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vs 우리 식의 범죄수사물

MBC의 새 월화 드라마, ‘히트’에 대한 호평과 혹평이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다. 한편은 ‘기대이상’이라 하고 한편은 ‘수준이하’라고 한다. 시청자게시판을 보면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캐릭터들도 공감이 간다는 의견과 함께, 이제는 더 이상 보기 싫고 심지어는 종영했으면 한다는 극단적인 의견까지 올라온다. 또한 주인공인 차수경 역을 맡은 고현정씨의 연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한편에선 털털한 연기 변신이 참신하다고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실제 경찰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는 의견도 보인다.

물론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얘기겠지만 똑같은 드라마를 가지고 이렇게 극명하게 의견이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요인은 ‘히트’가 갖고 있는 과도기적인 특성들 때문일 것이다. 올 들어 우리 드라마에서는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가 실험되고 있는 중이다. ‘하얀거탑’과 ‘외과의사 봉달희’를 통해 선보인 전문직 드라마는 새로운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들도 처음에 반드시 넘어서야 했던 산이 있었다. 그것은 전문직 드라마의 수요가 탄생한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와의 한판 대결이었다.

미드 vs 우리 식의 범죄수사물
‘하얀거탑’이 처음 맞닥뜨린 상대는 저 거탑처럼 높아 보였다. 이미 일본에서만도 여러 번 리메이크 될 정도로 검증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미 일드로 보았던 시청자들은 원작과 리메이크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김명민이라는 명배우가 있어 양쪽으로 갈린 시선을 우리의 ‘하얀거탑’으로 집중시키게 했던 점이다.

반면 ‘외과의사 봉달희’는 더 거센 상대를 만난다. 그것은 처음 ‘멜로가 섞인 전문직 드라마’라는 점에서부터 불거졌다. 으레 이 드라마도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아닐거냐는 추측들이 난무했던 것이다. 그 산을 넘어서자 이제 그 적이 분명하게 눈에 나타난다. 바로 ‘그레이 아나토미’다. 그리고 지금 그 바톤을 이어받은 ‘히트’가 맞닥뜨린 적은 ‘CSI’나 ‘24’같은 미드의 범죄수사물이다.

미드의 시시각각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설정들과 실제 현장을 방불케 하는 리얼리티에 익숙한 시청자들이라면 ‘히트’가 보여주는 스토리가 어딘지 약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미드에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히트’는 지금까지 보여줬던 여타의 드라마들과는 전혀 다른 참신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호평과 혹평이 나뉘는 갈림길이 다. 이것은 지금 ‘히트’가 처한 상황이며, 동시에 우리나라 전문직 드라마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감성적 드라마 vs 아드레날린 드라마
우리네 드라마가 지금껏 만들어왔던 것들은 대부분이 멜로드라마로 대변되는 감성적인 드라마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감성적인 드라마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류 바람이 거세지면서 우리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과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고개를 든 것이 일드였다. 일드는 똑같은 감성을 다루고 있었지만 그 표현은 달랐다. 눈물을 터뜨리는 우리네 정서와 달리, 일드에는 감추고 침묵하는 일본적 감수성이 있었다. 그것이 더 나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드라마들이 너무 자주 울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드는 세련되게 보였다.

우는 드라마들(멜로드라마)이 퇴진하면서 TV에 겨우 남게된 드라마는 논란만 잔뜩 있는 가족드라마(‘하늘이시여’나 ‘소문난 칠공주’ 같은)와 울지 않는 로맨틱 코미디(‘발칙한 여자들’이나 ‘환상의 커플’같은) 그리고 사극이었다. 그 어느 것도 눈물과는 그다지 거리가 멀었다(물론 억지로 짜낸 가족드라마의 가짜 눈물은 있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사극의 성장을 통해 예견된 ‘아드레날린 드라마’의 가능성이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아드레날린 드라마’에 가깝다. 주인공의 성장이나 미션의 완수, 복잡한 문제의 해결 등이 보는 이들을 흥분시키는 드라마다.

여기에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하얀거탑’은 본격 ‘아드레날린 드라마’의 새장을 열었다. ‘히트’는 그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 다른 것이 끼여든다. 우리만의 독특한 정서 때문인지, 지금까지 해오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 건지, 혹은 전문직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에 맞는 작가군이 없어서 그런 건지, 멜로 같은 감성적 코드들이 뒤섞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까지는 보편화되지 않은 장르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너무 전문적으로 가다보면 매니아들에게는 엄청난 호평을 받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피곤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수사 vs 탐문수사
호평과 혹평 사이에는 비교가 있다. 우리네 전문직 드라마와 미드를 비교하면 당연히 답은 나온다. 볼 것도 없이 미드의 승리다. 그것은 이미 미드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즌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제작에 있어서 노하우가 산적한 상태이며, 투자규모에 있어서도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전문직 드라마가 월등히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제 첫걸음을 떼고 있으며 그 첫걸음이 있어 더 나은 드라마들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히트’를 ‘하얀거탑’과 같은 이미 종영한 전문직 드라마와 비교하는 것 또한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 드라마들은 둘다 전문직 드라마이긴 하지만 그 ‘전문분야’가 다르다. ‘히트’가 좀더 어려운 것은 ‘의학’이라는 전문분야보다 스케일이 더 클 수밖에 없고 더 많은 투자가 소요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미 영화 등을 통해 헐리우드 액션에 더 익숙한 우리들에게 상대적으로 ‘히트’가 불리하다는 점도 포함된다.

또 한가지 드는 의문은 우리네 전문직 드라마를 만드는데 있어서 꼭 미드를 따라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한류로 그 재주를 인정받은 멜로의 기법들을 제대로만 접목시킨다면 그것은 오히려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히트’는 미드보다는 일본의 ‘춤추는 대수사선’을 더 따라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일부 어설픈 장면들과 매끄럽지 못한 이야기 전개가 거슬리면서도, 미드에서 보았던 과학수사와 함께, 우리 식의 탐문수사가 공존하는 ‘히트’에 기대를 걸게 되는 이유다.

최양일 감독의 신작, ‘수’는 대사는 적고 액션이 대부분인 영화. 말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는 행동으로 상황을 얘기한다. 영화는 난데없는 자동차 액션(사실 액션이라기보다는 있는 대로 부순다는 의미가 크다)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생각하기보다는 그 끝간데 없이 부서지고 부딪치는 자동차와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피를 보며 진저리를 치게 된다.

이 영화를 보통의 액션영화로 본다면 정말 지독히도 재미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액션영화의 틀을 벗어나 있기 때문. 액션의 통쾌함을 목적으로 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가 튀기는 장면들은 끔찍하다는 느낌을 줄뿐이다.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대도 극도로 얇게 구성되어 있다. ‘동생을 찾는 청부살인자→찾은 동생이 암살된다→복수를 한다’는 단순한 설정에는 몰입을 위한 어떠한 장치도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설정일 뿐이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최양일 감독은 영화 제목 ‘수’에 극중 주인공 태수의 수, 복수할 수, 목숨 수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 한 가지를 포함시킨다면 바로 수컷의 수이다. ‘하드보일드 클래식’이란 기치를 걸고 나선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동물적인 복수를 향해 달리는 수컷, 수를 이해해야 한다. 영화가 2시간 동안 보여주려는 것은 바로 ‘상처 입은 짐승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그를 키워낸 송인(조경환)의 말대로 ‘수’는 ‘누군가를 상처 주고 물어뜯고 죽음을 주는 존재’. 자신 때문에 대신 붙잡힌 쌍둥이 동생과 헤어져 19년 간을 살아온 태수는 짐승의 삶을 살아온다. 그 삶의 흔적은 그의 아지트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허름한 외부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외부와는 전혀 다른 내부공간. 차갑고 음울하며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공간 한 편에 놓여진 동생과의 사진 한 장이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동생의 애인 미나(강성연)가 끓여준 커피보다는 자학하듯 무미건조한 생수만을 고집하는 상처 입은 짐승이 태수이다.

그의 복수는 인간적인 판단이 배제되고 오로지 본능만 꿈틀거린다.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무모함. 그러니 액션 역시 물리고 물어뜯는 질척함이 묻어난다. 칼과 도끼로 찍히고 몽둥이로 맞아가면서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태수의 복수에서 깔끔하고 통쾌한 해결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건 속시원한 복수극이 아니다. 그것은 피 튀기는 대결과 죽이지 않으면 죽는 비정한 현실 혹은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핏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나중에는 스크린에 묻어날 것 같고 죽을 듯 죽을 듯 살아 꿈틀대는 태수를 보면서 그게 마치 내 자신인 양 관객이 피곤을 느끼게 될 즈음, 태수의 복수극은 끝난다. 그리고 피칠갑을 한 몸이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 누여지고 씻겨진다. 이 카타르시스의 장면조차 최양일 감독은 무미건조하게 처리해낸다. 커다란 대야에 가득 찬 물을 그저 화면에 담는 것이다.

‘수’는 대중적으로 지지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관객들을 동화시키기보다는 이화시켜 자꾸만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액션을 보러갔던 관객들은 태수에 동화되기 위한 어떤 장치(설정)를 기대했겠지만, 이 영화는 철저히 그 요구를 외면한다. 대신 영화는 이성을 배제하고 동물적 본능처럼 움직이는 태수의 몸짓으로만 흘러간다. 그 굵직한 고집은 그래서 기존 틀에 박힌 액션 복수극의 뒤통수를 때리는 구석이 있다. 이 어려운 영화를 정말 실감나게 해준 것은 지진희는 물론이고 문성근, 이기영 등의 몸서리쳐지는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의 몫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 태수와 태진이 쌍둥이라는 설정 정도는 좀더 영화의 뼈대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똑같이 생겼다’는 그 영화적 장치는 ‘자신(태진)이 죽는 장면을 자신(태수)이 목격하고’, ‘그 죽은 자신(태진)을 대신하며’, ‘그 죽은 자신(태진)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의미로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재일교포로 살아온 최양일이란 감독이 가진 두 개의 정체성, 즉 한국인으로서의 최양일과 일본에서 살아온 최양일을 보여주는 독특한 그만의 영화 스타일로 귀결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컷의 향기가 가득한 영화, ‘수’가 남긴 아쉬움이다.

TV가 버린 가요, 라디오로 회귀하나

침체된 가요계에도 봄은 오는가. 최근 라디오를 통해 또 라이브 무대를 통해 그동안 실종되었던 우리네 가요들이 조금씩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봄날 눈 녹듯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한 변화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가요계 전반의 움직임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보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의 회귀이다.

눈감고 음미하게 만드는 관록의 중견가수들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은 90년대 가요의 호황을 이끌고는 한동안 긴 동면을 하고 있던 중견가수들. 이승환, 현진영, 이승철, 신해철, 신승훈, 김현철, 김동률, 김건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최근 십대 중심의 댄스음악시장으로 침체된 분위기에, 일제히 신보를 들고 나왔다. 그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 마디로 압축해 말한다면 “역시 관록! 아직도 쟁쟁하다”는 것이다. 그 노래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눈을 감고 음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들이 동시에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숨어있다. 가장 큰 이유는 과거 90년대 가요계의 호황을 만들었던 7080이라는 구매력을 갖춘 가요소비층이 존재한다는 것. 그동안 몇몇 기획사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가요시장이 다양성보다는 10대 중심의 획일성을 보여왔고 이로써 그간의 가요소비층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지점에서 중견가수들의 복귀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간 가창력과 음악성으로 승부해온 가수들의 든든한 뒷심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섹시컨셉을 벗어나려는 가수들
‘10대 중심의 가요’라는 상품기획에는 반드시 댄스뮤직이라는 장르와 TV라는 매체의 결합이 포함되어 있다. 즉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팔짱끼고 앉아 듣는 음악보다는 좀더 ‘참여하고 행동하는 음악’으로서 댄스뮤직은 10대의 전유물이 되었고, 그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TV는 ‘보는 음악’에 폭발적인 엔진을 장착시켰다. 가수들은 점점 더 현란한 댄스와 파격적인 의상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른바 섹시컨셉가수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 몇 번 눈길을 끌면서 눈을 즐겁게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귀는 그다지 즐겁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들 섹시컨셉가수들은 발라드라는 장르를 선보이거나(이효리), 섹시컨셉을 벗으려 하거나(서인영), 가창력과 도전적인 여성상으로의 변신을 꾀하고(아이비) 있다.

비트보다 멜로디를 택한 힙합
그나마 힙합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줬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과제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마치 이전 가요계에서 정통 록이 처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 너무 파격적이면 대중성이 따르지 않고 적절한 타협(?)은 자칫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파격적이라는 것은 힙합이나 정통 록 자체가 갖는 특성(이를테면 저항정신 같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타협이라 함은 서구장르를 우리 것화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통 힙합의 인기는 대중성보다는 매니아적인 특성이 강하게 되었다. 몇몇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바비 킴이나 윤미래 같은 아티스트는 그저 힙합이라 부르기보다는 ‘바비 킴적인’, ‘윤미래적인’이란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그들의 성공은 힙합의 성공이라기보다는, 힙합이란 장르 속에서 살아온 그들이 우리 가요문화와 절묘한 결합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 성공한 힙합(?)들의 특징 역시, 퍼포먼스적인 랩보다 멜로디성이 강조된 ‘듣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가요경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라디오, 비디오스타 죽일까
이러한 ‘보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의 회귀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TV와 라디오 사이에서 가요가 점차 라디오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요순위 프로그램들의 TV로부터의 퇴출은 사실상 이 ‘보는 음악’이 자초한 결과가 크다. ‘TV 가요 프로그램 = 10대 프로그램’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되면서 요란한 의상에 현란한 몸 동작이 난무하는 가요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점점 떨어진 것. 게다가 자정에나 편성되는 라이브뮤직 프로그램들은 그저 명맥만 유지할 뿐, 과거의 영광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이제 TV와 가요가 동거하던 시대는 끝나고 있는 것 같다. 대신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오는 것은 라디오다. 이것은 TV가 가요를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디오라는 특성이 지금의 ‘듣는 음악’으로의 회귀현상과 잘 맞아떨어지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고,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 공개방송이란 장점을 가진 라디오는 기획과 상품화로 치달으면서 가요계가 처한 현실을 본 모습으로 돌리는 기능을 해준다. 여기에 컴퓨터와 라디오가 만나자 그 폭발력이 더해진다. 컴퓨터라는 일상도구에 자연스럽게 음악이 붙게된 것이다.

비디오가 라디오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고 하지만, 이제는 라디오가 비디오스타를 죽이는(Radio killed the Video star) 시대가 아닐까. 역시 노래는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달라진 환경, 시청률 믿을만한가

‘주몽’, ‘외과의사 봉달희’, ‘하얀거탑’ 같은 굵직한 드라마들이 일제히 종영한 상황에서 새로운 드라마들을 들고 나온 방송 3사의 시청률 경쟁이 과열양상을 띄고 있다. 특히 수목극 경쟁은 시청률 차이의 격차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누가 실질적인 1등이냐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상황. 편법적인 편성시간 배정이 시청률 순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이렇게 방송사들이 시청률에 집착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은 광고수익이라는 실질적인 이득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한 편의 시청률 높은 드라마가 방송사의 기업 이미지까지 높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한 편의 드라마는 여타의 프로그램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쳐 ‘주몽’같은 경우 월화의 뉴스 및 개그 프로그램의 시청률에도 그 후광을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이렇게 숫자로 대변되는 시청률이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해 시청률 조작사건논란이 터졌을 때 불거져 나왔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대신 이것은 최근 달라지고 있는 시청자들을 기존 시청률 집계가 얼마나 반영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하얀거탑’과 같은 전문직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 이런 논의는 탁상공론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청자의 존재를 담아낼 만한 이렇다할 새로운 드라마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하얀거탑’이라는 본격적인 전문직 드라마의 등장은 그 수면 밑에 있던 새로운 시청자들이란 존재를 예측하게 만들었다.

50% 이상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주몽’보다 더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하얀거탑’의 평균시청률은 고작 16%(TNS 집계). 마지막회에만 23.2%로 20%를 넘겼을 뿐, 나머지는 모두 1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 많은 댓글과 반응을 보인 ‘하얀거탑’의 시청자들은 드라마폐인으로 대변되는 매니아집단이거나, 혹은 TV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더 많이 본 사람들이라는 것.

하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이 두 예측은 같은 줄기에서 나온 다른 얘기로 볼 수 있다. ‘하얀거탑’과 같은 전문직 드라마의 탄생에는 저 물밑에서 감지됐던 미드, 일드 매니아들의 존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시청률 집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들로 TV보다는 인터넷이 더 가까운 시청자들이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아서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다운로드받은 드라마를 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과연 이들 매니아집단을 일부 소수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매니아라고 하면 마이너리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 인터넷이란 매체의 등장과 관련이 있는데, 초창기 이 세계를 바꿀만한 충격적인 매체의 등장에 대해 상대적으로 적응속도가 늦었던 기성세대들이 달라진 젊은 세대들의 생활패턴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누구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지금, 매니아의 의미를 소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상 그걸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매체 속에서 모두 매니아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즉 달라진 환경 속에서 매니아적 성향은 특정 소수집단의 행동이 아니고 대부분의 성향이라는 것이다. 이제 매니아라는 말은 소수가 아닌 좀더 집중력 있고 충성도 높은 일반인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런 의미의 매니아가 드라마에 있어서 더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그 매체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TV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간적으로 보고 지나가지만(물론 VTR로 녹화해서 반복해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은 그 자체가 저장성을 갖는다. 다운로드받는 순간 몇 번씩 반복해서 볼 수 있고 정지시켜 특정 장면을 분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쉬운 구조의 드라마들에 식상해버린다. 마치 대학생에게 초등학생 덧셈 뺄셈 문제를 풀라고 하는 식이다(실제로 TV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지적 수준으로 드라마를 90% 이상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룬다).

이것은 이들이 미드와 일드에 열광하는 이유이자 우리에게 전문직 드라마의 출현을 요구하는 이유가 된다. 이들의 질문은 “왜 우리는 없는가? 왜 우리는 안 되는가?”에서부터 비롯된다. 기존 트렌디 드라마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바로 이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서 우리네 식상한 드라마가 쉽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경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하나의 대세이고 우리네 드라마가 가야할 방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글로벌한 환경 속에서 우리 드라마의 시장은 국내가 아닌 세계로 넓혀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은 우물 속에서 성장하지 못해 결국은 죽게되는 상황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져야 하고 투자도 글로벌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달라져야할 것이 있다. 그중 가장 시급한 것이 달라진 환경에 맞는 새로운 시청률 기준이다. 공중파와 시청률 집계 조사기관들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구태의연한 시청률 분석을 고수하고 있는 한, 드라마 발전은 저해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너무 시청률로만 보는 건 좋지 않지만, 기왕 시청률로 본다면 제대로나 해야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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