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 연기, 연출 뭐하나 만족되지 않는 '해품달'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의 뜬금없는 장면 하나. 자신의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처인 민화공주(남보라)임을 알고 허탈해 하는 허염(송재희)에게 갑자기 자객들이 나타난다. 이 자객들은 윤대형(김응수)측이 보낸 것이라는 암시만 있을 뿐 누가 보낸 것도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보낸 이유조차 애매하다. 애초부터 이렇게 자객을 보내 죽일 거였다면 굳이 그에게 민화공주가 자신의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편지로 보낸 이유는 뭔가. 이 스토리는 어딘지 매끄럽지가 못하고 억지스러운 구석이 많다.

즉 허염이 모든 사실을 알고 민화공주를 질책하는 장면이 필요한데, 그 사실을 알리는 방법으로서 윤대형을 활용한 것이라고밖에 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뜬금없는 장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허염을 해치려는 자객들 앞으로 갑자기 설(윤승아)이 등장해 그들을 가로막는다. 결국 자객들과 싸우다 칼에 맞고 쓰러지는데, 또 여기서 느닷없이 운(송재림)이 나타나 나머지 자객들을 모두 물리친다. 물론 운의 갑작스런 등장은 후에 훤(김수현)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지지만 이것 역시 훤이 왜 그런 지시를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럴 듯한 이유는 별로 없다.

즉 이 장면은 허염 앞에서 설이 죽는 장면이 필요하고 또 그러면서도 허염은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운을 등장시킨 것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이런 식의 스토리 전개는 결말 부분 이 모든 드라마의 사건들이 해결되는 방식이다. 물론 훤이 양명군(정일우)을 통해 윤대형의 역모를 뒤집으려 계획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서 윤대형이 죽고, 그 순간에 중전(김민서)도 스스로 목을 매고, 양명군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식의 해결은 너무나 급작스럽고도 쉬운 선택이 아닐까. 결국 문제의 해결을 작가가 나서서 했다는 인상이 짙다. 이것은 저 그리스 비극에서 좋지 않은 극으로 지목되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갑작스럽게 신이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하는 방식)'를 떠올리게 한다. 캐릭터들이 스토리 속에서 저 스스로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마치 작가가 체스놀이를 하듯 이리 던지고 저리 움직여 스토리를 이어가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취약점으로 지목되는 것은 연기력 부족이다. 설을 연기한 윤승아는 죽는 순간에서조차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설픈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연기도 연기지만, 이 순간에 지루하게 던져지는 긴 대사로 인해 더더욱 몰입이 어려워졌다. 죽기 전에 할 말을 다 하는 이런 대사처리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대왕대비 윤씨(김영애)에서도, 또 양명군의 죽음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했는데, 주로 과거 신파극에서나 많이 쓰던 방식이다. 가뜩이나 연기 몰입이 안 되는 상황에 대사까지 이러니 발연기라는 얘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연기력에 대한 문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중견연기자들을 빼고는 대부분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물론 아역 여진구와 김유정 그리고 김수현은 예외다.

그렇다면 연출력은 어떨까. 아역들이 연기하던 초반에는 판타지와 멜로가 뒤섞이는 괜찮은 장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뒤쪽으로 갈수록 어딘지 어설퍼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파업의 여파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모가 벌어지는 장면에서 고작 수십 명의 병사가 등장하는 건 좀 너무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연출은 볼만한 구석들도 많았지만, 끝없이 옥의 티가 발견되는 등(시청자들은 그래도 이것조차 귀엽게 받아들이는 아량을 베풀었지만) 허점이 많이 드러났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해를 품은 달'의 미스테리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생겨난다. 대본이 앙상하고, 연기가 받쳐주지 않는데다가, 연출도 실수투성이였는데 어떻게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던 것일까. '해를 품은 달'은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뿌리 깊은 나무'에 훨씬 미치지 못했고, 퓨전사극의 참신함에 있어서 '바람의 화원'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청춘 멜로사극의 풋풋함에 있어서도 '성균관스캔들'을 넘어서지 못했다. 주제의식이 불분명한 이야기는 너무나 느슨했고, 좀 더 풋풋했어야 할 멜로의 정조는 신파조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그 여타의 작품들이 도달하지 못한 40%라는 시청률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은 거꾸로 40%라는 시청률에 우리가 경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40%의 시청률을 낸다고 해서 그만한 완성도의 작품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꽉 짜여진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뿌리 깊은 나무'의 시청률이 20% 언저리에 머물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해를 품은 달'의 40%라는 수치가 만들어낸 열광에는 다분히 착시현상이 있었다는 얘기다. 드라마 시청률이란 주지하다시피 중장년층의 시청률을 의미한 지 오래다. 따라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작품이라고 해서(그래서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그 드라마의 질이 높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해를 품은 달'이 어떻게 중장년층의 입맛에 맞아떨어졌을까. 어쩌면 이 기묘한 사극의 성공은 바로 이 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사극이라는 친숙한 장르가 갖는 착시현상이 그 한 가지였을 것이고, 사실은 중장년층에 익숙한 신파적인 멜로면서도 그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낮았기 때문에 어딘지 세련되어있다는 착각을 주면서 동시에 '청춘'에 대한 향수를 불러왔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요인일 것이다. 기실 중장년층들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콘텐츠(신파, 느린 전개, 사극)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구닥다리처럼 보이지 않는 포장(청춘멜로, 아역, 젊은 연기자)이 아닌가. 중장년층은 이제 그들 세대가 나와 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젊은 세대들이 전하는 그들이 젊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에 매료되곤 한다. 이것은 최근 복고를 내세우는 대부분의 트렌드들(예를 들면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복고풍 영화들 같은)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해를 품은 달'의 성공은 바로 이 기획의 성공이지 그것을 작품의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40%라는 시청률에 경도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양적인 것이 질적인 것을 담보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를 품은 달'에 반짝이는 순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지루한 전개와 몰입을 방해하는 연기와 실수 연발의 연출은, 그 순간들마저 상쇄시켜버린다. 어쩌면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완성도는 떨어지는 '해를 품은 달'의 미스테리는 점점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시청률 추산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라디오스타', 누가 나와도 되는 이유

'라디오스타'(사진출처:MBC)

현재 토크쇼는 '게스트쇼'가 되었다. 게스트로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 재미의 편차도 크고, 시청률의 등락 폭도 크다. '힐링캠프'는 박근혜, 문재인이 나왔을 때만 해도 시청률이 급상승했지만 이민정, 이동국, 최민식이 나왔을 때는 다시 시청률이 뚝 떨어졌다. 그러다 최근 차인표가 나오자 다시 시청률이 반등했다. 이런 사정은 '놀러와'나 '승승장구'도 마찬가지다. '놀러와'는 '세시봉' 이후로 끊임없는 추락을 경험했는데 '기인열전'을 했을 때 잠깐 반등했을 뿐이었다. '승승장구' 역시 MC스페셜로 '이수근편'을 했을 때의 주목도와 다른 게스트들의 주목도 차이는 크게 나타났다. 결국 현재의 토크쇼들의 성패는 거의 대부분 '섭외'가 관건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토크쇼들이 일제히 '게스트 중심'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약간의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현재의 토크쇼들은 '게스트를 편안하게 모시는' 분위기다. 그러니 게스트 자체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차인표처럼 웃음과 감동, 의외의 발견까지 해줄 수 있는 예능의 블루오션 게스트가 등장할 때와 그렇지 않은 보통의 게스트가 나왔을 때는 편차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게스트에 따른 편차가 없는 토크쇼도 있다. 바로 '라디오스타'다. '라디오스타'는 이제 누가 나와도 '재미있는' 토크쇼로 자리했다. 그 비결은 게스트가 아니라 호스트, 즉 MC들에 있다.

'라디오스타'를 보는 재미는 게스트들의 인생역정이나 특이한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MC들이 게스트로부터 어떻게 토크 어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콕콕 찍어서 끄집어내는가 하는 그 과정에서 나온다. 김진아, 임성민, BMK처럼 그다지 핫(hot)하게 여겨지지 않는 게스트들이 나왔을 때 김구라가 던진 첫마디는 "홍보할 게 없는 분들이기 때문에 사심 없는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타의 토크쇼들과 비교해보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홍보 포인트가 없는 이들에게서 더 과감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

외국인과 결혼했다는 그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여 출연한 이들에게 처음 만났던 이야기와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하나 둘 끌어내면서 MC들은 끊임없이 거기에 토를 달고 살을 붙인다. 김진아가 출연했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을 소개할 때 뒤에서 유세윤이 지나가는 소리로 "귀한 딸이네요."라고 덧붙이는 것으로 빵 터트리고, 엉뚱하게도 블랙호크를 몰았던 BMK의 남편에게 직업을 알선해준다며 헬기를 잘 안다는 고영욱에게 물어보겠다는 식으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라디오스타'에서는 일반 토크쇼에서는 통상적인 소개에 그치는 이름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김구라는 김진아씨의 이태리식 남편 이름을 아는 척 하다가 틀리자 "희성이시네요"라고 덧붙이고, 임성민 남편의 미들 네임이 안소니라고 하자 뜬금없이 "보수적이시네요"라고 툭 던진다. 그러자 주워 먹는 토크의 달인인 윤종신이 나서서 "개방적인 이름은 소니"라고 덧붙인다. 여기에 유세윤도 "남편의 성을 붙여 성민 엉거라고 부르냐"고 한 숟가락을 얹는 식이다. 즉 이 기묘한 토크쇼는 게스트들의 이야기만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추임새를 붙이고 엉뚱한 해석을 하고 이야기에 상상력을 덧붙이는 식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 '삼천포 토크(?)'가 갖는 매력은 토크의 내용이 아니라 그 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토크 속에서 드러나는 게스트의 반응에서 나온다. 심지어 사실과 다른 이야기로 비화되고 과장되지만, 그것을 웃음으로 받아주고 농담으로 받아치는 과정에서 게스트들의 몰랐던 매력이 끄집어내진다는 얘기다. 다른 토크쇼에도 여러 번 나왔던 이준이 유독 '라디오스타'에 나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삼천포 토크' 속에서 그만의 엉뚱한 매력이 자연스럽게 뽑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기존의 '게스트 중심 토크쇼'들은 게스트들의 삶과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으로 동력을 얻는 반면, '라디오스타'는 오히려 이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동력을 얻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게스트 편차와 상관없이 누가 나와도 된다는 얘기다.

어찌 보면 토크쇼는 그저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야기의 내용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즐거운 분위기 즉 형식이다. '라디오스타'는 물론 내용을 갖고 접근하지만, 그 내용 바깥으로 끊임없이 빠져나가려는 MC들의 '삼천포 토크'에 의해 내용 그 이상의 것을 포착하는 토크쇼다. 이 놀라운 토크쇼가 그 어떤 게스트가 나와도, 아니 심지어 홍보 포인트가 없는 게스트일수록 더 재미를 주는 이유는, 그 토크의 주도권이 온전히 MC들에 의해 쥐여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디오스타'를 통해 어떤 게스트들의 인생역정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MC들이 그 게스트들을 갖고 어떤 '삼천포 토크'를 할 것인가를 궁금해 한다. 바로 이 점이 거의 유일하게 게스트에 좌우되지 않는 '라디오스타'를 만드는 가장 큰 힘이다.


'초한지', 우리가 모가비에 열광한 이유

'샐러리맨 초한지'(사진출처:SBS)

'샐러리맨 초한지'는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이 모든 걸 덮어줄만한 한 가지를 얻었다. 바로 모가비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서형이라는 연기자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모가비라는 캐릭터는 도대체 뭘까. 악역이면서도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존재감을 차지했던 캐릭터. 이 캐릭터의 무엇이 대중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만든 걸까.

유방(이범수)이 "모가지"라고 비아냥대는 이 인물 속에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모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내적인 성취를 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빠르게 성공하려는 욕망과, 그래서 속 빈 강정처럼 허하기만 한 천민자본주의의 소비적인 성향,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하고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이코 패스적 정신분열, 그리고 결국은 욕망의 늪에 빠져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그런 인물.

모가비가 주목됐던 것은 어쩌면 지금 현재의 한국 사회가 가진 거의 모든 문제점들을 절대 악으로서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모가비는 먼저 파업과 직장폐쇄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그 경제적인 폭력의 문제를 드러내는 인물이고, 후반부에는 심지어 사람을 죽게 만들고도 법이라는 갑옷을 입고 버젓이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정의의 문제를 드러내는 캐릭터다. 경제와 사법. 지금 현재 이만큼 우리를 공분하게 하는 단어가 있을까.

코미디라는 장르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모가비가 가진 이 모든 문제들은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무너뜨리는 유방과 여치(정려원)의 복수는 그만큼 통쾌하게 다가올 수 있다. 모가비라는 거대한 한국사회의 공분을 세워놓음으로써 우리가 마음껏 비난하고 분노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복수극의 외형을 벗겨내고 나면 거기에 모가비라는 캐릭터 속에 내재된 우리네 근대사의 문제들이 드러난다. 전근대를 재빨리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속도에 집착했던 시대, 그 속도 때문에 근대화가 주창하는 진정한 개인주의나 합리성을 체득하지는 못했던 우리네 근대사. 그래서 합리성 대신 서열과 신분이라는 전근대적인 가치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 자리에 과시하듯 피어난 천민자본주의가 있었다. 모가비가 회장직에 오른 후 한 것이라고는 그 신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소비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지르게 된 범죄마저 돈으로 법을 사 덮어버리려는 모럴 해저드로 이어졌다.

모가비가 그토록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낼수록 대중들이 열광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가 권선징악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파멸될 모가비라는 인물이 한국사회의 어둠을 더 많이 껴안고 있을수록 이 이상한 복수극의 통쾌함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샐러리맨이 언뜻 보이지 않는 '샐러리맨 초한지'라는 작품이 왜 굳이 '샐러리맨'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드라마는 현재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 '초한지'가 보여주는 처세술을 가르치기보다는, 잘못된 자본주의의 파멸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카타르시스를 주는 작품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샐러리맨'들을 위안해주는 '초한지'가 '샐러리맨 초한지'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건 이 드라마의 초반부에 진시황(이덕화) 회장이 천하그룹에 들어오는 장면, 즉 직원들이 도열해 있고 마치 제왕이나 되는 듯 그 사이를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진시황의 모습이 맨 마지막 유방이 천하그룹에 들어오는 장면과 겹친다는 점이다. 누가 봐도 전근대적인 이 풍경은 그래서 드라마의 해피엔딩을 알리는 경쾌함과 동시에, 인물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는 기업 문화의 씁쓸함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것은 모가비라는 인물은 결국 정신병동에 감금되었지만, 모가비 같은 인물을 양산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암시처럼 여겨진다.

무엇보다 이 모든 위악을 모가비라는 한 캐릭터 안에서 독기어린 연기로 풀어낸 김서형이라는 배우의 공적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녀가 있었기에 모가비라는 문제적 캐릭터가 살았고, 그것이 결국 자칫 지리멸렬해질 수 있었던 이 드라마의 산만함을 깨뜨려 주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모가비라는 캐릭터와 그걸 연기한 김서형이라는 배우가 있어 그 아쉬움이 덮어지는 작품, '샐러리맨 초한지'다.


'샐러리맨 초한지', 많은 조역들이 아쉽다

'샐러리맨 초한지'(사진출처:SBS)

'샐러리맨 초한지'가 어느새 종영이다. 이제 겨우 시작일 것 같은데 벌써. '초한지'를 탐독한 시청자였다면 그 기대했던 만큼 아쉬움도 클 것이다. 원전인 '초한지'가 다루고 있는 그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상당 부분 삭제되어 있고, 그들을 통해 우리네 삶을 통찰하게 하는 깊이 역시 부족하기 때문이다(어떤 면으로는 의도적으로 깊이는 제거한 듯한 인상이 짙다). 깊이를 삭제했다면 풍자 같은 장치를 통해 현재적인 의미를 살려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중간에 팽성실업이 등장하면서 이런 기대를 갖게 만들었지만 이마저 폐업되면서 이야기는 단순한 복수극으로 흘러갔다. '초한지', 역시 드라마로는 한계가 있었던 걸까.

'샐러리맨'이라는 전제를 제목에 붙여놓은 것처럼 이 작품은 '초한지'의 샐러리맨 판 재해석으로 기획된 것일 게다. 하지만 초반에 일찌감치 유방(이범수)이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면서 샐러리맨의 느낌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중반을 넘어서 천하그룹 진시황(이덕화) 회장이 모가비(김서형)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이야기는 엄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즉 그 안에 강호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인간군상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인들에게까지 삶의 처세를 알려주던 '초한지'는 이 부분에서부터 기업 간의 암투와 개인적인 복수극으로 치달았다.

결국 모가비라는 극단적인 악역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이 드라마의 강점이면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 게다. 모가비와 그녀를 돕게 되는 항우(정겨운), 그리고 할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백여치(정려원)와 그녀를 돕는 유방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적절한 멜로구도를 반복했던 것이 이 드라마 후반부의 대부분이 아닌가. 삶의 처세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샐러리맨이라는 서민적인 포인트라도 짚어줬어야 했지만, 그 부분 역시 복수극이라는 커다란 극성 속에 빨려 사라져버렸다.

선악구도의 대결 속에서 몇몇 인물들에 집중하다보니, 본래 '초한지'가 갖고 있던 매력적인 인물들은 대부분 병풍처럼 되어버렸다. 유방이 가진 최고의 책사인 장량(김일우)과 한신은 유방의 그림자에 가려졌고, 항우 최고의 책사인 범증(이기영)은 모가비의 애인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본래 '초한지'의 재미가 이들 책사들 간의 두뇌싸움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뒤로 밀려난 책사들은 드라마를 너무 투톱 대결(유방과 항우)이라는 틀 안에 가둬놓고 단순화한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게다가 항우는 후반부에 이르러 멜로가 커지면서 이 대결구도의 전면에 나서지도 않는다(대신 모가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샐러리맨 초한지'는 드라마의 대중성을 위해서 상당 부분 타협을 한 작품이 되었다. 물론 이런 타협을 통해 뛰어난 재해석이 가능했다면 그것은 괜찮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드라마이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경쾌한 스토리 라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구도를 그려내기보다는 한 사람의 절대 악(모가비)을 세워놓고 그것에 대항하는 단순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주인공에 유독 집중하기 마련인 대중들을 염두에 두고는 책사들 같은 인물들을 주인공의 그림자에 숨겨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샐러리맨'이라는 포인트 하나만이라도 일관되게 잡으면서 갔다면 종영에 이르러 도대체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가 하는 의구심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현실적인 재해석이 빠져버린 복수극으로의 끝맺음을 향해 달려가는 '샐러리맨 초한지'는 그래서 많은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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