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가든'의 영혼 체인지와 완전한 공감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과 길라임(하지원)은 왜 서로의 영혼까지 뒤바꾸어야 할까. 시청자들은 어쩌면 이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꿈꿀 지도 모른다. 씩씩한 스턴트 우먼 길라임과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상처 주는 말을 건네지만 어딘지 매력이 넘치는 로엘 백화점 사장 김주원의 로맨스.

연거푸 난간에서 떨어지는 스턴트를 하면서도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길라임을 앞에 두고 감독에게 김주원이 "나에게는 이 여자가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뭇 여성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형처럼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굳이 신데렐라 이야기에 선을 긋는다. 김주원은 자기 같은 뭐하나 부러울 것 없이 사는 사람이 길라임 같은 스턴트 우먼을 자꾸만 떠올리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신데렐라를 연상시키는 김주원의 행동에 "그럼 신데렐라가 되는 거야?"하고 길라임은 묻지만(이건 시청자들의 질문처럼 느껴진다), 김주원은 "신데렐라가 아니라 인어공주"라고 말한다. 왕자의 사랑에 의해 인생역전하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왕자를 짝사랑하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인어공주.

따라서 신데렐라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 서로의 영혼이 뒤바뀌는 상황은 당혹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항간에 떠도는 이 변신에 대한 우려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이 변신이라는 상황이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혼 체인지는 지금껏 진지하게 흘러왔던(물론 코미디적 요소도 많았지만) 극을 너무 가볍게 만들 소지마저 있다. 영혼이 바뀐다는 것은 아무리 접고 봐도 과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기대마저 저버리면서 굳이 영혼이 바뀌는 '변신' 모티브를 이 드라마는 고집하고 있을까. 거기에 신데렐라 이야기 이상의 재미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데렐라 이야기는 여전히 대중들을 매혹시키는 소재지만, 이제 그 이야기만으로는 식상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연인시리즈 3부작과 '온에어', '시티홀'로 멜로드라마의 한 전형을 그려왔던 김은숙 작가에게 "또 신데렐라"라는 얘기는 맥 빠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김은숙 작가가 선택한 영혼 체인지라는 설정은 어떤 것들을 이 드라마에 부여할까. 먼저 영혼 체인지는 많은 비슷한 류의 콘텐츠들이 코미디를 연출했던 것처럼 이 드라마에 웃음을 부여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환경과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남녀가 뒤바뀌면서 그 몸과 맞지 않는 성격의 불균형도 웃음을 만들어내는 포인트다. 게다가 서로가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 두 사람은 서로의 몸 사용(?)을 조언하고 걱정하게 될 수도 있다. 영혼 하나 바꾸는 설정은 이처럼 다양한 웃음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가진다.

하지만 아다시피 이 영혼 바꾸기의 진짜 목적은 재미만이 아니다. 우리가 '왕자와 거지'라는 고전을 통해 알고 있듯이, 이 영혼 바꾸기는 역할 바꾸기를 통한 계급의 이해에 도달하게 해준다. 김주원이 그토록 넘지 않으려 선을 그어놓은 계급의 선을 넘게 해줌으로써 진정한 '공감'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

많은 드라마 속에 소재로 등장한 신데렐라 이야기는 현실인 것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완벽한 판타지다. 김주원의 말대로 그 너무나 깊은 계급의 차이로 인해 애초부터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 체인지라는 이 판타지처럼 꾸며진 '시크릿 가든'은 바로 이 판타지 설정 때문에 현실감을 갖는다. 신데렐라가 "그래서 왕자와 신데렐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불투명한 엔딩으로 끝날 때, 과연 그렇게 결혼한 신데렐라가 왕자와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 것은 그 둘 사이에 진정한 공감과 소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신데렐라는 왕자에 의해 선택된 것이지 그 두 사람이 진정 서로를 똑같은 위치에서 공감한 적은 없다.

그래서 '시크릿 가든'은 남녀의 차이를 넘어, 계급의 차이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의 공감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물론 그 외피는 로맨틱 코미디를 입고 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는 코미디 이상의 진지함이 담겨진다. 멜로가 그 사랑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당대 사회가 갖는 남녀와 계급의 차이를 드러내고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시크릿 가든'은 이 두 가지를 손쉽게 담아낸다. 그 핵심적인 장치가 영혼 체인지다.

김종민 하차 논란 그 이유는 어디일까

'1박2일'에 이수근이 적응하는데 들어간 시간은 무려 1년이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했지만 리얼 예능에 들어와서 잘 적응하지 못했다. 줄곧 병풍 역할에 머물던 그의 초창기 '1박2일'에서의 존재감은 우스갯소리로 상근이만 못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면서 이수근은 서서히 감을 잡기 시작했다. 슬슬 메인이벤트들이 벌어지는 중간 중간의 틈새에 특유의 입담과 몸 개그로 빵빵 터트리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는 '1박2일'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수근은 이것이 모두 자신을 기다려준 PD 덕분이라고 말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 얘기하면 그걸 기다려준 건 시청자들이다. 시청자들은 이수근이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도 그걸 받아들였다.

아무리 초창기 '1박2일'이 자리 잡기 전이라고 해도 시청자들의 이수근에 대한 관대함(?)과 현재 하차 논란까지 벌어지는 김종민에 대한 냉담함은 사뭇 갈린다. 도대체 왜 이수근과 달리 김종민은 좀체 기다려주지 못하는 걸까.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런 문제가 불거진 시점 때문이다. 이수근이 부진하던 초창기는 아직까지 '1박2일'의 캐릭터들이 모두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던 시기였다. 즉 이 시기의 캐릭터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그 현재상황이 아니라 향후 나아질 거라는 성장의 관점을 갖기 마련이었다.

이수근은 부진했지만 아직 캐릭터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나아질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김종민은 다르다. 그는 이미 초창기에 어리버리 캐릭터가 정착되어 있었고 그걸로 이수근 이상의 예능감을 선보이곤 했었다. 물론 군대문제로 공백기가 있었지만 '1박2일'에 복귀하는 김종민을 바라보는 대중들은 당연하게도 그 이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좀 더 강해진 어리버리 캐릭터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다르지만 강한 캐릭터거나.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기대감은 더 높아져 있지만 공백기가 가져온 부적응은 갈 길을 더 멀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복귀 시점에 벌어진 김C와 MC몽의 탈퇴는 그에게 더 큰 부담을 주었다. 이미 캐릭터를 구축했었던 김종민을 좀체 기다려주지 않는데다, 공교롭게도 김C와 MC몽의 빈자리가 마치 그의 부적응 탓처럼 여겨지는 상황마저 만들어졌다.

특히 김C 같은 프로그램에 안정된 바탕을 제공하는 멤버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호감 가지만 좀체 웃기려고는 하지 않는 김C의 바탕 위에서 다른 멤버들은 사실상 기본을 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 자꾸만 제기되는 위기설 역시 상대적으로 부진한 김종민을 곤란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김종민 자신의 개인적인 역량부족 탓일 수도 있지만,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보면 그는 불운하다. 새롭게 시작하는 tvN '네버랜드'의 제작발표회에서 "말 안 해도 돼서 정말 좋다"고 말한 데는 아마도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소회가 들어있었을 것이다.

'1박2일'처럼 인위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지 않는 버라이어티쇼는 사실상 멤버들이 스스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그걸 용인하는 것은 그 멤버가 완전히 새롭게 투입되는 경우이지, 과거에 활약했고 그러다 공백기를 가진 후 다시 복귀한 멤버의 경우가 아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멤버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마냥 용인하고 기다릴 수도 없는 문제다. 버라이어티쇼는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다. 이수근은 초창기에 '국민일꾼'이라 불릴 정도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어떤 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을 억지로 만들 수 없는 '1박2일'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 해법은 온전히 김종민에게 달린 셈이다. 김종민이 어서 빨리 그 계기를 찾기를 바란다. 너무 늦지 않도록.

타자에 대한 시선, 공포에서 공감으로

"들어가도 돼?" 뱀파이어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가 소년에게 묻는다. 소년은 망설인다. 그 소녀가 뱀파이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물어야 해? 그냥 들어오면 되잖아." 하지만 소년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온 소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낸다. 그러자 소년이 소녀를 꼭 껴안는다. 이 짧은 장면은 '렛미인'이라는 영화가 서 있는 공포와 공감 사이의 어느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문지방 하나, 벽 하나의 차이일 뿐이지만, 뱀파이어 소녀와 왕따 소년이 서 있는 거리는 그만큼 멀다. 소년은 소녀를 두려워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소녀의 처지를 공감한다.

'렛미인'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그 가운데 그어진 어떤 선을 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 소녀의 운명은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한 왕따 소년을 만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공감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인간들의 사회에서 타자로 내몰려진 뱀파이어와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왕따 소년을 같은 선 상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루어질 수 없어 더 절절한 사랑을 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공포가 공감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공포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라면 살아있거나 죽어야 하는데, 좀비는 그 중간에 걸쳐져 있다. 즉 시체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인 것. 따라서 이 인간과 다르다는 차이는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다. 게다가 이 좀비들은 인간들을 자신들과 같은 종족(?)으로 만들려 한다. 물어뜯긴 인간이 그들과 같은 좀비가 된다는 이 설정은 마치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이것은 인간의 형상을 지녔으나 피의 욕망 앞에 흡혈귀로 변신하는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공포의 존재들은 파괴되고 제거되어야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로베르토 로드리게스 감독의 '플래닛 테러'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같은 영화에서 좀비와 뱀파이어를 때려 부수는 장면들은 유희적인 성격까지 띤다. 어찌 보면 좀비와 뱀파이어라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세워두는 것으로(그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구 도륙하는 장면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의 콘텐츠들의 시각은 이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일찍이 뱀파이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트와일라잇'은 인간과 뱀파이어 그리고 늑대인간 같은 전혀 다른 존재들이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심지어 서로를 사랑하면서.

'렛미인'은 이렇게 타자에 대한 시선이 공포에서 공감으로 바뀌어가는(혹은 공존하는) 최근 경향을 이어받고 있는 작품이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질성을 보던 것에서 동질성을 보는 방향으로만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도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바라보는 콘텐츠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E.T.' 같은 영화가 그렇다. 그 전까지 외계인 하면 공포의 존재로 그려졌던 것이 이 영화에서는 지구인의 친구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아마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차 세계대전에서 대학살을 경험한 유태인의 후예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다른 존재로 분리하는 시각이 가져온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핏 속 깊이 각인되었을 테니까. 즉 20세기에도 이런 동질성을 찾는 콘텐츠들이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화의 경향은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는 건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단지 해외의 문화 콘텐츠들만의 경향이 아니다. 최근 드라마화 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처럼, 구미호라는 이질적인 존재와 인간은 이제 대결하기보다는 사랑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들 중에서 최근 연재되고 있는 강풀의 새로운 만화 '당신의 모든 순간'은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좀비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 만화는 이들 좀비와 싸워나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은 어느 날 그 좀비들 틈에서 자신의 형을 발견하고는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인공은 좀비들에게서 인간과 다른 점을 바라보기보다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쓴다.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르고 여전히 그 대치국면으로 서 있는 우리들에게 타자에 대한 공포와 공감은 늘 뒤얽혀있다. 반공교육이 한창이던 시절에 우리는 저네들을 마치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보듯 생각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산가족이 만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 역시 우리의 형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연평도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한 시간 여의 포격은 우리를 다시 혼란 속에 빠뜨린다. 이들과 우리는 과연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공존을 생각하는 시대에 여전히 대결국면으로 되돌리려는 이 역행을 우리는 어떻게 또 넘어서야 할 것인가. 뱀파이어 소녀 앞에 서 있는 소년처럼 당혹스럽다.

월요예능의 새 강자, '밤이면 밤마다'의 재미요소는?

'야심만만'이 시즌2를 시작하면서 SBS의 월요 예능은 줄곧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야심만만'이 폐지되고 '긴급출동 SOS24'가 편성됐고, 그 후로 월요 예능은 MBC '놀러와'의 독주 체제로 이어졌다. 이 독주를 막은 건 SBS에서 신설된 '밤이면 밤마다'. 청문회 형식을 들고 온 이 토크쇼는 이제 2회 만에 11.2%(AGB닐슨)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놀러와(11.5%)'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해피버스데이'가 폐지되고 신설된 KBS의 월요예능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가 4% 대의 시청률로 추락한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 '놀러와'의 대항마로 자리한 '밤이면 밤마다'의 재미 포인트는 무엇일까.

먼저 '놀러와'와 차별화되는 것은 청문회라는 형식이다. '놀러와'는 말 그대로 게스트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토크쇼. 따라서 게스트들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포인트다. 하지만 이 형식은 자칫 토크쇼 분위기 자체가 느슨하게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나치게 게스트 띄워주기 논란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밤이면 밤마다'는 청문회라는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MC들과 게스트 사이에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게스트는 청문회에 출석해 답변을 해야 하는 입장이고, MC들은 '위원'으로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지만 만일 이런 구도만으로 이 토크쇼가 이어졌다면 지나친 사생활 캐내기 토크쇼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밤이면 밤마다'는 다행스럽게도 여기에 안전장치를 집어넣었다. 즉 게스트를 두 명 세우고 질문을 하는 위원들도 두 편으로 나누어 대결구도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자기 편에 있는 게스트에 상대편이 민감한 질문을 던졌을 때 청문회 위원은 이를 방어해주는 역할이 가능해진다. 게스트로 출연한 조영남에게 탁재훈이 "얘기하기 곤란하신 게 있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청문회 형식에 대결구도를 집어넣음으로써 토크쇼는 팽팽한 긴장감과 동시에 어떤 균형감각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여기서 질문을 던지는 MC들은 게스트에게 궁금한 것을 묻는 것만큼 자기 자신의 예능감을 선보이려 노력한다. 전성기 때의 토크감을 살려내고 있는 탁재훈은 그다지 중요하다싶지 않은 질문들을 엉뚱하게 던짐으로써 의외의 웃음을 선사하고, 박명수는 특유의 호통과 어눌함을 넘나드는 면모로 웃음을 준다. 대성과 정용화는 같은 아이돌이지만 서로 다른 이미지로 묘한 대결구도의 재미를 주고, 유이는 분위기를 젊고 부드럽게 만들어낸다. 김제동이 가진 어록 토크의 진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즉 MC들의 목적 속에는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는 것이 우선적으로 들어있기 때문에 자칫 게스트에게서만 사적인 이야기를 빼먹는 자극적인 접근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자세히 뜯어보면 알아차릴 수 있듯이, '밤이면 밤마다'는 여러모로 원조 '야심만만'을 닮았다. 형식이 설문에서 청문회로 바뀐 것뿐이다. 즉 게스트와 MC간의 대결구도는 청문회 형식 속으로 들어가면서 상황극이 주는 편안함을 제공하고, 그 속에서 게스트의 개인사들이 줄줄이 뽑아져 나온다. 타인의 설문 속에 게스트가 자신의 경험담을 끄집어내던 방식처럼, 이 청문회 형식 역시 좀 더 자연스럽게 개인사를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야심만만'을 연출했던 최영인PD의 성향으로 보인다. 게스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한 뾰족한 면이 있지만 그것을 최대한 부드럽게 해주는 형식을 도입하는 것. 이것이 '밤이면 밤마다'가 독주하던 '놀러와'를 긴장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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