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비웃는 본능, ‘향수’

영화의 첫 장면. 감옥,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르누이(벤 위쇼)가 앞으로 나온다. 그러자 코 하나만 달랑 빛 속으로 튀어나온다. 어둠의 섬 위로 떠오른 그르누이의 코. 이 간단한 장면 하나는 그러나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모두 압축하는 힘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이 영화가 다루려 하는 후각과 시각, 어둠과 빛, 이성과 본능에 대한 상징이 숨겨져 있다.

어둠과 빛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영화가 앞으로 다룰 이야기가 바로 코, 후각에 대한 것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먼저 봐야 할 것은 이 첫 장면에서 보이는 어둠과 빛의 대비다. 어둠 속에 없는 듯 서 있는 그르누이는 영화 전체에서 드러나듯 그림자 같은 존재. 늘 거기 있지만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어떤 존재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모든 향기를 맡을 수 있지만 자신의 체취가 없다는 캐릭터의 설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늘 어둠 속에 숨어 빛의 세계 속에 놓여진 사람들에게 손길을 뻗는다.

처음 매혹적인 향기의 세계로 끌어들인 한 여인에게 다가가는 장면에서도, 로라(레이첼 허드우드)의 집 미로 같은 정원에서도,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본다.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들은 자신에게는 없는 체취를 가진 존재들. 그는 바로 그 체취를 자신도 가지려 한다. 영화는 바로 이 어둠과 빛의 상치를 통해 어둠의 세계를 빛으로 덮어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의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그것은 후각이 가진 특성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후각을 시각화한다는 도전
‘향수’라는 제목의 영화 속, 그르누이라는 괴물의 탄생이 악취가 진동하는 생선시장이라는 건 아이러니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향수의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즉 악취 나는 인간이란 진실을 덮어버리는 어떤 것이다. 그 속에서 그르누이가 처음 목도하는 현실은 후각으로 집약된다. 그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의 악취가 버려진 자신의 현실과 조우하면서 그는 시대의 잔인한 진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아내는 현실은 바로 그 악취 속이다. 그는 철저히 그림자로 어둠 속에서 악취에 쌓여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알게된 매혹적인 향기를 그는 수집하려 한다. 그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그 향기의 원천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꽃과 같은 낭만적인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향기를 모으기 위해서는 결국 그 향기를 갖고 있는 대상을 죽여야 가능한 것. 매혹적인 향기라는 빛의 이면에는 살인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그르누이는 바로 그것을 현시해보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후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대단한 도전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후각의 시각화.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영화는 먼저 강렬한 악취의 그림들을 연속적으로 내보내 먼저 시각을 후각화한다. 그리고 이것이 익숙해질 즈음, 향기가 가져오는 이미지를 환상으로 엮어낸다. 어느 순간, 우리들은 그르누이의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는 장면 하나 만으로도 이미지와 뒤섞인 후각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할 것. 왜 작가는 다른 감각도 아닌 후각을 소재로 선택했던 것일까.

본능에 무릎꿇는 이성
그것은 후각이 그만큼 우리 감각에서 억압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감각기관과 달리 좀더 직접적으로 뇌와 만난다. 우리는 어떤 냄새 하나에서 수만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후각이 노리는 것은 뇌가 가진 이성이라는 능력이다. 이성은 과연 후각으로 촉발되는 본능적 기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는다.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거라 믿었지만 전쟁과 참화가 끊이질 않는 20세기(당시 책이 출간되던)를 비웃기 위해 쥐스킨트는 그르누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성은 빛이고 또한 시각으로 구현되는 세계이며, 반면 본능은 그 빛에 의해 억압된 어둠이며 후각으로 구현되는 세계다. 여기서 그르누이와 대결점에 있는 로라의 아버지인 안토인 리치스(알란 릭맨)는 바로 그 빛과 이성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그는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추리하며 행동한다. 그러나 결과는 딸의 죽음. 딸이 죽어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안토인의 눈을 순간적으로 찌르는 것은 바로 그가 믿었던 빛이다.

그는 붙잡힌 그르누이에게 고문을 가하며 묻는다. “도대체 왜 그랬나?”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그르누이의 행동에 대해 어떤 답변을 듣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르누이의 답은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토인이 원하던 이성적인 답변이 아니다. 그르누이라는 괴물에 대한 처결은 잔인한 고문 후 사형이라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이 앞선 해결책이다. 그래서 마지막 군중들을 향기로 취하게 만들어 광기에 빠뜨리는 충격적인 장면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된다. 그것은 안토인이 자신의 딸을 살해한 자에게 “아들아 미안하다”고 하는 것처럼 이성의 굴복을 의미한다.

통쾌한 그르누이의 퍼포먼스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루누이가 개처럼 사슬에 매인 채 끌려나가는 장면을 보면, 군중들의 “죽이라!”는 고함소리 속에서 한 수문장의 흥분된 얼굴이 잠깐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곧이어 군중들 앞에 세워진 그루누이에게 판결문이 읽혀진다. 그것은 형식을 갖춘 글귀이지만 그 내용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절대로 한번에 죽이는 일 없이...”라는 문구가 그걸 말해준다. 군중들과 판관들은 모두 흥분한 상태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 사형대 위에 올라선 그르누이를 중심으로 모든 군중들은 잔뜩 흥분해있다. 그 앞 뒤 장면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서 있는 인물은 바로 그르누이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이성에 대한 통렬한 조소를 보낸다.

영화에서 통쾌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빛의 허울 속에 가려진 어둠의 실체를 보았다는 말이다. 이성이라는 허울뿐인 잣대를 내세워 정의를 운운하며 결국에는 비이성적인 살인과 전쟁으로 몰아넣는 세계의 비정함을 목격했다는 말이다. 동화적이면서도 세계를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선과, 기괴하면서도 거기서 보편성을 끌어내는 작품, ‘향수’. 쥐스킨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어떻게 그 후각의 세계를 영상화했을까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주는 작품이다.

아이콘화된 이름으로 규정되는 연예인들

버럭범수, 야망준혁, 야동순재, 애교문희, 내숭달희, 사육해미... 요즘은 이름 두 자와 그 성격을 규정하는 글자를 붙인 ‘아이콘화된 이름’이 대세다. 드라마와 시트콤을 기억해내는데 우리는 굳이 그 긴 제목을 생각해낼 필요가 없다. ‘하얀거탑’대신 야망준혁을, ‘외과의사 봉달희’대신 버럭범수를, ‘거침없이 하이킥’대신 야동순재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제목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라마나 시트콤의 특징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야망준혁에서 떠올려지는 야망을 향해 질주하는 준혁의 모습이나 버럭범수에서 봉달희를 향해 버럭대며 사랑을 표현하는 범수의 모습은 이들 드라마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재미요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이름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고 입에 잘 붙는다는 장점이 있어 인터넷을 통해 혹은 입에서 입으로 무한복제된다.

아이콘만 누르면 되는 시대
인터넷 검색이 일반화된 시대, 이런 이름들은 네티즌의 세례를 받아 새롭게 떠오르는 아이콘들이다. 드라마의 캐릭터를 아는 사람은 전날 드라마를 놓쳤다고 해도 다음날 인터넷에 뜬 검색어로 대충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이 시대 TV컨텐츠의 중심에 캐릭터가 서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프로그램, 코미디 할 것 없이 캐릭터 중심적인 현상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네티즌들의 키워드가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그 캐릭터 지향에서 비롯된다. 또한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각기 고유의 별명(뚱보-정형돈, 뚱뚱보-정준하, 단신-하하, 외국인-노홍철, 악마의 아들-박명수 등)을 가질 정도의 캐릭터를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캐릭터가 TV의 아이콘이 된 것은 그만큼 쏟아져 나오는 컨텐츠가 많은 정보화사회에서 좀더 쉬운 방법으로 컨텐츠를 선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구에서 비롯된다. 즉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 내용을 전부 파악하기보다는 특정 캐릭터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개그 프로그램에서 더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로 죄민수라는 캐릭터를 들 수 있다. 우리는 ‘개그야’의 죄민수를 떠올리는 것이 그를 스타덤에 올린 코너명, ‘최국의 별을 쏘다’를 기억하는 것보다 쉽다. 이러한 캐릭터 중심적인 경향에서 ‘아이콘화된 이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캐릭터를 찾는 데 있어서도 좀더 짧게, 좀더 확실하게!

아이콘으로 성공하고 고통받는 연예인
TV 프로그램들은 이제 캐릭터 창조가 성패의 갈림길이 되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물론 내용과 떨어진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지만), 약간의 허술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사랑 받는다. 반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구태의연하거나 호감가지 않는 캐릭터는 프로그램을 망쳐놓는다. 연예인들이 점점 TV 프로그램의 중심 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는 작가와 PD가 연예인이란 질료를 선택했다면 요즘은 캐릭터화된 연예인이 프로그램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연예인들의 권력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양성한다. 이미 캐릭터로 아이콘화된 연예인과 그렇지 못한 연예인 사이의 간극은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도태되어간다고 느끼는 연예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잘 나가는 연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심적인 압박감을 준다. 개인사생활조차 캐릭터로 아이콘화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사생활이 없는 완전한 유리상자 속의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다 문득 설정된 캐릭터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행동을 했을 때 결과로 오는 것은 아이콘의 상처 혹은 죽음이다.

아이콘화된 연예인들은 그래서 변신이 이중의 족쇄가 된다. 문근영 같은 ‘국민여동생’이란 아이콘을 가진 연기자는 연기변신에 있어 연기력 이외의 장벽에 부딪치게 된다. 언제나 두드리면 튀어나오던 아이콘에 대한 혼동을 야기시키는 변신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불쾌감이 되곤 한다. 그 아이콘을 사랑해왔던 강도만큼 그들은 변신하려는 아이콘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기자들의 변신은 어찌 보면 생존이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여전히 고등학생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은 연기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캐릭터를 통해 귀환하는 중견연예인들
반면 캐릭터를 통해 이제는 잊혀질 뻔한 중견연예인들이 아이콘으로 귀환하기도 한다. ‘주몽’에서 모팔모 역할을 하며 주목받은 이계인은 30여 년 연기세월에서 주로 범죄자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나 모팔모라는 캐릭터를 통해 털털하고 가슴이 따뜻하면서 화통한 인물로 아이콘화되었다. 임채무는 모 CF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멜로 드라마의 심벌이었다. 하지만 2:8 가르마를 하고 모레노 주심을 흉내내는 단 한 편의 CF는 그의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바꾸어놓았다. 그는 이제 진중한 연기자에서 재미있는 아저씨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황금어장’같은 프로그램에서도 활약 중이며, 최근에는 ‘복면달호’에서 역시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다.

젊은 연예인들과 달리, 중견연예인들의 변신은 ‘권위에서의 탈피’라는 점에서 용인되고 존경받는다. 아이콘화의 장이 젊은 세대들의 활동영역인 인터넷이란 점에서 볼 때 중견연예인의 변신은 재미이면서 발견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 연기자들 중 명연기자로 손꼽혀온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나 나문희가 ‘야동순재’와 ‘애교문희’로 젊은이들의 아이콘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인터넷의 속성이 한 몫을 차지한다.

연기자와 캐릭터의 경계가 사라진다
캐릭터의 리얼함은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무한도전’의 성공은 유재석이 주창하는 것처럼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개그맨들과 설정된 캐릭터 사이의 간극이 모호하다. 가상현실을 매일 접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만들어진 캐릭터는 더 이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반증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개그맨들은 그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거기서 구축되는 캐릭터를 다른 캐릭터와 대결시키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호통명수가 치킨집 사장이라는 점이나 유재석이 나경은 아나운서와 사귄다는 사실은 프로그램 상에서 하나의 웃음의 요소로 그대로 활용된다. 현실로서의 연기자와 프로그램 속 캐릭터 사이의 간극은 그만큼 좁혀진다.

이런 현상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극중 이름으로 연기자의 이름이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야동순재, 애교문희 같은 아이콘들은 어쩌면 연기자들에게는 위험성이 있는 게 아닐까. 연기자의 이름을 캐릭터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칫 연기자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잘못된 이미지로 굳어진 이름은 잘못된 이미지로 굳어진 캐릭터의 이름보다 더 위험하다. 다행히 ‘거침없이 하이킥’의 경우엔 김병욱 PD가 가진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이런 위험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발휘된다. 그는 애초부터 연기자들 속에 내재된 성격 혹은 이미지를 시트콤 캐릭터로서 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PD이다. 하지만 연기자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가 점점 지워져 가는 흐름 속에서 위험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캐릭터가 TV의 아이콘이 된 시대. 연기자들은 가장 중심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만큼 가장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대본에 의해 잘못 설정된 캐릭터나 잘못된 연출로 인해 직격탄을 맞는 것은 작가와 PD보다는 프로그램의 캐릭터로 표상된 연기자들이다. 여기에 리얼함이 강조되면서 야기되는 현실의 생활인과 TV속 캐릭터의 고착은 연기자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부터 미리 각오해야 하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처럼 캐릭터 중심으로 변모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지금 연예인들이 과거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이다.

장준혁을 위한 변명

‘하얀거탑’은 결국 환타지보다 현실을 선택했다. 장준혁(김명민)에 대해 쏟아지는 애정의 근원은 바로 그가 우리네 3,40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기 때문. 성공을 위해 밤낮 없이 달리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픽 쓰러지는 장면들은 이제 낯선 장면이 아니다. “장준혁을 살려내라”는 거센 요구는 바로 그런 현실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장준혁이 달려온 길은 이 시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을 어떻게 대변했을까.

장준혁도 이주완(이정길) 과장이 딴 맘을 먹기 전까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개원의도 아니고 종합병원에서 그것도 모두가 기피하는 외과에서 10여 년을 숨죽여가며 주는 봉급 받아가며 살아온 샐러리맨. 실력은 최고지만 조직의 생리가 어디 실력만으로 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조직이 거탑의 모양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위로 갈수록 숫자는 줄어드는 그 구조는 밑에서 올라가기는 힘들어도 위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막기는 쉽다. 그러니 아직 현역인 이주완 과장의 눈밖에 난 장준혁의 선택은 생존을 위해 당연한 것이다.

거탑의 구조가 갖는 생리는 오르지 않으면 떨어진다는 것. 가만히 있는다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인사철에 누락된 자신을 현상유지로 받아들이는 샐러리맨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을 향한 질주는 사실 생존을 위한 강한 몸부림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면으로 보면 장준혁은 그래도 운 좋은 인물이다. 적어도 그런 상황에 접했을 때, 현실에서라면 그저 고개 숙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에게는 뒤를 밀어주는 든든한 백(장인이나 아내 같은)이 존재했다.

그렇게 해서 오른 거탑의 꼭대기에 서면 더 많은 잔인한 결정들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 현실. 그의 위치는 윤리적 결정보다는 실리적 결정을 해야한다. 장준혁은 조직이 요구하는 대로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꼭지점에 존재하는 자는 앞만 보고 달려야지, 옆도 쳐다보고 또 뒤도 돌아보고 하면 조직 전체가 둔화된다. 문제는 어느 순간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본분을 잊는 순간에 발생한다. 여기에 물론 극화되어 과장된 캐릭터지만 늘 조직이라면 존재할만한 염동일(기태영) 같은 인물이 엮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미 벌어진 사건은 조직의 차원에서는 최대한 막아야 한다. 그것은 조직의 차원이 들어감으로써 인간적인 판단은 결여된다.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패한 장준혁이 가졌을 상실감의 깊은 근원 속에는, 단지 패했다는 사실 이외에도 조직이란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윤리적인 선택마저 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과장된 해석일 수 있지만 그가 가진 암은 그런 심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몸의 반응처럼 읽힌다. 성공의 뒤안길에 나타나는 죽음의 그림자. 그것은 저 ‘성공시대’라는 영화에서 안성기가 그랬던 것처럼 욕망의 끝으로 나타나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장준혁의 죽음으로서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정의는 이긴다’같은 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왜 그가 죽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왜 그토록 성공에 목말라 했나 하는 질문으로, 또 어째서 그런 비윤리적인 일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는가 하는 좀더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거탑의 구조 속으로 뛰어들어가야만 하는 사회, 그 거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의 별 짓을 다해야 하는 사회, 그리고 그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라곤 갑작스런 사망선고 같은 허망함뿐인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것이 할 짓 못할 짓 다 해가며 거침없이 거탑을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준혁에게 숙연해지는 이유다. 고인에게 명복을. 이 땅에 그처럼 살아가다 끝을 보아버린 모든 샐러리맨들에게도.

전문직 드라마의 이유 있는 선전

값비싼 스포츠카에서 내려 조금은 풀어진 듯한 모습으로 건물로 들어서는 남자. 그를 전날 길거리에 우연히 만났던 말단 여직원(하지만 늘 굳건하고 씩씩한 우리의 여주인공!)이 막 회사로 들어서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말을 건다. 옆에서 수행하던 비서들이 제지하면서 여자는 그가 이 회사 총수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된다….

식상한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 한 때는 한류의 한 공식처럼 통용되던 이 구조는 작년 한 해 시청자들에게 철저히 냉대를 받았다. 이로서 제작자들은 알게 되었다. 적당한 삼각 사각구도의 멜로 라인과 몇몇 스타들을 캐스팅하면 무조건 된다는 안이한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올해 들어 새롭게 선보인 것이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외과의사 봉달희’, ‘하얀거탑’ 같은 병원드라마가 그것이다.

트렌디는 가고 전문직이 뜬 이유
이제 통상적이고 구태의연한 구조의 드라마에 왠지 눈이 가지 않게 된 것은 달라진 매체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의 힘이다. 인터넷이란 매체는 무엇이든 그 속에 담겨질 때 매니아화되는 경향이 있다. 초창기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를 접해본 몇몇 매니아들이 그 저변을 꾸준히 인터넷을 통해 퍼뜨리자 그 영향은 네티즌들 전체로 파급되었다. 방송과 인터넷이 공존하는 시대에 이런 영향은 곧바로 드라마 소비자들의 입맛을 바꾸어버렸다. 몇몇 식상한 국내 드라마에 대한 비판과 외면은 거세졌고 그러자 방송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직 드라마(진정한 의미의)가 등장했고 그 첫 번째 타석에 선 것이 병원드라마이며, 이것은 이어서 형사드라마 같은 분야로 영역을 넓혀갈 예정이다. 반응은 예상대로 뜨겁다. 미드와 일드를 보며 우리에게도 저런 드라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우리나라’라는 딱지가 붙은 전문직 드라마에 어찌 애정이 없을 수 있을까. ‘하얀거탑’ 같은 경우 실제 시청률은 15∼20% 사이에 머물고 있지만 인터넷을 통한 파괴력은 50%를 넘기고 종영했던 ‘주몽’에 못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이런 외적인 조건만큼 중요한 요인들이 있다.

‘하얀거탑’, 전문직 드라마로 조직을 말하다
장준혁(김명민)이란 천재 외과의사의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를 담은 ‘하얀거탑’. 병원드라마의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엔 정치가 있었다. 병원 내에서 외과과장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다툼이 그것이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놈이 강한’ 그 세계는 선도 악도 없는 곳. 바로 우리들이 사회에서 몸담고 매일 살아남기 위해 싸워나가야 하는 ‘조직’이라 불리는 곳이다. 병원이란 공간이 우리들이 경험하는 조직이란 공간으로 환치되자 거기 서 있는 장준혁은 모든 샐러리맨들의 욕망을 부여받은 캐릭터가 된다. 때론 비열하고 비정한 그의 무한질주는 그래서 용납된다. 스포츠카와 성공, 돈, 권력 같은 것을 추구하는 장준혁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조직에 몸담은 이들의 로망이 된 것이다.

이 드라마가 리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병원사회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얀거탑’에서 그려지는 병원 사회의 모습은 오히려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단 한 사람 꼭지점에 있는 외과과장이 전체 병원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우리네 병원의 모습이 절대 아니다. 그래도 이 드라마에서 리얼함이란 바로 조직의 리얼함을 말하는 것. 바로 이 부분이 전문직 드라마로서 ‘하얀거탑’을 성공작으로 만든 주요인이다.

‘∼봉달희’, 전문직 드라마로 인간을 말하다
한 템포 늦게 시작한 ‘외과의사 봉달희’에 대한 초기 반응은 혹독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비판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이 드라마가 ‘하얀거탑과는 달리’ 멜로가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를 표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비판은 ‘하얀거탑’의 영향으로 ‘멜로가 있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것이 과거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데서 발생했을 뿐 근거는 희박한 것이었다.

두 번째 비판은 아무래도 원작 없는 ‘토속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의심한데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만큼 일드, 미드에 익숙한 매니아들은 우리가 그런 드라마를 순전 우리 원작으로 할 수 있을 거라는 데 의구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이 드라마는 우리 식의 멜로적 상황에, 의사라는 특정 직업이 갖는 고민, 여기에 보편적인 생명에 대한 질문들이 겹쳐지면서 어떤 면으로는 우리 식의 전문직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고 생각된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병원에서 통상적으로 보던 의사의 모습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의사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러자 환자의 생과 사를 다루는 인간이자 의사란 양면성이 부딪치면서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던져진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의사인가 인간인가’, ‘의사로서의 선택인가 인간으로서의 선택인가’, ‘생명에 우선순위가 있나’ 등등 그 질문은 사뭇 진지하다. 그러나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드라마의 분위기는 정감 가는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에피소드로 인해 경쾌해진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전문직 드라마가 결국엔 가야할 인간에 대한 이야기, 즉 본질에 접근하는 ‘본격 전문직 드라마’라 할만하다.

디테일을 통해 하는 현실이야기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섬세해진 디테일이다. 이것은 과거 의사가운 입은 사람들의 멜로드라마였던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와 비교해서 말하는 그런 정도의 디테일이 아니다. 아예 알아먹기 힘들 정도의 전문용어들이 대사로 쏟아져 나오고 수술장면에 있어서는 실제 의사들이 참여해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도 그 에피소드에 있어서 병원이나 의사 같은 특정 상황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디테일들이 풍부하다. 이것은 새로운 전문분야의 재발견에 가까운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의사라는 성역의 이면을 훔쳐보는 것에 어찌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놀라운 디테일이 말하려는 것은 그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 결국 전문직 드라마는 그 복잡하고 다양한 디테일을 파고들지만, 그것을 통해 결국 우리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얀거탑’은 조직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의 로망을 다루고 있고, ‘외과의사 봉달희’는 인간으로서 선택 앞에 고민에 빠진 의사를 다룬다. 그러니 전문직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저네들의 세상’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디테일을 통해 보여주는 현실이야기. 이것이 전문직 드라마가 각광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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