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전', 김대우식 유쾌하고 음란한 도발

'방자전'의 상상력은 음란하다. 아니 어쩌면 이건 전작 '음란서생'에서 이미 싹을 보였던 김대우 감독의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춘향전'을 뒤집는 이 이야기에서 춘향이는 더 이상 정절을 지킨 열녀가 아니고, 이몽룡은 사랑의 맹세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다. 변학도는 탐관오리의 표상이 아닌 다만 성적 취향이 변태적인 인물일 뿐이며, 물론 방자도 그저 몽룡과 춘향이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던 그 방자가 아니다.

성욕이나 성공 같은 욕망에 솔직하고 그것을 서로 이해할 정도로 쿨한 그들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현대인에 더 가깝다. 우리가 '방자전'의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사극이라는 과거의 지대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현대어법은 미풍양속이란 이름 위에 존속하는 권위의 엉덩이를 쿡쿡 찌른다. 그러니 어찌 보면 '방자전'의 음란함은 지배계층의 눈에는 꽤나 위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리 고전 중의 고전이고, 몇 년 마다 계속 반복되어 리메이크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21세기에 같은 정절의 이야기로서 '춘향전'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고 시선은 사극이 역사를 버릴 정도로 낮아졌다. 게다가 '춘향전'은 역사도 아닌 그저 허구적인 작품일 뿐이다. 따라서 '춘향전'에 내포된 기존 체제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을 '방자전'에서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니 '방자전'의 이야기는 철저히 현대적일 수밖에 없다. 몽룡이 춘향의 마음을 달뜨게 하기 위해 구사했다고 주장하는 '차게 굴기'는 '짐짓 일부러 쿨하게 구는' 현재의 연애법이고, 춘향이 몽룡의 마음을 동하게 하기 위해 보냈다는 '은꼴편(은근히 꼴리는 편지)'은 '은꼴사(은근히 꼴리는 사진)' 같은 현대적 은어의 패러디다.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현대어법이어서인지 그 사고방식 또한 현대적이다. '방자전'에는 물론 몽룡과 방자 같은 계급이 존재하지만, 그 둘이 춘향을 사이에 두고 경쟁을 벌이는 시퀀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계급이 주는 무게감은 미미하다. 어찌 보면 부모 잘 만난 몽룡과 그렇지 못한 방자를 보는 것만 같다.

'춘향전'이라는 미담의 탄생 뒤에 숨겨진 적나라한 현실을 고발하는 '방자전'은 방자의 시각을 집어넣어 '춘향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김대우식의 도발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훼손했다는 우려 섞인 비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방자전'을 고전과 비견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방자전'은 더 이상 옛이야기가 아니라 작금의 세태를 드러내는 현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 사랑마저도 미담으로 조작하는 현실, 신분상승을 위해 기꺼이 순정을 포기하는 현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순정. 그래서 차분히 바라보면 그것 또한 하나의 현대적인 미담으로 보여지는 시선. '방자전'의 음란함은 그 과감한 노출수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음란함 그 자체보다는 그 엄밀한 신분구조 속에서도 음란한 상상을 하는 그 도발이 음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음란함이 통쾌함을 주는 것은 속물근성 가득한 현대적 인물들이 고전을 빌어 뒤틀어지는 풍자가 현대인들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주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언니', 희생과 용서의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가 전한 감동에는 그저 '슬프다', '기쁘다' 같은 표현으로는 담지 못할 그 무언가가 있다. 누구든 바라보면서 그 몇 줄의 대사를 듣기만 하면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 못하게 만드는 그 감동의 실체는 뭘까. 대성도가의 주인 구대성(김갑수)이 거실 벽면에 붙여놓은 가훈, '역지사지(易地思之)'처럼, 신데렐라 이야기를 언니의 입장에서 풀어낸 그 스토리 때문에? 물론 이것이 표면적인 '신데렐라 언니'의 이야기지만 그것만으로 심지어 영혼을 건드리는 듯한 그 눈물의 실체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신데렐라 언니'는 여러 차원의 눈물들을 만들어내지만 그 중심에 서 있는 단 한 명의 인물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인 은조(문근영)도 아니고 신데렐라 당사자인 효선(서우)도 아니다. 그저 제 궤도에서 살아가며 버텨내고 있던 인물들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뒤흔들고는 스스로 모든 걸 떠안고 가버림으로써 그들을 다시 한 자리로 모아 놓은 인물, 바로 구대성이다. 이 드라마에서 구대성은 자상한 남편에 아버지로서 완벽한 인간의 표상처럼 그려진다. 심지어 배신하는 아내를 보면서도 오히려 그녀를 걱정하고, 아들처럼 여기던 기훈(천정명)이 사실은 다른 목적을 갖고 대성도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으로 죽어가면서도 그를 용서한다. 이것은 범인의 모습이 아니다. 차라리 성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공교롭게도 이야기 구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모티브를 닮았다.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통해 거의 완벽한 사랑을 전하고는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구대성은 드라마 속에서 계속해서 부활한다. 대성도가에 남은 가족들, 은조를 포함하여 효선, 아내인 송강숙(이미숙) 그리고 막내 준수는, 대성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의 사랑을 느낀다. 그의 사랑은 대성도가 구석구석에, 그가 남긴 일기장에, 준수의 스케치북 속에도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의 힘은 남은 가족들을 변화시킨다. 구대성의 희생은 사랑으로 부활하고, 그것은 남은 사람들을 참회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가족을 결속시킨다.

은조는 뒤늦게 대성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던 이름, "아버지"를 부르며 목 놓아 운다. 독하디 독한 계모 송강숙(이미숙)은 스스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고 말한다. "뜯어먹을 게 있어 좋다"던 이제는 고인이 된 남편 구대성(김갑수)의 무차별적인 사랑 앞에 세파에 말라버렸던 그녀의 눈은 결국 눈물을 흘린다. 구대성이 전한 '대가없는 사랑'은 그대로 효선에게 똑같이 이어지고, 막내 준수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심지어 자신으로 인해 구대성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죄의식을 가진 기훈은 이제 그 희생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대성도가 사람들을 살리려 한다.

이 우리의 가슴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희생과 용서에 관한 원형적인 이야기가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것은 당연한 일. '신데렐라 언니'는 그런 의미에서 희생과 용서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구대성이 희생을 통해 전한 사랑으로 인해, 남은 이들은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송강숙이 친구의 딸이 자신의 엄마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고 "그게 그렇게 속상해? 미안해. 그게 그렇게 속이 상하는 줄. 어린 것이 그렇게 피눈물 흘리는 줄 어떻게 알았겠냐. 미안해. 미안해."하고 말할 때, 그녀의 앞에는 또한 은조가 서 있었을 것이다.

툭하면 "마귀할멈!"이라고 독한 소리를 해대는 준수의 스케치북에서 가족들 그림 속에 자신만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쩌면 은조는 준수의 독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늘 웃고만 있는 기훈의 눈물을 보고는 "이제 나한테 기대"라고 말했을 때, 거기서 은조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바락바락 소리를 치면서도 절대 기대려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대성이 남긴 가훈, '역지사지'처럼, 서로가 서로의 입장이 될 때, 그들은 드디어 누구의 엄마이고 누구의 딸이며 누구의 자매이고 누구의 애인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껴안게 된다.

구대성의 희생적인 사랑이 남은 사람들을 서로 용서하게 만들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기대게 하는 이 드라마는, 은조의 표현대로, "뭔가 딱딱하게 뭉쳐져 있었던" 것을 녹작지근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무기력할 정도로 약하디 약한 우리네 인간이 살 수 있는 힘은 어쩌면 그 거대한 사랑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 속에서 타인을 자신처럼 이해하면서 똑같은 가녀린 존재로서 서로를 기대는 일일 것이다. 비록 신데렐라 이야기의 모티브를 빌려왔지만, '신데렐라 언니'가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이 격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학 같은 드라마가 주는 울림을 온전히 시청자들에게 전한 건 이른바 진정성으로 무장한 연기자들의 연기 덕분이다. 우리는 문근영을 통해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목 놓아 울던 은조를 이해하게 됐고, 서우를 통해 미움조차 이겨내지 못하던 사랑만 알던 효선의 성장을 보게 됐고, 이미숙을 통해 처절한 삶 속에서 사랑 없이 살아오다 덜컥 사랑을 알아버린 송강숙을 바라보게 됐고, 김갑수를 통해 자신이 부정당하면서도 결국은 모두를 끌어안은 그 큰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다. 또한 천정명의 여전히 소년 같은 미소와 택연의 마음까지 밝게 만드는 웃음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빙의된 연기가 있어 가능했다. '신데렐라 언니'가 전하는 결코 범상치 않은 큰 사랑의 이야기는.

'나는 별 일 없이 산다'가 던지는 질문

"살려고 그런 단 말야. 나도 살아야할 거 아냐!" 드라마 '나는 별 일 없이 산다'에서 황세리(하희라)는 늘 삶에 사기당하며 살아온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이제 자신이 누군가를 사기 쳐야 하는 이유로, '그래도 살아남아야 함'을 든다. 한편 나이 칠순에 접어든 신정일(신성일)은 "구차하게"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의 삶은 집사람이 떠나면서 그 의미를 잃었다. 한 사람은 그저 관성적으로 살아남으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 이유를 찾지 못하지만, 사실 두 사람의 정조는 같다. 의미 없는 삶. 그들은 '별 일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 앞에 갑자기 동네 깡패가 나타나 위협을 한다. 쌍팔 년도 멜로에나 등장할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시퀀스. 하지만, 겉으론 '별 일 없이' 살지만, 속은 절망적인 이 노년과 중년여성을 만나자 특별해진다. "야. 이놈들아 나 말기암환자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너희들 손에 죽으나 매한가지야."하고 외치는 노년 남자. 그리고 "그래 이 새끼들아. 나도 겁날 거 없어. 막장인생이야. 이혼 두 번에 자식새끼도 앞세워 죽인 재수 더럽게 없는 년이야."라고 응수하는 중년 여자. 마치 '별 일 없는' 삶에 지쳤다는 듯, '별 일 좀 벌려보라'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 한 구석을 찌른다.

나이 칠십이면 말기암 판정을 받고도 담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하루하루의 삶이 버텨내는 것이 되어버린 신정일에게 말기암은 그다지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고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길 하나, 그렇다고 노년을 흡족하게 해줄 자식이 있길 하나. "늙으면 돈이 최고"라고 외치는 조회장 같은 속물도 있지만 신정일에게 돈은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넌 돈이면 다냐"고 물을 정도로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동병상련이라고 아직은 젊은 나이에 인생의 험한 꼴을 많이 당한 자칭 막장인생 황세리가 신정일의 마음을 보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외로울 때면 그 외로움을 털어내기 위해 혼자 추는 춤을 둘이 함께 추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함께 추는 짧은 춤사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죽는 순간까지 이렇게 웃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신정일에게 사랑은 그처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도 주변에 남지 않고 절망만이 남은 채, 승무원이 되어 아무도 없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뉴욕과 파리가 뒤섞인 꿈을 꾸는 황세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느 밤 문득 외로움을 느낀 그녀는 신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함께 외로워요."

'나는 별 일 없이 산다'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래서 겉보기엔 노년에 주책없이 찾아온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좀 더 본질적인 사랑에 가깝다. 젊은 나이의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들의 사랑이 청춘의 봄에 찾아드는 아지랑이 같은 사랑이라면, 이 지긋한 나이에 이제는 가질 것보다 놓아야 할 것이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은 그 유한함 앞에서 그저 그 한 순간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해지는 사랑이다.

사실 '별 일 없이 사는' 이들이 나이 지긋한 노년의 삶들뿐일까. 장기하의 '별 일 없이 산다'가 젊은 세대들의 고통과 좌절을 복수하듯 반어법으로 노래하는 것처럼. 극중 신정일이 자식에게 말하듯, 나이는 먹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할 것이 없어질 때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별 일 없이 사는 삶'은 삶이 아니다. 그리니 여기서 말하는 '별 일'이란 사랑은 물론이고 사회적 의미로서의 행복과 다름 아니다.

서점에 나가보면 썰렁한 분위기에도 유독 활활 타는 코너가 있다. 이른바 '자기 계발 서적' 코너다. 성공에 관한 저마다의 방법들이 실용적으로 담겨진 그 책들은 언제 갑자기 도태될 지 모르는 경쟁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불안한 현대인들을 유혹한다.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 '자기 계발을 해준다'는 책들의 주장들은 정말 달콤하다. 아침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사회생활 속에서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하며 전술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것이 성공을 보장해줄 것이란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이라는 말은 그 뉘앙스만 보면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성장시켜주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그 책 코너 속에 몇몇 책들은 실제로 이런 기능을 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들은 사회를 상정하고 그 사회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지침처럼 내세운다. 즉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을 통제하는 것으로 그 사회의 기존 질서에 부합하는 성공을 열매로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계발'이란 이제는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통제하게 만드는 보다 견고해진 사회의 통제 시스템으로 보이기도 한다.

불안하기는 방송사 같은 조직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어떤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사도 새로운 사장을 뽑고, 조직을 새로 짜고, 매번 방송 개편을 하면서 자기계발을 한다. 사실 개인이야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심각한 자유의 침해로 여겨지지만, 방송사 같은 거대 권력 조직이 어떤 통제를 받는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통제 없이 달려 나가는 방송사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지뢰처럼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중요한 건 그 통제가 누구에게서 나오느냐는 것이다. 방송사가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계발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방송사가 존립하는 이유인 대중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대중들의 눈높이, 사회 윤리적 잣대, 볼 권리, 알 권리... 굳이 공익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늘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만일 이 통제가 대중들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 나온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 군사정권 하의 우리네 방송을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지금은 군사정권처럼 시시콜콜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하면서 방송을 통제하는 시대도 아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국민들도 아니다. 문제는 누가 지시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자기 통제를 하는 방송사다. 늘 자기 계발을 위해 좀 더 나은 방송을 위해 했다고는 하지만, 대중들에 의해 논란이 야기되는 건 그것이 혹 자기검열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좀 더 나은 방송을 위한다는 명분의 자기 계발은 그 통제가 대중들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자기검열은 권력으로부터 통제되는 것이기에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외압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 하차와 정관용씨의 시사 프로그램 하차, 그리고 계속해서 외압의혹을 낳고 있는 김제동씨의 결국 불발된 '김제동쇼'. 그 밖에도 '개그콘서트'의 몇몇 코너들에 대한 외압설 등등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아마도 직접적인 외압은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방송사가 스스로 단행하는 자기 통제 방식의 압력은, 그것이 대중들의 논란을 야기시키는 것으로 볼 때,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대중들을 위한 자기 통제라면 논란이 나올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자기 계발 시대의 통제 시스템은 이처럼 더 견고해졌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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