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두기라는 ‘마왕’의 낯선 드라마 공식

데이빗 핀처 감독의 명작, ‘세븐’을 보면 연쇄살인범을 좇는 형사 밀스가 자신의 아내가 살해당한 걸 알게되고 ‘분노’를 참지 못해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은 이 순간 형사는 살인자가 되고 연쇄살인범은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범법자와 법을 집행하는 자 사이는 이렇듯 백지 한 장 차이로 구분된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퍼즐을 푸는 듯한 드라마의 새로운 맛을 보여주는 ‘마왕’이 던지는 질문도 다르지 않다. 자신은 나쁜 놈 잡는 형사이지 나쁜 놈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강오수(엄태웅) 형사가 맞닥뜨린 현실은 끔직하다. 그것은 첫 번째 경고문 그대로다. ‘진실은 친구들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사건을 좇던 그가 사건의 실마리를 통해 알게되는 것은 범인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 저질렀던 끔찍한 사건의 기억. 강오수 형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일의 진실이 주는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보통의 형사물이나 스릴러를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자신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범인을 좇던 형사가 결국 그 범인은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구조로 드라마화시키기에 어려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있어 이만큼 강력한 소재는 없을 것이다. 강오수와 오승하(주지훈)는 상황의 양 끝단에 서서 정반대의 길을 향해 달려간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형사는 피의자가 되고, 범인은 피해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마왕’이란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거리 두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시청자가 특정 캐릭터에 동화되어 흘러가는 것을 막고, 전체 피스를 손에 쥔 채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가듯이 사건 전체를 생각하며 보게 만들기 위함이다. 기존 감정이입의 법칙에 익숙한 시청자들이라면 너무 어렵고 힘겹게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이것이 ‘마왕’이란 드라마를 보는 진짜 재미이다. 지금까지 가볍고 쉬운 게임에 질력이 났던 시청자라면 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복잡한 게임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화면 상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늘 불분명하게 처리된다. 그것은 때론 마치 훔쳐보듯 멀리 떨어져서 보여주는 카메라 때문이기도 하며, 때론 빛과 어둠이 명백한 조명 탓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론 사건 전개에 있어서 바로 이어져야 이해가 쉬울 신과 신 사이를 일부러 띄어놓는 장치 때문이기도 하며, 때론 거친 듯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 탓이기도 하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화면에 구성된 캐릭터들은 전체로 보여지지 않고 주변 사물들에 걸쳐져 가려지거나 갇혀진다. 마치 캐릭터들은 그 갇혀진 화면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화면이다.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조각 위에 그려진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치 카메라는 화면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분할되거나 가려진 공간 속에 놓여진 캐릭터의 일거수 일투족을 우리는 퍼즐 조각을 바라보듯 집중해서 바라본다. 그 안에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마왕’이란 드라마는 지금껏 등장했던 여타의 드라마들과 달리, TV 속의 드라마와 TV를 보는 시청자 사이의 간극을 넓혀놓았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재미와 새로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빠져들고 동화되어 보는 드라마에서 탈피해, 철저히 이화되고 객관화시켜 봐야 보이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다분히 매니아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늘 같은 공식에 같은 인물들이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들만 봐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늘 같은 밥상에 같은 반찬을 맛봐야 했던 시청자들이라면 이 낯선 반찬에서 왠지 모를 대접받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남자의 여자’ vs ‘고맙습니다’

주중 드라마의 향배가 정해져가고 있다. 월화는 김수현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승부하는 ‘내 남자의 여자’, 수목은 이경희 작가가 전하는 훈훈한 진심으로 승부하는 ‘고맙습니다’이다. 한쪽은 말많은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수다를 자극하고, 다른 한쪽은 말없이 울게 하는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달군다. 미드 열풍을 타고 온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지만 그 기대치에 맞는 드라마가 부재한 상황, 이 두 드라마는 전혀 다른 상반된 코드를 가지고 주중의 밤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 ‘수다와 손수건’, 당신이 좋아하는 드라마는 무엇인가.

분노 vs 눈물
‘내 남자의 여자’는 여성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분노를 끄집어내 폭발시키는 드라마다. 이것은 모든 불륜드라마가 갖는 기본전략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불륜드라마가 그 분노를 자해하듯 여성 속에 가두고 속으로 터뜨렸다면, ‘내 남자의 여자’는 거침없이 끄집어내 밖으로 터뜨린다는 데 있다. 죽이고 싶을 정도의 분노가 가진 두 얼굴은, 안으로 터질 때 자학 혹은 자살이 되며, 밖으로 터뜨릴 때 가해 혹은 살인이 된다. 그러니 불륜드라마가 가진 자극성은 바로 극중 은수(하유미)가 입만 열면 버릇처럼 쏟아져 나오는 욕설, “찢어 죽일” 정도의 강도를 숨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폭력물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무언가 내 안에 잠재된 불만과 분노를 애꿎은 기물을 파손하고 폭파시키는 장면을 통해 풀어내는 것. 그러나 폭력물에 바로 내 옆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공감을 끌어내는 설정이 들어가면 그 강도는 더 강해진다. ‘내 남자의 여자’는 바로 그런 설정을 불륜을 통해 만들어놓고 분노와 카타르시스를 반복하는 심리적인 폭력물이다. 여기에는 그간 남자라는 속물들에 의해 쌓여온 분노를 ‘무시’라는 형태로 복수하고는, 곧바로 ‘가정 있는 여자’와 ‘그 가정을 파괴하려는 여자’라는 구도를 만들어 대결구도에 들어간다. 주먹이 오가고 프라이팬이 날아드는 걸  보고 속시원하다고 느낀 시청자라면 이 대결구도에서 오는 해소감을 맛본 것이다.

반면, ‘고맙습니다’는 분노보다는 눈물을 무기로 끄집어낸다. 그런데 이 눈물은 그저 강한 설정에 의해 억지로 짜내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대결의식과 그 해결방법을 보면 드러난다. 드라마는 에이즈에 감염된 딸 봄(서신애)과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신구)를 모시고 살아가는 영신(공효진)과 세상의 편견과의 대결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중요한 것은 특정 캐릭터가 그 세상의 편견을 대변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석현(신성록)과 민기서(장혁)의 관계는 영신과 푸른도의 개발을 두고 묘한 대결구도를 가지면서도 서로 형제 같은 느낌을 준다. 박씨(김하균)와 석현모(강부자) 같은 모자란 듯한 섬사람들은 그 부족함이 때론 편견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모르기 때문일 뿐, 악함은 아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세상의 편견들 앞에서 영신이 하는 방식은 저 ‘내 남자의 여자’가 보여주는 ‘분노의 폭발’이 아니다. 그녀는 고작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끊임없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심지어 에이즈라는 사실이 밝혀져 자신의 딸을 피하는 푸른도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푸른도 사람들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며, 그래도 딸 봄이와 할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려 노력하면서 이런 작은 행복감에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들을 목격하는 시청자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작가가 이 가족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도처에 그 가족을 도우려는 인물들, 예를 들면 보건소 사람들이나 민기서, 석현, 서은희(김성은), 두섭모(전원주) 같은 인물들의 시선으로 처리된다.

직설화법 vs 간접화법
분노를 터뜨리는 방식으로서 ‘내 남자의 여자’는 직설화법을 선택한다. 욕은 차라리 순한 편이다. 대화내용은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충격적이란 느낌마저 든다. 화영(김희애)을 찾아온 지수(배종옥)가 “왜 그랬니? 넌 내 친구였잖아.”라고 하는 항변에 화영의 답변은 이런 식이다. “불가항력이었어. 죽어도 좋았어. 너 따윈 아무 상관없었어.” 이것은 언어라는 형태를 띄었을 뿐, 거의 칼로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는 정도의 수위를 담고 있다. 여기에 가만있을 지수가 아니다. “너희 짐승이니?” 그러자 화영은 비웃듯 웃으며 말한다. “행복한 짐승.” 칼이 날아가고 피가 튀는 사극이나 조폭영화보다 더 강한 직설화법의 액션이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인 말의 대결 너머에서도 캐릭터를 잡아내는 게 김수현 작가의 힘이다. “내가 널 얼마나 잘 해줬는데..” 이런 지수의 한탄에 화영이 하는 말. “니가 해놓고 왜 빚준 것처럼 그래? 솔직해라.” 이것은 지수의 성격이 조금은 과잉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주변의 것들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자신은 늘 착한 천사표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착한 여자 콤플렉스’ 같은 것을 약점으로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수의 일방적인 공세 속의 약점을 파고드는 화영의 한 자락 칼침이 더 강한 대결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인이 된다. 평소에 시청자들이 속으로 품고 있었던 말들은 그녀들의 입을 통해 뿜어져 나오고 그 순간 시청자들은 캐릭터에 빙의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반면, ‘고맙습니다’는 극도로 우회하는 간접화법으로 시청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고맙습니다’에 유독 많이 나오는 장면은 바로 ‘목격되는 장면’이다. 영신이 잠을 자다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민기서에게 목격되고, 술에 취해 민기서를 아버지로 대하는 그녀의 행동 역시 민기서에게 목격된다. 민기서가 살인의 누명을 쓰고 경찰서에 갔을 때 그 증언을 뒤집어줄 고씨네 집에서 비를 맞으며 애원하는 석현의 모습은 영신에게 목격된다. 에이즈 사실이 밝혀진 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 영신은 석현에게 목격된다. 여기서 목격자는 바로 시청자의 역할을 해준다. 시청자들은 여러 따뜻한 인물들에게 빙의되면서 그 시선으로 같은 가슴저림, 아픔을 느끼게 된다.

돌아온 민기서는 “정말 잊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는 진심 어린 말을 영신 앞에서 해댄다. 그것은 직설화법처럼 느껴지지만 곧바로 민기서가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함으로써 간접화법으로 되돌려진다. 과거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으로 착각해 민기서 앞에서 밥상을 차려주고 절을 했던 일을 이번에는 민기서가 간접화법으로 말하는 것. 여기에는 영신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에서 에둘러 말하지만 진심은 시청자에게 곧바로 전달된다. 드라마는 이러한 간접화법을 통해 진심이란 말 몇 마디로 전해지지 않는 어떤 것이라 말해준다. ‘고맙습니다’는 저 신구라는 연기자의 치매연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직접적인 말보다는 우회적인 말로, 때론 침묵이나 행동으로 진심을 전하는 드라마다.

네거티브 전략 vs 포지티브 전략
이 두 드라마가 취하는 전략은 사뭇 상반된다. ‘내 남자의 여자’는 말많고 자극적인 드라마로서의 전형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따르고 있고, ‘고맙습니다’는 마음의 진심을 전해 감동을 주는 드라마로서의 포지티브 전략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기보다는 세상을 대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다. 세상이 내게 무언가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이렇게도 다르다. 때론 불의와 맞서 싸우고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방식을 쓰기도 하고, 때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 장본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쓰기도 한다.

주중 드라마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내 남자의 여자’와 ‘고맙습니다’는 이 두 방식에 대한 드라마다. 공교롭게도 여타의 드라마들보다 이 두 드라마가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청자들이 그만큼 삶의 리얼한 문제에 더 민감하다는 것과 지금 우리 삶이 그만큼 각박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신은 이 각박한 삶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각박한 삶을 만든 장본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결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진심을 전하려는 대화를 계속할 것인가. 칼날 같은 수다를 통한 대결인가, 적마저 눈물 흘리게 하는 손수건인가. 당신은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여자들을 혹은 여자들만을 위한 드라마

김수현이 그려내는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그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불륜이라면 당연히 여자와 함께 남자가 있어야 하는 법. ‘내 남자의 여자’란 제목은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라는 관계를 설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제목에 방점이 찍히는 부분이 ‘남자’와 ‘여자’, 양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강조되는 부분은 궁극적인 지칭대상인 ‘여자’에 있다. ‘남자’라는 단어 역시 ‘내’라는 여자에 의해 한정되어 있는 존재. 그러니 이 제목에서 ‘남자’는 그냥 가운데 가만히 멈춰선, 혹은 양쪽에 포획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홍준표는 침묵하고 있을까
제목처럼 이 드라마에서 남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홍준표(김상중)가 남자일까. 교수에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부모의 돈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며, 게다가 천사표 부인까지 있는 홍준표는 과연 이 드라마에서 남자로 그려지고 있을까. 이화영(김희애)과 김은수(하유미)가 마치 입에 기관총이라도 단 듯 거침없이 속내에 잔뜩 품은 총알을 쏘아대고 있을 때, 홍준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가정을 쥐고 또 한 손에는 욕망을 쥔 채 어느 한 쪽도 잡지 못하고, 또 버리지도 못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가 이화영과의 불륜을 저지른 것에 무언가 그만의 이유가 있음직도 한데, 그와 이화영이 밝히고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의도하지 않았다”와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꽃처럼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을 뜻하니, 그것은 운명적인 것이었을까. 그런데 잘 보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 드라마는 운명이나 금지된 욕망에 대해 논하려는 의도가 없다. 머리채를 잡고 프라이팬으로 머리통을 내려치며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상황이 그걸 말해준다. 이 드라마는 이화영이 대사 속에서 말한 것처럼 불륜이라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가보는”,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의 화학반응을 보는 쪽을 택했다.

남자라는 족속은 다 그렇다(?)
그런데 김수현의 직설화법 속에서 왜 유독 홍준표는 그다지도 입이 무거운 걸까. 혹 이유가 없는 건 아닐까. 그저 남자라면 다 그런 족속이라고 드라마가 말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등장하는 남자들의 면면을 볼 때 그런 혐의를 벗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트렌디하기 이를 데 없는 불륜전과자(?), 허달삼(김병세)은 남자란 존재가 ‘다 그렇고 그런 수컷’이라고 말한다. 그의 대사를 보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놈의 수컷 기질은 어쩔 수 없는 철없는 남자라는 존재가 그려진다. 불륜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지수(배종옥) 앞에서 오히려 더 열불을 내고 있는 은수에게 “당신도 처음이 제일 힘들었지?”라고 묻는 남자다.

불륜 사실이 밝혀지고 집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홍준표를 데리고 가 코치랍시고 하는 대사들 속에도 남자는 없고 수컷만 존재한다. “무조건 빌어라. 빈다고 해결되지 않지만 그렇게 지나간다”는 게 허달삼이 코치한 내용이다. 중요한 건 이런 허달삼의 이야기를 홍준표 역시 듣고만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역시, “그게 통할까요?”라고 묻고, “차라리 한 일주일 숨었다가 오라”는 허달삼의 말에, “저도 그러고 싶어요.”라고 맞장구를 치는 캐릭터다. 여기서 그려지는 남자의 모습은 가정이 파탄 날 상황에서도 남자들은 저 혼자 도망칠 궁리만 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저질이고 철없으며 책임회피만 하면서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들의 모습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준표의 아버지인 홍회장(최정훈)이 가정부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 “남자란 족속들은 나이가 드나 젊으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 장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남자가 아닌 수컷이다. 왜 이다지도 남자를 극단적인 모습으로 그려 가는 것일까. 이것은 그 남자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과 만나면서 드라마 속에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그것은 이 불륜 게임에서 남자를 소외시키고 여자들만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낸다. “남자들은 어쩔 수 없어. 그러니 우리가 해결해야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자들을 혹은 여자들만을 위한 드라마
김희애라는 팜므파탈이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 여자들의 대결구도를 흥미진진하게 이끌기 위함이다. 적이 도무지 이가 들어가지 않는 인물이어야 대결은 더 극적으로 전개된다. 이 대결구도는 윤리적으로 말하면 선악구도가 너무나 명징해서 오히려 식상해진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주로 여자와 남자의 대결이었던 과거의 선악구도와 달리 여자와 여자가 맞붙게 되자 이야기는 참신해진다. ‘내 남자의 여자’라는 관계 속에서 화영과 지수는 서로 자리싸움을 시작한다. ‘내 남자의 여자’는 화영의 관점에서 보면 지수가 되고, 지수의 관점에서 보면 화영이 된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인물, 남자는 홍준표이고 그는 침묵을 통해 드라마 전체가 말해주는 ‘남자라는 속물’을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내 남자의 여자’는 여자들을 위한 드라마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 드라마가 불륜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갖게되는 최대의 강점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은수가 지수를 위해 화영을 찾아가 ‘박살을 내버리는’ 장면에서 “저런 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여자들만의 구도 속에서 남자 캐릭터가 일방적으로 그려져 상황 자체에서 배제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단 한 명 그렇게 그려지지 않는 유일한 남자인 지수와 은수의 친정아버지인 김용덕(송재호)이란 캐릭터가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아버지는 남자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임권택 감독 영화에 길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가 만드는 영화가 인생을 담고, 그 인생의 비의를 담지한 시대를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 위의 풍경은 임권택 영화가 가진 영상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먼저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길 자체가 내포한 표정이다. 길은 장관을 이루다가도 애조 띤 정서로 감아 돌고 때론 바다를 만나 반짝거리다가 인간에 의해 매몰되기도 한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구성진 소리처럼 구불구불 논길 사이로 이어진 길 풍경으로부터 우리네 구비진 인생살이의 고단함까지 잡아낸다.

그리고 그 풍경을 자세히 보면 길 위를 걷는 사람이 보인다. ‘천년학’에서는 소리꾼의 비루한 삶과 아버지에 의해 누이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여인 송화(오정해)로부터 도망친 동호(조재현)가 그 길 위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한편 눈이 멀어버린 송화는 그 길 위에서 소리로 연명한다. 동호의 길과 송화의 길은 자꾸만 엇갈린다. 동호는 자꾸만 송화의 길을 따라가고픈 욕구에 사로잡히고 송화는 마치 표식처럼 소리를 길 위에 남겨놓는다.

이러자 송화의 길을 좇는 동호의 길은 송화가 만들어놓은 소리 길을 좇는 길이 된다. 따라서 길 위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저 ‘서편제’의 길을 따라 듣게된 우리의 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에는 바로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가 오랜 세월 깃들어 있다. 인물과 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소리 길이 되면서 영화는 좀더 시대적 아픔을 잡아내며 시간 길을 날줄을 끌어들인다.

길 자체가 가진 표정에 그 길 위를 걷는 애틋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길에 시간의 표정이 곁들여지자 ‘천년학’은 더 이상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도 영상의 잔재주를 피우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임권택 감독만이 가능했을 이 담담한 시선은 바로 인생과 삶, 영화를 모두 집약하면서도 늘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다. 이 단순해 보이는 플래시백은 그러나 과거의 길과 지금의 길, 그리고 그 위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안타까움을 더해간다. 그 안타까움은 동호가 송화에게 갖는 그리움만큼의 거리에서 비롯된다. 그 그리움은 성장한 현재의 동호가 선학동 선술집에 도착해 처음 상상하던 어린 시절의 송화만큼 먼 거리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가까워지면서 만남의 기대감을 높인다. 선술집에서 펼쳐놓은 이야기 길을 따라 동호는 여러 차례 송화와 엇갈리지만 그들은 결국 실재 존재하는 길 위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매몰되어 사라져버린 강처럼, 예전 날아들었다는 학도 사라진 그 선술집 선학동으로 이야기는 먼 거리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결국 만나지 못한 동호와 송화는 그러나 소리로 길을 낸다. 그 소리 길 위로 사라졌던 강도 살아나고 사라진 학들도 날아든다. 학들은 동호와 송화의 못다 나눈 정담을 나누듯 소리 길 위에서 춤을 추며 강 위를 날아다닌다. 길은 소리 길을 따라서 영원이 된다. ‘천년학’은 그렇게 임권택의 100번째 길 위에서 영원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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