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결국 삶과 꿈에 대한 이야기

지난 5월 봄에 시작한 '선덕여왕'은 12월 겨울에 끝이 났다. 마지막에서 덕만(이요원)이 "스산하다"고 말하고 유신(엄태웅)이 "곧 봄이 올 것입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은 마치 이 '선덕여왕'의 처음과 끝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만 같다. 죽기 직전 덕만은 어린 시절 꾸었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꿈속에서 어린 덕만을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던 여인. 덕만은 죽음 앞에서 바로 그녀가 성장한 덕만이었다고 생각한다. 성장한 덕만은 어린 덕만에게 앞으로 있을 시련에 대해 이야기 한다.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지만 사실 가진 건 없을 거야."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그래도 "견뎌 내"라는 것이었다.

이 엔딩 장면은 지금껏 봄부터 겨울까지 달려온 '선덕여왕'이 한 인물의 생에 있어서의 봄부터 겨울까지를 그려내고 있다는 걸 압축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이야기는 꿈속으로 들어가면서 어린 덕만이 그녀의 앞에 놓여진 길을 향해 성큼 성큼 걸어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이 사극은 끝이 나지만 끝이 난 것이 아니다. 어린 덕만의 이야기로 다시 이어지면서 순환되는 것이다. 삶이란 이처럼 가진 것 같지만 가진 것 없이 사라지는 것이며, 그럼에도 견뎌 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꿈이다. 꿈을 꾼다는 것, 그것이 있어 어린 덕만은 한 치 앞에 놓여진 시련을 향해 성큼 성큼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다시 반복된다.

'선덕여왕'은 결국 삶과 꿈에 대한 이야기다. 미실(고현정)이라는 커다란 벽 앞에서 절망적으로 그 벽을 두드리고, 그것이 오히려 희망이 되던 젊은 시절의 덕만은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그것을 현실 가능하게 만들어 놓는다. 결국 미실이 가고 여왕의 자리에 오른 덕만은 그러나 함께 꿈을 꾸었던 자들과 부딪치게 되고 그 자리가 주는 천형처럼 가까운 이들을 하나씩 잃게 된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봄의 희망과 여름의 열정을 거쳐 정점에 오르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씩 정리해야 하는 가을과 겨울의 조락이라는 것.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꿈으로 이어져 있어 다시 봄은 오고야 만다는 것을 이 사극은 보여주었다.

여성사극의 정점, 추리극적인 장치를 활용한 연출, 미실이라는 전무후무한 거대한 캐릭터 등등. '선덕여왕'에 대한 화려한 수사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자잘한 외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덕여왕'의 마지막 몇몇 장면들은 말해준다. 이 사극이 보여준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는 저마다의 꿈과 그 꿈을 향해 하나씩 달려 나가 성취했지만 결국은 다시 돌려줘야 하는 우리네 삶을 제대로 포착해내고 있다. 사극이 시간을 다룬다면 이러한 반복되는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는 사극이 결국에는 도달해야 할 길이 아닐까.

봄에서 겨울 사이, 이 사극 속에서 어떤 이는 대업을 꿈꾸었고 어떤 이는 작은 행복을 꿈꾸었으며 어떤 이는 권력을 탐하였고 어떤 이는 사랑을 꿈꾸었다. 시간이라는 도저한 물결 위에서 그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우리는 결국 '불가능한 꿈' 속에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설레고 누구에게나 두렵고 누구에게나 아픈 이 길 위를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이 사극은 "견뎌 내"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린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힘이 된다. 드라마가 반짝 반짝 빛나는 순간은 이처럼 삶의 한 자락을 잡아내 "삶은 다 그런 것"이라며 우리네 힘겨운 어깨를 두드려줄 때이다. 이 사극이 있어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우리는 설레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가상이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는 세계, '아바타'

"나는 세상의 왕이다!" '타이타닉'으로 11개 부문을 휩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제 왕을 넘어서 세상의 창조자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영화 '아바타'에서 판도라라는 흥미로운 세상을 창조해낸다. 카메론의 상상 속에 만들어진 이 세상은 그 속을 채우고 있는 자연, 즉 생물이 지구와는 다르지만, 그 작동방식은 지구를 그대로 닮아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과 그 속에 우글거리는 동식물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비라는 종족은 그 외관이 지구와는 완전히 다르지만(심지어는 공중에 떠있는 산도 있다!), 그 시스템은 아마존의 생태를 연상시킬 만큼 유사하다. 이 영화가 식민지 개척시대에 제국이 자행한 원주민 학살의 역사를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 생태의 방식이 같기 때문이다.

만일 이 판도라라는 세계가 가진 유사한 설정에 지나치게 천착한다면 이 영화의 일면만을 볼 가능성이 높다. 즉 '늑대와 춤을' 식의 스토리, 원주민에 동화되어가는 식민지 침략자의 이야기 정도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세계를 떠올린다면 실로 영화가 가진 잡식성에 실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거대목의 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고, '천공의 성 라퓨타'의 날아다니는 대지에 경탄했던 적이 있으며, '원령공주'의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느낀 적이 있다. '아바타'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우리가 일찍이 콘텐츠 속에서 보았던 많은 세계들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단지 이것뿐일까. 유사한 배경설정과 익숙한 스토리가 '아바타'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아바타'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렇게 상상으로 축조된 세계가 그토록 리얼하게 그려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실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은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게임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반신이 마비된 제이크 설리(샘 웨딩톤)는 우주선의 긴 수면캡슐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판도라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의 아바타와 '접속'하고 그 아바타를 통해 그 세계를 활보하고 다닌다. 이 설정은 게임 과정의 인터페이스를 완벽하게 재연해 보여준다. 그것은 가상세계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기 위한 워밍업인 셈이다.

게임의 가상현실은 그 몰입도가 높아지면 '매트릭스'가 일찍이 보여주었던 장자몽 같은 꿈의 재해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이크가 잠이 들 때 아바타가 깨어나고, 아바타가 잠이 들면 제이크가 깨어나는 구조는 어느 것이 꿈이고 현실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제이크가 점점 나비 종족의 세계와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가상현실이 가상에서 시작해 현실감으로 이어져가는 그 몰입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꿈 같은 세계(물론 카메론의 꿈일 것이다)가 그저 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실감을 주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3D의 세계가 정교한 탓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만큼 우리가 게임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같은 현실을 모사한 가상세계 자체에 익숙해진 탓이기도 하다.

그 곳은 물론 현실세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낯선 새로운 세계도 아니다. 이 가상세계 속에는 무수한 콘텐츠들과 원형적인 문화들이 뒤섞여 나타난다. 즉 문화원형이 가진 세계들을 가져와 재해석하면서 만들어진 세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공간이 자연과 과학, 신화와 역사, 동양과 서양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은 이 수많은 문화원형들을 한 세계 속에 뒤섞어 놓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냈기 때문이다. '아바타'의 판도라라는 가상공간 속에는 이러한 다양한 문화원형의 스토리와 설정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특이한 것은 이 꿈 같은 가상공간이 디지털화된 네트워크 속의 세상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나비족들이 머리 끝을 연결해 자연과 교감하는 장면은 '접속'의 이미지가 강하고, '신성한 나무'는 이 판도라의 세계를 움직이는 슈퍼컴퓨터 같다. 종족들이 서로 손을 잡고 의식에 참가하는 모습은 집단적인 접속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세계 속에서 슈퍼컴퓨터 같은 신성한 나무는 따라서 그 속의 생명체들을 움직이게 하는 대지모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네트워크 위에 만들어진 이 판도라라는 신세계는 게임의 세계이면서 애니메이션 등의 콘텐츠를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그 판타지의 세계를 끌어 모아 재창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본 없는 복제의 시뮬라크르를 잘 보여주는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가상이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는 세계. 이 게임과 현실이, 꿈과 현실이,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판도라라는 세계는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모사한다는 점(원본 없는 복제로서)에서 3D가 가진 리얼리티의 한계를 손쉽게 넘어선다.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의 모습으로 모험을 하기 때문에, 그 3D 인물 애니메이션은 실제 인간의 모습과의 비교를 허용하지 않는다. 현실을 3D 기술로 재현하기보다는 가상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내는 것. 이것이 '아바타'가 가상현실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혹자는 이 작품 속의 세계가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것들이고, 이 작품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이미 고전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이 영화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영화가 콘텐츠라는 상상의 공간을 재료로 해서 재탄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달리 보일 것이다. 지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대가 아니라, 이른바 '문화원형'을 연구해서 그것들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해내는 시대다. '반지의 제왕'이 유럽 북구의 수많은 신화들에서 이야기를 따왔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일본의 많은 민담과 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익숙한 이야기들의 조합을 통한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현시로서의 실감나는 세계의 구축을 '아바타'가 꿈꾸었다는 점이다. '아바타'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 그것이 제공하는 익숙한 스토리텔링과 익숙한 가상의 세계들(게임이나 영화 같은) 속에서 현실감을 느끼며 즐길 수 있게 된다. '아바타'가 간파해낸 것은 우리가 이미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감을 주는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것이다. 제이크 설리가 아바타와 접속하면서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또 어떤 존재가 진짜 자신인지 헷갈리게 되는 상황은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매일 느끼는 것이면서 어쩌면 앞으로 영상이 우리에게 제시할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제이크의 선택이 현실이 아닌 가상에 있었다는 것. 카메론 감독이 연 것은 바로 이 현실과 가상이 공존하는 '판도라의 상자'다.

'아마존의 눈물',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인가

MBC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 프롤로그 '슬픈 열대 속으로'가 살짝 보여준 속살은 실로 시선을 뗄 수 없는 문화적 충격과 이국의 자연이 주는 경이의 연속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옷 한 가지 걸치지 않고 살아가는 자연 그대로의 원주민들의 모습이었다. 마치 에덴을 빠져나오기 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거리낌 없는 모습. 하지만 원시 그대로의 몸에 옷을 걸쳐 입고 활 대신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서는 문명의 바람을 쐰 흔적이 역력한 몇몇 원주민들의 모습은 작금의 아마존이 무엇으로 병들어가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라는 인류학의 기록을 통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했듯이, '아마존의 눈물'은 문명인의 눈에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야만의 모습을 그저 야만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곳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동식물에 이르는 생명들의 삶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경이롭고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야만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 삶 속으로 파고드는 질병 같은 문명이라는 것을 말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이식된 질병은 원주민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 문명의 욕망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은 이들의 삶의 터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마존의 눈물'이 그저 아마존이라는 지역을 포착하는 자연 다큐멘터리와 다른 지점은 이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그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모습을 병치해 보여줌으로써 환경 파괴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환경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진짜 여타의 환경 다큐멘터리와 다른 지점은 이러한 아마존의 실상을 알려주는 카메라의 시선이 그 곳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이야기에 머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에서 '로봇다리 세진이'를 연출한 김진만 PD는 당시 아마존으로 떠나기 전, '아마존의 눈물'은 자연 다큐이자 환경 다큐이면서 그 곳의 인간을 담아내는 휴먼 다큐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존에서 힘겨워하는 원주민들의 삶을 몇몇 인물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는 방식은 크게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강변하지 않아도 그 안타까운 아마존의 변화를 실감하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 간염으로 죽을 날을 앞두고 어린 아들에게 사냥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이야기나, 부모에게 버려져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어린 아이가 "날이 저물 때면 자꾸 슬퍼진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국의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이 다큐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삶에 공감하게 될 때, 아마존이 처한 문제 또한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는 것.

프롤로그인 '슬픈 열대 속으로'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아마존을 취재하기 위해 원시의 밀림 속으로 들어간 제작진들의 고생담이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결국을 구역질을 해대고, 호의로 베풀어주는 코담배를 고통스럽게 받아주는 모습들, 그리고 해충들의 공격으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제작진들이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는 그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생고생에서도 버텨내게 해주었을까.

압도적인 아마존이라는 자연이 주는 어떤 숭고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자연이 파괴되어 간다는 안타까운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그 곳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을 파괴한 문명의 야만을 끝내 고발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생고생을 마다않는 제작진들의 모습은, 이 경이로우면서도 충격적일 수 있는 영상을 마주하는 우리네 도시의 문명인들의 눈에도 그 자체로 그네들의 삶에 대한 강렬한 공감으로 다가온다. 아마존이라는 먼 거리까지 달려가서도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때론 파괴적인 문명의 모습이기도 하고, 때론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마존의 눈물'은 자연과 인간, 문명과 야만 사이로 나누어진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떤 소통을 꿈꾸는 다큐멘터리다.

 메시지보다는 장르적 재미를 추구한 '아이리스'

'아이리스'가 종영했다. 단 20부작으로 두 달여 정도의 여정이었지만 이 작품이 남긴 여운은 꽤 크다. 아마도 그 빈 자리는 한 동안 우리의 뇌리 한 구석에 남아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현장 속에서 흔들리며 짧게 짧게 편집된 숨 가쁜 영상들이 만들어낸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드라마 체험은 우리에게 그토록 새로운 것이었다. 감정선에만 깊게 박혀있던 우리네 드라마의 두 발은 '아이리스'를 통해 저 미드들이나 하는 것이라 치부했던 팽팽한 긴장감 속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경험이 단지 실험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리스'가 보여주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것은 '아이리스'가 취한 철저한 오락드라마로서의 자세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아이리스'는 어떤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런 드라마라고 보기 어렵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남북한이 공조해 국가를 뛰어넘는 아이리스라는 새로운 주적에 대항한다는 정도.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각별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도 아니다. '아이리스'는 메시지를 추구하기보다는 블록버스터 드라마가 갖추어야할 장르적 재미를 충실히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미드식의 스파이액션물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르적 재미를 우리 드라마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고, 그것에 우리네 드라마가 갖는 멜로적 감성을 잘 버무림으로써 이 이국의 콘텐츠를 우리 식으로 풀어냈다는 것이 이 드라마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다. 스토리는 많은 장르들 속에서 이미 본 듯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상황 속에서 전개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냉전시대가 지나면서 스파이 액션물들은 사라져 갔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분단국가가 우리나라라는 점은 여전히 이 장르가 유용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연출은 스파이액션물이라는 오락 장르가 가진 문법에 충실하다. 시종일관 긴장감이 유지되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며 이야기는 계속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여기에 다른 점이라면 우리 식의 멜로가 적절히 포진한다는 점이다. 최승희(김태희)와 김현준(이병헌)이 일본의 아키타현에서 만들어낸 멜로의 힘은 드라마 전반에 걸쳐 흐르면서 급박한 액션 사이 사이를 채워 넣는다. 겉으로 드러난 멜로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싸우는 지도 모르는 최승희나 김현준 그리고 진사우(정준호)의 액션은 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조직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사적인 멜로와 부딪칠 가능성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마치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듯, 숨겨놓은 조직의 비밀은 이 드라마가 움직이는 추동력이 된다. 이 드라마의 매력적인 인물들이 끊임없이 액션의 상황 속에 들어가는 이유가 비밀에 붙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액션에 빠져들면서도 궁금증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해간다. 그리고 이 아이리스라는 조직의 비밀은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성에 김현준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김현준의 죽음으로 안타까운 멜로는 여전히 남았고, 아이리스라는 조직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 역시 그대로 남아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충분한 재미를 주었지만 거의 출발선 상에 다시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대로 시즌2를 만든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비밀에 싸인 조직이라는 추동력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이고, 그 위를 달려 나갈 새로운 인물들과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아이리스'는 계속해서 시즌을 이어갈 수 있다.

지금껏 우리는 드라마라고 하면 지나치게 결과에 몰두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과보다는 과정의 재미에 충실하다. 결과에 치중하는 드라마가 메시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과정에 충실한 드라마는 순간순간의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장르 영화가 갖는 사고방식이다. 몇 시간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장르적 즐거움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것. '아이리스'는 이것이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시즌2를 통해 그 즐거움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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