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 없고 악역 없는 고마운 드라마, ‘고맙습니다’

MBC 수목 드라마, ‘고맙습니다’가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흔히 종영과 함께 ‘중독’이니 ‘금단현상’이니 하는 증상으로 아쉬움이 표현되는 강한 인상을 남긴 드라마들 속에 자리매김하게 될 것 같다. 시청률 전쟁에 자꾸만 자극적으로 변해 가는 드라마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본래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었으나 잊고 있었던 ‘감동’을 끄집어내 준 고마운 드라마, ‘고맙습니다’. 그 아름다웠던 시간의 흔적이 남긴 여운의 의미를 되짚어보자.

자극이 아니어도 좋다
자극과 파행을 거듭하는 이른바 논란드라마들의 탄생목적은 명백히 시청률이다. 그것은 이미 공식이 되어버렸다. 쏟아져 나오는 드라마들 속에서 일단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그러기 위해 이들 드라마들은 자극적인 장면과 파행적인 인물들을 전면에 배치한다. 논란은 예상된 코스이며 시청자들은 그 논란을 만든 극중 캐릭터들이 야기한 마음의 상처를 분노하면서 보게된다.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지만 시청률은 오른다. 목적의 달성이다.

하지만 ‘고맙습니다’는 이들 논란드라마가 가는 공식을 정반대로 걷는다.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자극과 파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착한 캐릭터들, 착한 스토리로 일관해 나간다. 사실 치매든 에이즈든 미혼모든 그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도 논란드라마의 공식을 채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설정들을 가지고 이 드라마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정답들만 하나씩 끄집어낸다.

자극적일수록 시선을 끄는 세태에, 그 시시해 보이는 정답에서 그 누가 드라마 성공의 공식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논란드라마들이 내는 자극적인 상처에 피학적 쾌감을 느끼며 드라마를 봐오던 시청자들에게, 이 정답들은 치유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다. 드라마를 보며 억지로 짜낸 눈물이 아닌 감동의 눈물을 흘릴 때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난 상처들은 하나씩 아물게 되었다. 시청자들은 감동하고 시청률은 오른다. 꼭 자극이 아니어도 드라마는 된다는 반가운 소식. ‘고맙습니다’는 그 소식을 들고 온 고마운 드라마다.

좋은 드라마는 악역이 없다
또한 ‘고맙습니다’는 좋은 드라마는 악역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해낸 드라마다. 작년 좋은 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던 ‘연애시대’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악역 없이도 충분히 극적인 드라마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연애시대’는 드라마의 극적 상황이 선악구도와 같은 대립이 아닌, 성격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로도 충분하다는 걸 실증해 보여 주었다.

악역이 없는 극적인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캐릭터에 대한 진정성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선악구도에서 보여지는 선한 캐릭터와 악한 캐릭터는 그것을 인물로 두고 볼 때 반쪽 짜리의 진실만을 담은 캐릭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악한 캐릭터 속에서 선한 면모를 찾아내고, 선한 캐릭터 속에서 또한 악한 면모를 찾아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지 못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그 때부터 드라마에서 악역은 사라지게 된다.

‘고맙습니다’는 다만 악역이 없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물들 속에 공존하는 불완전함을 감동의 요소로 끄집어낸다. 그것은 악한 면모를 보이던 석현모(강부자)가 흘리는 회한의 눈물 속에서, 편견으로 똘똘 뭉쳐있던 푸른도 주민들의 눈물 속에서, 좀체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했던 민기서(장 혁)의 변화과정 등을 통해 보여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에서 악역이 없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영신(공효진)의 가족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고맙습니다”라는 마법의 주문 때문이라는 것. 그 주문이 악역이 될 뻔했던 인물들 입에서 흘러나올 때, 악역은 사라지고, 좋은 드라마는 탄생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 아니다
무엇보다 ‘고맙습니다’라는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고 간 가장 큰 선물은, 어찌 보면 그저 심심풀이나 재미로 치부될 수 있는 드라마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드라마를 보며 혹여나 영신이나 봄이(서신애), 미스터리(신구)가 죽지 않을까 마음 졸이게 된 것은 그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시청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인물로 각인되었다는 반증이다. 우리는 영신이 미혼모로서 당하는 고통과 봄이가 에이즈에 걸려 받는 편견, 그리고 기억을 잃어버린 미스터리의 상황을 어느 순간부터 내 일처럼 느끼게 되었다.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을 의도하는 건 어떤 드라마나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이 드라마는 거기에 독특한 화법을 개입시킨다. 그것은 전혀 고맙지 않은 상황에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캐릭터에 몰입한 시청자는, 분명 캐릭터가 분노해야할 상황에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몰입이 깨지는 체험을 갖게 된다. 캐릭터와 시청자간의 감정에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간극이 주는 짧은 이질감은 곧 캐릭터에 대한 감동으로(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하는 경외감) 이어짐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생각은 드라마를 그저 재미거리로만 취급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물론 드라마는 분명 재미거리임이 맞지만, 그것으로만 취급될 때 괴물처럼 얼굴을 내미는 것이 시청률 지상주의와 논란드라마라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드라마가 드라마일 뿐이 아니라고 여길 때 거기서 적어도 우리는 괜찮은 드라마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특별한 체험의 시간을 준 ‘고맙습니다’는 종영에 있어서도 ‘중독’이니 ‘금단현상’이니 하는 것을 뛰어넘어 ‘긴 여운’으로 오래도록 미소지을 수 있는 좋은 드라마로 기억될 것이다.

728x90

너무 잘 짜여진 ‘마왕’ vs. 너무 흐트러진 ‘히트’

‘하얀거탑’을 통해 미드와 같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 시청자들이 그 연장선 상에서 기대했던 드라마는 ‘마왕’과 ‘히트’였다. 하지만 이 두 유망주의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마왕’은 그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연일 최저시청률을 경신하고 있고, ‘히트’는 수사물로서의 맥을 잡지 못하면서 시청률 추락을 맞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잘 짜여진 드라마, ‘마왕’
‘마왕’을 보고 있으면 이 드라마가 김지우라는 작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구성력에 있어서 이 정도면 거의 퍼즐 맞추기에 가까운데, 그 속에 인물들을 살려놓고 양파 껍질 벗기듯 조금씩 속살을 감질나게 보여주는 전개방식은 이것이 과연 드라마에서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게 만든다. 물론 미드를 한 편이라도 본 경험이 있다면 ‘마왕’의 전개방식이 그다지 낯설다고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작품에 수십 명의 작가들이 달라붙어 만들어내는 미드와 ‘마왕’은 그 대본의 제작환경이 백 프로 다르다.

미드의 경우, 에피소드 하나를 만드는 데 투여되는 인원은 최소 10명에서 1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메인 작가는 한 명이지만 공동 집필을 하는 경우 공동작가(co-writer)가 있고, 여기에 그들을 돕는 여러 보조작가(staff writer)들이 붙는다. 작가들의 분야도 각자 달라서 아이디어만을 내는 작가(creator)가 있고 스토리를 구성하는 스토리 구성작가(story editor)들, 그리고 대본만을 집필하는 작가(teleplay)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어찌 보면 이 정도 작가군이 투입되는 드라마가 치밀한 완성도로 미드 폐인들의 혼을 쏙 빼는 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왕’의 작가는 김지우 혼자다. 그는 12년 전의 한 사건(혹은 사고)에서부터 비롯된 처절한 복수극을 혼자 생각해냈고, 수많은 인물들의 캐릭터와 캐릭터들이 가진 스토리를 혼자 만들어냈으며,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사건들에 혼자 질서를 부여했고, 그 복수극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주제의식도 스스로 세웠다. 실로 놀랍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 역량을 통해 김지우 작가는 초라한 우리네 드라마 작가 시스템에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은 ‘마왕’을 좀더 많은 대중들이 즐기기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마왕’의 도전의식은 가치 있고 이 변화의 기로에 선 우리 드라마에서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사명이지만, ‘마왕’은 그 지점을 넘어서 너무 멀리 앞서가고 있다. ‘마왕’은 지금 미드에서도 좀체 시도하지 않는 20부 연작 추리극을 시도하고 있다. 미드가 그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도 맥을 놓치지 않는 것은 그 한 회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는 에피소드 형식을 안전망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왕’ 역시 그 형식을 취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마왕’의 이야기는 어느 한 편, 아니 어느 한 신, 심지어는 그저 휙 지나가 버린 소품 하나까지 기억해두지 않으면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짜여져’있다. 시청률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매니아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지만 중간에서라도 보고 싶은 시청자는 처음부터 챙겨보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진입장벽이 너무 높은 것이다. ‘마왕’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 짜여져 있어’ 시청자들을 허락하지 않는 드라마가 되었다.

너무 흐트러져 있는 드라마, ‘히트’
반면 ‘히트’는 너무 허술한 구성과 스토리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배반한 드라마가 되었다. ‘히트’의 문제는 그것이 ‘멜로가 있어서’ 라든가, ‘리얼하지 않은 연기’라는 식의 단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성과 스토리, 캐릭터 등이 맞물려 생긴 총체적인 문제이다. ‘마왕’이 너무 에피소드별로 드라마를 자르지 않아 시청자들의 진입장벽을 높였던 것에 반해, ‘히트’는 너무 에피소드별로 잘라내면서 맨숭맨숭한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미드가 가진 에피소드들이 시즌 드라마로서 힘을 받는 이유는 그 잘려진 에피소드들이 다음 에피소드와 맞물려 차츰 드라마의 긴장도를 높여간다는데 있다. 그러나 ‘히트’의 에피소드들 간에는 차츰 발전되어 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 접착력조차 약하게 느껴진다.

‘히트’가 이렇게 된 데는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캐릭터에 너무 천착한 결과이다. ‘히트’는 스토리와 구성 등에 많은 허점을 드러내지만 보기 드문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갖고 있는 ‘이상한’ 드라마이다. 보통의 경우 스토리란 캐릭터(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그것이 차츰 미궁에 빠지기도 하고 해결을 향해 나가기도 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마련인데, ‘히트’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극적인 긴장감을 일으킬만한 스토리가 부족하다.

강력 사건의 발생이 히트 팀 캐릭터들과 함께 벌어진다(장형사와 홍콩마약밀매 사건, 조과장과 최반장이 얽힌 증거물 도난 사건 등등)는 구조 역시 별로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사건에 캐릭터들을 포진시켜 좀더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려 했던 시도는 캐릭터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했을 지는 몰라도,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좀더 디테일한 사건 전개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홍콩 사건을 예로 들면, 어느 순간 사건은 사라지고 장형사(최일화)와 그 딸의 애틋한 정으로 흘러가면서 급작스럽게 맥이 풀려버리는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형사물로서 사건이 우선이 되고 그 사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캐릭터들이 부각되어야 하는 기본이 지켜지지 않은 탓이다. 좀더 치밀한 스토리와 에피소드 간의 강력한 접착력 그리고 그것이 중첩되면서 좀더 극적 긴장감을 높였다면 ‘히트’가 가진 캐릭터들은 좀더 사건 속에서 부각되었을 것이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현재 드라마의 에피소드로 진행되고 있는 14년 전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는 이전 에피소드와는 다르게 치밀한 면모가 있다. 초반에 있었던 사족 같은 에피소드들 대신 바로 이 메인 에피소드에 천착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마왕’은 너무 잘 짜여져 있어서, ‘히트’는 너무 흐트러져 있어서 결과적으로 시청률의 추락을 만들었다. 하지만 과거의 드라마와 앞으로 변화될 미래의 드라마 사이, 과도기에 걸쳐 있는 이들 드라마들의 시도는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의미가 있다. 시행착오들이 좀더 탄탄한 성공의 길을 알려준다는 면에서 어쩌면 그것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728x90

가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는 ‘아들’

지금 영화 속에서 아버지들은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그리고 ‘우아한 세계’에서는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진창에서 뒹굴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가치관의 퇴조, 여성성이 중요해진 사회, 경제적으로 더 힘겨운 상황에 몰린 남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된 이 시대의 아버지. 최근 들어 이른바 ‘아버지 영화’라고 불릴만한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아버지 영화가 가진 미덕과 한계
물론 어떤 영화는 아버지를 내세운 신파의 구조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 ‘아버지 영화’들의 미덕은 그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비껴나 있던 아버지들이 그 중심에 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사라진 모성애의 뒤를 채워줄 부성애로서 아버지가 등장했지만 이것이 자칫 과거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신(新)가족중심주의’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과 ‘좋지 아니한 가(家)’가 해체되어가고 있는 가족에서, 어떤 새로운 가족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면 이들 아버지 영화들은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아버지 영화는 과거 ‘어머니의 눈물’로 대변되던 가족영화의 아버지 버전이 될 가능성이 짙다. 장 진 감독이 들고 온 가족영화, ‘아들’은 그런 면에서 여타의 ‘아버지 영화’들과는 맥을 달리한다. 어찌 보면 아버지 영화로 착각될 수 있는 이 영화는 바로 그 착각을 의도함으로써, 극적인 반전을 도모한다. 반전의 이유는 명확하다. 위에 언급한 대로 ‘아버지 영화’가 갖는 버전만 바꾼 가족영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내레이션이 주는 난감한 유쾌함
15년 간, 단 하루도 생각이 떠날 수 없었을 아들, 준석(류덕환)을 만나러 가는 강식(차승원)의 마음은 짠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관객이라 해도 그 설정의 거미줄에 일단 걸리면 왠만해선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아기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서 시작한 영화는 곧바로 인터뷰로 이어지는데 강식의 멍한 표정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 거미줄에 잡히는 것은 충분하다. 그런데 장진 감독은 그것도 모자라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으로 강식과 준석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일기장에 써내려 가는 듯한 이야기들이다. 거기엔 관객을 울리는 그들의 진정어린 속내에서부터 관객을 웃기는 엉뚱한 속내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내레이션은 그저 절절한 그네들의 사연만을 전하는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 장치를 통해 장 진 감독은 특유의 유머를 구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 장 진 감독 특유의 화법을 통해 관객은 울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면서 ‘이거 참!’하는 난감한 유쾌함을 경험하게 된다.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새 패러다임이 열린다
차승원의 아버지 연기와 류덕환의 아들 연기는 장 진 감독의 전략에 딱 들어맞는다.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서 그들의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고, 내레이션은 그 감정들을 극대화하면서도 동시에 관조적인 입장에 서게 만든다. 그것은 일기 같은 내레이션이 갖는 상황 정리의 속성이 장 진 감독 특유의 쿨함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15년 간 만나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라는 어찌 보면 심각한 이 영화에 난데없는 철새들의 삽화가 만화처럼 끼여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 진 감독의 이런 스타일 덕분이다.

그런데 클라이맥스에서 던져지는 반전은 우리가 “이건 장 진 감독이니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전반부의 이야기들을 모두 뒤집는다. 그 모든 것들이 철저한 계산에 의한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걸 느끼며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한창 감정에 젖어있던 관객은 불현듯 고개를 쳐드는 이성을 느끼게 된다. 관객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 당혹스런 반전을 불쾌함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감정을 두들기는 동안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던 영상들이(심지어는 날아다니는 철새들까지) 모두 복선이었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가 기대했던 아버지 영화의 환상이 깨지면서 장 진 식의 가족영화가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은 이 정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화의 핵심이 바로 이 반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 반전을 드러내야 영화가 가진 진짜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지만, 그 순간 영화의 매력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글로 전달될 수 있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장 진 감독이 제목에서부터 관객들이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자신의 스타일까지 모두 반전의 장치로 활용해 의도한 ‘아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좋은 영화에 대한 편견이나 평가절하가 두려워 한 가지 정도는 밝혀둬도 되겠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 영화가 주는 절절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그저 아버지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영화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영화이다.

728x90

기적을 부르는 ‘고맙습니다’의 드라마 화법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를 그저 훈훈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반쪽 짜리 정답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고맙습니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들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선행을 담은 이야기가 인터넷에 대서특필됐을 때, 따뜻해지는 가슴과 함께 밀려오는 부끄러움 같은 것이다.

작은 이야기에도 민감해지는 건, 그만큼 감동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 ‘고맙습니다’는 이 감동 없는 세상에 던지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반어법이다. “고맙습니다”라는 작은 한 마디가 가진 울림은, 그런 한 마디 해주지 못하는 고맙지 않은 사회에 대한 통렬한 대결의식이 된다. 당신은 과연 그 누군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해본 적 있는가 하는 뼈아픈 질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이 아닌 우리가 만들었다
미혼모에 치매 할아버지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딸이지만 이들만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봄(서신애)이가 에이즈라는 사실이 알려져 마을사람들이 이들을 쫓아내려 할 때도 가족들 품으로 돌아온 영신(공효진)은 애써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한다. 에이즈에 걸렸지만 아이라는 점, 그리고 나이든 할아버지지만 치매라는 점이 이 모든 가족의 고통을 영신에게 지우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행복으로 치환하는 요인을 또한 그 가족에게서 찾는다. 그녀는 영신이가 아닌 봄이 엄마일 때, 미스터 리의 손녀일 때 가장 행복하고 강하다. 그러니 이 가족의 고통은 외부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일 뿐, 그들의 실상은 다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고통받는다.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행복하게 가만 놔두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다. 영신네 가족이 원하는 것은 그저 푸른도에 발붙이고 사는 것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에이즈에 걸린 어린아이를 괴물 보듯 대하고, 수혈을 받지 못해 죽어 가는 영신에게 그 누구도 헌혈을 하려들지 않는다. 이런 편견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힘이다. 그들에게 누구도 ‘고마운 짓’을 하지 않지만 그녀는 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들에게 늘 미안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생물’이라 말하면서까지 자신이 당하는 고통스런 상황을 긍정하고 끌어안으려 한다.

작가가 모진 세상에 거는 시비
이것은 작가가 모진 세상에 거는 시비이다. “왜 그렇게 사느냐”는 우회적인 질문이면서도 그 어느 것보다 무서운 비판이다. 영신의 그런 행동은 그녀를 바라보는 민기서(장혁)의 시선을그대로 담은 드라마 주제곡 가사처럼 때론 바보 같고 때론 천사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민기서는 늘 그녀를 향해 고함친다.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사느냐”고. “고맙긴 뭐가 고맙냐”고. 이 민기서의 시선은 그대로 우리네 시청자들의 시선과 맞닿는다. 영신의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민기서의 마음처럼 답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바보와 천사가 만나는 영신이란 캐릭터를 통해서 작가의 목소리는 더 신랄해진다. 이 말은 ‘천사처럼 사는’ 인간적인 삶을 ‘바보’로 여기는 세태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가 만약 영신의 행동에서 답답한 바보의 모습을 보았다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이다지도 영리하고 약삭빠르며 이기적인 것으로 만들었을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작가의 바람
드라마는 영신네 가족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들이 현실적 상황 속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단면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설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시사다큐프로그램을 통해 보아왔던 실제 현실이라면 그 핍박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을 테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 각박한 현실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설정한 안전장치가 푸른도라는 가상의 섬이다. 편견 없는 사회,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오가는 사회는 마치 기적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지만, 혹 이 섬에서라면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작가의 바람이다.

푸른도 마을 사람들의 면면들은 그래도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보다는 많은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간의 유대가 상대적으로 끈끈하다는 것. 부모들은 봄이가 에이즈라는 사실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 정도지만, 정작 아이들은 봄이를 걱정한다. 영신의 수혈을 위해 마을을 뛰어다니며 헌혈을 부탁하는 민기서의 행동은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을 갈등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저마다의 핑계거리를 들고 보건소로 찾아오게 만든다.

당신도 기적을 느끼셨나요
사람들의 편견이 깨지는 것, 그것은 이 드라마가 원하는 기적이다. 그 기적을 위해서 작가가 만들어낸 영신과 봄이, 그리고 미스터 리라는 캐릭터는 푸른도 사람들을 향해 온몸을 내던진다. 그들이 던지는 것은 생명(봄이의 에이즈, 영신의 과다출혈 같은 상황)이기에 그들의 전부가 된다. 푸른도 사람들은 그제서야 편견과 생명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 변화를 ‘저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은 민기서라는 캐릭터에 의해서다. 그는 우리와 같은 현실에서 살다가 그 이상한 섬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시청자들이 의식적으로 그에게 기꺼이 빙의되는 것은, 그가 푸른도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하는 사람으로서 드라마 속의 시청자 역할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기서가 바보처럼 착한 삶을 무능력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 속에서 영신이란 진짜 바보를 만나며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겪는 변화의 과정과 일치한다. 따라서 봄이와 영신이가 그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민기서가 “그건 개떡같은 내 인생에 그 어떤 놈이 주고 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가가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권유가 아닐 수 없다. 당신도 그런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드라마는 민기서를 통해 얘기해주고 있다.

절대로 누군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지 않던 민기서는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신을 살리고 나서야 비로소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깨어난 영신 앞에 선 석현(신성록)도 마찬가지. 심지어는 석현모까지 눈물 흘리게 하고, 결국 봄이로 하여금 그녀에게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맙습니다”를 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이 바보처럼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살아가는 가족으로부터 점차 전염되어 가는 희망의 징후들을 기적처럼 포착해준다. 그러니 ‘고맙습니다’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과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반어법이다. 그 반어법 앞에서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면 그것은 당신도 아마 기적이라는 전염병에 막 감염되었다는 반가운 신호가 아닐까.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