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시청자들이 그토록 사이다 엔딩 기대했건만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이 종영했다. 모두가 바라던 해피엔딩. 박정우(지성)는 차민호(엄기준)를 결국 사형수로 감방에 집어넣으며 정의를 실현했다. 마지막 시청률도 28.3%(닐슨 코리아)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모든 것이 정의로 돌아간 해피엔딩에 최고 시청률까지 기록했지만 어딘지 시청자들의 반응은 찜찜하다. 사이다이긴 한데 어딘지 김빠진 사이다란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

'피고인(사진출처:SBS)'

가장 큰 문제는 이 드라마가 연장 2회를 더해 18회를 끌고 왔던 그 힘이 고구마 전개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고통스런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박정우를 다시금 원상태로 돌려놓는 방식을 반복하면서 생겨난 시청자들의 갈증을 동력으로 삼았던 것. 마지막회까지 이렇게 갈증들을 증폭시켜놓았기 때문에 웬만한 엔딩으로는 그게 채워지기가 어려웠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 차민호가 사형수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인 척 가장하며 법망을 피해나가려는 상황에 갑자기 나연희(엄현경)가 증인으로 등장해 자신이 차민호를 사랑했다고 말하며 아이 역시 차민호의 아들이라고 밝히는 장면은 너무 신파적이었다. 결국 그 증언이 차민호의 마음을 움직여 그 실체를 드러내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사형수가 된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결말이다. 

그토록 권력자들을 좌지우지하며 잘 빠져나가던 차민호가 “본래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에 감상적으로 빠져버리는 이야기는 18회 동안 쌓아 놓은 정의 구현을 통한 사이다 결말에 대한 갈망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일이다. 갑자기 약해진 악역이 신파적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해피엔딩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 결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이 느끼는 진정한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권선징악이라는 단순한 구도조차 명쾌하다고 보기 어려운 <피고인>은 그래서 나아가 어떤 주제의식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피고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드라마는 애초에 “누가 이 시대의 피고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중한 질문을 담아낼 수도 있었다. 박정우라는 무고한 인물이 피고인이 되고, 정작 살인자인 차민호가 권력을 손에 쥐고 버젓이 잘 살아가며 법망을 빠져나가는 그 구도만 잘 살려냈어도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고인>은 그런 주제의식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고구마 전개를 통한 시청률 낚기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였던 것. 물론 주제의식 같은 메시지보다 이야기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됐다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가 개연성을 잃어버리면서 억지 반전을 통해 만들어내는 충격요법이 진정한 이야기의 재미를 주기는 어렵다. 

최근 들어 이만한 시청률을 가져간 드라마도 드물었지만 <피고인>은 여러모로 적지 않은 문제들을 남긴 드라마였다.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시청자들의 혹평도 늘어갔다는 건 그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애초에 고구마를 통해 시청자들의 감정을 억압함으로써 시청률을 겨냥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 제대로 된 엔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애초 사이다 엔딩은 고구마 전개의 끝에 보상처럼 주어질 것처럼 여겨진 환상이었을 지도.

‘역적’, 초반의 속도감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MBC 월화드라마 <역적>은 어느새 반환점을 돌았다. 전체 30부작 중 15부가 지나간 것.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홍길동(윤균상)의 비상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앞부분의 대부분을 아모개(김상중)라는 길동의 아버지의 존재감이 채워 넣었고, 이제 겨우 홍길동이 활빈정의 수장이 되었지만 아직 각성하지 못하고 왕 연산군(김지석)의 뒷배를 봐주는 건달놀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역적(사진출처:MBC)'

사실 이런 느림보 전개가 되리라고는 <역적>의 초반만 해도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길동 아버지 아모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 전개가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참봉을 죽이고 각성해 노비 처지에서 벗어나 익화리에서 터전을 만들었지만, 충원군(김정태)을 뒤에 업고 복수하는 참봉부인(서이숙)에 의해 익화리 사람들과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그 상황까지가 숨 가쁘게 진행된 바 있다. 

그런데 길동이 충원군에게 복수를 하고 나서 내관 김자원(박수영)을 매개로 연산과 관계를 맺는 이야기는 너무 느슨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아모개의 죽음을 지나치게 긴 분량으로 잡아넣은 지난 회에서부터 느껴졌던 부분이다. 물론 아모개라는 캐릭터의 존재감이 그만큼 컸다는 걸 방증하는 일이겠지만 드라마가 앞으로 나가지 못함으로써 긴장감이 흐트러진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연산이 금주령을 내리고 그걸 이용해 돈을 모아 다시 연산에게 바치는 그 연결고리에서 그나마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 유일한 인물은 김자원이다. 한편으로는 홍길동을 위험인물로 바라보면서도 또한 이용하려는 듯 보이는 이 속을 알 수 없는 내관의 태도가 아니었다면 이 한 회 분량의 이야기는 너무 심심할 수 있었다. 어째서 초반 그 좋은 설정과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를 발견하기 쉽지 않은 걸까.

길동을 중심으로 활빈정 사람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건 이 드라마가 자칫 너무 분위기만 잡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순수노비혈통의 애기장수라는 홍길동에 대한 좋은 재해석을 담아 놓고도 어째서 이런 외관에만 집중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드라마의 힘은 긴장감을 놓지 않는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에서 나온다. <역적>이 그토록 좋은 캐릭터와 재해석을 갖고도 시청률이 오르기는커녕 갈수록 빠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도 입소문으로 12.5%(닐슨 코리아)까지 올랐던 시청률은 이제 9,7%까지 주저앉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홍길동은 도대체 언제쯤 각성해 연산군과 대적해나갈까. 물론 그걸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이 시청자들로서는 너무나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겉멋을 부릴 일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쭉쭉 뻗어나가는 홍길동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이니.

<뉴스룸>, 손석희 앵커브리핑이 만든 울림

“적어도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언론의 위치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중간에 있으며 그 매개체로서의 역할은 국가를 향해서는 합리적 시민사회를 대변하고 시민사회에는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뉴스룸(사진출처:JTBC)'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서 손석희 앵커는 저널리즘에 대한 소신을 그렇게 밝혔다. 사실 이 이야기가 그리 특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스스로도 밝혔듯이 “교과서적인, 뻔한 얘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석희 앵커의 이 교과서적인, 뻔한 얘기가 주는 울림은 컸다. 그건 심지어 비장하기까지 했다. 지난 주말 홍석현 회장의 사임으로 불거진 대선출마설은 JTBC <뉴스룸>으로서는 소문이라고 해도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앵커브리핑을 통해 말하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공적 영역이지만 사적 영역”이기도 하다. 이것은 JTBC <뉴스룸>이 삼성 관련 사안이 불거져 나올 때마다 과연 제대로 보도를 할 것인가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던 이유다. 그 때마다 <뉴스룸>은 그런 의구심을 불식시키라도 하듯이 할 이야기를 당연히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모습은 시청자들이 <뉴스룸>에 신뢰를 갖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뉴스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객관적인 사실 보도를 해야 하는 소임을 맡고 있지만, 결국 그 뉴스를 하는 방송사는 하나의 회사이고, 그 회사는 방송을 허가하는 정치권력과 그 방송사가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광고료로 지탱된다. 그러니 정치권력이나 그 광고를 내는 광고주를 비판한다는 건 자칫 뉴스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은 어쩌면 언론인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딜레마일 것이다. 즉 언론인들이라면 손석희 앵커가 말하는 것처럼 “시민사회에 진실을 전하는 것”이 그 소임이지만, 그들 역시 자신이 속한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그저 교과서적으로 진실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딜레마에 대해 손석희 앵커는 명확한 소신을 밝혔다. “저희는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모두가 동의하는 교과서 그대로의 저널리즘은 옳은 것이며 그런 저널리즘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 존재하거나 복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그 소신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할 선택에 대해서도 쐐기를 박았다. “저나 기자들이나 또 다른 JTBC의 구성원 누구든. 저희들 나름의 자긍심이 있다면, 그 어떤 반작용도 감수하며 저희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을 지키려 애써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비록 능력은 충분치 않을지라도, 그 실천의 최종 책임자 중의 하나이며,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면 저로서는 책임자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비장하기까지 한 소신의 고백.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정답 같아 보이지만 손석희의 앵커브리핑이 어떤 울림을 만든 건 그것을 공공연하게 밝혔다는 점이다. 그것은 스스로도 밝혔듯 “저널리즘의 실천”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지금까지 <뉴스룸>의 성취가 어느 한 순간 불쑥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매번 한 걸음씩의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이준, 출생의 비밀 아닌 자신을 찾아가는 길

KBS 주말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는 일찌감치 안중희(이준)라는 연기자의 출생의 비밀이 공개됐다. 어찌 된 일인지 그의 아버지는 수원 외곽에서 아빠분식을 운영하는 변한수(김영철)였던 것. 드라마는 굳이 아버지의 존재를 알면서도 찾지 않으려 하던 안중희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아버지가 이상해(사진출처:KBS)'

드라마에서 보통의 ‘출생의 비밀’ 코드란 부모의 존재를 모르는 자식이 뒤늦게 부모를 찾게 되고 그로 인해 인생도 바뀌는 그런 이야기를 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안중희는 이런 코드를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한 연기자이고 부모가 살아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찾지 않았을 뿐. 

그런 안중희가 새삼 아버지를 찾아 나선 이유는 연기 때문이다. 그잖아도 발연기로 흑역사를 쓰고 있는 상황. 아버지와의 관계를 담은 배역을 연기해야 하는데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그로서는 제대로 배역에 몰입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오디션에서 떨어진 그는 좌절한 채 술에 취해 감독에게 전화를 해 자신이 배역을 위해 아버지까지 찾고 있다는 연기에 대한 진심을 이야기하면서 재차 오디션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 

그래서 그가 아빠분식을 찾아 아버지를 만나는 그 목적은 새삼스런 가족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연기’ 때문이라는 표면적 이유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마음을 먹게 되면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그 길이 몹시도 설레고 두근거린다. 어떤 옷을 입고 갈까를 고민하고 어떤 선물을 들고 갈까를 고민한다. 

겉으론 연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쿨한 척 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회한, 미움 같은 감정들이 저 밑바닥에 꾹꾹 눌려져 있었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을 오롯이 드러내는 건 그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진심에서 우러나는 연기를 할 때다. 그간 그의 발연기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던 이들은 그의 이런 연기에 놀란다.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안중희라는 캐릭터가 독특한 점은 그가 연기와 실제 사이에 놓여져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그건 분리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기란 실제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발연기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안중희의 연기에 대한 욕심은 자연스럽게 실제 현실을 바꿔나가는 기폭제가 된다. 그리고 그 실제의 변화는 그의 연기 또한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은 또한 <아버지가 이상해>라는 주말드라마가 여타의 주말드라마와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주말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항상 정해져 있다. 그것은 가족애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어떤 캐릭터에 입혀 다른 방식으로 전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아버지가 이상해>는 가족애를 안중희 같은 연기자가 걷는 연기의 길을 통해 전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것은 가족애를 찾는 지점이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이 드라마가 꺼내놓은 안중희의 과거사는 그래서 ‘출생의 비밀’ 코드가 아니라 ‘자신을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혹자 똑 떨어져 나와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들의 개인주의적인 삶이지만, 그래서 가끔은 우리가 나고 자랐던 그 가족이라는 본질을 잊고 사는 게 우리들이 아닌가. 그걸 찾아내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나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성장시킬 수 있는 어떤 변곡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가 이상해>가 하려는 이야기가 그저 통상적인 가족애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어떤 현실적인 공감대를 가져가는 건 안중희라는 발연기 연기자의 캐릭터가 남 이야기처럼 여겨지지 않는 부분 때문이다. 누구나 스스로 써나가는 삶의 무대에서 우리는 어쩌면 자신은 혼자라며 그 뿌리를 부정함으로써 인생의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 당당히 서서 제 삶을 제대로 연기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건 어쩌면 자신을 구성하는 그 본질들과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안중희가 앞으로 걸어갈 아버지를 향한 길이 몹시도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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