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같은>, 심지어 원작과 정반대의 영화라니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는 현직 연예부 기자인 이혜린 기자의 동명의 자전적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이 소설은 열정같은 소리를 해대며 사실은 갖가지 기레기짓으로 제 밥그릇을 챙기는 스포츠지 연예부 기자의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작가 스스로는 반성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런 원작의 메시지는 영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의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그 주제의식이란 다름 아닌 대중들이 흔히 기레기라고 부르는 이들도 나름대로의 애환과 직업의식은 있고, 그것 역시 밥줄이 달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여러 모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이야기구조와 유사하다. 인턴기자로 입사한 도라희(박보영)<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앤 헤서웨이)처럼 보이고 그녀를 압박하는 하재관 부장(정재영)은 미란다(메릴 스트립) 편집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은 뒤로 갈수록 <미생>의 인물들로 바뀌어간다. 즉 도라희는 장그래(임시완)처럼 보이고 하재관은 오과장(이성민)처럼 보이는 것.

 

하재관이란 인물에 대한 동정적 시선을 만들어 언론 현실의 문제를 밥줄의 문제로 슬쩍 덮어버리자 영화는 진지한 문제제기보다는 발랄한 코미디를 따라간다. 그리고 사실 악이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는 해도 누군가의 사생활을 캐고 그것을 자극적으로 만들어내며 나아가 찌라시를 활용하기까지 하는 그 언론 자체와 그걸 만들어내는 자본의 경쟁논리에 있지만, 영화는 엉뚱하게도 한 기획사의 대표를 악의 축으로 세워놓는다.

 

이렇게 되자 내부의 문제는 가려지고 대신 외부의 강력한 적과 싸워나가는 기자정신(?) 이야기로 포장된다.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제목이 가진 시니컬함은 사라지고 오히려 주인공이 마치 CSI처럼 밤새워 정황들을 모아 기사를 작성하는 열정이 부각된다. 그리고 그 열정은 원작과는 너무나 다른 정식 기자증이라는 훈훈한 결과로 이어진다. 내부 고발의 이야기가 힘겨워도 살만하고, 더러워도 그것이 먹고 살기 위함이라는 포장으로 채워지면서 원작의 메시지는 완벽하게 뒤집어진다.

 

이러한 훈훈한 성장담에 박보영 캐스팅은 아마도 최적이었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순수한 이미지의 연기자가 바로 박보영이 아닌가. 그러니 여기 등장하는 기자들의 말 그대로 먹고 살자고 하는 일들이 그녀가 인턴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상당부분 용인되게 만드는 힘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기자라고 하면 막연히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도 박보영이 하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것은 정재영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꽉 막힌 것처럼 버럭대는 캐릭터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정이 느껴지고 때로는 그 버럭 댐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이게 만드는 역할에 정재영 만한 연기자가 있을까. 부하직원을 끔찍이 챙기고, 기러기 아빠로서 살아가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하재관이 그래서 심지어 구악처럼 보이기보다는 한 명의 가장이자 피해자처럼 보이게 된 건 정재영이라는 연기자의 이미지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어째서 이처럼 지옥 같은 경험을 담았던 원작이 훈훈한 직장생활 성공기로 변신하게 됐던 걸까. 물론 그것은 장르적으로 경쾌한 코미디가 훨씬 경쟁력이 있다 여겨졌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원작을 뒤집어 그저 웃고 넘기기엔 어딘지 아쉬움과 씁쓸함이 남는 리메이크가 아닐 수 없다. 그것 역시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각색되고 포장된 것일 테니 말이다. 만일 연예부 기자들의 현실을 리얼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면 영화보다는 차라리 원작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응팔><꽃보다>까지, 이우정 작가의 놀라운 존재감

 

한 매체가 제기한 이우정 작가 부재설은 사실무근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 사안이 말해주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우선 이우정 작가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이 상상 이상이라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금껏 참여해온 작업들은 놀라울 정도로 큰 성과를 가져왔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네 방송사에 새로운 획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12>이 지금껏 KBS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리하고 있고, <꽃보다> 시리즈는 물론이고 <삼시세끼>까지 연달아 대박을 터트리는 놀라운 성과가 이어지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응답하라> 시리즈는 예능 인력들이 드라마 판에 들어와 오히려 드라마에 신선한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우정 작가 부재설 기사가 나오고 나서 대중들이 보인 반응은 <응답하라1988>에 대한 걱정과 우려였다. 그만큼 이우정 작가를 시청자들은 믿고 보는 작가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응답하라1988>은 속편은 본편을 넘지 못한다는 속설 자체를 뒤집고 매회 최고의 기록들을 경신중이다. 반응도 그 어느 때보다 좋다. 예능적인 요소보다 드라마적인 요소를 더 만이 발견할 수 있는 <응답하라1988>은 그래서 이우정 작가의 드라마판에서의 지분 또한 확연히 넓혀놓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모든 성취들을 이우정 작가 한 사람의 공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것은 혼자가 아니라 팀이 이룬 성취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우정 작가를 중심으로 나영석 PD, 신원호 PD, 신효정 PD 같은 PD군들이 있고, 그 작가들 중에도 최재영 작가나 김대주 작가는 물론이고 <응답하라> 시리즈를 함께 해온 다수의 작가군들이 존재한다. 여기에 이 모든 걸 진두지휘하고 관리해주는 이명한 본부장까지.

 

한 사람이 아니라 막강한 사단이 함께 이룬 성취라는 점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들의 일들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일종의 시스템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나영석 PD<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를 연달아 진행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시스템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이우정 작가도 작가군들을 통해 이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니 애초에 이우정 작가 한 사람의 공백이 있다고 해도 큰 차질은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안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건 지금껏 프로그램에 대한 주목이 PD들에게 집중되었던 것과 달리, 작가에게 시선이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꽃보다> 시리즈나 <삼시세끼>, <응답하라> 시리즈의 전면에 나서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나영석 PD와 신원호 PD였다. 하지만 이우정 작가 부재설이 나오자 즉각적으로 <응답하라1988>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예능에서부터 드라마까지 너무 많은 의존도에 대한 걱정이 쏟아진 건 프로그램에서 작가의 존재감을 새삼 느끼게 만든다.

 

물론 드라마에 있어서 작가들은 PD들보다 더 주목받는다. 거의 작가의 의지에 의해 드라마가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예능은 다르다. 예능 작가들은 PD들만큼의 지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그만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능에서부터 드라마로 차츰 차츰 영역을 확장해온 이우정 작가는 지금 이러한 예능 작가에 대한 위치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가는 험난한 길은 그래서 수많은 예능 작가 후배들에게는 중대한 이정표로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응답하라> 시리즈가 드라마의 제작방식을 답습하는 드라마도 아니고, 또 보통의 드라마 공식을 따르는 드라마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예능의 유전자를 가진 나무가 드라마라는 텃밭에서 쑥쑥 자라난 새로운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의 연속성을 따라가기보다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별로 구성되는 형태는 시트콤이나 콩트 같지만 그 심도가 드라마 이상이라는 점이 <응답하라> 시리즈에 우리가 매료되는 이유다. 예능 작가가 아니라면 시도되지도 또 나오지도 못했을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이우정 작가 부재설 해프닝은 그 자체의 사안만이 아니라 나아가 예능작가에 대한 새로운 존재감을 확인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우리는 그 예능의 경험치들이 하나하나 쌓임으로써 그 경계를 뚫고 나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낸 작품을 <응답하라1988>에서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 행보와 성취는 향후 예능 작가에 대한 새로운 위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오마비>, 소지섭, 신민아 아니었으면 어쩔 뻔

 

예뻐지고픈 욕망, 잘 빠진 몸매, 멋진 훈남들. KBS <오 마이 비너스>가 포인트로 잡고 있는 건 여성들의 로망이다. 강주은(신민아)은 거기에 딱 맞는 캐릭터. 한 때는 대구비너스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고대의 비너스처럼 살이 쪄버려 오래도록 사귀어온 남자친구에게 차이기까지 한 인물. 게다가 가족도 영 그녀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아이를 가졌다며 살림을 차리려는 남동생에게 가게라도 차리라며 통장을 내미는 그녀다. 요즘의 시청자들이 완벽한 스펙과 외모와 직업을 갖고 있는 인물보다는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는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끼고 몰입할 수 있어 한다면, 그녀는 거기에 어느 정도 부합한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오 마이 비너스(사진출처:KBS)'

역변한 몸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린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시청자들의 로망이 분명하다. 그녀는 요즘처럼 취업이 어렵다는 시대에 변호사씩이나 되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다. 게다가 살이 쪘다고는 해도 한 때 대구비너스의 본판이 어디 갈 것인가. 아마도 신민아라는 배우가 그걸 연기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살이 쪄 이중 턱이 된 얼굴에서도 귀염성이 묻어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로망이 되는 건 그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훈남들 때문이다. 세계적인 헬스 트레이너 김영호(소지섭)는 이 시대의 여성들이 선망하는 요소들을 거의 다 갖춘 인물이다. 훈훈한 외모에 잘빠진 몸매, 알고 보면 재벌2세이고 그러면서도 약자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물론 그 따뜻한 마음을 짐짓 아닌 척 차갑게 포장하는 차게 굴기의 면까지 가졌으니 완벽하지 않은가. 이런 인물이 강주은 옆에서 헬스 트레이너를 빙자해 먹는 것에서부터 생활습관, 운동까지 모든 걸 관리해준다... 이런 로망이 어디에 있을까.

 

김영호만이 아니다. 그를 보좌하는(?) 장준성(성훈) 같은 격투기 선수는 그 잘 빠진 몸과 저돌적인 동작만으로는 시선을 사로잡고, 김지웅(헨리)은 늘 유쾌하고 친절해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인물이다. 게다가 전 남자친구인 임우식(정겨운)은 수영선수 출신에 잘 나가는 가홍 VIP센터장이다. 그는 잠깐 강주은의 친구였던 오수진(유인영)에게 한눈을 팔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강주은 쪽에 남아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이런 우글우글한 훈남들 속에서 집중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강주은이란 캐릭터가 로망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알다시피 이런 인물 캐릭터 설정과 관계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때로는 너무 상투적이라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강주은의 아래 층에 사는 그녀의 스토커 남자는 사실 이런 상투성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스토커가 그녀를 따라다니고 심지어 집안까지 들어오는 상황은 긴박감을 만들어주지만 그 설정은 누구나 다 알 듯 김영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일회적인 장치에 불과하다. 그것도 너무 상투적인.

 

또한 세계적인 헬스 트레이너인데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재벌 2세 김영호가 어째서 강주은에게 이렇게 친절하고 점점 마음을 빼앗기는지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드라마는 그저 그가 약자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퉁치고 넘어가지만 아무리 봐도 개연성이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개가 허용되는 건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강주은에게 시청자들이 어떤 동질감과 몰입감을 갖고 빙의된다면 개연성과 상관없이 김영호 같은 멋진 남자와의 로맨스를 꿈꿀 수도 있을 게다. 물론 현실성은 없다. 그러니 한 발 물러나 바라보면 이 드라마가 가진 허점들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래서 이렇게 한 발 물러나지 못하게 계속 몰입하게 만드는 일인데, <오 마이 비너스>는 적어도 거기에서는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름 아닌 소지섭과 신민아다. 이 배우들이 주는 로망과 판타지는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의 몰입을 만들어내고 있다. 적어도 그들이기 때문에 개연성 부족 정도는 넘어서 푹 빠져들게 만들고 있는 것. 그러고 보면 <오 마이 비너스>는 캐스팅이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싶다. 그 자리에 소지섭과 신민아가 아니었다고 상상해보라. 이런 판타지에 몰입할 수 있었겠는가.



<육룡이>, 박혁권이 만들어낸 악역의 품격

 

이토록 모스트스러운 악역이라니.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육룡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활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악역들이 있다. 이른바 도당3인방이라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 그들이다. 고려 말 혼돈기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전횡을 일삼는 이들이 전제되기 때문에 육룡이라는 시대의 영웅들이 훨훨 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 구조상 이들 악역은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세 명의 악역이 모두 강렬한 저마다의 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인겸은 정치력을 갖춘 악역이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천호진)의 약점을 잡아 무릎 꿇린 바 있고 그의 정계 진출을 막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홍인방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본래 성균관의 스승이었지만 모진 고문 앞에 스스로를 포기하고 오히려 개인적인 욕망을 터트리는 인물. 해동갑족의 수장에게 대놓고 협박을 하는 모습에서 소름돋는 악역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세 명의 악역 중 단연 주목을 끄는 캐릭터가 길태미일 것이다. 삼인방 중 무력을 상징하는 그는 삼한제일검이라 불리며 초절정의 무공을 갖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는 행동이나 외모, 말투는 여성스럽기 그지없다. 진한 화장에 말할 때 목소리나 손동작은 영락없는 여성의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부드러움이 칼을 뽑을 들 때 더 섬뜩한 느낌을 준다.

 

해동갑족 전원의 서명이 들어간 상소를 이방원(유아인)이 가져옴으로써 최영(전국환) 시중이 주상의 윤허를 받아 이뤄진 길태미의 추포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어떤 사극 속 악역들보다 압도적이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배가 고프다며 국밥을 먹는 장면은 길태미의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준다. 평상시에는 전혀 무공을 할 것 같지 않는 듯한 허술함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오히려 고수의 면면으로 느껴지는 그런 캐릭터.

 

그가 저잣거리로 걸어 나올 때 그를 본 백성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마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같다. 그만큼 그 캐릭터가 가진 살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왠지 길태미에게서는 인간적인 면모도 느껴진다. “어이 이인겸 따까리!” 라고 부르자 그가 분노하는 건 그 역시 스스로를 세우려 노력했지만 실상은 이인겸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걸 자인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돈인 홍인방과 헤어지면서 그래서 사돈 때문에 재밌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자신은 할 것 다 해봤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끝까지 손에 쥔 걸 놓지 않는 홍인방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땅새(변요한)와 대결을 하게 되자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에서는 무인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난다. 마치 최고의 무인에 의해 마지막을 장식하기를 바랐다는 듯이.

 

여성스러움과 난폭함을 동시에 갖춘 이 이중적인 캐릭터가 제대로 구현된 건 다름 아닌 박혁권이라는 연기자의 공력 덕분이다. 지금껏 어딘지 찌질하거나 소심한 중년의 모습을 자주 보여왔던 그지만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악역 길태미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남겨놓았다. 길태미는 시쳇말로 모스트스러운 악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박혁권은 악역의 품격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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