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혁과 봉달희가 원하는 사회

병원드라마를 가지고 이것이 진짜 병원의 실상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병원의 실상을 보고 싶다면 ‘닥터스’나 병원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된다. 물론 병원드라마는 그 소재에 걸맞게 이야기도 병원에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갖춰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현실적인 결론에만 집착한다면 드라마가 가진 극적 장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수 있다. 드라마는 때론 실상은 아니지만 실상이었으면 하는 환타지를 다루며, 그 환타지와 현실의 차이를 통해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최근 병원드라마들이 갖춘 요건들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이미 종영한 ‘하얀거탑’이나 앞으로 종영될 ‘외과의사 봉달희’는 드라마로 구성된 병원이야기일 뿐, 실제 병원의 이야기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얀거탑’의 외과과장 장준혁(김명민)은 우리나라 외과의를 리얼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거탑의 꼭대기에 군림하며 외제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일식집을 들락거리는 외과의사는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외과의사 봉달희’ 역시 마찬가지. 물론 병원에서 벌어질 수 있는 환자들과 의사들의 생과 사를 두고 싸우는 모습은 리얼하지만 1년 차 레지던트가 교수들과 벌이는 연애는 실제가 아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맞다. 이건 드라마다. 현실이 아니다. 이들 병원드라마는 허구다. 장준혁과 봉달희(이요원)는 허구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 인물들은 매력적이다. 이 캐릭터들 속에는 외과의사 아니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욕망과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욕망과 욕구는 일반 시청자들이 투사해도 될 만큼 보편적인 것들이다. 상승욕구 혹은 성장욕구. 장준혁의 거탑을 향한 상승욕구는 일반 샐러리맨들의 욕구와 맞닿아 있으며, 봉달희의 연애를 포함한 성장욕구는 우리 일상인들의 보편적인 욕구이다. 두 병원드라마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의사의 이야기를 빌어서 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이 같은 병원 소재를 다루면서도 서로 다른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 두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같은 설정을 가진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의사와 환자의 역할 바꾸기’이다. 장준혁이 결국 담관암에 걸려 자신이 종횡무진 활약했던 수술대에 오르는 것은 의사 이야기에서 환자 이야기로 연결되면서 ‘의사→환자→인간’의 구도로 회귀하기 위함이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일찌감치 이 역할 바꾸기에 몰두해왔다. 봉달희의 캐릭터 설정 자체가 선천성 심장병 환자이며, 이건욱(김민준)은 폐암수술을 받고, 조문경(오윤아)은 아들이 급성확장성심근증으로 수술을 받는다. 모두 역할 바꾸기의 사례들이다.

이러한 역할 바꾸기의 목적은 그것이 극적인 연출에 효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사라는 자칫 차갑기만 하게 느껴지는 기계적인 직업인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환원하기 위함이다. 의사가 환자가 되고, 의사가 의사를 수술하며(더욱이 평사시에는 경쟁자로 있던 의사가), 수술을 받아야할 병을 가진 의사가 기다리는 환자를 먼저 수술하는 이 장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보면서 적어도 살아있는 자신에 ‘부끄러운 안도’를 갖는 봉달희는 그래서 의사이지만 한 인간이기도 하다.

병원드라마는 의사들을 빌어 사람들의 환타지를 다루었다. 거기서 의사들은 의사이면서도 한 명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결국 죽음 앞에 경건해지는 인간(장준혁)이며, 자기도 아프고 두렵고 연애하고 싶은 한 인간(봉달희)이다. 그것이 진짜 의사의 이야기가 아닌 허구라고 해도 그 허구는 보편적인 진실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더 리얼하다. 웃음, 눈물, 증오, 사랑, 절망, 희망, 질투, 고뇌... 병원드라마를 통해 본 의사들의 인간적인 감정들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따뜻한 병원을 느낀다. 그것 역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병원의 모습이란 건 분명하다. 병원드라마에서 발견한 인간은 거꾸로 실제 병원에서 찾기 힘든 인간적인 의사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병원드라마를 너머 인간드라마로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병원만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 냄새나는 사회에 대한 희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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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이어 ‘마왕’ 주제가 부르는 바비 킴

고현정이 드라마로 복귀해 화제가 되었던 ‘여우야 뭐하니’에서 천정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나오는 노래, ‘고래의 꿈’.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의 고뇌 어린 얼굴에 흐르던 노래, ‘소나무’. 모두 ‘힙합대부’에서 ‘소울의 제왕’으로 돌아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바비 킴(본명 김도균)의 곡이다.

드라마에서 그의 목소리를 찾는 이유는 바비 킴 특유의 음악적인 맛 때문이다. 그 맛은 마치 레스토랑에서 먹는 시큼털털한 김치 같다. 힙합이라는 서구적 음악형식에 있어 극도로 세련되어 있고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식으로 흔히 말하는 ‘뽕끼’가 가득한 음악을 내놓으니 말이다. 즉 매력적이고 세련된 멜로디에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묻어나는 음색과 개성이 드라마 같은 극적인 장르에 잘 녹아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바비 킴으로서의 개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로소 자신만의 개성을 발하며 주목을 받게된 2집 앨범 ‘Beats Within My Soul’에 오기까지 그는 무려 10여 년의 세월을 돌아왔다. 1994년 레게 힙합을 선보인 닥터레게 싱글의 성공으로 장밋빛 미래가 보였던 것도 잠시, 앨범 출시 2주만에 그룹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그는 줄곧 실패를 거듭해왔다. 그에게 힙합대부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윤미래, 리쌍, 다이내믹 듀오, 버블 시스터즈, 드렁큰 타이거 등의 가수들과 작업해온 결과. 정작 본인은 늦깎이 힙합 가수로서 ‘랩 할아버지’란 별명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98년 솔로로 낸 1집 앨범 ‘Holy Bumz Presents’에서 그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 바비 킴은 2집에 와서는 완전한 자기 스타일의 소울을 선보인다. 흑인음악을 그저 흉내내는 것이 아닌 온전히 우리 것으로 소화하는 작업을 보여준 것. ‘고래의 꿈’으로 대표되는 그 곡들은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단순한 리듬에 바비 킴만이 소화할 수 있는 나른한 음색이 만나 절묘한 음악적 세계를 구축해놓는다. 1집에서처럼 그의 목소리는 굳이 격하지도 않고 메시지는 강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넋두리처럼 쏟아내는 그 가사들은 오히려 더 강하게 청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어깨의 힘을 빼자, 호소력은 더 짙어진다.

최근에 낸 3집 앨범, ‘Follow your soul’은 앨범명에서 드러나듯 좀더 소울이 깊어진 느낌이다. 2집의 실험적인 스타일에서 좀더 안착한 느낌이랄까. ‘파랑새’라는 곡은 여러모로 전작 ‘고래의 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고래의 꿈’이 바다를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냈다면, ‘파랑새’는 그 향수의 대상을 하늘에서 찾아낸다. ‘고래의 꿈’의 분위기를 그의 아버지인 김영근씨의 트럼펫이 만들었다면 이번 ‘파랑새’는 전제덕의 하모니카가 합세한다. 랩보다는 힙합 베이스에 멜로디 중심의 소울을 구사하는 바비 킴의 스타일과 잘 어울리는 곡이다.

바비 킴은 오는 3월21일 새롭게 시작하는 엄태웅, 주지훈 주연의 KBS 드라마 ‘마왕’에서도 주제가를 부를 예정이다. ‘하얀거탑’의 ‘소나무’에 이어 이번엔 어떤 음악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자못 궁금하다. 드라마를 통해 새삼 바비 킴의 음악을 기대하는 것은 최근 OST 시장이 새로운 가요계의 탈출구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된 가수가 아닌 진정으로 노래하는 음유시인, 바비 킴의 드라마 나들이가 여타의 실력 있는 가수들의 전범이 되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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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비웃는 본능, ‘향수’

영화의 첫 장면. 감옥,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르누이(벤 위쇼)가 앞으로 나온다. 그러자 코 하나만 달랑 빛 속으로 튀어나온다. 어둠의 섬 위로 떠오른 그르누이의 코. 이 간단한 장면 하나는 그러나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모두 압축하는 힘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이 영화가 다루려 하는 후각과 시각, 어둠과 빛, 이성과 본능에 대한 상징이 숨겨져 있다.

어둠과 빛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영화가 앞으로 다룰 이야기가 바로 코, 후각에 대한 것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먼저 봐야 할 것은 이 첫 장면에서 보이는 어둠과 빛의 대비다. 어둠 속에 없는 듯 서 있는 그르누이는 영화 전체에서 드러나듯 그림자 같은 존재. 늘 거기 있지만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어떤 존재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모든 향기를 맡을 수 있지만 자신의 체취가 없다는 캐릭터의 설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늘 어둠 속에 숨어 빛의 세계 속에 놓여진 사람들에게 손길을 뻗는다.

처음 매혹적인 향기의 세계로 끌어들인 한 여인에게 다가가는 장면에서도, 로라(레이첼 허드우드)의 집 미로 같은 정원에서도,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본다.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들은 자신에게는 없는 체취를 가진 존재들. 그는 바로 그 체취를 자신도 가지려 한다. 영화는 바로 이 어둠과 빛의 상치를 통해 어둠의 세계를 빛으로 덮어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의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그것은 후각이 가진 특성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후각을 시각화한다는 도전
‘향수’라는 제목의 영화 속, 그르누이라는 괴물의 탄생이 악취가 진동하는 생선시장이라는 건 아이러니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향수의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즉 악취 나는 인간이란 진실을 덮어버리는 어떤 것이다. 그 속에서 그르누이가 처음 목도하는 현실은 후각으로 집약된다. 그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의 악취가 버려진 자신의 현실과 조우하면서 그는 시대의 잔인한 진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아내는 현실은 바로 그 악취 속이다. 그는 철저히 그림자로 어둠 속에서 악취에 쌓여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알게된 매혹적인 향기를 그는 수집하려 한다. 그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그 향기의 원천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꽃과 같은 낭만적인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향기를 모으기 위해서는 결국 그 향기를 갖고 있는 대상을 죽여야 가능한 것. 매혹적인 향기라는 빛의 이면에는 살인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그르누이는 바로 그것을 현시해보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후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대단한 도전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후각의 시각화.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영화는 먼저 강렬한 악취의 그림들을 연속적으로 내보내 먼저 시각을 후각화한다. 그리고 이것이 익숙해질 즈음, 향기가 가져오는 이미지를 환상으로 엮어낸다. 어느 순간, 우리들은 그르누이의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는 장면 하나 만으로도 이미지와 뒤섞인 후각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할 것. 왜 작가는 다른 감각도 아닌 후각을 소재로 선택했던 것일까.

본능에 무릎꿇는 이성
그것은 후각이 그만큼 우리 감각에서 억압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감각기관과 달리 좀더 직접적으로 뇌와 만난다. 우리는 어떤 냄새 하나에서 수만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후각이 노리는 것은 뇌가 가진 이성이라는 능력이다. 이성은 과연 후각으로 촉발되는 본능적 기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는다.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거라 믿었지만 전쟁과 참화가 끊이질 않는 20세기(당시 책이 출간되던)를 비웃기 위해 쥐스킨트는 그르누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성은 빛이고 또한 시각으로 구현되는 세계이며, 반면 본능은 그 빛에 의해 억압된 어둠이며 후각으로 구현되는 세계다. 여기서 그르누이와 대결점에 있는 로라의 아버지인 안토인 리치스(알란 릭맨)는 바로 그 빛과 이성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그는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추리하며 행동한다. 그러나 결과는 딸의 죽음. 딸이 죽어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안토인의 눈을 순간적으로 찌르는 것은 바로 그가 믿었던 빛이다.

그는 붙잡힌 그르누이에게 고문을 가하며 묻는다. “도대체 왜 그랬나?”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그르누이의 행동에 대해 어떤 답변을 듣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르누이의 답은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토인이 원하던 이성적인 답변이 아니다. 그르누이라는 괴물에 대한 처결은 잔인한 고문 후 사형이라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이 앞선 해결책이다. 그래서 마지막 군중들을 향기로 취하게 만들어 광기에 빠뜨리는 충격적인 장면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된다. 그것은 안토인이 자신의 딸을 살해한 자에게 “아들아 미안하다”고 하는 것처럼 이성의 굴복을 의미한다.

통쾌한 그르누이의 퍼포먼스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루누이가 개처럼 사슬에 매인 채 끌려나가는 장면을 보면, 군중들의 “죽이라!”는 고함소리 속에서 한 수문장의 흥분된 얼굴이 잠깐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곧이어 군중들 앞에 세워진 그루누이에게 판결문이 읽혀진다. 그것은 형식을 갖춘 글귀이지만 그 내용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절대로 한번에 죽이는 일 없이...”라는 문구가 그걸 말해준다. 군중들과 판관들은 모두 흥분한 상태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 사형대 위에 올라선 그르누이를 중심으로 모든 군중들은 잔뜩 흥분해있다. 그 앞 뒤 장면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서 있는 인물은 바로 그르누이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이성에 대한 통렬한 조소를 보낸다.

영화에서 통쾌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빛의 허울 속에 가려진 어둠의 실체를 보았다는 말이다. 이성이라는 허울뿐인 잣대를 내세워 정의를 운운하며 결국에는 비이성적인 살인과 전쟁으로 몰아넣는 세계의 비정함을 목격했다는 말이다. 동화적이면서도 세계를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선과, 기괴하면서도 거기서 보편성을 끌어내는 작품, ‘향수’. 쥐스킨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어떻게 그 후각의 세계를 영상화했을까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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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화된 이름으로 규정되는 연예인들

버럭범수, 야망준혁, 야동순재, 애교문희, 내숭달희, 사육해미... 요즘은 이름 두 자와 그 성격을 규정하는 글자를 붙인 ‘아이콘화된 이름’이 대세다. 드라마와 시트콤을 기억해내는데 우리는 굳이 그 긴 제목을 생각해낼 필요가 없다. ‘하얀거탑’대신 야망준혁을, ‘외과의사 봉달희’대신 버럭범수를, ‘거침없이 하이킥’대신 야동순재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제목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라마나 시트콤의 특징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야망준혁에서 떠올려지는 야망을 향해 질주하는 준혁의 모습이나 버럭범수에서 봉달희를 향해 버럭대며 사랑을 표현하는 범수의 모습은 이들 드라마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재미요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이름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고 입에 잘 붙는다는 장점이 있어 인터넷을 통해 혹은 입에서 입으로 무한복제된다.

아이콘만 누르면 되는 시대
인터넷 검색이 일반화된 시대, 이런 이름들은 네티즌의 세례를 받아 새롭게 떠오르는 아이콘들이다. 드라마의 캐릭터를 아는 사람은 전날 드라마를 놓쳤다고 해도 다음날 인터넷에 뜬 검색어로 대충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이 시대 TV컨텐츠의 중심에 캐릭터가 서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프로그램, 코미디 할 것 없이 캐릭터 중심적인 현상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네티즌들의 키워드가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그 캐릭터 지향에서 비롯된다. 또한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각기 고유의 별명(뚱보-정형돈, 뚱뚱보-정준하, 단신-하하, 외국인-노홍철, 악마의 아들-박명수 등)을 가질 정도의 캐릭터를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캐릭터가 TV의 아이콘이 된 것은 그만큼 쏟아져 나오는 컨텐츠가 많은 정보화사회에서 좀더 쉬운 방법으로 컨텐츠를 선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구에서 비롯된다. 즉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 내용을 전부 파악하기보다는 특정 캐릭터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개그 프로그램에서 더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로 죄민수라는 캐릭터를 들 수 있다. 우리는 ‘개그야’의 죄민수를 떠올리는 것이 그를 스타덤에 올린 코너명, ‘최국의 별을 쏘다’를 기억하는 것보다 쉽다. 이러한 캐릭터 중심적인 경향에서 ‘아이콘화된 이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캐릭터를 찾는 데 있어서도 좀더 짧게, 좀더 확실하게!

아이콘으로 성공하고 고통받는 연예인
TV 프로그램들은 이제 캐릭터 창조가 성패의 갈림길이 되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물론 내용과 떨어진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지만), 약간의 허술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사랑 받는다. 반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구태의연하거나 호감가지 않는 캐릭터는 프로그램을 망쳐놓는다. 연예인들이 점점 TV 프로그램의 중심 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는 작가와 PD가 연예인이란 질료를 선택했다면 요즘은 캐릭터화된 연예인이 프로그램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연예인들의 권력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양성한다. 이미 캐릭터로 아이콘화된 연예인과 그렇지 못한 연예인 사이의 간극은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도태되어간다고 느끼는 연예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잘 나가는 연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심적인 압박감을 준다. 개인사생활조차 캐릭터로 아이콘화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사생활이 없는 완전한 유리상자 속의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다 문득 설정된 캐릭터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행동을 했을 때 결과로 오는 것은 아이콘의 상처 혹은 죽음이다.

아이콘화된 연예인들은 그래서 변신이 이중의 족쇄가 된다. 문근영 같은 ‘국민여동생’이란 아이콘을 가진 연기자는 연기변신에 있어 연기력 이외의 장벽에 부딪치게 된다. 언제나 두드리면 튀어나오던 아이콘에 대한 혼동을 야기시키는 변신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불쾌감이 되곤 한다. 그 아이콘을 사랑해왔던 강도만큼 그들은 변신하려는 아이콘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기자들의 변신은 어찌 보면 생존이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여전히 고등학생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은 연기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캐릭터를 통해 귀환하는 중견연예인들
반면 캐릭터를 통해 이제는 잊혀질 뻔한 중견연예인들이 아이콘으로 귀환하기도 한다. ‘주몽’에서 모팔모 역할을 하며 주목받은 이계인은 30여 년 연기세월에서 주로 범죄자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나 모팔모라는 캐릭터를 통해 털털하고 가슴이 따뜻하면서 화통한 인물로 아이콘화되었다. 임채무는 모 CF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멜로 드라마의 심벌이었다. 하지만 2:8 가르마를 하고 모레노 주심을 흉내내는 단 한 편의 CF는 그의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바꾸어놓았다. 그는 이제 진중한 연기자에서 재미있는 아저씨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황금어장’같은 프로그램에서도 활약 중이며, 최근에는 ‘복면달호’에서 역시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다.

젊은 연예인들과 달리, 중견연예인들의 변신은 ‘권위에서의 탈피’라는 점에서 용인되고 존경받는다. 아이콘화의 장이 젊은 세대들의 활동영역인 인터넷이란 점에서 볼 때 중견연예인의 변신은 재미이면서 발견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 연기자들 중 명연기자로 손꼽혀온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나 나문희가 ‘야동순재’와 ‘애교문희’로 젊은이들의 아이콘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인터넷의 속성이 한 몫을 차지한다.

연기자와 캐릭터의 경계가 사라진다
캐릭터의 리얼함은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무한도전’의 성공은 유재석이 주창하는 것처럼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개그맨들과 설정된 캐릭터 사이의 간극이 모호하다. 가상현실을 매일 접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만들어진 캐릭터는 더 이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반증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개그맨들은 그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거기서 구축되는 캐릭터를 다른 캐릭터와 대결시키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호통명수가 치킨집 사장이라는 점이나 유재석이 나경은 아나운서와 사귄다는 사실은 프로그램 상에서 하나의 웃음의 요소로 그대로 활용된다. 현실로서의 연기자와 프로그램 속 캐릭터 사이의 간극은 그만큼 좁혀진다.

이런 현상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극중 이름으로 연기자의 이름이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야동순재, 애교문희 같은 아이콘들은 어쩌면 연기자들에게는 위험성이 있는 게 아닐까. 연기자의 이름을 캐릭터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칫 연기자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잘못된 이미지로 굳어진 이름은 잘못된 이미지로 굳어진 캐릭터의 이름보다 더 위험하다. 다행히 ‘거침없이 하이킥’의 경우엔 김병욱 PD가 가진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이런 위험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발휘된다. 그는 애초부터 연기자들 속에 내재된 성격 혹은 이미지를 시트콤 캐릭터로서 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PD이다. 하지만 연기자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가 점점 지워져 가는 흐름 속에서 위험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캐릭터가 TV의 아이콘이 된 시대. 연기자들은 가장 중심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만큼 가장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대본에 의해 잘못 설정된 캐릭터나 잘못된 연출로 인해 직격탄을 맞는 것은 작가와 PD보다는 프로그램의 캐릭터로 표상된 연기자들이다. 여기에 리얼함이 강조되면서 야기되는 현실의 생활인과 TV속 캐릭터의 고착은 연기자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부터 미리 각오해야 하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처럼 캐릭터 중심으로 변모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지금 연예인들이 과거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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