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을 소비하는 방송, 인기라면 심지어 발가벗는 세태

그녀는 자신이 '명품녀'라고 불리게 될지 알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대중이 한때 '개똥녀'를 부를 때 가졌던 공분의 뉘앙스를 갖게 될 것을 알았을까. 아마도.

그렇다면 문제가 된 방송 프로그램은 어땠을까. 그녀가 나간 방송이 이토록 큰 파장을 가져올 줄 알았을까. 분명.

명품녀라 불리며 사회적 파장까지 일으킨 당사자와, 그녀를 한껏 스토리텔링해 결국에는 명품녀라 불리게 만든 방송. 이것은 안타깝게도 작금의 우리네 방송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한쪽에서는 인기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 사생활을 팔겠다 나서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렇게 내놓은 사생활을 '상품화'시킨다. 물론 그 '상품화'의 성패는 얼마나 논란이 되느냐다.

한때 '루저 논란'을 일으켰던 '미녀들의 수다'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방송사고'였다면, 명품녀의 탄생은 의도적인 방송이었다는 점에서 실로 '독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나가 실수(?)였다면, 다른 하나는 의도지만, 이 두 방송은 내용적으로 보면 그다지 차이가 없다.

명품녀는 자신이 한 얘기가 10배쯤 부풀려졌다고 주장하고, 제작진들은 오히려 명품녀가 한 얘기를 오히려 순화해서 편집했다고 한다. 지금 이 공방은 '거짓말을 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 '누구'인가가 과연 중요할까. 한쪽은 너무 부풀려졌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축소된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크고 작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왜 명품녀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이런 소재가 버젓이 방송을 탔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른바 아이템이 되기 위해 스토리화되어서.

이 스토리화되는 과정에서 명품녀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삭제되고 오로지 명품, 사치 같은 특정 부분들만 취사선택되어 보여진다. 그것이 과장됐든 아니든 이미 스토리화 과정에서 논란은 의도된 것이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지만, 명품을 좋아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삶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이다. 물론 정치인 같은 공인이 이런 행동을 버젓이 내놓고 하고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이고 도적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성이 아무리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공인처럼 치명타를 입지 않을 것이라 하더라도 사생활의 노출이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반인이 방송을 타는 조건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사생활이 거래되는 방송 프로그램은 일반인들이 등장하는 케이블 채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우리는 늘 이 사생활이 사고 팔리는 장면들을 당연한 듯 바라보고 있다. 토크쇼는 대표적이다. 연예인들은 이제 심지어 푯말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자랑이라도 되는 듯 써놓고 그 내밀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한다. 연예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있지만, 사생활을 거래하는 방식은 '명품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방송이 점점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경향에서도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발견된다. 즉 개인의 훼손불가능한 몸은 사적 영역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그 몸을 전시하는 TV의 선정성은 프라이버시의 대표적인 침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지극히 사적인 내밀한 몸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사생활 침해'에 더더욱 둔감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품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는 문제의 핵심을 흐린다. 문제는 그런 사생활을 거래하는 방송이 상호거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이 점점 더 자극적으로 흐르면서 거기에 제작자나 대중들 모두 둔감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연예인들이 공공연히 사생활을 소비하면서 인기를 유지하고, 방송은 그들을 끌어들여 시청률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명품녀 논란을 통해 알게된 것처럼, 이러한 사생활 소비는 이제 연예인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논란이든 인기든 또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화제가 된다면 무엇이든 끄집어내지고 발가벗겨지는 방송 프로그램과, 주목받고 싶다면 서슴없이 그런 방송에 알몸으로 자신을 세우는 세태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제2, 제3의 명품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성균관 스캔들', 청춘물 그 이상을 그릴까

'성균관 스캔들'에는 우리가 익히 봐왔던 많은 사극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세책점은 '음란서생'을, 남장여자 콘셉트는 '바람의 화원'을, 두건을 하고 밤을 휘젓고 다니는 홍벽서는 '일지매'를 그리고 금등지사와 정조 그리고 정약용의 이야기는 '영원한 제국'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성균관 스캔들'이 단지 이런 몇몇 사극들의 코드들을 버무려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이들 작품들과 차별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청춘'이다.

여기서 '청춘'이라고 하면 단지 남장여자 콘셉트의 여주인공과, '꽃보다 남자'의 사극 버전 정도로 읽을 수 있는 꽃미남들이 어우러지는 그저 그런 멜로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성균관 스캔들'이 가진 가장 큰 강점 중은 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청춘들의 대학(?) 멜로에 있는 게 사실이다. 믹키유천에 유아인 그리고 송중기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대학 멜로에 빠질 수 없는 기숙사(?)에서 남장여자 윤희(박민영)는 그들과 심지어 같은 방을 쓴다. 그것도 조선시대에.

거기에만 머문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청춘물의 사극버전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금등지사의 이야기와 윤희의 아버지 김승헌의 죽음이 연관이 있고, 또 문재신(유아인) 역시 그 형의 죽음이 금등지사와 관련이 있다고 볼 때, 이 사극은 그저 알콩달콩 청춘물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성균관에 정약용을 보낸 이유 역시 바로 그 금등지사와 관련이 있는 것이니까.

겉보기엔 지조 있는 선비처럼 엄숙한 낯빛을 한 채 단단한 권력의 틀을 쥐고 있지만, 그 뒤편을 보면 그 권력이 끝없는 당쟁과 권력 투쟁의 음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청춘들은 과연 어떻게 이와 싸워나갈 것인가. 홍벽서(洪壁書)라는 이름이 말 그대로 대자보를 뜻하듯, 이미 이 싸움은 이 작품 밑바닥에 세워져 있다. 권력의 중심에서 누릴 모든 것을 누리며 자라온 선준(박유천)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권력의 실체를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형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자리만을 지키려 하는 아버지 앞에 문재신은 어떻게 저항해나갈 것인가. 재미로만 살아오다 사는 이유를 알게 된 용하(송중기)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가난에 꿈꾸는 것조차 사치라 여기며 살아온 윤희는 다시 꿈꿀 수 있을 것인가.

'성균관 스캔들'이 앞으로 그려나갈 청춘의 파릇파릇함이 보는 이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들이 상기시키는 젊은 날의 그 연애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어느덧 삶에 지쳐 잊고 있었던 청춘의 꿈같은 것들이 꿈틀거린다. 거침없이 옳다고 생각하던 것을 끝까지 믿고 밀고 나가던 그 시절의 호기. 뭐든 꿈꾸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강건했던 마음. 물론 작금의 청춘들에게는 윤희가 조금씩 꾸게 되는 꿈을 통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것 역시 그 사치로만 생각했던 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마루 밑 아리에티'에는 거대한 스케일이 없다. 이야기의 배경은 고작 한 시골의 별장 같은 저택의 반경을 넘지 않고, 주요 등장인물도 아리에티 가족 3명, 이 저택에 요양온 쇼우와 할머니, 가정부 이렇게 3명, 그리고 아리에티와 같은 소인족으로 외부에서 들어온 사피라까지 모두 합쳐봐야 7명 정도다. 이야기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처럼 다이내믹하지 않다. 요양 차 시골에 온 소년이 소인인 아리에티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전부. 어찌보면 심심할 정도로 단순한 구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지극히 작고 사소해보이는 애니메이션이 우리의 가슴을 이토록 설레고 울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다.

3D의 화려한 기술이 점점 일반화되어가는 시대에, '마루 밑 아리에티'는 완전히 정반대에 서 있는 듯한 작품이다. 자극적인 영상과 스토리에 익숙해진 눈과 귀가 과연 이 잔잔한 클래식 같은 애니메이션에 반응을 할 것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 하지만 막상 작품이 시작되고 나면 단 몇 분만에 이 기막히게 마음을 건드리는 소소함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스토리가 그렇고 연출이 그렇듯, 작고 소소한 세계에 던지는 경외적인 시선이 주는 따뜻함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마루 밑 아리에티'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이야기다. 그러니 그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앨리스는 인간세상에서 이상한 나라로 떨어져 인간의 눈으로 그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아리에티는 소인이다. 즉 아리에티의 낮은 시선으로 보여지는 작품의 세세한 디테일을 따라가면서 관객은 어느새 아리에티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

이 작품은 소소해도 바로 이 아리에티라는 소인의 시선을 취함으로써 그 소소함을 넘어선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밟고 다니는 정원은 소인들에게는 까마귀의 공격을 받고 너구리가 지나다니는 모험의 세계다. 게다가 인간들의 물건을 '빌려쓰는' 이들이 인간세상에서 그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벌이는 일련의 행동들도 모두 모험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모험의 목적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각설탕 한 조각 얻기' 같은 소소함이라는 점이다. 아리에티의 세계에는 시침판 하나에도 즐거워지는 통쾌함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소인의 시선을 끌어넣은 궁극적인 이유는 거기 인간 쇼우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쇼우는 심장병을 앓고 있으며 그래서 요양차 이 저택에 내려왔다는 점에서 이 만화 같은(?) 이야기에 어떤 근거를 제공한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쇼우의 꿈 혹은 상상일 지도 모른다는 것. 늘 아팠기 때문에 누군가 소통할 수 없었던 아이는 자연 속으로 들어와 거기 작은 존재들과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아리에티 같은 소인이란 존재는 자연의 또다른 말일 지도 모른다.

소인들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인간의 해석, 즉 그들이 인간세상의 물건을 '훔치는 자'라는 것과 '빌려쓰는 자'라는 것은 이 작은 이야기의 핵심적인 메시지다. 그런 점에서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건네는 각설탕 한 조각과 아리에티가 쇼우에게 건네는 빨래집게 같은 선물의 교환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소통은 이루어진다. 이 낮은 시선과 눈을 맞추는 행동이 말해주는 의미는 작아 보이지만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은 우리 인간 역시 거대한 지구 위의 '빌려쓰는 자'임을 에둘러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화려한 이야기들이 갖는 자극들 속에 열광하면서 어쩌면 우리는 가슴 속의 작은 울림이 주는 감동을 잊고 사는 지도 모른다. 아리에티라는 소인을 바라보며 쇼우가 "너는 이미 내 심장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때, 우리의 가슴 속으로 이 작은 아리에티가 들어옴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무한도전'과 프로레슬링은 뭐가 닮았을까

왜 프로레슬링을 볼 때보다, '무한도전'이 보여준 레슬링 특집을 보면서 우리는 더 열광했을까. 그것이 '무한도전'이라서?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무한도전'의 인기 때문에 그들이 보여준 레슬링이 더 긴박하게 보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물론 시뮬레이션된 동작들이고,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는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쇼'를 넘어서는 '실제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러들은 링 위에서 보여주는 경기 모습 이외에 그 이면에 놓여진 그들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시뮬레이션된 '쇼'를 하면서도 자신들이 하는 경기가 실제인 것처럼 보여주려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니 그걸 바라보는 관객들은 (실제로 그 경기들이 쇼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치 실제인 듯 보이려는 프로레슬러들의 동작에서 어떤 실감을 얻기가 어려워진다. 거기에는 실제상황은 안보이고 실제인 척 하는 '쇼'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거꾸로 접근했다. 일단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것을 그대로 다 드러낸 후, 그것을 연습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쇼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 그러자 프로레슬링이라는 경기는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낸다. 시뮬레이션된 정해진 동작들을 감당해야할 육체적 고통은 진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과거와 달리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것을 인정한다. 과거 1965년 튀어나왔던 '레슬링은 쇼'라는 말에 민감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실감을 느낄 수 없었던 건, 이미 각인된 '쇼'라는 인식은 여전히 남아있는데다, 프로레슬링의 기술 자체가 가진 고통스러움과 위험성은 대중들이 잘 몰랐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이 링 바깥으로 카메라를 가져와서 보여준 것은 이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 아닌가. 그러니 그 몸이 겪을 고통의 느낌은 그대로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절대로 프로레슬링 같은 힘겨운 경기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이 몸을 날리고 링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마치 우리가 겪는 듯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제 경기를 통해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승패를 바라본 게 아니라 그 경기에서 기술을 던지고 합을 맞추는 '무한도전' 멤버들 전원을 응원했다. 정형돈, 정준하와 유재석, 손스타가 더블 매치를 할 때, 때론 정형돈의 이름을 외치고, 때론 유재석의 이름을 외치는 모습은 프로레슬링의 진짜 즐거움이 승패가 아니라 그 퍼포먼스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경기가 끝나고 상대편이었던 정형돈을 안은 유재석의 마음이 그토록 절절히 느껴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흔히 한일전의 양상을 보였던 과거 프로레슬링의 승패에 대한 집착은, 어찌 보면 진정한 프로레슬링의 묘미와는 다른 이상과열 상태가 아니었을까.

프로레슬링은 쇼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다. '무한도전'은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로서의 프로레슬링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아마도 '무한도전'의 레슬링 특집이 우리의 프로레슬링에 어떤 영감을 주었다면, 그것은 프로레슬링이 좀 더 한국적이면서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스토리를 경기에 부여해야 한다는 것일 게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와 프로레슬링은 모두 쇼지만 그렇다고 거짓이 아닌 '리얼'이라는 점에서 분명 공통점이 있다. 프로레슬링과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접목은 그래서 그만큼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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