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우리 문화의 경쟁력?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중국시장에서 반응을 보인 데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민감해진 중국영화시장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바탕에는 ‘괴물’ 자체가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미덕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중국언론들은 이 영화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의) 차별점으로 가족을 들었다.

‘괴물’의 중국 성공, ‘가족’ 때문?
유력일간지 징화스바오는 ‘괴물’에 대해 “기존의 멜로물과 폭력물 위주에서 탈피한 한국영화”라며 “한 평범한 소녀를 괴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평범한 가족들이 사생결단”을 “눈물 없이 보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관영 베이징르바오는 이 영화가 “으시시한 공포영화나 화려한 화면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보통사람들의 단결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갖는 집단적 가치에, ‘가족’이라는 가치가 덧붙여졌고, 거기에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확실한 경쟁자를 내세우자 반응은 더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이 ‘가족’이라는 소재이다. 우리이게 이 소재는 어딘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만 흥행의 요소가 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쿨한 전개를 파고 들어오는 가족이란 이름의 끈끈함을 종종 비아냥대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소재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족보다는 개인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가족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맞춰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가족의 탄생’, ‘좋지아니한가’ 같은 가족을 표방한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영화 속 어디에서든 어른거린다.

조폭 짓 왜 하냐고? 가족 때문에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는 이제는 하나의 우리네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조폭영화에 ‘가족’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과거 ‘비열한 거리’에서 가족들이 살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철거촌 깡패짓을 하는 병두(조인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아한 세계’의 메인 카피, ‘조직에 몸담은 가장의 꿈’에서 조직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다. 즉 조폭 세계의 조직이란 뜻도 있지만 우리 현실사회에서 누구나 몸담게 되는 조직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조폭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폭은 하나의 상징이 되며 조폭에 ‘가장’이 붙게되자 영화 속 가장인 송강호의 삶은 더 독해진다. 그가 피가 튀고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하는 ‘조직생활(사회생활)’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가족들 때문이다.

송강호가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정작 ‘우아하지 않은 세계’ 속에 남아 있을 때,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다.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는 아버지로, ‘눈부신 날에’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는 아버지로,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부성애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어려운 선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다.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형사 짓보다 가족이 우선이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는 만큼, 드라마에 나타나는 가족의 모습은 좀더 직접적이다. 주간시청률 집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는 대부분이 가족드라마이다. 거기에는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한 여자’, ‘나쁜여자 착한여자’, ‘사랑도 미움도’, ‘아줌마가 간다’등등 문제가 되는 불륜과 논란 드라마도 끼어 있지만 그것은 역시 가족이 중심테마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단지 가족드라마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최근 들어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전문직드라마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하얀거탑’이 병원 내에서 숨가쁘게 벌어지는 정치드라마를 그리면서도 장준혁(김명민)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을 빼놓지 않는 것은 가족이 갖는 장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도 병원 내의 생사를 오가는 전문적 내용들이 다뤄지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속에서 가족의 이야기(예를 들면 이건욱(김민준)과 조문경(오윤아)의 에피소드 같은)를 끄집어낸다.

최근 시작한 한국형 범죄수사드라마 ‘히트’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수사경력 25년의 최고참 베테랑 형사이지만 만년 경사인 장용하(최일화)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강력범죄 수사를 전담하는 ‘히트’의 멤버이면서 만사 제쳐두고 가출한 딸을 찾아 홍콩으로 가는 그는 우리 드라마에서 가족이 갖는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국드라마라면 상상하기 힘든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범인 잡는 형사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딸과 그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자 드라마는 좀더 끈끈하고 절절해진다. 자극 중심의 아드레날린 드라마에 감성적 드라마가 뒤섞여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려면
홍콩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영웅본색’은 헐리우드 영화가 갖지 못한 피의 끈끈함을 다루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리’이다. 소마(주윤발)가 자호(적룡)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폭력과 피로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기만 하던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갑작스레 던져진 감성의 자극이었다. 그 감성은 그러나 감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를 좀더 끈끈한 의리로 묶어놓자, 거기서 벌어지는 드라마에는 더 강력한 아드레날린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보다 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더 강렬해지는 탓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그런 면에서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서구가 뒤늦게 인정하게 된 가치이다. 점점 글로벌화되는 미디어 시장 속에서 세계는 국경 없는 전쟁에 돌입해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이 하나의 아시아권으로서의 영화적 경쟁력을 키워나간다고 가정할 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면서도 보편성을 띄는 가치이다. ‘의리’니 ‘가족’이니 하는 가치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똑같은 동양적 가치체계(예를 들면 유교나 불교 같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쟁력이 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과거의 구질구질함으로 대변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서 ‘가족’을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달라진 세상에 달라진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소재는 자칫 과거적 가치로의 회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대결 ‘대조영’이 처한 상황
사극이 가진 힘은 바로 대결구도에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대조영’은 여타의 사극들과 비교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결구도를 만들어왔다. 그 대결구도는 대조영(최수종)이 어엿한 제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 대중상(임혁)이 중심이 되어 당태종(송용태), 설인귀(이덕화) 등과 대결구도를 이루다가, 대조영이 연개소문(김진태)의 집에서 개동이란 이름으로 키워질 때는 애증의 유사부자관계를 유지하며 대조영과 연개소문이 역시 대결구도를 형성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연개소문과 양만춘(임동진)이라는 두 호랑이의 대결이 드라마의 맛을 살린다.

그 사이 대조영은 당나라와의 전투를 벌이며 차근차근 자신의 입지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는 이해고(정보석)라는 대결자가 나선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죽게되자 이제 상황은 고구려의 내부로 오게되고 그러자 연남생(임호)과 연남건 형제를 이간시키며 망국의 길로 이끄는 부기원(김하균)과 사부구(정호근)가 대조영의 확고한 적으로 등장한다. 이제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걸고 당나라와 싸우고 있는 대조영은 설인귀를 축으로 하는 이해고, 부기원 등과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

대조영, 조금은 다른 영웅
고구려 사극의 기치를 걸고 등장했던 ‘주몽’, ‘연개소문’과 비교해 ‘대조영’은 조금은 다른 영웅의 면면을 보여준다. ‘주몽’은 국가를 세우는 영웅으로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함께 융합력이 돋보이는 인물이었다면, ‘연개소문’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이렇게 세워진 국가를 지켜내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주몽과 연개소문은 자신의 입지를 하나씩 넓혀나갔던 인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 ‘대조영’은 잃었던 것을 찾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단지 패망된 고구려의 부흥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의 대조영의 역할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잃었던 인물이다. 부모를 잃고 신분을 잃었던 그는 성장해 부모를 되찾고(물론 어머니는 그 과정에 죽지만), 자신의 신분도 되찾는다. 그런 그의 캐릭터가 고구려라는 민족의 희원을 되찾는 행보를 보이는 것은 드라마의 구조상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가진 것 위에서 무엇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잃은 것을 되찾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대조영은 여타의 영웅들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를 갖는다. 그가 되찾고자 하는 소망과 현재의 모습 사이에서 비롯되는 간극은 그만큼의 간절함을 만들어낸다. 가진 것 없던 그가 성공을 이루는 방식은 온 몸을 던지는 것. 나라의 패망이 내부적인 갈등에서 비롯되었기에 그는 초기 연개소문과 양만춘 사이에서 연남생과 연남건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지금은 결국 잃게된 나라를 되찾는 영웅의 길을 가고 있다.

단순 대결이 아닌 두뇌싸움으로서의 대결
‘잃은 것을 되찾는다’는 기치를 내건 대조영의 적은 ‘잃게 만든 이들’이다.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이 대결은 그러나 단순한 물리적 충돌이 아니다. 거기에는 전략가들이 등장한다. 대조영과 미모사(김정현)가 전략을 짜고, 반대편에서는 설인귀와 신홍(김규철), 부기원, 이해고가 머리를 짠다. 똑같은 전투 신, 전쟁 신이 나오더라도 그 재미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은 바로 이 전략의 부딪침으로 그 장면들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굳이 초대형의 전쟁 신이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조영’은 몇 명되지 않는 게릴라 전투로 좀더 아기자기한 두뇌싸움이 갖는 대결의 세계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스케일 논란을 빚었던 ‘주몽’과 초기 과도한 전쟁 신으로 제작비 문제를 일으킨 ‘연개소문’의 행보에 비교하면 경제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같은 사극이라도 ‘대조영’은 국가 간의 대결보다는 인물들간의 치밀한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이어가는 사극이라 할 수 있다.

인물 간 대결구도 중심 사극의 양면성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다. 아무리 인물들 간의 치열한 대결구도가 계속 해서 이어진다고 해도 굵직한 사극 전체를 꿰뚫는 커다란 대결구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잔재미에 머물 수 있다. 지금 ‘대조영’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는 대결구도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계속 유발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끝없는 대결로 인한 긴장감 또한 무한히 떨어져온 것도 사실이다. ‘보고는 있지만 무언가 미진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너무 많이 지속되면 지루해지기 마련. 이제는 대결구도가 만들어지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라는 잠재적인 안도감을 갖게된다. 그것은 대조영이 이해고에게 칼을 맞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게되고 반신불수의 몸에서도 재활(?)에 성공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더욱 심화됐다. 이제 대조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서는 인물이 된 것이다. 이것은 무한대결이 갖고 온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대결구도는 조금씩 더 강도가 강해져야 하는데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조영은 분명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 상황에서 대조영 역을 하고 있는 최수종이란 배우가 갖게될 부담감은 당연하다. 무한대결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계적인 발전인데 지금 대조영은 거의 수평적인 진행을 밟고 있다. 다만 최수종을 위시한 배우의 열연으로 그 힘이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무한대결은 사극이 가진 힘이 분명하며 ‘대조영’이란 매력적인 드라마는 바로 그걸 추구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이제 ‘대조영’은 새로운 국면을 향해 나가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였던 잃었던 것을 되찾는 인물, 대조영에서 이제 새로운 것을 세우는 인물, 대조영으로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것이 무한대결, '대조영'에서 무한끌기의 혐의를 벗어내는 길이다.

‘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의 딜레마

“또 조폭영화야? 한국영화는 소재가 겨우 조폭 밖에 없냐?” 영화 개봉 시점에 맞춰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최근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은 ‘조폭영화’ 범주 속에 자신의 작품이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린다.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도 그렇다. ‘생활 느와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이 영화, 분명 조폭영화다.

조폭영화? 느와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미국에 서부영화, 갱스터영화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영화가 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조폭영화란 어찌 보면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장르영화가 아닐까. 조폭영화라며 싸잡아 욕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조폭이라는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소재에 기대 자극적인 설정으로 흥행만을 노린 기획영화들 때문이다. 물론 조폭영화라는 용어 속에는 그런 류의 영화에 대한 비아냥이 들어있다.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느와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 역시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조폭이라는 소재에 연연하는 것일까. 혹시 조폭은 우리 사회와 시대를 표상하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우아한 세계’에 이르러 추정되는 결론은 조폭은 이제 그저 칼부림에 쌍스러운 욕이나 하는 그런 표피적인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 함의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이다.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게임의 법칙(1994)’, ‘초록물고기(1997)’, ‘넘버3(1997)’로 귀결되는 초창기 조폭영화들은 조폭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문제를 에둘러 고발했다. 철저히 조폭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렸던 것.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고 경제의 법칙이면서 결국 사회라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법칙이다. 사회라는 체계 속에서 벌이는 게임에서 결국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에 대한 문제. 정답은 시스템을 만들고 법칙을 정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넘버3가 넘버2나 넘버1이 되려고 해도 넘지 못하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는다손 치더라도 치러야할 대가는 혹독하다는 것을 이들 영화들은 조폭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폭의 세계가 갖는 단순명쾌한 폭력으로 그 아래 숨겨진 가진 자들만을 위한 시스템을 목격한다는 것은 똑같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친구(2001)’는 이런 현실에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부여했다. 그러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던’ 그 시절의 친구를, 이제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런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속에서 우회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성공의 욕망을 향해 달리지만 결국 그 시스템의 벽에 무너지는 우리네 가장의 모습들이다.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
하지만 초창기 조폭영화가 가진 이러한 풍자 내지는 사회비판의 요소들은 상업적으로 기획된 조폭 코미디물로 인해 퇴색된다. ‘조폭마누라’나 ‘두사부일체’, 그리고 ‘가문의 영광’은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명절 극장가를 달구었다. 조폭영화가 가진 현실적 함의들이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공중에 붕 떠버린다. ‘또 조폭영화냐’라는 비판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소재는 2006년 개봉된 ‘비열한 거리(2006)’를 통해 다시 원상태로 돌려진다.

‘비열한 거리’는 똑같이 초창기 조폭영화에서 다루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달라진 것은 좀더 생활기반으로 조폭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과거 조폭의 모습은 조폭 세계 속에서의 비장한 인물로만 그려졌지만, ‘비열한 거리’에 와서는 생활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야기는 더 리얼해지고 사회적인 함의는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집안에서는 가족이 살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의 철거민들을 몰아내는 일을 해야하는 병두(조인성)는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장이 갖는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
수직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 위로 올라가려 노력하지만 또한 그 가장에게 존재하는 세계는 가족이나 연인 같은 수평적인 세계이다. 병두가 수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누군가를 밟고 서야한다는 것.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밟혀질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수평적인 세계의 안정을 위해 수직적인 세계로 올라가려는 가장들의 희망은 시스템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아한 세계’가 그려내는 세계 역시 바로 가장들이 갖는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집안과 집밖으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며, 가족이란 안전망과 사회라는 현실 싸움터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다.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가족들과 우아하게 살려는 강인구(송강호)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저 현실세계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 부분이 현실적 가장들이 겪는 딜레마이다. ‘비열한 거리’에서 보여졌듯이 시스템은 절대로 희생 없는 대가를 주지 않는데, 우리네 가장들은 그 시스템에서의 성공을 통해 가족들과의 ‘우아한 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아한 세계’가 또다시 조폭의 세계를 들고 온 이유이자, 조폭이 이 시대의 가장이 된 사연이다.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지금의 드라마들을 보면 퓨전사극, 트렌디 드라마의 변용으로서의 로맨틱 코미디, 미국 드라마와 우리 드라마 사이에서 접합점을 찾아가는 우리 식의 전문직 드라마의 부상이 눈에 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모두 새로운 시도로 보여진다. 이런 시도는 구태의연한 설정의 트렌디나 불륜, 불치 같은 자극적인 설정의 과거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비롯된 바가 크다.

그 과거 드라마들의 소재 중 현재 그나마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불륜드라마뿐이다. 시절이 독하다 보니 ‘독한 불륜(불륜드라마)’이나 ‘중독성이 강한(전문직 드라마, 사극)’ 혹은 독한 시절 잊고 웃고 싶은(로맨틱 코미디) 쿨한 드라마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따뜻한 인간애 같은 소재를 다루는 드라마를 찾아보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가치를 발하는 것은 모두가 외면한 따뜻함을 드라마 속으로 가져 왔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작중 캐릭터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시골 처자, 그것도 에이즈에 걸린 아이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둔 영신(공효진)과 잘 나가는 의사 민기서(장혁), 그리고 석현(신성록)이 만들어내는 삼각구도는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의 구조를 의심하게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전혀 트렌디가 되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민기서와 석현은 영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소유하려 한다기 보다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인물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단지 영신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이 집에 살아가는 사람들, 할아버지(신구)와 이봄(서신애)을 같이 끌어안는다.

드라마를 보다가 불현듯 떨어지는 눈물은 독한 관계 등으로 억지스럽게 짜내지는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눈물, 감동이다. 그것은 짐이 될 수도 있는 할아버지와 딸을 늘 밝게 끌어안는 영신의 모습에서, 그런 영신의 어려움을 알고 집을 뛰쳐나가려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린 나이에도 현실을 밝게 받아들이는 조숙해져버린 봄이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들이 서로 엮어 가는 가족애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은 진짜 눈물이기에 구질구질한 눈물이 아닌 웃으면서도 나오는 그런 눈물이다.

감동을 증폭시키는 것은 거의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출연자들의 명연기이다. 울음을 참고 밝게 웃는 공효진과 천연덕스런 아이 서신애 게다가 ‘치매연기의 달인’으로까지 불리는 신구의 연기가 그렇고, 군 제대 후 더욱 깊어진 연기를 보이는 장 혁이 그렇다. 특히 장 혁은 본래부터 투덜이의 아이콘을 가진 배우였지만, 이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가볍지만은 않은 연기를 선보인다. 아픔을 가진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결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이런 명 연기자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는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감동적인 삶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 틀을 빠져나와 민기서와 석현의 따뜻한 시선을 끼워 넣는다. 그러자 가족의 범주는 더 넓어진다.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 그래서 거기에 가족 같은 관심과 사랑에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은 공감과 감동을 갖게 된다. 이야기가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게 되자 드라마는 가족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약자들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영신과 그 가족은 사회적 약자의 대변인들이 된다. 미혼모라는 굴레의 여자와 에이즈에 걸린 아이, 거기에 치매를 앓는 노인은 어찌 보면 이 한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내는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따뜻한 시선에서, 작가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이것이 독한 세상에 ‘고맙습니다’란 드라마가 고마운 이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