 70년대에 주저앉아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이제 2012년의 시점에서 이어질 드라마는 그 70년대를 추억하면서도 그 시절이 주는 아날로그가 지금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길 것이다. 그 질문이 혹시 우리 중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든다면, 자극과 속도에 경도된 우리들에게 조금은 담담하면서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사랑비'를 뿌려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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