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의 갈등, 익숙함의 반복 혹은 새로운 도전

정조의 삶과 정치세계를 조명하겠다던 ‘이산’의 야심 찬 계획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나서는 노론 벽파 세력들로 인해 뭐 하나 제대로 개혁을 진행하지 못하는 이산의 처지처럼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이산’이 노비개혁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선보이는 순간, 반발하는 장태우(이재용)와 노론 세력들처럼 곤두박질치는 시청률이 ‘이산’을 힘겹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산’은 점점 ‘대장금’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 같다. 거기에는 늘 대장금(이영애)이 지켜드리고픈 한 상궁(양미경)마마 같은 중전 효의왕후(박은혜)가 있고, 그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 성송연(한지민)은 어떻게든 그녀를 도우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왕은 늘 그렇듯 중립적이면서 판관의 역할을 한다.

그 소재들만 봐도 이것은 인물을 바꿔놓은 ‘대장금’으로 읽힌다. 가짜임신 사실을 숨기려는 원빈과 홍국영(한상진)이 탕약을 문제로 삼고 나오는 것이나, 갑자기 어의의 캐릭터가 중요해지는 점, 임신과 관련된 탕약에 대한 중전의 해박한 지식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틀에 박힌 구조 속에서 각자 캐릭터들이 하는 역할까지 ‘대장금’의 그것을 닮았다. 사실 원빈이 성송연을 불러들여 굳이 궁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설정은 후에 성송연에게 이 사건의 실마리를 던져주기 위한 억지스런 설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력다툼이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그저 인물들 간의 선악 대결 같은 단순한 게임에 불과하다. 갑자기 왜 ‘이산’은 노비개혁 같은 복잡한 정치이야기를 버리고 ‘대장금’식의 인물게임에 2회 분량을 소모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치이야기가 그저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축된 캐릭터들과 정치이야기가 잘 맞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산’의 캐릭터들은 이병훈 PD 특유의 선악구도 속에 들어가 있다. 분명한 선악구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인공 편(선)이 처하게 되는 어려움과 그것을 뛰어넘는 이야기(따라서 선이 반드시 이기는)의 단순함이 이병훈표 사극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이병훈표 사극이 본격 정치이야기를 꺼려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정치이야기는 선악구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역학관계가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산이 정조로 등극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캐릭터들이 자신의 위치를(선악의 팽팽함)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정치를 대리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선을 대표하는 영조(이순재)와 악을 대표하는 정순왕후(김여진)의 대리전이다. 그 속에서 이산이나 성송연, 박대수는 상대적으로 현실정치의 복잡함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죽고, 정순왕후의 힘이 약화되며 정조가 등극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선으로 대변되던 정조의 캐릭터는 현실정치 앞에서 달라져야 한다. 홍국영의 캐릭터는 더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실제 역사 속에서도 그러하듯이). 문제는 이들 주변에 있는 캐릭터들이다. 성송연은 여전히 정치와는 상관없는 인물이고, 박대수 역시 그렇다. 진짜 정치를 해야할 인물들, 이를테면 정약용(아직 누가 연기하게 될 지도 결정되지 않은)이나 박제가의 캐릭터는 극의 중심부로 오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이원화될 수밖에 없다. 현실정치의 정조와 홍국영의 이야기와, 나머지 캐릭터들의 정치 이외의(이를테면 궁내의 파워게임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억지로 한 사건에 이들을 끼워 넣으면 캐릭터가 흔들리게 되고, 그렇다고 한 사건을 포기하게 되면 아예 한쪽 캐릭터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대장금’류의 에피소드에 이끌리는 ‘이산’은 아직까지도 이 양자의 이야기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성장드라마와 정치드라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병훈 PD의 상황이기도 하고, 시청률과 완성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네 사극의 상황이기도 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자유겠지만, 적어도 ‘이산’정도의 사극이 쉬운 결정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대장금’보다는 새로운 사극의 가능성을 ‘이산’에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왕이 되기까지’와 ‘왕이 된 후’

‘주몽’이 처음 고구려 사극의 포문을 연다고 발표됐을 때, 우리가 기대했던 건 막연하지만 민족의 시조이자 역사적 영웅인 주몽이 갈라져있는 민족들을 규합하고 한나라를 밀어내는 통치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주몽’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거기에는 평범한 철부지 주몽이 있었고, 왕이 되기까지 가야할 길은 멀었다. 그러니까 드라마의 방향성도 정해진 셈이었다. ‘주몽’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던 한 사내가 사실은 신탁을 받은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최정점인 왕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되었다. 왕이 된 이후는?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나라를 통치하는 문제는 ‘주몽’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기대에 대한 배반은 ‘주몽’이 성공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산’의 긴장감이 떨어진 이유
겉으로 보기에 ‘이산’이나 ‘대왕 세종’같은 최근의 사극들은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산’은 이미 정조(이서진)의 등극까지 험난한 과정을 끝내고 이제 통치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중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숨 가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달려오던 ‘이산’은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는 순간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30%에 육박하던 시청률이 거의 20%까지 추락했다. ‘이산’은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졌다. 과거에는 성송연(한지민)과의 멜로 라인과 이산-노론 벽파 간의 대결양상은 병렬적으로 굴러가지 않고 한 가지 고리로 엮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결고리가 흐릿해지면서, 각각의 이야기로 흩어지고 있다. 정무에 힘겨운 정조가 성송연을 가끔 그리운 얼굴로 바라보는 것 이외에, 둘을 이어주는 사건의 고리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시청률의 하락과 집중도의 저하가 단지 이런 드라마 내적인 이유 때문 만일까. 그것은 혹시 왕이 된 후의 통치과정보다, 되기까지의 성장드라마에 더 ‘몰입’되는 우리네 경향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통치란 좀더 복잡한 정치의 과정이기 때문에 실제로 재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고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됐는가 하는 과정까지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지만, 정작 그렇게 대통령이 된 후의 정치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CF였던 ‘욕쟁이 할머니’편이 전략으로 삼았던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었다. ‘뭐 복잡한 건 다 싫으니까 경제 하나나 제대로 살려라’라는 게 그 주 메시지였다. 여기서 경제란 참 불투명하고 막연한 의미다. 수백 수천 가지의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거기에 있다.

‘이산’이 막연히 ‘백성’이란 단어를 들고 나왔을 때는(주로 영조에 의해) 그 막연함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꽂혔을 것이다. ‘복잡한 건 싫고’ 그저 성군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한 단어가 더 받아들이기 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왕이 된 이후의 정치는 다르다. 여기서는 막연한 ‘백성’이란 단어가 잘 먹히지 않는다. 현실정치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노비의 폐지’라는 정책 하나는 수많은 반대논리들을 이끌어내고 거기에서 대결양상을 만들어낸다. 그 논리 속으로 들어가면 진짜 정치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 제작진에게는 곤혹스러운 문제다. 제작진들은 시청자들이 바로 이 복잡한 정치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좀더 단순한 필터가 필요한 상황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노론벽파의 수장인 장태우(이재용)다. 정치적인 쟁점은 캐릭터가 세워짐으로 해서 선악 구도로 단순화된다.

이런 단순화 과정을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지금껏 연승가도를 달려온 이병훈 PD가 사극에서 모두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다루고 그 정점에서 끝을 맺었던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병훈 PD에게 ‘이산’은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게다가 왕이란 캐릭터는 더 복잡한 정치를 그것도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 이 부분을 대중들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대왕 세종’이 말해주는 정치사극의 어려움
거기에 대한 답은 오히려 ‘대왕 세종’이 말해주고 있다. ‘대왕 세종’은 이 두 가지 면모, 즉 주인공의 성장과정과 정치적 쟁점들이 모두 자세하게 다뤄지는 드라마다.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대왕 세종’은 정치인이라는 전문직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역사 전문직 드라마의 한 분파라 보여진다. 모든 주인공들의 대사들은 정치적 뉘앙스를 갖고 있으며 그 뉘앙스 하나로 어떤 인물들은 정치적 죽음을 맞기도 한다. 거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조차도 없으니, 이 하드보일드한 사극은 미드의 한국사극 버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정한 시청률을(폭발적인 시청률이 아니다) 유지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이미 자리를 잡아버린 주말사극에 대한 관성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쟁점과의 반대편 날개인 주인공의 성장과정 때문이다.

셋째인 충녕대군(김상경)이 이미 국본이 된 첫째 양녕대군(박상민)과 대결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이 익숙하게 보아왔고 또 보기를 원하는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대의를 앞세우는 양녕대군과 백성을 내세우는 충녕대군의 대결에서 그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는 셈이다.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도 그랬을까마는, 어쨌든 드라마가 보여주는 ‘정치 대 백성’의 대결에 있어 시청자들은 복잡한 ‘정치’보다 막연하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백성’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까.

정치가 재미없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불신감에서부터 비롯된다. 내가 아무리 뭐라 해도 바뀌지 않는 정치의 세계, 그러니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가 되어버린 정치는 괜히 골치만 아픈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은 조장된 바가 크다. 정치적인 선택(하다 못해 투표 하나라도)은 골치가 아픈 게 아니라, 바로 우리네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가 주는 환타지(주인공의 성장)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을 뭐라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동시에 다뤄지는 현실의 문제(전문직으로서의 현실성)를 외면하는 것은 자칫 드라마의 반쪽(중독적인 면)만 반복해서 보는 경향을 낳을 수 있다. 왕이 되기까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왕이 된 후의 통치과정이다. 이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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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 몸 개그와 짧은 개그의 만남

리모콘이 생겨난 이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혹은 ‘서론-본론-결론’ 형태로 이어지는 서사구조는 끊임없이 공격받아왔다. 이제 시청자들은 발단에서부터 뜸을 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시작이 지루하면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손가락에 의해 여지없이 잘려져 나간다. 그러니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나 서론은 점점 축약되고 있다. 그것이 드라마건 방송 프로그램이건 김수현 작가 식으로 표현하면 “베토벤의 ‘운명’처럼 처음부터 짜자자잔 하고” 시작한다. 사실, 너무나 서사구조에 익숙해져버린 시청자들 입장에서 보면 서론은 너무 뻔한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굳이 설명하지 않고 ‘척’하고 보여주면 ‘착’하고 알아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들 속에서도 이런 서론이 사라지는 징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가 개그 프로그램이다. ‘개그 콘서트’로 촉발된 이 새로운 경향은 무수히 많은 개그맨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짧은 시간을 준다. 그리고 거기서 웃기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물론 그 일차적인 가위질은 PD가 한다. 하지만 이차적인 가위질은 바로 시청자들의 리모콘에 의해 일어난다. ‘개그 콘서트’의 많은 개그 코너와 개그맨들이 ‘마빡이’같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아이템을 들고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짧은 시간 내에 웃기지 못하면 시청자들의 기억에서 편집될 수밖에 없는 개그맨들의 강박증을 잘 보여주었다.

짧은 개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몸 개그와 그 속에 드러나는 자학경향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임혁필이 땅거지로 등장하면서 후에 세바스찬으로 인기를 얻게 되는 과정은 그 자학개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 박준형은 무를 갈았었고, 정종철은 옥동자로 못생긴 얼굴을 한껏 과장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초창기 ‘개그 콘서트’의 공신들이 보여준 개그에 서사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웃음은 ‘서사 속의 반전’이 주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인 장면과 함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몸 개그(자학경향이 있는)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몸 개그의 극단을 보여준 것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웃음충전소’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무대개그가 가진 한계를 정교한 세트와 야외촬영의 교차편집으로 뛰어넘으려 했던 ‘웃음충전소’는 녹화방송이었지만 무대개그가 보여주었던 극단적인 몸 개그의 경향을 끌어들였다. ‘타짱’은 전후맥락 상관없이 무조건 상대방을 웃기기만 하면 이기는 대전개그를 보여주었고, ‘막무가내 중창단’은 의미와 상관없이 노래 가사의 일부분을 몸으로 보이는 개그를 선사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지만 곧 ‘웃음충전소’는 폐지되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개그 프로그램의 새 패러다임은 몸 개그에 있었다기보다는 무대개그가 가진 순간적이고 ‘짧은 개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라져버린 ‘웃음충전소’의 코너들 중, 주목해야할 코너가 있다. 그것은 김병만이 선보인 ‘따귀맨’이다. 이 코너는 ‘웃음충전소’라는 프로그램이 사라지기도 전에 단 몇 회로 끝나버렸는데, 정확하게 몸 개그와 짧은 개그의 접합점을 모색했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주인공을 패러디한 복장의 김병만은 그 분장만으로 모든 서사의 설명을 지워버리고 곧바로 정의의 사도로서 악당들에게 무차별 따귀를 날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바로 이 단순함과 명쾌함은 김병만 개그가 가진 특징을 이루었다. “저거 개그야 무술이야?”할 정도의 몸 개그를 통해 단순하고 과장된 몸이 보여주는 순간적인 웃음을 포착해온 김병만이 ‘달인’이라는 짧은 개그에서 폭발력을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너와 코너 간에 잠깐 쉬는 시간을 활용한 듯한 이 코너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짧은 시간 속에 순간적 웃음을 전달하려는 노력은 그만큼 더 높은 집중도를 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꾸만 짧아지는 개그의 경향은 거꾸로 말하면 시청자들의 긴 서사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 같은 기본적으로 짧으면 안 되고 길어야 성공하는 분야가 있지만 이것은 드라마가 가진 산업적인 성격과 그 요구되는 진정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드라마는 자못 진지한 마음으로 보지만, 개그는 쉬는(오락) 목적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진지한 접근이 거부감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논리적인 서사에 대한 거부는 상당부분 디지털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아날로그 문화가 가진 ‘처음부터 중간 과정을 다 봐야 끝을 볼 수 있는’ 서사의 특성은 디지털 문화로 오면서 ‘아무 곳에서나 중간 중간 끼어들어 볼 수 있는’ 하이퍼 텍스트적인 속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성향이 기술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술이 성향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그 프로그램으로 적용되어 ‘개그 콘서트’처럼 분절적인 구조의 개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분절적인 구조를 이루려면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개그 코너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특성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개성의 정점에는 당연히 캐릭터화된 개그맨이 존재해야 한다. 갈갈이 박준형과 마빡이 정종철 같은 한 코너의 캐릭터로서 부각된 개그맨들은 설명 필요 없이 즉각 웃음폭탄을 날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짧은 개그에 그만큼 유리하다.

‘개그 콘서트’로 촉발된 무대 개그 전성시대 이후에 방송 3사가 경쟁에 들어가고 현재 결과적으로 무대 개그가 하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개성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개성의 출현(너무 많은 캐릭터들)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다지 눈에 뜨일 정도로 보이지 않는 개성들의 소소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분절된 구조를 분절된 느낌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코너들은 이제 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덩어리 속에서 발 하나를 빼고 나온 ‘달인’의 돌출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개그 프로그램의 분절화는 시대의 요청이지만 지나친 경쟁구도로 인해 과도하게 생산되는 것은 문제다. 바로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개그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숙제가 될 것이다.

‘드라마시티’, 왜 살려두지 못하나

왜 짧으면 안되는 걸까. 우리네 문화 중에서 짧은 것들은 왜 대부분 퇴출의 위기에 직면하는 것일까. 문학에 있어서 단편소설이 그렇고, 영화에 있어서 단편영화가 그렇다. ‘이 시대 마지막 단막극’, ‘단막극의 멸종’이라는 비장한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이 ‘짧은 것들’에 대한 선호를 일정부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KBS가 폐지를 결정한 단막극 ‘드라마시티’의 마지막 방송이 일주일 남짓 남겨진 가운데, 방송작가협회와 KBS PD협회의 철회 성명에 이어 노희경 강은경 이금림 박정란 주찬옥 정성주 등 드라마 작가 57인이 ‘드라마시티’를 살려내라는 성명서를 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그것도 방송 3사를 통틀어 한 시간밖에 할애되지 않고 있는 단막극은 이들의 표현대로 멸종될 위기에 처한 셈이다.

이리저리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드라마시티’를 폐지시키려는 이유는 한 마디로 ‘돈이 안되기 때문’이다. ‘드라마시티’는 시청률이 보장되지 않고, 또 광고게재를 위해 계산될 수도 없기 때문에 방송사에게는 손해다. 돈은 투입되나 이익은 창출되지 않는다. 기업의 입장에서 이익 안 되는 사업에서 발을 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KBS 같은 공영방송에서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KBS 스스로 자신들의 결정이 경제적으로는 합리적이나 윤리적으로는 비합리적이라는 걸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단막극의 효용은 한 방송사의 효용보다는 사회 전체의 효용으로 봐야 한다. 단막극은 이미 코드화된 소재와 기법을 가지고 상업적으로만 치닫는 장편 드라마들의 세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실험의 장이다. 흔히들 드라마 하는 사람들은 “남의 돈 갖다가 예술 하려고 하지마”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드라마는 개인 혼자의 작품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제작진들과 방송 관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대한 제작비가 투여된다. 하지만 이런 상업적인 드라마들만 제작해서는 드라마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체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드라마시티’ 같은 창구를 없애버리면 새로운 피, 즉 신진 작가들이 수혈될 수 있는 곳이 사라지게 된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내는 단막극은 이런 점에서 효용성을 발휘한다. 여기서는 적어도 새로운 생각의 작가나 PD들이 예술(적어도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으로서 KBS가 끝까지 단막극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회적인 효용성을 위해서이다.

공영방송인 KBS의 입장에서 보면 단막극의 존립은 그 자체로 자신들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상업방송이 하지 않는 영역을 하고 있다는 가장 상징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이익이 아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단막극의 폐지는 오히려 손해가 될 공산이 크다. 방송사의 정체성은 몇몇 프로그램의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KBS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손익계산을 해본 결과 그들은 폐지를 선택했다. 그것은 이제 공영방송이 더 이상 지금의 방송환경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송은 그 자체가 이제 공익성보다는 오락성, 상업성으로 점점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점이 이 짧은 것들(단편 형태의 문화들)로 하여금 문화소비자들이 원하는 그 상업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하게 하는 걸까. 현재 장편 형태의 문학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들은 점점 본연의 미학에서 멀어져 스토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문학에서의 문체나, 영화에서의 영상미학, 드라마에서의 대사가 갖는 언어미학은 종종 스토리가 가진 상업성에 가려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문학으로 된 작품이 영화가 되고 드라마가 되는 것은 잘 들여다보면 바로 이런 스토리가 가진 상업성에 의존한 바가 크다. 문체가 뛰어난 단편소설이 좀체 장편영화화 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지만 장편들이 대부분 상업성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 속에서 반대에 위치한 단편들은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두 쉽게 변환이 이루어지는 장편들의 특징인 ‘스토리 지향’은 거꾸로 말하면 이들 서로 다른 장르들이 가진 고유의 미학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드라마로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이야기가 멋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드라마만이 시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를테면 드라마만이 갖는 대사의 묘미 같은)’이 멋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이나 영화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대부분 짧은 구조 속에서 더 잘 드러난다. 짧다는 것은 군더더기가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본래 그 문화만이 갖는 장점을 가장 극대화해야되는 상황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단막극 폐지가 말해주는 것은 바로 이 하나의 장르를 장르이게 하는 방법적인 틀이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멸종이다.

우리는 ‘단막극 폐지’를 보면서 ‘또 사라지는군”하는 체념적인 말로 수동적인 반대를 한다. 몇몇 거기에 밥줄이 달려있는 사람들 - 예를 들면 작가협회 같은 - 은 극렬히 반대하지만 그것은 이 거대한 돈의 조류에 급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방송사를 비롯한 매체들 속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이것은 그냥 많은 프로그램들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제 ‘단막극’이라는 형식 자체가 TV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일주일에 한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비상업적 방송도 이제는 더 이상 묵인하지 못하는 시대인가.(이 글은 서울예대 학보에 쓴 글을 조금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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