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YJ 사생팬 논란을 통해 봐야하는 것들

JYJ(사진출처:씨제스엔터테인먼트)

한 매체에서 입수해 공개한 JYJ의 김재중과 박유천 음성파일에는 그들이 이른바 사생팬(연예인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려고 쫓아다니는 극성팬)에게 퍼붓는 욕설이 가득했다. 심지어 폭행으로 추정되는 소리들까지 들어 있었다.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가 그 안에 들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음성파일에는 빠져 있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욕설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구체적인 이유다. 원인은 감춰져 있고 결과만 나와 있다. 그래서 얼핏 이 음성파일만 듣게 되면 (물론 막연히 사생팬들의 문제가 심각할 거라는 짐작은 하지만) 마치 김재중과 박유천의 행동이 너무 과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실제로 과한 건 있다. 욕은 할 수도 있겠지만 폭행으로 추정되는 행동은 분명 과한 것이다. 그것도 팬(?)에게.

그런데 먼저 이 '팬'이라는 말이 과연 이들에게 적합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사생팬'이란 단어는 너무나 이상하다. 팬이라면 응당 그들이 추종하는 스타에게 이로워야 할 텐데, '사생활'을 도촬하고 스토킹하는 수준이라니. 이른바 '사생택시'라고 불리는 택시를 타고 하루 종일 연예인을 쫓아다니며, 연예인의 핸드폰을 복제해 그 내역을 감시하는가 하면, 숙소까지 들어와 물건을 빼내가고, 말도 안 되는 것(심지어는 생리혈을 모아 보내기도 한단다)을 선물이라고 하여 보내기도 한다고 한다. 이걸 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따라서 팬에게 욕설을 가하고 폭행했다는 것은 이 경우에는 '사생팬'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착시현상일 뿐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스토커에게 욕을 했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그래도 팬인데..."라는 관점을 집어넣으면 본질은 흐려진다. 연예인들이 바보가 아닐 진대,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팬에게 왜 폭력을 행사하겠는가. 이른바 '사생팬'이라 불리는 이들은 심지어 공식적인 팬클럽의 팬들조차 문제로 여기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있어 팬 문화 전체가 욕을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음성파일에 빠져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연예인의 정신적인 상처다. 음성파일은 이들의 폭언과 폭력만을 보여주고 있지, 그들이 어떤 정신적인 폭력을 당해왔는지는 빠져 있다. 우리는 흔히 폭력하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인 폭력만을 먼저 떠올리지만, 수면 아래 놓여진 정신적인 폭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누군가 끊임없이 정신적인 폭력을 가했다면, 그것은 눈에 직접 보이진 않아도 물리적인 폭력 그 이상의 충격을 줄 수 있다.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면 누군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듯이, 그것이 안으로 표출되면 우울증이나 자살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음성파일 공개 자체에 빠져있는 것은, '사생팬과 연예인'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이 공개 자체가 사생팬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하든, 개인이 하든 파파라치식의 사생활 폭로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언론은 물론 여기에 '알권리'라는 애매한 포장을 한다. 하지만 누가 알고 싶어 했는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데 눈앞에 들이밀면서 대중을 위한 것이라 말하는 것, 이것 또한 폭력이 아닐까. 알려 주려면 제대로 앞뒤 사정을 균형 있게 알려주던지.

김재중과 박유천의 음성파일 속에 담겨진 폭력적인 언사나 그런 상황은 물론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와 상관없이 이들은 거기에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정황을 만들어낸 사생팬이라는 존재의 문제 역시 스토킹의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또 그것이 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알권리'라며 폭로하는 언론이 행하고 있는 폭력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음성파일의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 이면에 담겨진 많은 것들을 끄집어내고 공론화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창궐하는 사생팬들과, 그것에 상처 입은 연예인들의 불상사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폭로하는 무수한 파파라치 기사들과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기대감의 차이가 만든 다른 결과

'1박2일'(사진출처:KBS)

새 '1박2일'이 시작되기 전, 가장 주목받은 새 멤버는 단연 차태현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차태현은 말 그대로 예능 고수니까. 무언가를 억지로 짜거나,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름에 내맡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차태현은 귀찮으면 귀찮다고 얘기하고,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또 맘에 안 들면 그게 PD라도 대놓고 맘에 안 든다고 말하는 캐릭터다. 그 자연스러움은 리얼 예능에서의 그의 기대감을 높이는 가장 큰 요인이다.

실제로도 차태현은 새 '1박2일'의 첫 방에서부터 거의 이물감이 없는 새 멤버로 자리했다. 그 스스로도 말했지만 어느 프로든 늘 함께 했던 멤버 같은 느낌을 '1박2일'에서도 보여줬던 것. 오프닝을 찍으러 여의도로 갈 줄 알고 일찍부터 머리를 하고 나름 코디(어린이 같은)를 한 그가 엉뚱하게도 인천 여객선 터미널로 가는 상황에서부터 차태현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는 끊임없이 투덜대면서 어딘지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1박2일'과 나는 잘 안 맞아"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게임조차 귀찮아하다가도 자기가 이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벌칙 주는 일에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가 특유의 솔직함을 반전(?)으로 활용하며 웃음을 자가 발전시킬 수 있는 캐릭터라는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차태현이 이처럼 발군의 예능감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더 주목받게 된 인물이 있다. 바로 새로운 '1박2일'이 첫 여행을 떠나기 전, 새 멤버들 중에서 가장 걱정과 우려를 많이 갖게 했던 김승우다. 김승우는 배 안에서 '서서 가기, 앉아 가기, 누워 가기'를 놓고 벌인 게임에서 의외의 열성을 보이다 천정에 머리를 부딪치는 몸 개그(?)를 보여줬고, 도시락을 놓고 벌인 닭싸움에서도 은근 의욕 과잉의 캐릭터를 드러내기도 했다.

차태현보다 김승우가 더 주목된 이유는 기대감의 차이 때문이다. 차태현은 그 기대한 만큼의 예능감을 보여주었지만, 김승우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드러냄으로써 더 주목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몇몇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지만, '1박2일'의 다른 멤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기대감과 반전은 반비례한다. 즉 기대감이 높을수록 반전효과는 적고, 기대감이 낮을수록 반전효과는 크다. 따라서 이수근처럼 기대감이 높은 개그맨이 빵빵 터트리는 것보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김승우가 한 번 터트리는 의외의 웃음이 파급효과가 더 크기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새 멤버들은 자신들의 '1박2일' 부적응이 오히려 하나의 기회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성시경이나 주원에 거는 기대감은 우리가 이수근이 김종민에 거는 것보다 그다지 크지 않다. 따라서 이 빈 기대감을 어느 순간 채워준다면 오히려 더 주목받는 상황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억지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상황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진정성이 결국 재미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1박2일'을 '발견의 예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연스러우면서도 반전을 주는 캐릭터의 발견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한 '1박2일'은 그런 면에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1박2일'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게임을 하고 그걸 통해 멤버들이 친해지며 그 안에서 캐릭터를 발견하려는 건 나쁘지 않은 시도지만, 그것이 너무 뜬금없이 진행되는 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것은 게임을 하기 전, 일종의 캐릭터들 간의 관계(이를테면 갈등 같은)가 아직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어색함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어색함이 차츰 사라지게 된다면, 의외의 캐릭터와 그로 인한 스토리들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캐릭터에 대한 반응이 극과 극인 것처럼, 현재 새롭게 시작한 '1박2일'에 대한 반응 역시 극과 극인 것도 어찌 보면 이 시청자들마다 다른 기대감의 차이 때문이다. 어떤 시청자들은 그저 편안하게 이전의 '1박2일'을 그대로 반복해서 보고 싶어 하고, 또 어떤 시청자들은 무언가 이전과는 달라진 '1박2일'을 보고 싶어 한다. 한쪽은 그대로였으면 좋겠고, 다른 한쪽은 달라졌으면 한다. 따라서 어떤 길을 가든 반응은 갈라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기대감을 모두 저버리지 않고 적절한 선을 밟아가며, 차츰 이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차태현에 대한 기대감을 넘어 김승우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것은 또 성시경과 주원으로 이어져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결국 '1박2일'의 기대감을 높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대감의 반전과 자연스러움은 '1박2일'이 순항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감동이 사라진 생방송, 왜?

'K팝스타'(사진출처:SBS)

'K팝스타' 생방송의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만큼 예선에서 보여준 참가자들의 기량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감성의 이하이, 자유자재의 고음을 선사하는 박지민, 끝없는 아이디어로 아티스트라 불린 이승훈, '수펄스'라는 놀라운 여성4인조의 앙상블을 만들어냈던 이미쉘,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오뚝이 이정미, 예선 막판에 깜짝 반전을 보여준 김나윤, 맑고 깨끗한 목소리의 백아연 등 누구 하나 기대를 갖게 하지 않는 참가자가 없었다.

하지만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일까. 무려 120분으로 파격 편성된 'K팝스타' 생방송 무대는 시청자들에게 큰 실망감으로 다가왔다. 이하이의 노래는 평이하게 들렸고, 노래가 뒷받침되지 않는 이승훈의 무대는 어딘지 아마추어적인 인상을 만들었다. 기대했던 이미쉘도 시원스런 무대를 볼 수 없었고, 김나윤은 치어리딩의 볼거리에 치중된 느낌이 강했다. 그나마 박지민의 노래가 밋밋한 생방송 무대에 활기를 주었을 뿐, 다른 참가자들의 무대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아직 경험이 일천한 아이들에게 첫 생방송이 주는 압박감이 너무 컸다는 점이다. 그 심한 긴장감은 치열한 예선에서 보여줬던 자신감 넘치는 무대를 잡아 먹었다. 목소리는 시원하게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고, 자꾸만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게다가 생방송 무대의 음향은 예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아무래도 라이브 음향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예선에 비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음향 상태는 가뜩이나 주눅이 든 참가자들의 노래를 시청자들이 잘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10명에서 한 명씩 탈락하는 본 무대이기 때문에 사라져버린 기획사 3사의 지원도, 갑자기 달라져버린 무대의 주요한 이유다. 심사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기획사 3사는 참가자들이 무대를 준비하는 것에 관여를 하지 않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무대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무대란 가창력 하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선곡과 편곡, 그리고 전략이 필요한 곳이 바로 무대다. 뒤집어 보면 기획사 3사의 코디네이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 생방송 무대의 초라함이 보여준 셈이다.

노래 선곡에 있어서도 예선에 주로 팝송이 많았던 점은, 생방송에서 전곡이 가요로 바뀐 상황을 적응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사실 'K팝스타'의 예선이 그 어느 때보다 세련되면서도 글로벌한 느낌을 주었던 것은 그 선곡에 팝송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K팝스타'를 통해 아델이나 비욘세 같은 세련된 팝 보컬들의 노래를 참가자들을 통해 들으면서, 어떤 동질감 같은 걸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예선 무대보다 최적화되지 못한 생방송 무대에서 갑자기 가요 선곡으로 바뀌면서 이런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한편 생방송 진행에 있어서도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진행은 어딘지 맥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었고, MC들은 편안함을 주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의 심사는 무난했지만 그 역시 예선 때 보여준 촌철살인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러모로 총체적으로 예선에서의 기대감이 너무나 컸던 반면, 생방송 본무대가 그것을 채워주지 못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것은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몇 달 간의 전체 흐름의 진행에 있어서도 강약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물론 이것은 이제 첫 생방송일 뿐이다. 그만큼 쓰라린 첫 경험을 제대로 했다는 얘기다. 끝없이 올라가던 것을 다시 바닥으로 끌어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어쩌면 이 바닥의 경험은 다시 차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지도 모른다. 어딘지 밋밋하게 들리는 노래의 도입부가 후반부의 빵 때리고 올라가는 절정의 감흥을 주기 위한 것처럼, '박진영 식으로 얘기하면' 이 첫 생방송의 밋밋함 역시 갈수록 무대를 고조시키기 위한 하나의 작전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간 'K팝스타'가 주었던 그 감동의 무대를 다시 생방송에서도 보고 싶기 때문일 게다.


'러브픽션', 겨털에 담긴 사회학

사진출처:'러브픽션'

여자들은 왜 겨드랑이 털을 미는 걸까. 그것이 깔끔해 보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보면 민망해서? 아니면 사회적 시선 때문에 귀찮아도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몸에 자라나는 일부일 뿐인데, 여자들의 겨드랑이 털은 언제부턴가 애초에 없는 것처럼 그 부위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그것은 단지 그 부위에서만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들의 뇌리 속에 들어있는 여자들의 이미지 속에서도 지워져 있다. 얼마나 그게 뿌리 깊으냐 하면, 우리는 심지어 '겨드랑이 털'이라는 말조차도 어딘지 민망해 '겨털'로 줄여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꼭꼭 숨겨지고 지워졌던 겨드랑이 털이 적나라하게 스크린 전면에 등장했을 때 느껴지는 그 당혹감은 아마도 그런 겨털에 내려진 저주(?) 때문일 게다. 하지만 곤혹스러워하는 하정우(구주월 역) 앞에서 '이게 뭐 어때서?'하는 포즈로 당당히 겨털을 드러내는 공효진(희진 역)을 보면서 무언가 통쾌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판타지와 금기를 넘어서 적나라한 실제 그 자체를 드러내면서도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 '러브픽션'은 하정우의 대사처럼 '겨털과 대화를 시도하는' 영화다.

겨털을 전면에 내세운 건, 그것이 우리네 사랑을 가장 적절하게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질 때 마치 말끔히 지워진 겨털처럼 만들어진 하나의 픽션을 그리지만, 차츰 사랑을 알아가면서 거기 한 올씩 자라나는 겨털 같은 실제와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한 구절처럼 로맨틱한 말들과, 닿으면 녹아내릴 듯한 달콤한 입술은 물론 그 수사처럼 하나의 픽션일 뿐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그 속으로 빠뜨린다. 하지만 단 하루를 만나는 것으로 사랑을 평생 기억하는 것이 아닐진대, 어찌 사랑이 픽션에만 머물 수 있을 것인가.

소설가로서 구주월은 이 픽션과 실제를 혼동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다. 그는 희진을 만난 후, 그 강렬한 첫 키스의 기억을 한 편의 소설로 그려낸다. 영화가 소설을 액자구성으로 갖고 있는 이유는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서이면서도, 픽션과 실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주월의 의식세계를 포착해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구주월은 현실에 만나는 인물들을 픽션 속으로 재배치시키는데 그 과정에 그의 욕망이 살짝 투영된다. 희진은 소설 속에서 어딘지 신비로운 인물로 그려지고, 구주월은 그 신비의 세계(?)를 탐문하는 사랑의 탐정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의 액자식 소설을 집어넣음으로써 영화는 쿨함을 유지한다. 즉 실제에서 희진의 쿨한 사랑과 정반대되는 구주월의 좀스러운 사랑은 그 감정을 액자식 소설을 통해 드러낸다. 따라서 두 사람이 실제에서 부딪치고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결코 질척이지 않는 뽀송뽀송함을 유지한다. 이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나, 상심을 표현할 때나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법이 없다. 문학의 한 구절을 원용하거나, 소설로 풀어내거나, 사진을 찍거나, 혹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마음을 드러내는 식이다.

그런데 이 쿨한 사랑은 모든 걸 픽션처럼 숨기고 지움으로써 생겨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실제를 마구 드러내고 '그것이 뭐 어때?'하고 되묻는 쿨함이 그 안에는 들어 있다. 그래서 문학인 양 고상한 척 하던 구주월은 조금은 적나라하고 선정적인 인터넷 소설을 쓰는 자신을 인정하고, 희진은 사진에 남자들의 누드를 담아내며 그게 뭐가 잘못됐냐고 되묻는다. 우리가 꽁꽁 숨겨 두려했던, 그래서 하나의 픽션으로 만들려 했던 사랑이라는 놈의 '겨털'을 마구 드러내며 '이것 또한 사랑스럽지 않은가'하고 묻는 영화. 이것이 '러브픽션'이라는 영화를 한없이 사랑스럽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겨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유쾌해지는 영화, '러브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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