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반전된 '그대 웃어요', 그 웃음을 회복한 이유

SBS 주말드라마, '그대 웃어요'는 제목이 알려주듯 아예 내놓고 웃음을 표방한 드라마다. 하지만 6회가 지나는 동안, 이 드라마는 꽤 웃음의 포인트를 집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체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웃음의 포인트는 건설업 회장이었다가 졸지에 망하게 되어 길바닥에 나앉게 된 서정길(강석우)과 그 가족들이 그의 운전기사였던 강만복(최불암)의 집에 얹혀산다는 그 설정에 있다. 하지만 좀체 웃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얹혀사는 서정길과 그 가족들이 염치라는 걸 모르는 인간들로 그려지면서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

서정길은 여전히 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강만복을 함부로 하대하고, 얹혀사는 주제에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뻔뻔한 인물. 불황으로 가뜩이나 빈부 격차에 대해 민감한 현재, 이런 부를 앞세워(심지어 그 부조차 사라져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지만), 타인을 지나치게 낮게 바라보는 시선은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사업이 망했다고 결혼식날 바로 파혼을 선언하는 장면은 아무리 과장되게 연출되었다고 해도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만큼 그 상황들은 웃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현실에 여유가 있는 이들의 눈에는 웃음을 줄 수 있었을 지 몰라도, 현실 자체가 팍팍한 서민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서정길의 맏아들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서성준(이천희)이 거의 알거지로 귀국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강만복은 이제 서정길을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되고, 도련님이라 부르던 호칭 대신, "야 서정길이!"하고 호통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드라마는 이제부터 강만복이라 대표되는 서민들의 대변자가 돈푼깨나 만졌다는 졸부들에게 한 수 가르치는, 본래하려고 했던 본격적인 제 이야기의 궤도에 들어서고 있다.

부자랍시고 사람 대하기를 하인 대하듯 해왔던 서정길과 그 가족들은 이 인간냄새 풀풀 나는 집안에서 서민들의 삶을 통해 인간적인 삶을 배워나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찬란한 유산' 이후 주말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한 고전적인 이야기의 현대적 재해석이 이 드라마에도 깃들어 있다. '찬란한 유산'이 '위대한 유산'의 재해석이라면, '그대 웃어요'는 어찌 보면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 같고, 어찌 보면 '양반전'의 재해석 같은 풍자의 칼날이 숨겨져 있다. 이 위에 빈부 격차를 뛰어넘는 사랑의 이야기 역시 고전적인 맛이 있다.

고전의 재해석이 갖는 익숙함이 있기 때문에, 그 위에 양념처럼 얹어지는 웃음의 코드는 그만큼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강만복의 변신을 통한 국면전환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 드라마가 제목 값을 하게 될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서정길의 행동과 그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청자들에게 작금의 불쾌한 우리 현실을 과장된 틀을 통해 환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갖는 판타지를 강화하기 위해 먼저 현실의 각박함을 드러내주는 방식.

그렇다면 드라마가 내놓고 표방하듯이 이젠 웃을 수 있을까. 앞으로 전개될 '그대 웃어요'에서는 현실의 세태가 도마 위에 올려지는 유쾌한 웃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 풍자의 웃음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까지 전해줄 수 있을까. 그것을 통해 드라마가 주는 웃음이, 좀체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는 각박한 현실에도 어떤 웃음을 던져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이 드라마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밤'의 부활, 폐허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하 일밤)'가 결국 특단의 조치를 감행했다. 현재 하고 있는 '오빠밴드'와 '노다지', 두 프로그램 모두를 폐지하기로 한 것. 물론 '오빠밴드'는 폐지를 반대하는 팬층의 목소리가 만만찮기 때문에 실제로 폐지될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나올 게 나왔다는 반응들이다. 일요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시청률 3%를 밑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동시간대의 경쟁 프로그램이 막강하다고 해도 말이다.

먼저 '일밤'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그 안이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밤'은 전신인 '일요일 밤에 대행진'에서부터 현재까지 무려 2백여 개가 넘는 코너를 선보였던 일요일 예능의 명실공히 최강자였다. 공개코미디와 콩트코미디가 주류를 이루던 80년대 후반 이 프로그램은 버라이어티쇼를 정착시키며 새로운 예능의 다양한 실험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예능에 불어온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경향을 '일밤'은 재빠르게 간파해내질 못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효시가 되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기에 중복되는 콘셉트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한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창조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형식들을 창출해낸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의 일요일 침공은 '일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부랴부랴 이에 맞서는 버라이어티쇼들을 내놓았지만 이미 구축된 아성 앞에서는 저마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대망'은 큰 희망을 갖고 내놓은 제목이 무색하게 '크게 망하기' 시작한 '일밤'의 전조가 되었고, 이어 '퀴즈 프린스', '공포영화제작소', '힘내라 힘', '몸몸몸' 등이 거의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생겼다가 사라졌다.

문제는 그 형식들의 식상함 혹은 지나친 낯설음이다. 어떤 것은 너무 낯설어 그 웃음 포인트에 적응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리게 되었고(강력한 경쟁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어떤 것은 너무 식상해(이미 경쟁 프로그램에서 했던 것들이니까!)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잦은 프로그램의 교체는 더더욱 시청률 하락을 부추겼다. 고정팬을 만들고 그 위에 차츰 팬층을 부가시켜야 하는데 될 만하면 사라지고 심지어 어느 정도 성공한 형식은 타 시간대로 독립편성되어 내보내니 '일밤'은 산고만 치르다 지쳐버린 산모꼴이 되어버렸다. '우리 결혼했어요'나 '세바퀴'는 그 참신한 실험적 형식이 '일밤'의 새로운 얼굴로 충분한 자질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저 살길을 찾아가버린 자식이 되었다.

경쟁 프로그램인 '1박2일'과 '패밀리가 떴다'가 물론 형식 상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소재, 즉 여행이라는 소재를 갖는 버라이어티쇼라는 점은 '일밤'에게 더 큰 짐을 지운다. 이들 프로그램들이 대중들에게 이 시간대가 여행 버라이어티를 보는 시간대라는 인식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일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고 여행 버라이어티를 또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또 따라한다는 비판은 물론이고 결국 후발주자라는 인상만 남길 뿐이니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주병진, 이경규로 이어지는 '일밤'만의 대표 MC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1박2일'의 강호동,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에 대항할만한 MC가 '일밤'에는 없다. 결국 프로그램 형식도 선점하지 못했고, 내놓는 것마다 식상한데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일요일 주말 저녁 시간대를 여행 버라이어티의 시간으로 만들어낸 강력한 경쟁 프로그램들 앞에서 이렇다 할 대표 MC가 없는 '일밤'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인 셈이다. '오빠밴드'와 '노다지'의 폐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오빠밴드'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프로그램으로 보였지만, 헝그리 정신이 잘 보이지 않는 점이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물론 그들도 힘겹게 촬영에 임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경쟁 프로그램들이 보이는 야생에 가까운 생고생 앞에서는 무색해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이미 성장이 다 되어있는 멤버들(게다가 대부분 가수라는 점)은 이 성장 버라이어티의 어떤 한계점을 만들어낸다.

'일밤'의 침몰 그 원인은 경쟁 프로그램의 선전 때문으로만 치부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거의 총체적인 부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건물에 몇 개 기둥 새로 세우는 것으로는 힘만 부칠 뿐, 무너지는 건물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예 이럴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를 다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일 것이다. 필요하다면 '일밤'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조차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밤'은 즐거워야할 그 일요일 밤이 고통의 시간으로 되어버린 현재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호우시절', 멜로를 넘어 삶을 관조하다

"그땐 참 좋았었지"하고 말하는 자의 눈빛은 쓸쓸하다. 시간은 그 좋았던 시절이 늘 좋은 시절이 되게 놔두질 않는다.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시간은 심지어 그 좋았던 시절의 기억마저 마모시킨다. 그러니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그 무차별로 흘러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허진호 감독의 다섯 번째 멜로, '호우시절'은 바로 이 시간을 응시하면서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좋았던 시절을 현재진행형으로 돌려놓는 영화다.

영화는 출장을 가게 된 박동하(정우성)가 이제 막 중국 청두에 내린 비행기 안에서 시차에 맞게 시계를 돌려놓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앞으로 벌어질 시간여행(?)에 대한 짧은 암시다. 그 여행은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는 휴식 같은 여행이자, 두보의 시집을 들고 가는 사색의 여행이자, 그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과거의 좋은 기억 같은 설렘의 여행이면서, 그 위로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감정의 폭우 같은 여행이다.

박동하가 청두 땅에서 우연히 메이(고원원)를 만나 보내게 되는 3박4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산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밀도를 보여준다. 그 3박4일 속에는 박동하와 메이가 과거로 묻고 살아가는 미국 유학 때의 좋은 시절이 들어있고, 그 이후 어찌 어찌 하다가 시를 포기하고 직장생활에 안착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 박동하의 시간이 들어있으며, 중국으로 돌아와 불행을 겪고 여전히 그 불행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메이의 시간이 들어있다.

영화는 이 중첩된 시간들을 박동하의 시선으로 관조하면서 삶의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을 살짝 보여준다. 박동하와 메이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공간이 메이가 가이드로 일하는 두보초당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두보는 이처럼 이 영화의 공간이면서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시간이고, 또 그 공간과 시간 위에 흐르는 삶에 대한 관조이기도 하다. '호우시절'이라는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인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에서 따온 것이다.

이 화두 같은 싯귀는 메이가 말장난처럼 동하에게 하는 질문, 즉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걸까."라는 말과 조우하면서, 이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의 감정을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연결시킨다. 허진호 감독의 멜로가 여타의 멜로와 다른 점은 그 속에 남녀 간의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랑을 그려 넣으면서도 그 위에 삶을 관조하는 시간을 부여한다는 점일 것이다.

'호우시절'은 그 멜로를 통한 삶의 관조라는 어찌 보면 균형 잡기 힘든 그 줄타기를 가장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영화로 보인다. 마치 출장길에서 잠시 일을 벗어나 여유로운 여행자의 마음을 만끽하는 자의 그것처럼 이 영화에 대한 허진호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어깨에 힘을 뺀 편안함이 묻어난다. 영화 내내 정우성과 고원원이라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배우들과 함께 편안하고 달콤한 여행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허진호 감독의 편안해진 영화의 걸음걸이 탓이다.

이 선남선녀의 자연스러운 만남과 헤어짐 위에서 두보의 시는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삶에 대한 어떤 울림을 전해준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그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서서 같은 언어를 소통하며 사랑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한때 과거의 것으로 치부해두고 마모시키고 있었던 바로 그 '좋은 때'라는 것. 즉 좋은 비가 때를 알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때가 그 비를 좋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호우시절'은 바로 그 좋은 때로 우리를 인도해, 일상의 시간이 갉아버린 그 촉촉한 감성의 시간을 충분히 우리의 머리 위로 뿌려주는 영화다. 그러니 이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여행은 우리의 좋은 때를 떠올리게 하는 여행이자, 현재를 좋은 때로 바꿔주는 여행이기도 하다.

신조어 속에 숨겨진 세태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가 방영될 때, 우리는 초식남이라는 신조어를 듣게 되었다. 초식남. 풀만 먹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위키디피아의 정의를 보면, 초식남은 '남성다움(육식적)을 강하게 어필하지 않으면서, 주로 자신의 관심분야나 취미활동에는 적극적이나 이성과의 연애에는 소극적인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초식남과 함께 고개를 든 신조어가 건어물녀다. 이 신조어는 2007년 방영된 일드 '호타루의 빛'의 주인공인 호타루라는 여성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일 잘하고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연애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퇴근하고 나면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대충대충 살아가는 싱글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연애세포가 말라 건어물처럼 되었다고 해서 건어물녀라고 불린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엉남, 토이남, 품절남, 엣지녀, 인상녀, 짐승남... 이 끝없는 신조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 양상이다. 그리고 그런 신조어들 옆에는 늘 연예인들의 이름이 달라붙는다. 오지호는 대표적인 우엉남이고, 유희열은 토이남, 빅뱅의 탑은 짐승남... 이런 식이다. 신조어가 어떤 트렌드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연예인들은 어떻게든 이 신조어와 만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신조어가 붙는 연예인들은 뜨고 있는 연예인을 표상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세상, 정리가 필요해
이렇게 ○○남, ○○녀처럼 어떤 특정 성향을 가진 이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은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경향은 아니다. 과거에도 신세대, X세대, 와인세대 같은 세대를 지칭하는 신조어들이 있었고, 오렌지족, 낑깡족, 야타족 같은 족속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이 있었다. 깊게 들여다보면 그 신조어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것은 과거처럼 성별의 구분이 되어있지 않은 신조어들과 달리, ○○남, ○○녀 같은 최근 신조어들은 남성과 여성을 마치 성별 구분하듯 나누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또 이러한 신조어들이 한번 나오면 일정 기간 동안 홀로 트렌드를 유지하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거의 매일같이 새로운 신조어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먼저 남성과 여성이 나누어지는 양상은 그만큼 성별이 동등하게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낼 정도로 다채로운 성향이 구분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덧붙여지는 것은 ○○남, ○○녀 같은 용어들이 그 자체로 재미있는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신조어들은 현재 인터넷이라는 공간 속에서 특정 부류와 특정 성향을 분류하는 놀이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놀이성은 신조어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설명해준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왜 이런 놀이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인터넷이라는 공간으로 표면화 되는 사회의 복잡성이 그 원인을 제공한다. 물론 사회는 예전부터 복잡했지만,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다른 매체와 달리 복잡한 사회의 구석구석에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니 그 다양한 성향과 특징들이 몇 마디로 정리되고 구획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요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양한 별종들이 공존하는 세상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신조어로 정리되는 성향들이 갖고 있는 독특함이다.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조건 중 독특함이나 특별함은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그것을 듣고 신기하다거나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평범한 신조어는 그저 사장될 뿐이다. 초식남을 예로 들면 과거에는 이런 성향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남성이 남성다움을 어필하지 않고 연애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인물은 별종으로 여겨지곤 했다.

가부장적 사고관이 지배했던 사회는 다양한 성향을 배제하고 누구나 따르기를 요구되는 성향이 획일적으로 제시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런 과거의 별종들은 이제는 다양성의 품속으로 들어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심지어는 그 성향에 대한 공감대까지도 넓혀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초식남이나 건어물녀로 지칭되는 이들이 과거 신세대나 X세대처럼 다수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신조어가 구획하는 인물군들이 소품종 다수를 지칭했다면, 지금은 다품종 소수를 지칭하는 경향이 짙다.

즉 특이한 성향을 가진 소규모 집단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 특이한 성향에 대한 거부보다는 수용하는 자세가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양성의 추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인터넷은 이제 다채로운 인간군상들을 서로서로 뽐내듯 드러내고 또 인정하는 다양성 게임의 재미에 빠져있다는 것. 획일적인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것을 하나하나 깨부수는 이 작금의 다양성 게임이 주는 매력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조어, 시대를 읽는 기호 혹은 상품을 위한 포장
하지만 이처럼 다양성의 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신조어들을 그저 긍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해도 좋을까.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러한 발 빠른 마케터들의 상품 판매를 위한 성향에 대한 선점이다. 신조어는 때로는 자생적으로 생긴다기보다는 이해관계를 가진 특정인들에 의해 제시되고 배포되어 조장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신세대니 X세대니 와인세대니 할 때 그 용어들은 새롭게 부상하는 개성을 가진 이 세대들을 특정 감성을 가진 상품 마케팅의 영역으로 묶어두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상품의 구매가 멋져 보이는 세대로의 편입으로 이어지는 심리적인 효과를 유발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세대나 성향을 구획하는 신조어들이 가진 마케팅 경향은 지금에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이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인터넷에 한 신조어를 검색해보는 것이다. 초식남이나 건어물녀라고 치면 그 키워드를 가진 무수한 상품들과 회사들이 줄줄이 창에 떠오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조어들이 다양해진 것은 현재의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상품 마케팅 역시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해진 특정 세력들을 겨냥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즉 이 시대는 다양한 개성들에 맞추는 맞춤 생산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신조어는 이처럼 작금의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기호로서 존재하면서, 동시에 산업과 만나면서 거꾸로 사회에 제시되기도 하는 마케팅의 그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신은 가만히 있지만 어느 순간, 어떤 부류로 분류될 때 그것은 자신이 이미 어느 그물 속에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신조어가 갖는 다양성의 놀이에 빠지는 것은 긍정적일 수 있으나, 그 상품성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은 조심해야 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신조어를 표상하는 연예인이라는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연예인을 지칭하는 신조어는 그 시대를 읽어내는 기호로 읽히기도 하지만, 또 거꾸로 연예 비즈니스를 위해 만들어지고 조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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