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학교>를 통해 장수원도 이원종도 찾는 것은

 

배우니까 배우세요.’ tvN <배우학교> 첫 회에 등장한 문구다. 배우는 그냥 연기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배움으로써 더 잘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발연기 논란을 겪었던 남태현이나 연기하는 것마다 로봇이라고 비아냥을 받다 아예 그게 캐릭터가 되어버린 장수원. 이제 원로급 배우지만 연기하는 즐거움을 잃었다는 이원종이나 어떻게 하면 웃길까만을 고민하다 연기의 진지함을 간과해온 유병재 등등. 이 학교에 온 출연자들은 저마다 연기에 대한 고충들을 안고 있다.

 


'배우학교(사진출처:tvN)'

배우니까 배우라는 캐치 프레이즈에 맞게 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산을 오르며 발성연습을 하고 운동장에 있는 사물들을 몸으로 표현해보기도 하며 때로는 돗자리라는 단어 하나로 대화를 나눠보기도 한다. 또 결국은 몸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중요한 연기를 위해 발레리나 김주원이 찾아와 일러주는 발레 동작들을 연습하고 표현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인 준비와 연습이 귀결되는 곳은 따로 있다. 그것은 처음 이 학교에 들어왔을 때 박신양이 던졌던 질문. 즉 연기란 무엇이며 나는 왜 연기를 하려는가 라는 그 화두다. 즉 나를 알고 그 껍질을 깨치지 않으면 연기는 그저 흉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연기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사물을 몸으로 연기하라는 박신양의 숙제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장수원이었다. ‘로봇 연기라는 소리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그는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도 제대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했다. 마음 속의 무언가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 노력해도 안되는 자신이 스스로도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무심코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놓여진 쓰레기봉지에 마음이 갔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봉지 같았다는 것.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상의 속으로 쏙 들어간 장수원은 마치 그 껍질을 벗고 나오려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을 연기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을 표현하려 하지만 무언가가 그걸 막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 선생인 박신양은 장수원에게 그가 연기한 것이 쓰레기인지 쓰레기봉투인지를 물었다. 사실 그것들은 겉과 속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들이지만 장수원은 그것들을 하나로 혼동할 정도로 겉이 단단하게 속을 감싸고 있었던 것. 장수원은 아마도 이 연기수업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연기란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일이 아니던가.

 

이원종은 노틀담의 꼽추의 꽈지모도를 연기했다. 에스메랄다를 데려와 놓고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꽈지모도였다. 그 연기를 본 동료들은 진심어린 칭찬을 해주었지만 박신양은 여기서도 질문을 그치지 않았다. 그 연기가 너무 느리게 나왔다는 것. 또 에스메랄다라는 존재를 드러내는 연기가 아니라 꽈지모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연기였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원종은 박신양의 질문에 수긍했다. 연기는 연기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대상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박신양의 지적에 이원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도록 연기를 하면서 자신에 대한 치장들이 드러내야 할 것들을 오히려 가리고 자신을 강조하고 있었던 걸 그는 명확히 깨달았다.

 

<배우학교>가 보여주는 이런 장면들은 과연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게나 중요한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배우가 아니라도 배울만한 것들이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법. 소통과 공감의 시대에 이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배우학교>가 배우가 아닌 보통의 시청자들에게도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다

<동주>, 그의 부끄러움이 시대의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사실 요즘 멀티플렉스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볼라치면 그 화려한 색감과 입체적인 연출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시간과 공간을 점핑하듯 널뛰는 편집 속에서 영화를 본 것인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동주>는 정반대다. 흑백 영화이고 영화의 흐름도 유려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본래 인물을 염두에 두고 그려낸 것이겠지만 동주(강하늘)의 어딘지 어눌할 정도로 느린 말투까지도 지금의 속사포로 쏟아내는 영화 속 대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사진출처: 영화 <동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정반대로 가는 영화가 마음을 뒤흔든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청춘과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마치 윤동주 시인에게 후대로서의 예우를 보내듯 지극히 절제된 영상으로 그 얼굴에 비춰지는 정조와 생각들을 담아낸다. 영화는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담담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가슴은 이내 먹먹해진다. 영화가 앞질러가며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으로 가리지 않으니, 그 정지된 듯한 화면 속에 동주의 눈빛 하나, 물기하나 없이 마른 입술, 흑백으로 처리되어 핏기는 알 수 없으나 투명해질 정도로 창백한 얼굴의 음영은 그대로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든다.

 

강하늘의 목소리로 다시 읽혀지는 윤동주의 시는 영화를 통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너무 유명해 흔해져버린 서시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같은 구절이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 동주의 시선과 겹쳐지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삼 의미를 전해준다. 영화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두 가지 화두는 청춘부끄러움이다.

 

영화 속 윤동주는 그의 평생의 지기이자 경쟁자이자 사촌이었던 송몽규(박정민)와는 사뭇 다르다. 몽규가 당대 일제에 대항하던 행동파였다면 동주는 스스로 회고하듯 그의 그림자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시로 숨어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란 본래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진실 된 시를 쓴다는 건 그가 서시를 통해 다짐하듯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인 동주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걸어간 것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과 마주쳤을 때 첨예한 갈등과 마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동주가 살았던 일제 강점기는 그래서 일본의 제국주의라는 현실이 그에게 부끄러운 삶을 용납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청춘은 있었고, 청춘은 언제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지금의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동주>는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에도 작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땅의 무고한 청춘들은 모두가 그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현실이 그들을 바람에 스치우게 하고 있을 뿐.

 

바람에 맞서 서 있는 나무의 그 격렬한 고통은 스스로 항변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음으로 해서 바람의 존재를 알린다. 동주라는 존재가 그렇다. 그는 당대의 현실 앞에 오롯이 부끄럽지 않게 서 있었기 때문에 그 혹독했던 현실의 부조리를 우리 앞에 드러냈다. 그리고 동주는 그 한 세기를 건너 힘겨운 현실 앞에 괜찮다는 듯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버텨내고 있는 지금의 청춘들과 겹쳐진다. 비록 힘겨워졌지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현실이 부끄러운 것이니. <동주>가 지금의 청춘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쿡가대표>의 강호동, 완벽한 조합에 빠진 한 조각

 

JTBC <쿡가대표><냉장고를 부탁해>의 글로벌 버전 같은 느낌이다. JTBC<비정상회담>의 성공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확장시켰던 것처럼, <쿡가대표><냉장고를 부탁해>를 국가 대항전으로 확장시켰다. 그간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15분 요리 대결을 선보이며 대결했던 셰프들은 이제 국가 대항전 속에서 한 팀이 되어 타국의 요리사들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쿡가대표(사진출처:JTBC)'

우리 팀의 장점은 15분 요리 대결을 여러 차례 하면서 갖게 된 경험일 것이지만 타국의 요리사들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있다. 홍콩에서 벌어진 첫 대결에서 주방이 낯선 최현석 셰프는 당황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크레페의 농도를 맞추지 못해 다시 반죽을 하기도 했고, 자신이 놓은 밀가루가 어딨는지 찾지 못해 당황해하기도 했다. 반면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로 살린 홍콩 요리사는 여유롭게 두 가지 요리를 선보이며 첫 대결에서의 승리를 가져갔다.

 

흥미로운 건 <쿡가대표>가 가진 출연진들의 조화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부터 확장해 나간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여기 참여한 이연복, 최현석, 샘킴, 이원일의 조합은 완벽하다. 요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을 잘 알고 있어 프로그램이 어디서 흥미로워지는지 그 포인트를 정확히 살려낸다. 연장자이자 우리 팀의 대표인 이연복 셰프는 상대팀 대표와 악수를 하면서 긴장감을 높이고, 최현석 셰프는 그 와중에도 허세를 보이다가 또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프로그램을 쥐락펴락한다. 샘킴의 온화한 미소는 프로그램에 부드러움을 더해주고 이원일은 자신이 막내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국가대항전에 맞게 톤이 한층 올라간 김성주의 해설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여기에 그와 오래도록 호흡을 맞춰온 안정환과의 조합이 빛을 발한다. 김성주가 해설로 토스하면 안정환은 역시 스트라이커답게 그것을 웃음의 골로 연결시킬 줄 안다. 딸기 소스로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홍콩측 요리사에게 딸기 아가씨라고 슬쩍 건드리기도 하고, 최현석이 크레페를 만들다 실수하는 장면에서는 공을 받았는데 밟고 넘어진 격이라고 해설을 단다.

 

국가대항전이니 생길 수밖에 없는 언어장벽을 해결해주기 위해 투입된 헨리의 역할도 명확하다. 미모의 홍콩 레스토랑 대표에게 다가가 관심을 표하기도 하고, 마지막에 판정단들이 선택을 하는 순간에도 적절한 멘트와 농담으로 긴장감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헨리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의 출연자가 통역으로 자리해 있다는 건 통역사가 들어와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강호동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초에 <쿡가대표>라는 프로그램이 소개될 때만 해도 마치 강호동의 프로그램처럼 얘기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쿡가대표> 첫 회에서 강호동이 한 역할이란 처음 출연자로 소개될 때 이연복 셰프의 식당에서 안정환과 요리 대결을 벌이는 장면뿐이었다. 홍콩에 가서는 아예 분량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아마도 다른 출연자들이 모두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다져진 팀워크가 있고 그래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분명한 반면, 강호동은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 무엇인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먹는 역할도 아니고 요리를 하는 역할도 아니며 그렇다고 중계를 해야 될 역할도 아니다. 그러니 마치 게스트가 된 것처럼 간간히 몇 마디 던져 넣는 것이 고작일 수밖에.

 

어째서 강호동 같은 괜찮은 예능 선수를 데려다놓고도 그 역할이 불분명하게 되어버린 걸까. 과연 강호동은 이 탄탄한 조합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낼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제작진이 강호동의 어떤 특별한 위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빠져 있는 이 마지막 한 조각을 잘 맞춰 넣는 것은 어쩌면 <쿡가대표>의 화룡점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치인트>, 왜 하필 고슴도치 세대의 사랑을 그릴까

 

고슴도치의 사랑이다. 누군가 다가서면 잔뜩 가시를 세우며 경계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마저 찔리게 하는 그런 사랑. tvN 월화드라마 <치즈 인 더 트랩>의 유정(박해진) 이야기다. 홍설(김고은)에게는 그토록 다정할 수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차갑고 때로는 그 치밀함에 두렵기까지 한 존재 유정.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가 없다는 홍설의 마음처럼 시청자들 역시 그가 왜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는지가 못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치즈 인 더 트랩(사진출처:tvN)'

백인호(서강준)와 있었던 과거사를 홍설에게 털어놓는 유정의 이야기에는 왜 그가 그토록 가시를 세우며 살아야했는가에 대한 이유가 들어 있었다. 관계 장애를 겪고 있는 유정이 유일하게 믿고 있던 백인호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던 것. 게다가 아버지가 백인호를 입양하려고 하자 유정은 다른 친구들을 이용해 그가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유정의 이야기는 그가 지금껏 해온 이상한 행동들, 때로는 너무 과해서 폭력적이라고까지 느껴지게 하던 그 행동들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것은 공격성이 아니라 거꾸로 자기 보호 본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무표정 역시 차갑게 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안간힘처럼 느껴진다. 친구처럼 다가왔지만 결국은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사람들. 자신의 아버지조차 자신을 믿지 못하고 친구들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이런 과한 자기 보호 본능을 만들어낸 큰 상처다.

 

홍설 앞에서 드디어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유정은 한 마리의 상처 입은 고슴도치였다. 다행스러운 건 그 유정 앞에 홍설이라는 마치 그의 모든 걸 끌어 안아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홍설이 유정을 끌어안고 많이 좋아 한다고 털어놓는 장면은 그래서 아프면서도 아름답다. 이상한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존재가 심지어 가시를 세우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끌어안아줄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니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치즈 인 더 트랩>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일 것이다. 유정은 홍설에게 넌 처음부터 다른 사람하곤 달랐다고 말한다. 사실 홍설은 처음 유정 같은 완벽해 보이는 선배가 자신에게 사귀자고 할 때 도대체 왜 자신인가에 대해 의아해했었다. 하지만 유정이 홍설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그런 그를 끌어안는 홍설의 모습에서 사랑이란 그런 겉면으로 드러나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서로의 가시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유정이 바랐던 사랑이니 말이다.

 

그런데 왜 <치즈 인 더 트랩>은 유정 같은 상처투성이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는 것일까. 그 이중적인 캐릭터가 갖는 멜로드라마에서의 매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또한 작가는 작금의 젊은 세대들이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상처들과 그로 인해 고슴도치처럼 자기 보호 본능으로 가득해진 그들 세대의 아프지만 절절한 사랑법을 얘기하고픈 것은 아닐까. 친구조차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경쟁적인 현실을 살아오며 그들은 어쩌면 모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던 그들에게 가시를 뛰어넘는 사랑은 구원이 되기도 할 것이다. 유정을 끌어안아주는 홍설이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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