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예능이 재미를 추구할 때 조심해야 할 것들

아마도 낮은 시청률로 인한 조급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뜨거운 형제들-효자 되다'편은 리얼 예능이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시골 집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찾아 일일 아들 노릇을 하고 헤어질 때 "또 와"라는 말을 듣는 것을 미션으로 한 이번 편에서 시골 어르신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물론 순박하신 그분들은 애써 웃음을 짓고 애써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기광과 쌈디가 반말을 툭툭 내뱉는 장면들이나, 정성껏 차려주신 밥상에 반찬이 김치뿐이라며 계속해서 투정하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럼 막내는 버려도 되는겨?" 김장을 더 담그라는 말에 기광이 이렇게 말을 놓은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반말은 진짜 아들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무례가 아니라 오히려 친근함의 표현일 테니까. 하지만 이 짧은 프로그램 속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연출된 장면 속에 진짜 아들인 양 반말을 해대는 것은 그저 무례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반말까지 가려면 그만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한 셈이다. 하지만 편집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대놓고 친근한 척 뻔뻔하게 연기를 하려 한 것인지 그런 장면은 생략되었다.

게다가 뜬금없이 쌈디가 할아버지께 "어머니 밤에 심하게 괴롭히신다면서요?"하고 자꾸 묻는 장면은 그 자체로도 무례한데다가, 주말 저녁 예능 프로그램으로서는 대단히 부적절한 멘트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이런 말이 우연히 튀어나왔다고 해도 연출에서는 분명 편집했어야할 부분이다. 하지만 '뜨거운 형제들'은 편집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것들을 재미 포인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박명수가 일일 엄마가 된 할머니에게 이런 저런 요리가 먹고 싶다고 요구하고, 할아버지에게는 그리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염색을 권하는 것도 예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염색이 실패해 머리가 퍼렇게 된 결과에도 애써 웃으시고, 시간은 두 시간이나 있었는데 반찬이 왜 김치 밖에 없냐고 타박하는 박명수에게도 그저 웃어 주시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는 건 불쾌한 일이다. 물론 재미를 위해 박명수는 특유의 상황극을 한 것이지만, 그 상황극이 적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된 것은 출연자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자의 문제가 더 크다. 연출자가 상황극과 리얼 예능을 혼동한 것이다. 지금껏 '뜨거운 형제들'은 아바타 소개팅 같은 상황극으로 큰 웃음을 주었다. 하지만 '되면 한다'라는 코너로 새롭게 재정비되면서 프로그램은 상황극이 아닌 리얼 예능이 되었다. 특정 현실 속에서 일일 교사, 일일 아들, 일일 엄마가 되는 것은 리얼 예능이지 상황극이 아니고 상황극이 되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투입되는 곳은 가상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기 때문이다.

상황극을 연출해 재미를 뽑아내려 한다면 자칫 현실에 사는 분들이 소외되거나 왜곡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흔히 리얼 예능에서 '민폐'라고 부르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는 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상황극은 재미만 만들면 되지만 리얼 예능은 그 현실 상황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미도 만들어질 수 없다. 도대체 시골 어르신들을 세워두고 "또 와"라는 말을 듣기 위해(목적 자체가 순수한 것이 아니다) 마치 게임처럼 상황극을 연출하는 장면에 누가 진짜 즐거운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뜨거운 형제들'이 새롭게 가져온 컨셉트인 '되면 한다'는 그래서 위험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하면 된다'처럼 무언가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태도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부여된 상황 속에서 어떤 인물이 '되면' 그걸 '한다'는 수동적인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골학교의 일일 교사가 되면 그걸 하는 것이고, 시골마을 어르신들의 일일 아들이 되면 그걸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를 통해서 웃음을 끌어내려는 목적이지만, 여기에는 리얼 예능이 갖추어야 하는 상황 자체에 대한 진정성이 빠져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되려하지 않는다. 그저 미션으로 부여되는 '어떤 말'을 듣는 것이 목적이 된다.

이 미션이 환기시키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오지에 사시는 시골 어르신들을 찾아가 하룻밤을 지냈던 '1박2일'이다. 같은 아이템이지만 왜 느낌은 이렇게 다를까. 화면으로 드러나는 작은 진정성의 차이는 이렇게 다른 느낌을 만들어낸다. '뜨거운 형제들'이 싫든 좋든 리얼 예능을 선택했다면, 그 리얼한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되면 한다'라는 슬로건을 붙였지만 진짜로 되려고 해야 한다. 그러려면 웃음보다 재미보다 더 필요한 것이 배려다. 현실 속 인물들이 어떻게 느낄 것인가에 대한 공감의식이 없다면, 프로그램 멤버들과 실제 현실 속의 인물들은 겉돌게 되고 나아가 프로그램은 자의든 타의든 현실을 이용하게 된다. 이것은 물론 출연진들도 숙고해야 하는 문제지만, 그보다 더 제작진들이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다.

'무한도전'이니까 가능했던 미션들

"역시 '무한도전'이야."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 말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만큼 '무한도전'은 하나의 대중문화 아이콘이 되어 있다. '나비효과 특집'이 그렇다. 사실 지구온난화가 어떤 방식으로 지구를 위협하는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은 다르다. '나비효과 특집'은 어떻게 에어컨을 틀면 그것이 북극의 얼음을 녹이고 그 녹은 물이 몰디브를 잠기게 하는가를 예능의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시시콜콜하고 상식적인 것들도(사실은 매우 중대한 사안들조차 말로만 전달되었을 때는 이렇게 치부되어버린다) '무한도전'이라는 실험실 속에 들어가면 특별해지는 이유다. 말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행동하는 이는 적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많아도 그걸 몸소 체험을 통해 느끼는 이는 드물다. "역시 '무한도전'이야"하는 말에는 '무한도전'이니까 가능한 이 경험들이 들어있다. 2010년 '무한도전' 역시 그랬다.

연초에 방영되었던 '복싱특집'은 WBC세계 챔피언 최현미 선수와 일본의 도전자 쓰바사 선수와의 패자 없는 아름다운 승부를 담아냈다. 흔히 한일전이라고 하면 그저 무조건 이기고 본다는 식의 시각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자가 최고'라는 '무한도전' 정신을 두 아름다운 소녀들의 드라마틱한 경기를 통해 보여주었다.

'죄와 길' 특집에서 벌칙으로 수행되었던 '알래스카에서 김상덕씨 찾기'는 '깨알 같은' 아이템들에 왜 '무한도전'이 과감히 뛰어드는 지를 말해준 미션이었다. 누군가 툭 던진 말 한 마디가 실제로 미션으로 제시되고 그 결과가 보여지는 곳, 그곳이 바로 '무한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무한도전'이라는 세계는 우리가 상상만 하던 것이 실제로 눈앞에 도전으로 제시되는 그런 세계라는 걸 각인시켰다.

몇 년을 거쳐 오면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겨졌을 미션들의 내용을 찬찬히 상기해보면 실제와 맞닿아있는 '무한도전'의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날 수 있다. 다이어트를 하면 실제로 몰라볼 정도로 살을 빼고, 달력 모델을 미션으로 부여받아 만들어낸 달력이 한 달만에 80만부 이상 팔려나가며, 대한민국을 알리는 비빔밥 광고가 만들어져 뉴욕 스퀘어 가든 전광판에 광고되는 세계. 그것이 '무한도전'이다.

장기 프로젝트로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던 '프로레슬링 특집'은 한 때 쇼라고 여겨지며 몰락의 길을 걸어간 프로레슬링의 세계를 '무한도전' 특유의 몸의 미학으로 재조명해주었다. 그저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던지고 부딪치는 기술들을 보여줌으로써 프로레슬링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것은 또한 쇼가 아닌 진짜 실제 상황으로 뛰어 들어가는 (프로레슬링을 그대로 빼닮은) '무한도전'이 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지를 알게 해준 미션이었다.

한편 '텔레파시' 특집은 어떤 공통의 기억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감의 힘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소통이 왜 중요한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늘 손에 들려진 휴대폰으로 원하는 이와 즉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시대에 소통이란 이미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잊기 마련이다. '무한도전'은 통신수단이 거세된 멤버들이 서로를 만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을 통해 그 소중함을 다시 일깨웠다. 역시 '무한도전'이기에 가능한 미션이었다.

'무한도전'의 이 많은 미션들은 공통적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고리의 공감을 통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둘러 말해주고 있다. 1년이 지났고, '무한도전'은 또 한 살을 먹었지만 이런 공감과 공존의 태도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우리는 연결된 존재이기에 '무한도전'의 이런 시도들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한 해 동안 고마웠고 또 한 해를 기대한다.

'몽땅 내 사랑', 진짜 막장 시트콤이 되지 않으려면

MBC 시트콤 '몽땅 내 사랑'의 시청률은 평균 10%(agb 닐슨) 정도. 그렇게 나쁜 성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성적도 아니다. 그럭저럭 시청을 할 만하지만 보고나면 그다지 여운이 남질 않는다. 확실한 웃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청률보다 더 안 좋은 건 화제성이다. 그다지 확실한 반응이 별로 없다. 관성적인 시청이 많다는 얘기다.

'몽땅 내 사랑'의 출연진만을 놓고 보면 이런 상황은 사실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연기 지존으로 불리는 김갑수가 있고, 예능돌로 가장 잘 나가고 있는 조권과 가인이 있다. 박미선 같은 이미 시트콤 경험이 있는 베테랑 코미디언도 있는데다가, 비스트의 윤두준 같은 시트콤을 활기 있게 만드는 신선한 얼굴도 있다. 그런데 왜 별 화제를 만들어내지 못할까. 왜 확실한 팬층을 확보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몽땅 내 사랑'은 재미 포인트로서 '막장 시트콤'을 주창했다. 한 마디로 스토리가 팔자 고치기 위해 김원장(김갑수)을 속이고 결혼하는 박미선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황옥엽(조권)이 하도 사고를 치는 통에(김원장하고도 얽힌다) 박미선은 가짜 아들을 김원장에게 보여주고 결혼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사기 결혼인 셈이다. 그래서 옥엽은 미선과 함께 살지 못하고 승아(윤승아)네 집에 얹혀산다.

'몽땅 내 사랑'이 아무리 작금의 세태를 비판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주인공들의 행동에 대한 근거 제시는 필요한 법이다. 세태 비판은 사회적 환경을 비판하는 것이어야지 인물 비판에 머물러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국 이런 세태의 문제가 그 사람만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저 아무에게나 빌붙는 박미선네 가족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 주인공들의 행동에 근거나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은 그저 인물의 매력을 떨어뜨리게만 만든다.

매력 없는 캐릭터가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는 없을 것이다. 캐릭터가 구축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아무리 김원장이 길바닥에서 똥을 싸고, 금지(가인)가 작은 눈 때문에 성형을 고민하며, 옥엽이 승아만 보면 자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오버를 한다고 해도 거기에 합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한 캐릭터는 세워질 수 없다. 캐릭터가 없으면 웃음은 그 때 그 때 임기웅변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결국 시트콤 같은 연속적으로 방영되는 장르에서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면 지속적인 시청은 어렵게 된다.

현재 '몽땅 내 사랑'의 설정들이 대부분 멜로관계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문제다. 김원장과 박미선 사이의 멜로는 이 시트콤의 설정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옥엽과 승아, 승아와 전태수 같은 멜로 설정은 시기상조다. 멜로는 결국은 가장 쉽고도 뻔한 장치로 흐를 수 있다. 오히려 다른 아이디어들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물들의 캐릭터가 좀더 분명하게 세워져야 할 시간에 멜로 라인을 만드는 건 시트콤을 더 고리타분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시트콤은 말 그대로 시추에이션 코미디다. 즉 상황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그 상황은 희극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희극은 비극만큼이나 공감대를 필요로 한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상황과 웃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쩌면 희극이 아니고 비극인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몽땅 내 사랑'은 시트콤이라고는 하지만 어쩔 때는 그저 조금 과장된 드라마로 보일 때가 많다. 시트콤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라는 얘기다.

'막장 시트콤'이라고 주창하고 나왔을 때 솔깃했던 것은 막장 드라마가 갖는 비현실성을 패러디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돌아보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김갑수 같은 명배우가 자리한다는 것은 그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저 말 그대로의 엉성하다는 의미로서의 막장 시트콤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몽땅 내 사랑'이 잃어버린 존재감을 다시 찾으려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아이디어로 캐릭터 하나하나를 다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미 각자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출연진들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면 너무 늦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공감대가 앞으로라도 형성되기를 바란다. 그래도 10% 정도의 시청률을 꾸준히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기회는 있는 셈이다.

'아테나', 수애와 정우성의 액션 멜로 역학관계

'아테나'는 정우성이 아니라 수애와 차승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하와이에서 윤혜인(수애)이 정보 요원의 뒤를 쫓다가 어느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서 플라잉 니킥을 선보이는 액션은 그녀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인지시켰다. 또 화장실 변기와 유리 등이 마구 부서져버리는 추성훈과 차승원이 화장실에서 벌이는 사투 장면을 통해 손혁(차승원)이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부각됐다. 하지만 정우성은 달랐다. 그가 연기하는 이정우는 상대적으로 유약해 보일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상대적으로 이정우(정우성)가 1회에 약하게 그려진 것은 어느 정도는 계산된 것들이다. 어딘지 빈 구석을 만들어놓아야 혜인과의 멜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아테나'가 가진 재미의 핵심이 이정우와 혜인이 벌이는 팽팽한 액션과 멜로의 뒤섞임이라고 볼 때, 이정우라는 캐릭터에 대한 힘 조절(?)은 필수적이다.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이정우의 초반 캐릭터는 '아이리스'에서 김현준(이병헌)이 그랬던 것처럼 혜인과의 어떤 계기를 통해 급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테나'는 그저 액션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장면의 흐름 속에 심리적인 고려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 폭풍처럼 흘러가는 액션의 연속은 시청자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때론 불친절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장면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상황을 이해하게 만들려는 연출의 의도가 엿보인다. 망명한 북한의 핵물리학자를 구출하려는 권용관(유동근) 국장이 요원들을 끌어 모아 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손혁과 혜인이 요원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장면에는 어떤 설명도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교차 편집된 장면 연출을 통해 우리는 이들이 서로 다른 집단에 소속되어 있고 대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만큼 연출에 있어서도 단지 그림을 찾기보다 심리적인 고려를 한다는 얘기다.

폭풍 액션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 이정우가 용의자(박철민)를 취조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배치한 것도 이런 심리적인 고려 때문이다. 한바탕 웃음으로 숨을 돌린 후에 드라마는 멜로 설정으로 들어간다.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이정우가 혜인을 만난 후, 다시 국정원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넣으면서, 동시에 손혁과 혜인과의 관계도 노출시킨다. 이들의 멜로적인 관계 속에 대결구도 역시 고려하는 것이다. 여기에 속을 알 수 없는 혜인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을 세워둠으로써 정우와 손혁 양쪽에 걸쳐진 멜로는 이중스파이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아이리스'가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본 아이덴티티'의 영상을 끌어냈다면, 2회의 첫 도입부 20분 간을 장식한 이탈리아에서의 액션신은 007 시리즈를 오마주한 듯한 영상을 선보인다. 클래식과 록이 배경음악으로 교차되면서 우아함과 강렬함이 뒤섞이고, 긴박한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유머까지 구사하며 총을 쏠 때는 사정을 두지 않는 냉혹함을 보여주는 이정우는 숀 코네리 시절의 007을 떠올리게 한다. 전체적으로 액션이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카메라의 과도한 흔들림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감성이 덧붙여진 액션 덕분이기도 하다. 물론 이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이탈리아 액션 장면들이 이정우의 꿈이라는 설정 역시 의도적이다. 확실한 이정우의 액션 질감을 보여준 후, 다시 본래 목적이었던 혜인과의 멜로구도로 회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테나'는 전반적으로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굴러가지만 전반의 폭풍 액션과 후반부의 멜로 구도를 병치하면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액션과 멜로의 교집합. 이것은 '아테나'라는 작품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액션이 앞에서 강렬하게 끌고 나간다면 멜로는 그 강렬함에 어떤 브레이크를 걸면서 부드러움을 집어넣는다. 정우성이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수애와 차승원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그 후에 정우성이 어떤 계기를 통해 다시 전면에 나서는 과정은, 바로 이 멜로와 액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멜로와 액션의 병치는 다분히 우리네 드라마 시청 환경을 고려한 것이다. 너무 지나친 마니아적 액션들은 고른 시청층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아테나'의 성패는 바로 이 액션과 멜로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보여진다. 그 열쇠는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변화할 정우성에게 다시 돌아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