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27회의 스토리는 무엇이었을까. 장희빈(이소연)이 동이(한효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가 돌아와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독약을 마시는 자작극을 벌인 것? 그래서 향후 폐비(박하선)에게 누명을 씌워 아예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던 사건? 만일 이것이 '동이'가 한 회분 사건이라면 이 스토리는 과거 흔하디 흔한 장희빈 이야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동이'는 스스로 기획의도에서 밝힌 듯이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가 될 동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그러면 27회 한 회 동안 동이가 겪은 사건은 무엇일까.

궐 밖으로 도망쳐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이(한효주)가 의주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도성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동이는 무수리가 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폐비의 누명을 벗겨줄 증좌를 왕에게 직접 건네기 위함이다. 한 회분의 스토리로 치자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새로울 것이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왜 동이가 꼭 스스로 궁으로 들어가 그것도 숙종(지진희)에게 직접 증좌를 건네려는 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장희재(김유석)와 오윤(최철호) 같은 인물들이 동이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동이는 왜 다른 인물을 통해 증좌를 대신 왕에게 건네려 하지 않는가. 또 궁에 들어왔다면 감찰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을 동이는 왜 찾아가지 않는가.

서용기(정진영)와 차천수(배수빈)는 왜 갑자기 동이가 찾을 수 없게 사라졌는가. 우연히 도성 저자에서 보게된 주식(이희도)과 영달(이광수)의 뒤를 좇는 인물들은 왜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그들이 주식과 영달을 미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이'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은 의문을 남긴다. 논리적으로 비약도 많고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물론 모든 사극이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짜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럴 경우 사극은 좀 더 인물의 감정라인을 통해 논리적인 허점을 메워야 한다. 즉 동이가 왕을 직접 만나려 한다면 시청자들에게 동이의 왕을 만나려는 그 애틋한 마음을 감정이입시켜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동이'는 그 부분이 부족하다.

지금 '동이'는 스토리가 잘 보이질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스토리는 있지만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활에 맞고 거의 사경을 헤매다가 의주의 한 상인에 의해 살아남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또 그 상인이 동이를 붙잡아 두려하고 마침 나타난 장희재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 또 갑자기 심운택(김동윤)이 나타나 그녀를 돕는 이야기도 새롭지 않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동이가 왕의 행차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애끓는 토로를 하는 장면이거나, 심운택의 캐릭터다. 즉 이야기보다는 외적인 것들에 더 치중해 있다는 것이다.

'동이'가 초반부에 그나마 촘촘했던 스토리에서 차츰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연출이다. 사실 동이가 도성으로 돌아와 궁으로 들어간다는 이 한 회 분의 간단한 스토리를 그나마 긴박하게 만드는 것은 연출의 힘 덕분이다. 동이가 돌아오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왕의 심경이나 장희빈의 심경을 배치하면서 그 단순함을 조금씩 비껴가게 만들고, 결정적으로 엔딩 부분에서 마치 숙종이 동이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는 장면 같은 것이 삽입되는 것은 연출을 통해 지속적인 시선을 잡아끌려는 목적이 다분하다.

하지만 사극이 연출의 힘만으로 굴러갈 수는 없다. '동이'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예상을 깨는 의외성이 없을 때, 이 사극은 그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왕실암투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며 성장하는 동이의 심심한 이야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흔히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쉽게 멜로라인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은 이 사극이 처한 가장 큰 위기다. 숙종과 동이의 멜로는 이 사극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때 이 사극은 아무런 새로운 재미를 발견해내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심지어 차천수라는 인물까지 동이의 오라버니에서 남자로 변하려는 모습은 그래서 위험하다.

'동이'는 지금 스토리 실종상태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결구도 그 이상을 보여주는 동이만의 스토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동이의 캐릭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동이만이 가진 특징은 무엇일까. 또 동이의 약점은 무엇일까. 이런 부분들이 다시 세워지고 그 위로 이야기가 다시 구축될 때 '동이'는 잃었던 스토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동이'가 그저 숙종과의 멜로드라마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전우’의 2010년판 리메이크는 화려한 스펙터클로 무장했다. 레드원 카메라로 찍어 선보인 첫 전투신은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폭격기가 쏟아 붓는 폭탄과 기관포 세례에 튀는 흙가루가 그 미세한 입자까지 드러내며 허공에 흩어지고 빗줄기처럼 날아드는 총알 속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은 과거 ‘배달의 기수’ 같았던 ‘전우’의 전투신을 더 실감나게 재현해냈다. 첫 방 시청률은 16% 남짓(AGB 닐슨). 반공드라마가 아니냐는 논란 속에서도 성공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제빵왕 김탁구’의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경제 개발 시대. 김탁구(윤시윤)라는 인물이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제빵업계의 1인자로 서는 과정을 그린다. 배고픔의 시절, 빵이 심지어 어떤 판타지로 다가왔던 70년대. 이 드라마에는 어린 시절의 탁구가 당대 코미디언들을 흉내내듯 그 시대의 향수를 자아내는 장면들이 도처에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드라마는 초반부부터 당대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 신파극과 치정극으로 물들어 있다. 월드컵 시즌의 특수를 맞아서(경쟁드라마가 없는 상황) 시청률은 벌써 25%에 육박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1970년대 개발시대를 향수하고 있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개발이나 성장에 대한 집착이나, 반공이라는 구시대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달라진 2010년 현재, 왜 이들 드라마들은 여전히 그 과거의 가치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걸까. 이것은 과연 단지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아내는 복고 트렌드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보수화의 길을 걷고 있는 드라마가 이제 노골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낸 것일까.

사실 최근 드라마는 보수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주말 저녁 KBS1에 편성된 일련의 드라마들이다. ‘명가’는 하필이면 현 방통위원장의 종친인 경주 최씨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 때문에 보수적인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가 내세운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메시지는 자칫 ‘가진 자의 논리’를 정당화해줄 소지가 다분하다. ‘명가’에 비해 그 후속작인 ‘거상 김만덕’은 여성 성장극을 집어넣어 그 보수적인 색채를 드라마적인 힘으로 많이 누른 흔적이 보이지만 그 메시지만은 동일했다. 그리고 이어 방영되는 ‘전우’는 여전히 반공드라마의 논란 위에 서 있다.

한편 주말극으로 끊임없는 막장 논란에도 불구하고 4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종영한 ‘수상한 삼형제’ 역시 드라마의 퇴행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과거의 틀을 더 독하게 현재에 재현했다. 과거 드라마들의 고질적인 소재였던, 고부갈등이나 불륜, 한 여자를 두고 벌이는 치정극은 이 드라마에서 더 자극적으로 무장한 채 반복되면서 많은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이 퇴행적인 양상은 이 드라마가 경찰청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사실(이것 때문에 한때 경찰만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논란이 인 적도 있다)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막장이라 취급돼도 시청률만 높으면 마치 ‘국민드라마’인 양 심지어 자긍심까지 갖는 모습은 자칫 드라마의 상업화와 시청률 지상주의의 늪으로 타 드라마들까지 빠뜨릴 위험성이 있다.

올해 초에 큰 인기를 끌었던 ‘공부의 신’도 마찬가지다. 마치 입시경쟁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법이라도 가르쳐 줄 듯 나섰던 이 드라마는 그래서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했지만, 기존 입시 제도를 결국은 두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 후반부에 와서 이런 메시지는 슬쩍 ‘진정한 공부’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지만, 이것은 ‘수상한 삼형제’가 패악스런 가족들의 자극적인 이야기로 점철되다 마지막에 급속히 봉합했다고 해서 착한 드라마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다. 이들 드라마들은 어떤 면으로 봐도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놓은 듯한 드라마 소재와 진행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드라마가 70년대를 향수하거나 6.25 같은 전쟁을 다루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과거를 다룬다고 해서 과거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2010년도에는 2010년도에 맞는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드라마는 현 대중들과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퇴행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시청률에서 성공한 드라마들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아직까지 리모콘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보수적인 중장년 시청층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들 드라마들의 뛰어난 위장술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스펙터클과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스토리 진행 같은 것은 드라마의 실체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하다. 게다가 이들 드라마들은 스스로를 복고라고 말하지 보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탑의 눈빛으로 기억되는 영화, '포화 속으로'

'포화 속으로'의 전쟁 스펙터클은 한 편의 액션영화를 보는 것처럼 숨 가쁘고 정신없을 정도로 현란하며 심지어 때론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그 화려한 영상의 박진감 속에 빠져들 정도다. 하지만 그 스펙터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답답해진다. 많은 이들이 영화 개봉 전부터 불거져 나왔던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했던 문제나, 특정 집단의 자본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로 인해 이 영화가 반공영화일 거라는 우려를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반공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반공영화가 아닌 이유는 당연하다. 상업영화이기 때문이다. 70년대도 아니고 2010년도에 반공영화는 대중들이 공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품성이 없다. 그래서 주인공 장범(탑)이, 죽어가며 '오마이'를 외치는 어린 북한병사를 처음으로 확인사살하고는 '그들 역시 괴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조금은 생뚱맞아 보인다. 반공을 주창하던 시기는 전후의 일이지, 전쟁이 막 벌어지던 당대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장면은 상업영화로서 반공 냄새를 없애려는 안간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반공영화가 아니라는 것이 반전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초반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전투장면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며 포항에 학도병을 놔두고 가버리는 강석대 대위(김승우).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 같은 인민군 776부대를 이끄는 박무랑(차승원). 이들은 어느 편이라기보다는 모두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던져진 그저 싸워야 하고 이겨야 살아남는 비슷비슷한 존재들처럼 그려진다. 한바탕 전투의 소란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장범의 넋 나간 얼굴과, 새로 온 학도병들을 장범의 손에 맡긴 채 떠나가며 강석대 대위가 "너희들은 군인인가 아닌가"를 묻는 초반부의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가 마치 반전영화인 것 같은 인상을 던져준다.

하지만 국군이 떠나가고 포항에 남은 학도병들은 이상하게도 이 덧없는 어른들의 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자가발전시키며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진다. 영화 후반부에 장범이 "우리는 군인인가 아닌가"를 선창하듯 질문하고, 다른 학도병들이 "군인이다!"라고 선언하는 장면부터, 거의 초인처럼 총을 쏴대는 장범과 갑조(권상우) 앞뒤로 마치 게임처럼 우수수 쓰러져버리는 북한 병사들의 모습은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논조는 이렇게 바뀐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조국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결국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전쟁은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

이 쉽게 드러나는 영화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장범을 연기하는 탑의 눈빛이다.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의 두려움과 순수함과 강인함, 그리고 슬픔이 교차하는 그 눈빛은 많은 걸 얘기해준다. 영화를 보다가 혹시 눈물이 났다면 그것은 영화가 꾸며놓은 화려한 영상 때문도 아니고, 조악하지만 꾸역꾸역 집어넣은 모성애적인 관점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는 탑의 슬픈 눈빛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탑의 눈빛은 이 영화와 이 영화가 방영되는 2010년도의 우리네 청년들의 눈빛을 닮았다. 마치 왜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나갔다가 죽음을 맞이한 학도병들처럼, 여전히 이런 국가의 메시지 속에 던져진 채 그 싸움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상에 여전히 편입되기를 강요받아야 하는 청년들의 슬픔.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뒤늦게 돌아온 강석대 대위가 장범을 안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어른들의 전쟁 속에 무참히 동원된 학도병에 대한 미안함, 혹은 그래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어른들의 시각에 대한 미안함. 탑의 슬픈 눈빛이 아픈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때문이다.

짧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런닝 구'

길면 되고 짧으면 안되는 것. 바로 드라마다. 심지어 50회를 훌쩍 넘기는 장편 드라마들은 50%의 시청률을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단 한 편으로 끝나는 단편 드라마의 경우, 5%에서 10% 사이의 시청률을 향해 달린다. 장편 드라마가 풀코스 마라톤이라면 단편 드라마는 단거리 혹은 중장거리 달리기에 해당한다. '런닝 구'는 4부작이다. 그러니 이 사이에 낀 하프 마라톤 코스 정도는 될까?

한편에선 같은 집에서 내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욕망을 위해 폭력이 자행되는 지독스런 막장이, 다른 한편에선 전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월드컵이 서 있는 스타트 라인 위에 선 지독해도 착한 드라마 '런닝 구'는 극중 주인공인 구대구(백성현)를 빼닮았다. 이 드라마는 다음에 이어질 MBC의 야심작 '로드 넘버 원'의 페이스메이커다. 그래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경쟁 위에 서게 되었다.

'런닝 구'는 구대구처럼 마라톤 풀코스를 달릴 필요는 없다. 그저 30킬로까지 질주하고는 그 힘을 다음 작품에 넘겨주면 된다. '로드 넘버 원'은 그 힘을 받아서 골인점의 승리를 따낼 것이다. "너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을 둥 살 둥 뛰어주면 그 기운 받아서 지만이는 달려 나가 메달 따고 너는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거잖아." 극중에서 행주(박민영)의 이 대사는 런닝 구' 같은 이 땅의 단편 혹은 중편 드라마들의 운명을 말하는 것만 같다.

KBS는 공영방송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단막극의 부활을 주창하며 'KBS 드라마스페셜'을 신설했다. 몇 편이 방영됐지만 각 작품마다 완성도의 차이도 있고 대중성에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인지 어떤 건 10%에 가까운 시청률을 내기도 했지만 보통은 5%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단막극이 아무리 시청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청률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짧게 달리는 드라마에서 시청률을 기대하는 것은 좀체 어렵다.

그래서인지 '단막극의 부활'이라는 이 슬로건은 공영방송의 명분 정도에 그치는 느낌이다. 단막극의 부활이 기성보다는 신인 작가들의 등용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무색하게, '드라마 스페셜'은 기성작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재기발랄하고 실험적인 스토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단막극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단거리 경기를 마라톤 중계 하듯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면 '런닝 구'라는 중편드라마는 장편들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중요한 가능성을 몇 가지 보여주었다. 왜 단막극의 부활이라고 하면 늘 1회로 끝나는 단편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1회는 이미 길어진 호흡에 적응된 시청자들에게 드라마가 끝까지 달리기에는 너무나 짧아져버렸다. 이미 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이 점점 장편화하는 추세라면, 그 취지를 살리면서 대중성도 어느 정도 살릴 수 있는 방법으로 왜 2부작이나 4부작 드라마들의 설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4부작이라고 하더라도, '런닝 구'가 가진 성취는 50부작 이상의 막장드라마들이 거둔 것보다 훨씬 크다. 그저 그런 자극적인 설정 몇 개면 늘 승리해온 장편드라마들의 패배를 모르는 허세보다, 이 작지만 죽을 힘을 다하는 드라마의 선전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끝까지 달리고 싶다"고 말하는 구대구의 진술이 이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드라마들의 항변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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