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아빠딸',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

"괜찮다"고 하는 아버지의 말만큼 슬픈 말이 있을까. 자신은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도 자식 앞에서는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 세상의 아버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얘기일 것이다.

'괜찮아 아빠딸'의 아버지 기환(박인환)이 그렇다. 그는 딸들의 결혼에만 목매는 아내 숙희(김혜옥)와 철없이 명품백 타령이나 하는 채령(문채원), 어른스럽지만 아직은 아버지의 그늘을 찾는 애령 그리고 만년백수로 소심한 빨대(?) 하나 들고 "2만원만"을 연발하며 허풍만 떨며 살아가는 처남 만수(유승목)까지 모두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자식의 허물조차 자신의 죄라며, "이건 내 잘못이야. 절대로 네 잘못이 아냐."하고 말하는 기환은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늘 존재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표상 같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이 땅에 그냥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인인 아들 딸들의 가슴을 적시는 사부곡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좀 더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그저 신파적인 아버지의 애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좀 더 의미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기환이라는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바깥으로 확장된다. 그는 자신과 오래 동고동락한 직원을 위해서 선뜻 돈을 빌려줄 수 있는 만인의 아버지며, 심지어 자신의 딸에게 해코지를 하려한 덕기(신민수)를 용서하며 "너도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해 오히려 그를 감복시키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즉 아버지의 시선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인물, 그가 바로 기환이다. 하지만 세상의 아버지들이 모두 기환과 같은 건 아니다. 혁기(최진혁)의 아버지는 늘 술에 절어 툭하면 손찌검을 하는데다가, 자식이 죽었는데도 그걸 통해 돈이나 뜯어내려는 부성애를 상실한 아버지다. 진구(강성)의 아버지는 능력 있는 병원장이지만 망나니 자식 때문에 골치를 썩는 아버지고, 종석(전태수)의 아버지는 변호사지만 심지어 자식 때문에 죄를 저지르는 아버지다.

각박해진 사회 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흐려지는 것은 그렇게 늘 손만 벌리면 뭐든 쥐어주는 아버지들을 당연한 듯 잊고 사는 세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스스로도 사회에서 어떤 존경받을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는 것 같다. 즉 이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삶은 이 드라마에서는 '정의'와 연결된다. 가지고 못 가진 것이 아니라, 또 사회적인 위치가 아니라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 하는 그 질문에 답하고 있는 아버지가 바로 기환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가족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사회의 이야기를 담는다. 기환이 어느 날 갑자기 휘말리게 되는 사건 속에서 누군가의 누명을 벗겨 주어야할 법은 누군가에게는 돈을 벌어주거나 자식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이용된다. '괜찮아 아빠딸'은 그래서 전형적인 가족드라마의 형태를 띠면서도 그 안에 사회극의 단서들을 집어넣는다. "괜찮아 아빠딸"이라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입에 달고 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은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그저 가족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기환이 그렇게 말할 때, 공감과 함께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의 정의를 지켜주고픈 마음은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추진력이다.

'우결'과 노래는 어떤 화학작용을 만들어낼까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에서 정용화는 서현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었다며 들려준다. 이것은 아마도(어쩌면 분명히) 용서 커플의 노래로 발표될 지도 모른다. 지금껏 수많은 '우결'의 출연진들이 그래 왔기 때문이다.

조권과 가인은 '우리 사랑하게 됐어요'를 불러 각종 음원 차트에 올렸다. 곡도 좋았지만 조권 가인이 참여한 가사가 다름 아닌 '우결'에서의 두 사람의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그 가사는 '우결'에 출연하면서 둘 사이에 생겨난 설렘과 두근거림을 담았다.

'우결'을 통해 두 사람 사이의 스토리를 익히 알고 있는 대중들에게 이 노래는 더 친숙하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마치 '우결'의 번외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노래와 스토리가 만나면 이런 강력한 화학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결'과 노래가 인연이 깊은 건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대부분 가수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노래와 프로그램이 만났을 때 생겨나는 내적 외적 효과가 그만큼 극대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가수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래에 스토리가 얹어지고, 가수들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그 프로그램을 연상하게 만든다.

아마도 '우결'에서 가장 처음 이런 효과를 보인 커플은 알렉스와 신애 커플일 것이다. 알렉스는 신애를 녹음실로 불러 러브홀릭의 '화분'을 불렀다. 워낙 좋은 노래지만 그다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이 노래는, 알렉스 특유의 자상함과 신애의 분위기가 어우러지면서 굉장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후 크라운제이와 서인영은 'too much'를, 앤디와 솔비는 '러브 송'을, 환희와 화요비는 '사랑해'를, 전진과 이시영은 '바보처럼'을 그리고 김용준과 황정음은 '커플'을 불렀다. 재미있는 것은 '우결'에서 노래와 관련된 스토리들이 잘 전달되었을 때 그만큼 노래의 화제성도 커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위해 노래를 만든다거나 혹은 불러준다거나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그만큼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가 나오는 시점은 대부분 커플들이 상당히 가까워진 시점일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용서 커플이 이제 그들의 노래를 발표할 시점이라는 것은 그들 역시 초반의 어색함을 벗어내고 이제 가까워졌다는 말도 된다. 실제로 이들은 이제 대화에서도 편해졌고 스킨십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졌다. 아마도 쿤토리아(닉쿤과 빅토리아) 커플도 좀 더 가까워진다면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혹자들은 이것을 그저 마케팅의 한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수들 입장에서도 그렇고 프로그램 입장에서도 노래는 그만큼 강력한 효과를 지닌다. 부정적으로 보면 가상 결혼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노래로 전한다는 것이 가식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분히 그런 위험성이 있다. 만일 진정성이 의심이 된다면 그것은 거꾸로 가수들에게나 프로그램에게나 득보다는 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가상결혼이라고 해서 그저 설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 부부처럼 모든 걸 나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 자체가 거짓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만나다 보면 누구나 좋은 감정이나 미운 감정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수인 이들에게 노래는 또한 자신들의 좋은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기도 한다.

결국 진정성은 노래에 담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노래에 느껴졌을 때 대중들의 마음은 움직일 것이다. '우결'의 몇몇 노래들이 그런 파장을 일으킨 걸 보면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출연진들의 마음이 그 진심을 담고 있었다는 얘기는 아닐까. 아마도.

수애의 니킥 한 방이 만들어낸 '아테나'에 대한 기대감

한 배우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얼마나 들까. 물론 몇 년이 걸려도 쉽지 않은 게 이미지 변신이다. 게다가 여배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수애가 그런 배우다. 꽤 오랫동안 단아한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던 자신을 깨뜨리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그녀가 가진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론 이미지 변신에 드는 시간은 단 몇 초면 충분할 지도 모른다. '아테나'의 예고 동영상에서 수애가 플라잉 니킥을 날리는 장면이 그렇다. 한껏 날아올라 무릎으로 상대방의 가슴을 가격하는 그 시원스런 니킥 한 방은 그녀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바꾸어놓았다. 그 니킥은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산산이 부서뜨릴 만큼 파괴적이었다.

물론 수애의 변신은 이미 영화 '심야의 FM'에서 예고된 바 있다. 그녀는 마치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것처럼 처음에는 우아하고 단아한 목소리로 라디오를 듣는 대중들을 사로잡다가 아이들을 인질로 그녀를 조종하려는 스토커와 맞서면서 지금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여배우로서, 그것도 수애처럼 단아한 기품이 하나의 아우라로 고정되어버린 여배우로서 그 껍질은 그녀에게 너무나 무거웠을 것이다. '가족'에서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그 가녀린 이미지로 고정되어버리고는, '그 해 여름', '님은 먼 곳에'까지 그녀는 주욱 그런 이미지였다. '님은 먼 곳에'는 작정하고 변신을 시도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군인들 속에서 얇은 슬립 같은 차림으로 춤을 추며 노래를 해도 거기에서는 슬픔이 먼저 느껴졌다. 그런 그녀는 '심야의 FM'을 통해 비로소 변신의 실마리를 잡았다. 그 노력은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으로 보상받았다.

바로 이런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수애가 날린 니킥 한 방이 영화에 이어 드라마에서도 수애의 재발견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전쟁의 여신'이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아테나'에서 수애의 잔상이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아테나'에서 수애가 연기할 윤혜인이라는 캐릭터는 따뜻한 미소로 시작해서 섬뜩한 잔인함과 차가운 냉철함으로 변해가는 인물이다. 이 이중적인 이미지는 그녀가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방긋 웃거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히면 한없이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면서도, 액션 속에서는 강인한 내면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수애라는 연기자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제작발표회에서 그녀는 "드레 수애도 고맙지만 이젠 액션 수애로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그만큼 새로운 이미지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그녀의 변신이 기대된다. 그것은 또한 '아테나'라는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이언트'가 소화한 것, 다양한 장르, 시청층, 연기

실로 '거인'다운 소화력이었다. 드라마는 전형적인 시대극이지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고, 그 장르들의 문법들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중요한 건 '삼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화해냈다'는 것. 시청자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흥미와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삼켜서 기어이 소화해내고 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자이언트'의 세계였다.

시대극은 넓게 보면 사극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역사를 다룬다는 것.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작품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평가에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한계를 지운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이언트'는 초반부터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오인 받았다.

하지만 '대조영'을 겪은 장영철 작가의 뚝심은 여전했다. 시대극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실제 사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장영철 작가는 그 속에 인물들의 대결에 좀 더 과감한 허구적 상상력을 끼워 넣었다.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미션과 그 미션의 해결과정에 부딪치게 되는 대결구도는 사극의 장르적 특성처럼 '자이언트'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대극이 부여하는 현실감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상상력을 펼쳐나간 점은 초반의 오인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뚝심은 오해마저 삼켜버리고 소화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초반의 시청률 부진은 단지 이런 오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극적인 대결구도와 치밀한 심리전으로 흘러가다 보니 정서적인 공감대가 따라오질 못했다. 물론 남성들은 이 사극적인 특징에 매료되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자이언트'가 어떤 전환점이 된 것은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자이언트'는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이 주는 특유의 스릴러적인 특징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가족드라마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을 덧붙임으로서 여성 팬들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원수가 되어버린 가족들 속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모는 다시 만난 정연(박진희)과 사랑에 빠지고, 미주는 민우(주상욱)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 아버지들이 원수라는 걸 알게 되고 헤어지게 된다.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이 멜로와 가족드라마적 요소들은 시대극이 궁극적으로 끌고 가려는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들 위에서 말랑말랑한 매력을 첨부했다. '자이언트'는 자칫 특정 세대로만 집중될 수 있었던 시청층을 삼키고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런 다양한 장르의 공존이 가능했던 것은 장르를 잘 이해하는 유인식 감독의 공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뭐든 해낼 수 있는 든든한 배우들이 있었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어느 한 장르의 결을 연기했다기보다는 주어지는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미주 역할을 한 황정음은 신파적이기까지 한 가족드라마의 여동생에서 갑자기 비운의 줄리엣이 되는 멜로드라마의 여자로 변신해야 했고, 그 후에는 가수로 성장해가는 성장드라마의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민우 역할의 주상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서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멜로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박소태를 연기한 이문식은 적과 친구를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재발견된 배우는 정보석과 박상민이다. 정보석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악역으로 처음부터 마지막회까지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아도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한 카리스마는 이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은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상민은 액션연기에서부터 맏형으로서의 애틋한 가족애를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부분에 뇌손상을 입은 모습까지 말 그대로 연기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 이후 밋밋하게까지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는 '자이언트'를 통해 확고하게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자이언트'는 이처럼 연기자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연기의 극점까지 낱낱이 끄집어내 삼켜버렸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장르를 삼키고, 시청률을 삼키고는, 연기자들의 거의 모든 연기까지 끄집어낸 '자이언트'가 결국 소화해낸 것은 강남과 개발로 축약되는 한 시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누군가는 복수하듯 처절하게 살아왔던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꼭대기에 선 자의 처절함과 쓸쓸함'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뛰어왔던가. '자이언트'가 결국 돌아가는 길은 가족이다. 성모가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 마치 그 자리를 메워주듯 막내가 찾아오고, 강모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기나긴 개발시대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알게 된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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