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의 딜레마

“또 조폭영화야? 한국영화는 소재가 겨우 조폭 밖에 없냐?” 영화 개봉 시점에 맞춰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최근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은 ‘조폭영화’ 범주 속에 자신의 작품이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린다.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도 그렇다. ‘생활 느와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이 영화, 분명 조폭영화다.

조폭영화? 느와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미국에 서부영화, 갱스터영화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영화가 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조폭영화란 어찌 보면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장르영화가 아닐까. 조폭영화라며 싸잡아 욕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조폭이라는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소재에 기대 자극적인 설정으로 흥행만을 노린 기획영화들 때문이다. 물론 조폭영화라는 용어 속에는 그런 류의 영화에 대한 비아냥이 들어있다.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느와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 역시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조폭이라는 소재에 연연하는 것일까. 혹시 조폭은 우리 사회와 시대를 표상하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우아한 세계’에 이르러 추정되는 결론은 조폭은 이제 그저 칼부림에 쌍스러운 욕이나 하는 그런 표피적인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 함의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이다.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게임의 법칙(1994)’, ‘초록물고기(1997)’, ‘넘버3(1997)’로 귀결되는 초창기 조폭영화들은 조폭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문제를 에둘러 고발했다. 철저히 조폭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렸던 것.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고 경제의 법칙이면서 결국 사회라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법칙이다. 사회라는 체계 속에서 벌이는 게임에서 결국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에 대한 문제. 정답은 시스템을 만들고 법칙을 정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넘버3가 넘버2나 넘버1이 되려고 해도 넘지 못하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는다손 치더라도 치러야할 대가는 혹독하다는 것을 이들 영화들은 조폭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폭의 세계가 갖는 단순명쾌한 폭력으로 그 아래 숨겨진 가진 자들만을 위한 시스템을 목격한다는 것은 똑같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친구(2001)’는 이런 현실에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부여했다. 그러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던’ 그 시절의 친구를, 이제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런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속에서 우회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성공의 욕망을 향해 달리지만 결국 그 시스템의 벽에 무너지는 우리네 가장의 모습들이다.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
하지만 초창기 조폭영화가 가진 이러한 풍자 내지는 사회비판의 요소들은 상업적으로 기획된 조폭 코미디물로 인해 퇴색된다. ‘조폭마누라’나 ‘두사부일체’, 그리고 ‘가문의 영광’은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명절 극장가를 달구었다. 조폭영화가 가진 현실적 함의들이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공중에 붕 떠버린다. ‘또 조폭영화냐’라는 비판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소재는 2006년 개봉된 ‘비열한 거리(2006)’를 통해 다시 원상태로 돌려진다.

‘비열한 거리’는 똑같이 초창기 조폭영화에서 다루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달라진 것은 좀더 생활기반으로 조폭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과거 조폭의 모습은 조폭 세계 속에서의 비장한 인물로만 그려졌지만, ‘비열한 거리’에 와서는 생활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야기는 더 리얼해지고 사회적인 함의는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집안에서는 가족이 살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의 철거민들을 몰아내는 일을 해야하는 병두(조인성)는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장이 갖는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
수직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 위로 올라가려 노력하지만 또한 그 가장에게 존재하는 세계는 가족이나 연인 같은 수평적인 세계이다. 병두가 수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누군가를 밟고 서야한다는 것.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밟혀질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수평적인 세계의 안정을 위해 수직적인 세계로 올라가려는 가장들의 희망은 시스템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아한 세계’가 그려내는 세계 역시 바로 가장들이 갖는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집안과 집밖으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며, 가족이란 안전망과 사회라는 현실 싸움터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다.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가족들과 우아하게 살려는 강인구(송강호)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저 현실세계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 부분이 현실적 가장들이 겪는 딜레마이다. ‘비열한 거리’에서 보여졌듯이 시스템은 절대로 희생 없는 대가를 주지 않는데, 우리네 가장들은 그 시스템에서의 성공을 통해 가족들과의 ‘우아한 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아한 세계’가 또다시 조폭의 세계를 들고 온 이유이자, 조폭이 이 시대의 가장이 된 사연이다.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지금의 드라마들을 보면 퓨전사극, 트렌디 드라마의 변용으로서의 로맨틱 코미디, 미국 드라마와 우리 드라마 사이에서 접합점을 찾아가는 우리 식의 전문직 드라마의 부상이 눈에 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모두 새로운 시도로 보여진다. 이런 시도는 구태의연한 설정의 트렌디나 불륜, 불치 같은 자극적인 설정의 과거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비롯된 바가 크다.

그 과거 드라마들의 소재 중 현재 그나마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륜드라마뿐이다. 시절이 독하다 보니 ‘독한 불륜(불륜드라마)’이나 ‘중독성이 강한(전문직 드라마, 사극)’ 혹은 독한 시절 잊고 웃고 싶은(로맨틱 코미디) 쿨한 드라마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따뜻한 인간애 같은 소재를 다루는 드라마를 찾아보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가치를 발하는 것은 모두가 외면한 따뜻함을 드라마 속으로 가져 왔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작중 캐릭터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시골 처자, 그것도 에이즈에 걸린 아이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둔 영신(공효진)과 잘 나가는 의사 민기서(장혁), 그리고 석현(신성록)이 만들어내는 삼각구도는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의 구조를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전혀 트렌디가 되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민기서와 석현은 영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소유하려 한다기 보다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인물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단지 영신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이 집에 살아가는 사람들, 할아버지(신구)와 이봄(서신애)을 같이 끌어안는다.

드라마를 보다가 불현듯 떨어지는 눈물은 독한 관계 등으로 억지스럽게 짜내지는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눈물, 감동이다. 그것은 짐이 될 수도 있는 할아버지와 딸을 늘 밝게 끌어안는 영신의 모습에서, 그런 영신의 어려움을 알고 집을 뛰쳐나가려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린 나이에도 현실을 밝게 받아들이는 조숙해져버린 봄이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들이 서로 엮어 가는 가족애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은 진짜 눈물이기에 구질구질한 눈물이 아닌 웃으면서도 나오는 그런 눈물이다.

감동을 증폭시키는 것은 거의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출연자들의 명연기이다. 울음을 참고 밝게 웃는 공효진과 천연덕스런 아이 서신애 게다가 ‘치매연기의 달인’으로까지 불리는 신구의 연기가 그렇고, 군 제대 후 더욱 깊어진 연기를 보이는 장 혁이 그렇다. 특히 장 혁은 본래부터 투덜이의 아이콘을 가진 배우였지만, 이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가볍지만은 않은 연기를 선보인다. 아픔을 가진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이런 명 연기자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는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삶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틀을 빠져나와 민기서와 석현의 따뜻한 시선을 끼워 넣는다. 그러자 가족의 범주는 더 넓어진다.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 그래서 거기에 가족 같은 관심과 사랑에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은 공감과 감동을 갖게 된다. 이야기가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자 드라마는 가족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약자들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영신과 그 가족은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들이 된다. 미혼모라는 굴레의 여자와 에이즈에 걸린 아이, 거기에 치매를 앓는 노인은 어찌 보면 이 한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내는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따뜻한 시선에서, 작가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이것이 독한 세상에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고마운 이유다.

마왕’을 좀더 재미있게 보는 법

“한 꺼풀 벗겨내면 또 다른 의문이 증폭된다.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만 같다.” 드라마 ‘마왕’이 주는 새로운 재미이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낯선 시청자들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지루하고 복잡하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매니아 드라마’라는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어딘지 억울한 느낌이 있다. ‘다르다’는 것이 외면의 사유가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확실히 여타의 우리네 드라마들과는 다르다. 재미를 주는 요소도 다르고 재미를 전달하는 방법도 다르다. 좀더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없을까.

첫 번째 - 기본구도로 사심 없이 바라보기
무언가 긴박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카메라는 현장을 훑어내면서 많은 추측과 단서들을 쏟아낸다. 12년 전 사이코메트러(물건에 기록되어 있는 잔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진 자) 해인(신민아)은 현장에 떨어진 물건들을 통해 한 고등학생이 칼에 찔려 살해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 사건은 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드라마가 하려는 얘기가 그 자리에 있던 인물들의 12년 후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에는 오수(엄태웅)와 그의 친구들이 있었고, 오수에게 칼을 맞은 승하(주지훈)의 형이 있었다. 승하는 죽어 가는 형을 위해 긴박하게 구조를 요청하고, 뒤늦게 현장의 잔상을 통해 해인은 그 장면들을 보게 된다. 관계는 이 장면 하나로 명확해진다. 12년 후 변호사가 된 승하가 형사가 된 오수와 그의 친구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날릴 거라는 것. 이 대결구도는 너무나 명확해 심지어 맥이 빠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도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앞으로 끌고 들어갈 미궁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할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 미궁을 즐기기
막상 이런 설정을 갖고 보면서도 복잡한 느낌이 드는 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 대결구도에 장애물들을 수없이 설치해두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직업이다. 오수는 자신의 말대로 ‘나쁜 놈 잡는 형사’이지 자신이 나쁜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객관적으로 ‘나쁜 놈들’이다. 오수의 형인 강희수가 운영하는 호텔에서 비서로 일하는 석진(김영재)은 희수의 처와 바람을 피운다. 윤대식(한정수)은 해결사에 가까운 사채업자이고 김순기(오용)는 절도, 폭력 전과자이다.

오수라는 털털한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칼잡이를 싫어한다”는 대사는 ‘칼쓰는 나쁜 놈들’을 싫어한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12년 전의 악몽과 연관되면서 ‘그랬던 자기 자신을 싫어한다’는 말로도 중첩된다. 여기에 변호사로 등장하는 승하는 상황을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억울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살인자를 구원하기도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의 양면성이 활용되면서 승하라는 인물이 나쁜 놈인지 좋은 놈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오수의 집안은 무언가 범죄의 냄새를 풍긴다. 드라마의 첫 희생자인 권현태(이도련) 변호사는 부와 권력의 상징처럼 보이는 오수의 아버지 강동현(정동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그 집안의 문제들을 덮어왔다.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12년 전 오수의 사건에서도 그가 진실을 덮어버리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추리하게 만든다. 그의 살인범으로 승하가 아닌 조동섭이 자수를 하지만 조동섭의 대리역으로 승하가 변론을 맡는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여전히 승하와 관련을 짓는다.

재미있는 것은 승하가 오수의 친구인 김순기를 변론해 풀려나게 해주면서도,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조동섭의 대리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수에게 승하라는 존재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승하는 살해된 권현태 변호사를 ‘스승 같은 인물’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장치로 보인다. ‘스승’이란 늘 좋은 것만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우리네 통념을 뒤집는 것이다. 어쩌면 승하가 말한 스승이란 ‘진실을 덮는’ 권현태 변호사로부터 뼈저린 상처를 통해 배웠고 그래서 변호사가 된 자신도 그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단순했던 대결구도는 직업과 주변인물들의 관계를 통해서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 단단히 최초의 실마리를 잡고 나가야 한다. 이 야누스처럼 변하는 인물들이 주는 미궁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추측해야 한다. 그 추측이 맞았을 때 느끼는 쾌감은 배가 될 것이다. 틀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전의 의미로서 쾌감을 줄 것이다.

세 번째 - 작가와의 두뇌게임
여기서 한 차원 더 나간다면 이젠 작가와 한 판 두뇌게임을 벌여보는 것이다. 작가와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가려놓은 수많은 장애물들을 하나씩 들춰보는 재미를 가져보는 것. 그 첫 번째 단서는 사이코메트러라는 독특한 능력자가 왜 등장하느냐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오수와 승하의 대결구도와 그 속에서 말하려는 선악의 문제나 진실과 정의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꼭 사이코메트러 같은 평범하지 않는 인물이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녀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능력’은 이 드라마의 의도가 보여주는 ‘진실은 무엇인가’에 적합하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시청자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을까. 물론 후반에 가서는 좀더 명확한 진실에 근접할 것이지만, 초반부인 지금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추측을 하게 만드는 장치로서 활용된다. 그러니 그녀가 보는 비전에 너무 의미를 두다가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덫에 걸리기 십상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드라마 상 사이코메트러인 해인이 이 사건에 끌어들여지는 것이 과연 형사들의 수사를 위한 것이냐는 점이다. ‘예전에 그녀의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했다’는 점은 그녀가 마치 수사를 돕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를 사건으로 끌어낸 것은 형사가 아니라 그녀가 만든 타로카드가 살해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카드를 놓거나 택배로 보낸 인물은 처음부터 그녀를 사건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는 형사가 아닌 살인자가 그녀를 불러낸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역할은 사건해결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살인자가 살인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 진실로, 12년 전 그 장소에 있던 인물들을 가이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마왕’이 단순한 범죄물이나 형사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드라마는 범인을 잡는 드라마가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조금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이것은 승하가 오수에게 던지는 대사 속에 집약되어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제각기 다르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유리한대로 조금씩 거짓말을 합니다. 나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대사에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기억’, ‘거짓말’,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작가는 왜 이다지도 시청자들을 혼란 속에 빠뜨리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현실생활에서 혹은 드라마적 관습에서 굳게 믿고 있는 편견들을 효과적으로 부수기 위함이다. 형사와 변호사의 역할, 선악구도에 대한 편견 같은 것 말이다. 사실 혼란에 빠진 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편견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마왕’은 좀더 작가와의 즐거운 두뇌게임을 요구한다. 그것이 즐거울수록 견고했던 편견들이 깨져나가는 카타르시스의 깊이는 더 클 것이다.

김수현이 ‘내 남자의 여자’를 가지고 또 한번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확 질렀다. 들고 온 기름은 화력 좋기로 소문난 ‘불륜’이다. 기름 위에 얹어진 장작들도 여느 장작들과는 달랐다. 그저 불륜이란 소재에 기대 평이한 설정과 연기를 해 이제 식상해져버린 기존 불륜에 넣어진 장작들보다 몇 배는 더 잘 타들어가는 김희애, 배종옥, 하유미라는‘명품 장작들’이다. 그들의 혼을 불사르는 듯한 연기는 김수현이 내지르는 직설화법이란 기름을 만나 활활 타올랐다.

불륜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이제 불륜 좀 그만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첫 방송을 끝낸 이 드라마의 반응은 남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자칫 불륜에 집중될 수 있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 그 장본인은 김수현이란 작가와 작품 속에서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준 김희애라는 연기자다. 이 조합이 만들어내는 불륜드라마를 통해 역시 드라마는 소재보다 중요한 것이 완성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륜 드라마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지면 인간 본질의 사랑 이야기로 발전하는 것인가.

‘내 남자의 여자’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남자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가 아니다. ‘내 남자의’는 수식어고 결국 그 뒤에 붙는 ‘여자’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일까. 드라마는 아예 내놓고 여성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시작부터 중반까지 김지수(배종옥)의 일상을 따라가며 계속되는 대사들은 여성들의 수다에 가까우면서도 대단히 연극적이다. 일상적인 사설은 지겨울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그를 통해 관계는 ‘보여지기보다는 설명’된다. 드라마라는 영상언어가 있는데 왜 이렇게 대사중심의 극을 이끌어가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게 된다. 혹 김수현이란 작가가 PD의 몫을 빼앗아간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목적은 더 치밀한 데 있다는 걸 알게된다. 평온한 가족의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인물, 이화영(김희애)이 그 장소에 오기 전까지 거의 노출된 몸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녀가 앞으로 불붙게 될 극적 순간을 예고했던 것이고, 유난히 천사표이자 세상물정 모르는 김지수가 그녀의 보호자격(적어도 불륜에 관해서는)인 김은수(하유미)와 너스레를 떨며 명랑한 하루를 보내는 장면 역시 그 순간의 폭발을 위한 장치였다. 물론 연극적인 대사 중심의 극 전개 역시 후에 벌어질 시각적 자극의 극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아야한다.

김수현이란 작가는 소위 작가들이 말하는 ‘눌러주기’의 대가이다. 한참 겉으로 도는 관계를 평이하게 눌러주다가, 어느 한 순간에 폭발시켜주는 것. 그것이 ‘내 남자의 여자’가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만든 요인이다. 이 정도 되면 김수현은 ‘언어의 마술사’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장인임을 증명한 셈이다. 게다가 김수현은 ‘감춰지는 불륜’이 아닌 ‘드러내는 불륜’을 선택했다. 이 차이는 분명하다. 전자는 감춰진 게 드러나는 순간 맥이 빠져버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드라마 공식 속의 불륜이고, 후자는 드러낼수록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불륜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김희애라는 연기자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내는 이화영이란 캐릭터에 있다. 이 캐릭터는 불륜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잘못된 관계를 되돌리려 하기보다는 자포자기하면서 파멸을 향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즉 드러나서 해결되지 않고 드러나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캐릭터란 얘기다. 여기에 맞상대역으로 먼저 등장하는 김은수 역의 하유미도 만만찮은 연기력을 과시한다. 이 팽팽한 대결구도 앞에서 더 몸서리처지는 것은 ‘지금 이건 맛보기에 불과해’라고 말하는 김수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륜드라마라고 무엇이 나쁠까. 불륜은 사실 저 드라마(drama)의 구조가 나왔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연극 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히 내려오는 전통적인 소재다. 그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담기에 용이하다는 말이다. 사회가 가진 가치개념과 인간의 욕망이 부딪치는 이 소재는 욕망을 가지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늘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또 불륜이냐”는 목소리에는 우리 드라마가 다루었던 소재의 폭이 그만큼 좁다는 것에 대한 비판과 또한 같은 불륜이라도 너무 표피적인 자극으로만 다루었던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김수현이 만든 불륜드라마는 일단 무언가 다를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작가와 연기자들에게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불륜을 통한 인간의 문제를 천착하지 않고 자극으로만 치닫게 된다면 또다시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 불륜이냐”는 말보다는 “불륜도 제대로 다루면 다르다”는 의견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