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2'의 내적 외적 성공요인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MBC '목표달성토요일'에서 진행됐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악동클럽'은 소소하게 지나가 버렸고, 2006년 박진영이 진행한 스타 메이킹 프로그램 '슈퍼스타 서바이벌'은 전국과 해외에 걸친 사전 오디션과 서바이벌 형식, 시청자들의 직접 투표방식 등 작금의 '슈퍼스타K'와 상당히 유사한 형식을 갖추었지만 그다지 화제를 몰고 오지는 못했다. 2007년도 MBC에서 방영됐던 신인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 '쇼바이벌'은 쇼의 형식으로 신인들의 무대대결을 보여주었지만 역시 반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슈퍼스타K'는 다르다. 케이블 채널 엠넷에서 방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케이블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두 자리 수를 훌쩍 넘어섰다. 도대체 이 오디션 프로그램은 뭐가 다른 것일까.

많은 이들이 프로그램 외적인 상황을 지적한다. 즉 현실이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상에서나마 실현시켜준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슈퍼스타K2'에 몰린 1백만 명이 훌쩍 넘는 지원자들이 그려내는 풍경은 경쟁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살 떨리게 재현한다. 그런데 그 엄청난 지원자들이 선정되는 기준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리 연예인의 자식이라도, 또 학벌이 출중하다고 해도 실력이 없다면 심사위원들은 가차 없이 '불합격'을 준다. 초기에 심사위원으로 앉은 이하늘은 '철이와 미애'의 신철의 조카를 떨어뜨리면서 "너는 철이형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하늘은 "이 오디션이 실력은 있지만 등용문이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란 점을 반복해서 말한다. 살벌한 경쟁 현실의 리얼함 위에, 불공정한 세상을 뒤집는 판타지가 겹쳐지는 지점에 대중들의 몰입은 생겨난다.

하지만 단지 프로그램 외적인 상황에 의해 '슈퍼스타K2'가 거둔 경이적인 대중적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외적인 환경은 기획적인 것이지만, 이 기획을 실현시키는 것은 내적인 완성도다. 그런 점에서 '슈퍼스타K2'가 거둔 성과의 반은 바로 이 끊임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프로그램 내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음악의 본질인 노래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슈퍼스타K2'는 물론 간간히 댄스를 가미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래 실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슈퍼위크를 거쳐 마지막 11인에 뽑힌 경쟁자들 중에서 댄스와 함께 노래를 한 후보자는 이보람과 김소정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각자의 개성적인 보컬로 경쟁에 임했다. 기존의 노래들을 이들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해내는가는 이 프로그램이 가진 특별한 재미다.

쟁쟁한 기성가수들의 노래가 이제 첫발을 디디는 이들에 의해 거침없이 재해석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대중들을 열광한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이기 때문이다. 이문세가 '조조할인'을 부른 허각에게 "저보다 더 잘 불렀네요"라고 심사평을 말할 때, 윤종신이 장재인의 노래를 듣고는 "좋은 가수가 될 거예요"라고 말할 때 그 쾌감은 극대화된다. 심사위원들의 노래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서서히 찬사로 바뀌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이들이 불러야 하는 노래가 좀 더 폭넓은 세대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뽑힌 11명이 첫 생방송 무대에서 부여받은 미션은 명곡들의 재해석이었고, 8명으로 좁혀진 경쟁자들이 치르게 된 미션은 이문세의 노래를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쇼바이벌'이 그랬던 것처럼 노래들이 지나치게 젊은 층에 치중되었다면 '슈퍼스타K2'는 이처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좀 더 넓은 세대를 포괄할 수 있는 노래들을 미션을 부여함으로써 이 프로그램은 젊은 세대들은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빠져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노래 자체의 매력과 그것을 절절히 표현해내는 경쟁자들의 만만찮은 노래 실력이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힘을 만들어냈다면, 이 힘에 더 강한 추진력을 부여하는 건 게임이나 스포츠를 보는 것 같은 이 프로그램만의 형식이다. '슈퍼스타K2'는 노래를 빼놓고 보면 한 판의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관중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사회자로서의 김성주 아나운서(그가 예전 스포츠 캐스터였다는 점이 이채롭다)가 심판처럼 서 있고 경쟁자들이 나와 실력을 보이면 그것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준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형식은 100만 명이 넘는 지원자에서 단 한 명으로 서서히 좁혀져가는 과정을 통해 시쳇말로 '쪼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게다가 이렇게 좁혀지는 과정에서 가수들(캐릭터)은 성장한다. 스타일리스트가 붙으면서 스타일이 업그레이드되고, 보컬트레이너가 붙으면서 노래가 세련되어지는 과정은 게임에서 캐릭터가 성장할 때 바뀌어지는 갑옷처럼 대중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지지 않았다면 매번 진행될 때마다 이처럼 프로그램이 상승곡선을 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지는 구조가 '슈퍼스타K2'에 마치 연속극을 보는 것 같은 힘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저마다의 지원자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고 무대 위에 오른다. 허각이나 김지수가 갖고 있는 힘겨웠던 가족관계의 이야기는 노래로 승화된다. 때론 애인을 생각하며 때론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래에 감정이입하는 이들의 모습은 노래 이면의 스토리를 구축한다. 게다가 함께 합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들은 그들만의 스토리 또한 만들어간다. 함께 연습해서 무대에서 부른 후, 둘 중 한 사람을 떨어뜨리는 경쟁 형식은 이런 스토리에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슈퍼스타K2'의 경이적인 성공을 단 한 가지 요소로서 해석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음악이 갖고 있는 본연의 힘과 그 음악을 세대적으로 배려하는 섬세한 연출, 마치 게임이나 스포츠를 보는 것처럼 구성해놓은 무대 그리고 차츰 성장해가는 인물들의 스토리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물론 한 몫을 하는 것은 케이블이라는 채널이라는 특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심사라고 하지만 이승철이 지원자들 앞에 거침없이 날리는 독설은 지상파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직설어법이 이 프로그램에 대중들이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항간에는 "왜 우리는 저런 프로그램을 못하냐"는 질책으로 '슈퍼스타K2'를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이 기획되어 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요인들을 분석하다보면 그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예감할 수 있다. 다 년 간의 무대 노하우가 거기에는 있고, 케이블만이 자유롭게 해온 실험정신이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지극히 상업적이면서도 그것이 용인되는 케이블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이 들어가 있다. '슈퍼스타'는 그냥 탄생하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1박2일', 새로운 여행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라

'1박2일'이 깔끔해졌다. MC몽이 빠진 공백은 크게 느껴지지만 대신 다섯 명으로 줄어든 멤버들에 대한 집중력은 더 높아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복불복에 대한 강박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게임을 하는 모습보다는 여행지에 대한 소개가 더 많아졌다. 전체적인 짜임새도 더 탄탄해졌다.

당일치기 콘셉트로 떠난 서울 나들이는 치밀한 사전 계획이 돋보였다. 종로의 북촌 한옥마을, 북악산 성곽길, 백사실 계곡, 이화마을, 광장시장을 배경으로 주어진 미션은 이미 그 속에 의미를 다 담고 있었다. 게다가 이 미션은 그 장소에서 서울의 특징을 대변하는 특정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서울로 떠나는 출사여행을 미션 형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모든 미션이 끝난 후 강호동이 굳이 설명한대로, 북촌 한옥마을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고, 북악산 성곽길에서 이수근이 담아온 총알 맞은 소나무는 근대사의 아픔이, 백사실 계곡에서 은지원이 찍어온 개구리 사진은 서울의 자연을, 이화마을은 예술과 어우러진 서울의 모습을, 그리고 광장시장은 서울의 친절한 사람들을 담아낸 것이었다.

미션 막판에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는 멤버들이 보여주는 초를 다루는 긴박한 상황은 자칫 루즈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팽팽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 이렇게 미션으로 각각의 서울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사진들이 모아진 후, 그 정지 화면을 함께 보면서 마치 그 날 하루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집어넣은 것도 꽤 깔끔한 안배라고 할 수 있다.

즉 '1박2일' 서울 나들이 편은 상당히 잘 짜여져 있고 웃음과 함께 정보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묻어났다. 복불복이 빠지자 자극적인 재미는 줄어들었지만, 의미는 그만큼 커졌다. 마지막 강호동이 굳이 그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과잉의 흔적까지도 느껴진다. 공익적인 분위기까지 연출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기획이 잘 되어 있고 잘 짜여진 데다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1박2일'에서 어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말이다. 왜 그럴까. 여행에 대해 집중해달라는 요구와 복불복에만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시청자들의 주문에도 불구하고, 왜 복불복이 그립게 느껴지는 걸까.

그 이유는 너무 잘 짜여져 있는 느낌 때문이다. 사실 '1박2일'이 가진 매력은 잘 정돈된 영상이 아니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 의외성에 있다. 말 그대로 '야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래서 때로는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날 것이 주는 재미는 잘 짜여진 틀에서는 나오기가 어렵다.

'1박2일'이 다큐를 닮아있다는 표현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큐는 말 그대로 의외의 사건들이 날 것 그대로 마구 드러난다는 의미에서지, 실제 여행 다큐멘터리가 갖는 그 기획적인 깔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영석 PD는 '1박2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100% 이상을 기획하지만, 50% 정도만 기획을 충족시킬 때 '1박2일'만의 재미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100% 기획이 100%대로 이루어지면 밋밋해진다는 얘기고, 그렇다고 완전히 틀어지면 본래 기획 자체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박2일'은 다큐 같은 날것을 지향하는 예능이지만, 다큐 자체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특히 여행이라는 소재는 지나치게 기획된 대로 움직이면 재미가 반감되기 마련이다. 여행의 묘미는 길 위를 걷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길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있는 것이다. 복불복이 문제로 지목되는 것은 그것이 게임에만 몰두할 때다. 필자가 만난 나영석 PD는 이미 복불복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복불복은 게임이 재미를 주지만, 그 게임이 만들어내는 어떤 의외성이 여행 전체에 색다른 스토리를 부여할 때 진짜 재미를 준다"고 그는 말했다.

꽤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1박2일'은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나치게 앞으로만 달려 나왔던 '1박2일'은 그 초심인 여행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여행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 여행이라면 몇몇 관광명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다였지만, 지금은 아예 없는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 여행이 되고 있다. 모쪼록 '1박2일'이 과거부터 지금껏 해오던 대로, 여행이라는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를 얹어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의 맛이 느껴지는 밥상을 차려내기를 바란다.

'슈퍼스타K'와 '남자의 자격', 뭐가 다를까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는 음악이 대세다. 일반인들이 오디션을 통해 최고의 1인을 가리는 '슈퍼스타K'는 15%에 육박하는 케이블 채널로서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먼저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참가자가 100만 명을 넘어선 '슈퍼스타K'는 전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LA에서까지 오디션의 열기가 뜨거웠다.

그 중 단 한 명의 슈퍼스타를 뽑는 만큼 옥석을 가리는 과정은 냉정할 수밖에 없다. 심사위원들은 면전에서 "느끼하다"거나 "구리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실력 미달의 참가자를 가차 없이 잘라낸다. 반면 최후의 1인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엄청나다. 2억 원의 상금과 최고급 승용차, 무엇보다 앞으로 가수로 활동할 수 있는 탄탄대로가 열린다. 1인에 대한 혜택이 큰 만큼 탈락자들이 겪는 상대적인 박탈감 역시 클 수밖에 없다.

'참가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거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미사여구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심사위원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참가자에게 "우리는 프로를 뽑는다"며 "최선보다는 최고여야 함"을 강조한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모습이다. 심사위원들은 참가자에게 독설을 해주고는, 그걸 계기로 오히려 "독하게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초반에 뭐라 독하게 말을 못하는 심사위원 이하늘에게 이승철이 "너 착한 척 하지 마라"고 하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슈퍼스타K'는 그만큼 힘겨운 가수가 되는 길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이 혹독한 현실만을 다룬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 혹독한 현실 위에 세워지는 것은 하나의 판타지다.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진 경쟁자들은 이 오디션 과정을 통해 저마다의 꿈을 드러내고, 그리고 결국 최후의 1인은 그 꿈을 성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경쟁률이 엄청난 만큼, 현실이 혹독한 만큼 그 1인이 되는 과정의 판타지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슈퍼스타K'가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유는 바로 이 최고의 1인을 뽑는 과정이 보여주는 냉정한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판타지가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경쟁적이고 혹독함을 그려내는 '슈퍼스타K'와는 완전히 상반된 프로그램이, 최근 예능에 음악 붐을 일으킨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이다. '슈퍼스타K'에서는 최고의 1인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남자의 자격'에서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모여 단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 서로 마음을 맞춰나간다. 물론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츰 이들은 '최고'라는 가치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참가한 대회에서 한사랑 실버 합창단의 하모니를 들으며 그들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눈물을 흘리고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는 모습은 그 하나가 되기 위해 보여주는 '최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잘 보여주었다.

'슈퍼스타K'가 지향하는 세계가 프로인 반면, '남자의 자격'이 보여준 것은 아마추어들이 보여주는 그 순수함이다. '최고'와 '최선'이라는 두 가치는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두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두 가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1인으로 서야하는 가요계의 현실과 많은 목소리들 중의 하나로 존재하는 합창단이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음악을 소재로 하는 이 두 프로그램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경쟁적인 현실이다. 하나는 그 경쟁 속에서 최고의 1인이 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이 아닌 상생의 하모니를 이루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작금의 지상파와 케이블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신에게는 어떤 가치가 더 소중한가. 지금 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두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무적자', 영웅은 있지만 본색은 없다

'무적자'라는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당할 적이 없는 자’란 뜻이고 다른 하나는 ‘국적이 없는 자’란 뜻이다. 80년대 홍콩 느와르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본색’은, 2010년 우리나라로 오는 과정에서 그 시대적 간극과 국가적인 정서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이런 변화를 모색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국적이 없는 자’란 의미의 ‘무적자’는 탈북자로서 국내에 들어와 무기밀매를 하며 살아가는 김혁(주진모)과 영춘(송승헌) 그리고 김혁의 동생 김철(김강우)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써 ‘영웅본색’이라는 느와르는 남북문제 같은 우리식의 의미가 덧씌워지게 된다.

혹자들은 이것이 흥미롭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 탈북자가 갖는 의미가 ‘영웅본색’이라는 스토리 속에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이다. 이 영화가 다루어야 할 것은 형제애나 우정이 뒤섞인 액션 느와르이지 탈북자들의 애환이 아니다. 따라서 탈북자 설정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김혁과 영춘이 부산에서 무기물매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거가 탈북자들이 갖는 무국적자 같은 위치라면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존재해야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부연 설명이 없다. 그저 탈북자라면 어딘지 절망적이고 호전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바탕에 깔아놓고 있을 뿐이다.

김혁의 동생, 김철이 경찰이 돼서 한 조직폭력배를 심문하는 장면은 그래서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너 사람 죽여본 적 있어? 너 사람 고기 먹어본 적 있어?”하고 물으며 물론 과장이 섞인 것이겠지만 북한에서 사람 고기를 먹게 된 사연을 얘기할 때, 그 얘기에 부들부들 떠는 폭력배는 어딘지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영웅본색’이라는 느와르 장르가 사실은 실제 현실이라기보다는 과장된 이야기나 판타지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무적자’는 여기에 갑자기 현실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것은 ‘영웅본색’에서 쌍권총이나 기관총을 마구 쏘아대고 아무리 적이 많아도 죽지 않는 소마(주윤발) 같은 인물이 하나의 장르적 재미로서 용인됐던 것과는 상반된 결과다.

‘무적자’에 등장하는 총과 유탄 발사기, 기관총이 생뚱맞아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는 홍콩이라는 떨어진 공간만큼, 또 느와르 장르라는 과장이 용인되는 공간만큼 ‘영웅본색’의 비현실적인 장면들을 받아들였지만, ‘무적자’는 그렇지 못하다. ‘무적자’에는 탈북자라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거기에 들어가 있고, 또 그것도 부산이라는 우리에게 가깝고도 친숙한 현실공간이 들어있다.

우리네 액션에 대해 세계가 주목한 것은 그것이 장르적 재미를 주면서도 꽤 현실적인 연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주먹을 주고받거나 폼 잡고 총을 쏴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막싸움 같은 액션들은 그 장면에 실감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무적자’가 가진 액션은 그렇지 못하다. 홍콩 느와르의 향수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그 총기 액션과 우리네 정서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적자’가 홍콩 느와르의 향수를 자극할만한 통쾌한 액션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또 그렇다고 우리식의 정서들(예를 들면 탈북자 문제 같은)에 천착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느와르를 복원할 것인지 아니면 드라마로 그릴 것인지, 어정쩡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느와르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서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기 쉽다. ‘무적자’가 결과적으로 국적 없는 작품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이 시대와 국가를 넘어선 혼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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