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아버지의 집’과 KBS ‘경숙이 경숙아버지’

불황이 드라마 세상에 가져온 것 역시 현실과 다르지 않다. “길면 살 것이요, 짧으면 죽을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드라마 버전으로 읽히는 우리네 단막극의 실종은 그래서 더더욱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가난한 드라마, 단막극들은 이제 이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드라마 경제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힘겨운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듯,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 꽤 괜찮은 선전을 한 두 가난한 드라마가 있어 주목을 끈다. 바로 SBS 2부작 ‘아버지의 집’과 KBS 4부작 ‘경숙이 경숙아버지’다.

먼저 눈을 의심하게 하는 건 이 두 가난한 드라마가 거둔 시청률이다.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13.5%, ‘아버지의 집’은 무려 19.6%의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AGB 닐슨). 보통 16부작 미니시리즈에서도 높은 시청률이라 할 만한 이런 기록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짧은 단막극에서 가능했던 걸까. 먼저 이 두 작품은 여타의 장편 드라마들이 갖추고 있기 마련인 자극적인 소재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두 편의 드라마들에 대중들이 공감을 갖게 된 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그 드라마가 전해준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올해 1월에 방영된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가난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적인 정을 다루었다. 경숙(심은경)의 아버지인 조재수(정보석)는 집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나도는데, 그와 악연관계에 있는 박남식(정성화)이 경숙의 집에 기거하며 경숙모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경숙의 가족들이 친 아버지인 조재수보다 가족에 헌신적인 남식을 더 따른다는 것. 결국 극단적 가난의 상황에서 조재수와 박남식의 악연이 차츰 정으로 바뀌어나가는 과정을 이 드라마는 특유의 해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또 ‘아버지의 집’은 1998년 IMF서부터 2009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연도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불황 속에서의 우리네 아버지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주인공인 아버지 강만호(최민수)가 스턴트맨 대역배우라는 사실은, 이 드라마가 담고 있는 아버지가 경제의 그늘 아래에서 소외된 서민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배운 것 없어 몸으로 벌어먹고 살면서도 자신의 손가락을 꼭 쥐어주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 힘겨운 나날들을 버텨낸다.

하지만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1998년부터 2009년 간 무려 11년이 지났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된다. 아들은 친엄마가 미국으로 데리고 가고, 그는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의 힘겨운 삶을 알게 되고 “이것이 전부 자기 탓”이라고 말할 때, 강만호가 “네 덕분에 살 수 있었어.”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아마도 모든 아버지들은 그 진심을 읽었을 것이다. 가난해서 배운 게 없어서 오로지 온 몸으로 사랑하는 법밖에 모르는 강만호의 마음은, 불황 속에 지치고 허덕인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일 테니까.

공교롭게도 이 두 편의 가난한 드라마는 이처럼 그 배경 속에 불황의 풍경을 그려 넣고 있다. 그 가난 속에서도 놓지 않는 희망을 진심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함으로써 대중들과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진심은 상업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단편 혹은 중편의 이 가난한 드라마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연장에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 생태계 속에서 이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단막극들의 울림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2009년 단막극이 사라진 세상 속에 남겨진 두 편의 가난한 드라마가 주는 진심이 2010년 단막극 부활의 희망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빵꾸똥꾸'에 깃든 사회, 그 의미

난데없는 '빵꾸똥꾸(?)'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악동인 해리(진지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이 '빵꾸똥꾸'는 올해의 유행어가 될 만큼 장안에 화제가 됐다. 그런데 지난 22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러한 용어가 폭력적이고, 필요이상 반복적으로 사용됐다며 해당 프로그램에 권고 조치를 했다. 도대체 왜 이 같은 용어에 대해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나온 걸까.

먼저 사전에도 없는 '빵꾸똥꾸'가 무얼 의미하는 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시트콤의 내용에 따르면 그 유래는 해리가 어렸을 때 말을 좀 늦게 하게 됐는데, 할아버지인 이순재가 방귀를 뀌는 소리를 듣고는 첫 마디를 '빵꾸똥꾸'라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 그 후로 뭔가 심사가 뒤틀리는 것(행위나 사람 모두 통틀어)을 대하면 해리는 이 말이 습관적으로 터져 나온다. '빵꾸똥꾸'는 적어도 해리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의 모습은 그래서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어쨌든 욕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욕은 그 집에 새로 들어와 식모 생활을 어렵게 하며 살아가는 세경과 신애 자매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빵꾸똥꾸'는 해리가 처음 신애의 뺨을 올려 부쳤을 때 느껴지던 그 충격처럼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어린 아이가 어쩌면 저렇게 독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충격은 조만간 사라져갔다. 그리고 차츰 독하기만 한 아이라고 여겨졌던 해리는 역시 아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빵꾸똥꾸'를 외치면서도 하루만 신애가 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고, 신애가 쓰는 동화를 읽기 위해 신애가 하는 일을 도와주며 빨리 쓰라고 욕을 해대는 해리는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아이가 이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에서 이제는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해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해리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에서 해리의 '빵꾸똥꾸'가 의미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아이가 입에 담는 욕이 보기 좋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보기 좋지 않은 것, 그것은 사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마저 욕을 하게 만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아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빵꾸똥꾸'는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의 비뚤어진 부분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가 '빵꾸똥꾸'를 외칠 때마다 이제는 심지어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욕이 가진 언어적인 기능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 욕과 배설의 즐거움이 같다는 것은 어떤 억압을 대리해 풀어주는 그 기능적 유사함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촌철살인의 욕은 심지어 문학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빵꾸똥꾸'가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풍자를 웃음의 재료로 삼는 시트콤으로서는 꽤 우회적인 괜찮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빵꾸똥꾸'를 듣고 빵 터졌던 분들은 그 이유가 이 말이 가진 표피적인 의미 이상의 뉘앙스를 순간 느꼈고 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무비판적으로 해리의 행동을 따라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아이들의 리얼한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붕 뚫고 하이킥'은 정직하게 그런 변화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 혹은 아이들의 성장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은 ‘선덕여왕’, 사극의 향방은?

1999년 ‘허준’에서 비롯된 사극의 퓨전화는 2003년 여성사극 ‘대장금’을 통해 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성사극의 등장과 성공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사극의 시청층이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렸고, 여성들이 즐기는 사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또한 선 굵은 남성사극들(주로 전쟁사극이나 정치사극)과 달리, 섬세함이 주 무기가 되면서 여성 사극 작가들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대장금’, ‘선덕여왕’의 김영현 작가가 대표적이고,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대왕세종’의 윤선주 작가, ‘이산’, ‘동이(2010년 방영예정작)’의 김이영 작가 등이 모두 여성 사극 작가들이다.

여성들이 그리는 여성 사극은 당연히 여성성을 담아낸다.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고, 남성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그 남성 속에는 여전히 여성성이 들어가 있다. 사극은 인물의 심리나 사건 전개가 보다 디테일해졌고, 감성 또한 풍부해졌다. 일련의 여성사극들은 과거에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의 뒤안길에 서있는 여성들을 역사로 끌어냈다. ‘대장금’이 그랬고, ‘황진이’가 그랬으며, ‘이산’(이 작품은 정조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모습과 성송연이라는 여성이 역사 위로 올라왔다)이 그랬다. 이러한 여성 사극 속의 인물들이 성장드라마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억압받는 존재가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성장은 여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2009년 여성사극들은 이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처럼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남성들을 거느리는 여성 카리스마의 등장은 그간 여성사극들이 보여준 일련의 자신감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까지 올라간’ 이 여성들의 영웅담을 담은 작품들이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는 야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천추태후’와 ‘선덕여왕’은 결이 달랐다. ‘천추태후’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지만 남성적 세계를 반복한 ‘무늬만 여성사극’의 한계를 드러냈다면, ‘선덕여왕’은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고현정)과 덕만(이요원)이 때론 대결하고 때론 토론하면서 보여준 여성적 카리스마의 세계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까지 매료시켰다.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는(혹은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야 되는) 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성별을 넘어서 이 사극이 보여주는 여성적 카리스마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실의 억압적이면서도 적까지 끌어안을 줄 아는 포용력은, 남성적 사회의 잔재와 여성적 세계관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사람들을 꿈꾸게 하고 때론 모성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덕만의 모습은 온전한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덕만이 그 여성적 카리스마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리네 여성 사극 역시 어떤 정점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사극이 일궈온 일련의 성장곡선이 여성사극 속에서 여성 주인공이 거치는 성장과정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여성사극에서 주인공의 성장이 어떤 정점에 올라갈 때, 그 사극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리막길을 밟았다는 것은, 이제 정점에 서게 된 여성사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어쩌면 성별은 무의미해졌고, 오히려 여성사극이 가진 일련의 장점들, 예를 들면 성장드라마나 섬세한 심리묘사, 혹은 입체적인 캐릭터 같은 요소들이 오히려 여성적인 강박을 버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사극의 진화가 시작될 거라는 점이다. 여성들만큼 남성들도 섬세하게 그려질 것이고, 왕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인물들이 신분적 위계에 갇히던 과거와는 달리, 동등한 눈높이에서 그려질 가능성이 높다.

퓨전사극으로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여성사극으로 신분과 성별이 가진 한계를 넘어버린 사극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스타일을 입은 장르화의 길이 되기도 하고(‘추노’가 대표적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중세와 근대가 섞여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되기도 하며(‘제중원’), 여전히 여성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여성의 성장 드라마(‘동이’)가 되기도 한다. 2009년 ‘선덕여왕’이 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음으로써, 2010년의 사극은 좀 더 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속도에 대한 강박이 완성도를 망치다

뭐가 그리도 급했던 걸까. 이 폭주기관차 같은 '천사의 유혹'이라는 드라마는 도대체 왜 그리도 달리고 또 달렸던 걸까. 만일 속도에 대한 강박이 없었다면 이 드라마의 완성도는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복수극에 복수극을 넣고, 그 속에 가족관계와 연인관계를 거미줄처럼 엮어놓은 이 드라마는 만일 속도를 조금 줄여, 감정선을 충분히 살려놓고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에 디테일을 살릴 수 있었다면 꽤 괜찮은 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한 여인이 갖게 된 불륜과 아이에서 비롯된 이 불운한 가족사는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결국 그 칼날은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는 상투적이지만 고전적인 주제를 향해 달려간다. 신우섭(한진희)의 아내인 조경희(차화연)는 남편 몰래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주아란(이소연)의 부모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는 그 가책으로 주아란의 동생인 윤재희(홍수현)의 후원자가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조경희의 아이였던 남주승(김태현)은 자신을 버린 모친에게 복수하려 하고, 주아란 역시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 반면 윤재희는 조경희의 아들인 신현우(배수빈)와 가까워지면서 주아란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멜로가 엮어지게 되자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가족관계와 원수지간, 그리고 멜로관계(여기서 멜로 역시 복수를 위한 것으로 위장되기도 한다)가 엮이면서 복수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즉 주아란은 신현우와 그 가족을 파탄내려 하지만, 신현우와 연인관계이자 그녀의 친동생인 윤재희는 그것을 막으려한다. 또 주아란이 조경희를 죽이려고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연인인 남주승은 자신의 어머니인 조경희의 죽음을 막으려고 나선다. 이것은 신현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주아란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언니이고, 또 남주승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누군가를 위한 복수는 결국 관계라는 줄을 타고 그 칼날이 자신에게도 돌아오게 된다.

이 드라마가 결국 복수의 끝을 자살로 끝낼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모든 관계의 갈등은 누가 응징을 하고 당하는 것으로 끝내지지 않는다. 결국 모든 일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조경희와 주아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복잡한 관계그물 속의 문제들이 해결된다. 지나치게 엮어놓은 점이 없잖아 있지만, 그 관계그물이 꽤 잘 짜여진 것 역시 사실이다. 복수극으로서는 그 특유의 재미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의 묘미는 이 복잡한 그물 속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드라마의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인물들은 조급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섣불리 모든 것을 결정하고 오해하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원인이 된다. 즉 비극적인 끝없는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물들이 쉬지 않고 오해의 상황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최대의 약점이다. 극적 장면에 대한 강박은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하지 않고 인위적인 손길(작가의 손길이다)로 움직이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늘 극적 장면이 저 앞에 달려가고 있는데, 인물들의 감정은 저 뒤편에서 뒤늦게 따라오는 격이다.

결국 속도와 극적 상황에 대한 강박은 인위적인 작가의 개입을 만들고 이것이 결국 개연성을 망치는 결과로 이어진다. '천사의 유혹'은 속도감이 장점으로 내세워지지만 결국 그 속도감에 대한 강박이 단점으로 작용했다. 드라마에 있어서 속도감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속도를 마구 높이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드라마의 속도감이란 군더더기가 없는 선에서 이루어져야지, 아예 속도를 위해 살까지 발라내는 것은 결국 완성도에 문제를 일으킨다.

만일 속도를 조금 늦추고(그렇다고 질질 끌라는 얘기는 아니다)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에 디테일을 살렸다면 '천사의 유혹'은 꽤 괜찮은 드라마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가족과 엮어지는 복수극이라는 소재는 상투적일 수 있지만, 그 복수극에 복수극을 섞어서 그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또 다른 시도가 될 수도 있었다. '천사의 유혹'의 종영에 즈음에 아쉬운 점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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