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부는 전문성과 오다쿠적 감수성의 요구

최근 들어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것은 과거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요즘의 열기는 수면 위로 올라와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한 이유다. 한때는 ‘한류’라는 태극마크에 우쭐하던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갑자기 미드, 일드가 부상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것은 한류의 ‘한 때 부흥’에 들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은 우리네 드라마의 진화 속도가, 오히려 한류로 드라마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시청자들의 드라마를 보는 높은 수준을 따라잡지 못한 데 있다.

언제부턴가 시청자들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공식을 꿰뚫고 있으면서 그 공식에 딱딱 맞게 무한 생산되는 드라마들을 외면하고 있다. 작년부터 본격화된 이런 현상은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 ‘멜로 드라마’의 몰락을 불러왔다. 모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트렌디 드라마’는 구태의연한 드라마의 대명사로, ‘멜로 드라마’는 통속적인 신파로 싸잡아 인식되었던 것. 우리네 드라마가 이런 시청자들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미드와 일드는 그 시청자 욕구의 빈자를 찾아 매일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속도로 인터넷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드와 일드 어떤 점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헐리우드와 시즌제 드라마의 만남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가 헐리우드 시스템에 갇혀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헐리우드는 영화라는 장르에서 시즌제 드라마라는 장르로 새로운 부흥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회에 영화 제작비에 버금가는 투자가 이뤄지고 유명 감독들과 스타들이 포진하는 이 시즌제 드라마는 그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아니다. 이 괴물은 우리가 과거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에서부터 ‘V’, ‘맥가이버’를 거쳐 ‘X파일’을 통해 익숙한 헐리우드라는 강물 아래서 꾸준히 커왔고 수면 위로 올라와서는 거침없이 세계의 시장을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미드가 가진 특징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갖는 특성 중 하나인 전문성이다. 특정 직업에 대한 심도있는 접근은 미드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형사(CSI)와 의사(그레이 아나토미)는 물론이고 탈옥전문가(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전문성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박아두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한 편 한 편에 들이는 영화 수준의 완성도는 전체적인 연결성을 두고 이어지면서 파괴력을 높인다. 어느 중간에 한 편을 봐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다 자꾸 찾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즌제를 통해 무한복제되는 양상은 두렵기까지 하다. 최근에는 방송형태에 있어서도 PMP를 통한 방식을 취해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되었다니 드라마 폐인의 탄생은 이 정도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

오다쿠적 드라마의 중독성
반면 일드의 특징은 편집증적이라 할 만큼 집요한 디테일과 섬세한 감정 묘사이다. 우리네 드라마에 비해 좀 템포가 느리다거나 다이내믹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영상문법에 있어서 우리보다는 좀더 고도의 우회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리 드라마는 한 장면을 묘사할 때 A=A로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드라마는 A=B이고 B=C라는 전제를 충분히 깔아놓은 상태에서 A=C라고 말한다. 그러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더 수고를 해야 그 감정 선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언뜻 보면 답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이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 중독성은 더 커진다. 일방적인 전달보다 강한 것은 상호 교감이라는 것. 이것이 오다쿠적인 일본 드라마의 중독성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튼튼한 문화의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로 승부하는 수많은 소설들이 또한 각종 권위 있는 상을 휩쓸고 있는 건 우리네 소설계 풍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또한 만화를 하위장르가 아닌 하나의 가치 있는 상위장르로 보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소재와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은 드라마처럼 늘 소재발굴에 목마른 장르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미드와 일드 앞에 우리 드라마는?
이러한 미드와 일드의 약진 속에서 작년 우리 드라마가 내민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작년 한 해 우리의 드라마는 사극과 논란드라마, 그리고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몇몇 실험적인 드라마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사극은 드라마적인 재미에 있어서 가능성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또한 민족주의적인 접근이 갖는 한계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미드와 일드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약하다. 논란드라마는 드라마의 퇴진과 시청률 지상주의가 가져온 병폐로 진화보다는 퇴화가 가까울 것이다. 그나마 몇몇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실험적 드라마들(예를 들면 ‘90일 사랑할 시간’이나 ‘환상의 커플’같은)이 겨우 우리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래서 올 들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소위 ‘전문직 드라마’다. 이것은 분명 미드와 일드의 영향이 가져온 결과다.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같은 병원드라마는 그저 화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드라마의 지반을 변동시키는 큰 동인이 되고 있다. 과거의 향수로서 드라마를 대하는 시청자들은 이들 전문직 드라마보다는 드라마의 원형에 가까운 가족드라마와 사극에 아직도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만 이들은 미래의 시청자가 아니다. 미래의 시청자들은 굳이 TV가 아니라도 인터넷 등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드라마를 보는 세대다. 이들 세대들을 겨냥하는 더 많은 전문직 드라마의 등장이 예고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변화된 환경, 시청률에도 질적 개념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어떠한 장르든 인터넷과 연결되면 ‘매니아화’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터넷의 속성이다. 인터넷은 누구든 쉽게 접근하고 쉽게 주장을 펼치고 거기에 좀더 많이 빠져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하얀거탑’의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인터넷에서의 폭발력도 낮은 것은 아니다. 이 ‘충성도 높은 시청자’는 ‘그저 심심풀이로 보는 시청자’와는 다르게 분류해봐야 할 것이다. 시청률도 양적인 개념이 아닌 질적인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변화된 매체환경 속에서 미드와 일드가 각자 자신들이 가진 개성과 힘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무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를 촉발하게 된 우리네 드라마는 현재 퓨전 사극과 전문직 드라마들에 올인하는 느낌이 있다. 이것은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네 드라마에 활기를 줄 훌륭한 시도임에 틀림없으며 또한 인터넷 환경에서 자꾸만 요구되는 전문성과 오다쿠적 감수성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과거 한류드라마의 틀을 이루었던 ‘멜로드라마’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은 한류에 기대 몇몇 유명 한류스타를 내세워 성공하려했던 제작사들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들 졸속 멜로드라마들에 대한 백안시 때문에 ‘완성도 높은 멜로드라마’에 대한 실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졌던 힘을 버리는 행위는 아닐까. 멜로는 드라마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전문성에 매니아적 감수성 그리고 여기에 덧대진 질 높은 멜로의 틀이 완성될 때 우리 식의 독특한 개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외과의사 봉달희’가 던지는 질문들

병원드라마가 재미있는 건 그 공간이 생명을 다루기 때문이다. 환자의 생사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의사라는 직업은 그 자체로서 강력한 드라마성을 갖는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사가 늘 직업 속에서 접해야하는 바로 그 선택의 딜레마들을 다룬다.

이 딜레마는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원칙적이고 본원적인 이야기들이면서,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특유의 숭고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외과의사 봉달희’는 바로 그 본원적인 질문들을 다시 던짐으로써, 자꾸만 상업화 되어가는 의사라는 직업을 다시 본질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첫 번째 질문 :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외과의사 봉달희’가 서두에서 하고자 한 이야기는 ‘사람 살리는 의사’보다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라는 문제이다. ‘외과의사 봉달희’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 시청자들은 “도대체 봉달희가 의사 맞냐”는 반응을 보인다. 당장 피를 뽑지 않으면 5분 내에 사망할 환자를 두고 어찌해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의사를 보고(물론 울릉도 보건소의 검진의지만)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 그녀가 한국병원 레지던트로 오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심근경색 환자를 소화제 처방해 결국 사망하게 하고 식도가 약해진 환자 동건에게 딱딱한 고구마를 먹게 해 중태에 빠뜨린 그녀는 환자들의 생과 사가 자신의 순간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는 중대한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 살리는 의사보다 먼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드라마의 갈등상황은 바로 이 중대한 선택 앞에 수시로 놓이게 되는 의사들에게, 일반인으로서의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되는 순간 발생한다. 이 손에 땀을 쥐고 피 말리는 선택 앞에서 기쁨과 슬픔은 오버랩된다. 봉달희의 판단 착오로 심장이 멎어 죽게된 환자 앞에서 함께 안타까워하다가도, 그녀의 옳은 판단으로 괴사성 근막염으로 사망할 위기에 처한 환자가 살았을 때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치병 드라마’를 뒤집어놓은 상태가 된다. 불치병 드라마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다루지만, 이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의 문제를 다룬다. 똑같이 삶과 죽음을 다루지만 ‘불치병 드라마’가 수동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이 드라마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드라마는 좀더 철학적이 되고 좀더 역동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이건욱(김민준)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 칼을 댈 수 있는 유일한 면허를 가진 인간’, 의사라는 직업 특성 상 환자 앞에서의 모습과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괴리를 갖게 마련이다.

두 번째 질문 : 의사인가 인간인가
그렇기에 의사 조문경(오윤아)은 아들의 병 앞에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된다. 그 두 정체성(의사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갈등을 일으킨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들을 부정하던 이건욱이 아들의 병을 알고 아버지이기를 자처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죽음 앞의 한 인간(그것도 아주 가까운)에 대한 의사로서의 안타까움일까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애절함일까. 혹은 그 둘 다인지도 모른다. 이 복잡 미묘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감정 속에는 인간과 의사라는 두 존재가 공존한다.

봉달희는 한 의식불명환자의 생명유지를 위해 벼랑 끝에 매달린 앰블란스 속에서 갈등한다. 의사로서의 판단은 그 환자를 유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만, 의식불명으로 빈사 상태에 있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없다는 인간적인 판단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두려움 앞에 서서 손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갈등하는 모습은 의사는 의사일 뿐인가 아니면 의사도 한 인간인가 하는 문제를 질문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 속에 존재하는 ‘멜로 라인’은 바로 이 ‘인간으로서의 의사’라는 부분과 연결성을 갖는다.

‘멜로 라인’이 있는 드라마로서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우려해왔던 것과는 달리, ‘외과의사 봉달희’는 이 ‘멜로 라인’을 ‘인간적인 의사’의 갈등 라인 속으로 끌어들인다. “도대체 그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냐”며 조문경에게 핏발을 올리는 이건욱. 늘 자신보다 앞서있는 경쟁자이자 기분 나쁜 존재인 안중근(이범수)과 조문경이 함께 가는 장면을 보고 증오 섞인 눈빛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강력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만일 누군가를 살려야할 한 의사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살의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의사의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면모는 때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세 번째 질문 : 의사로서의 판단과 인간으로서의 판단
모든 환자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아이처럼 여기는 ‘인간적인 의사’라는 존재는 이상일 뿐, 현실은 아니다. 봉달희가 “의사도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때, 안중근이 “누가 의사가 사람이래?”라고 되묻는 건, 감정이 들어간 판단은 오히려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말처럼 “너무나 살리고 싶은 환자가 있어 더 빨리 낫게 하려고 수치 이상의 항생제를 쓰면” 결국 환자는 죽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게되는 환아가 동건이다. 1차 항암치료에서 별다른 암세포의 변화를 보지 못하자 좀더 강력한 2차 항암치료를 강행했던 동건이는 일시적인 회복을 보이고는 결국 암세포의 급작스런 전이로 사망하게 된다. “왜 내게 희망을 주었냐”는 동건에게 “그래도 이겨낼 수 있다”고 2차 항암치료를 강권한 봉달희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개입된 판단’으로 결국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던 것.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동건의 담당의로서의 조문경(오윤아 분)의 최종 결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문경은 사망자컨퍼런스에서 자신은 이제 둔감해져 사라진, 열정을 갖고 있는 봉달희가 부러워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의사가 환자에 대한 열정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환자를 괴롭힐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설상가상으로 위급환자를 돌보다 혈관이 터져 죽게 하자 봉달희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녀는 그 두 환자의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안중근은 봉달희에게 그 두 죽음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동건의 경우에는 봉달희의 열정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 후에 사망한 위급환자는 제대로 된 판단과 처치를 다 했지만 사망했으므로 의사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판단을 내려준 것. 이 판단은 이런 문제가 단지 봉달희 같은 유별난 의사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모든 의사들이 갖게 되는 양면의 딜레마라는 걸 말해준다. 즉 봉달희든 안중근이든 똑같이 딜레마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질문 : 생명에 우선순위가 있나
이제 그 질문은 의사의 환자 선택의 문제까지 확대된다. 응급실에 실려온 살인용의자와 그 용의자에 의해 차에 치어 죽을 위기에 몰린 아이. 둘 다 위급한 환자지만 병원에 남은 혈액의 양은 한 명만 살릴 수 있다. 잔인하게도 먼저 실려온 살인용의자는 살고, 몇 분 늦게 도착한 아이는 피를 구하지 못해 수술도중 사망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아이의 수술을 맡았던 이건욱은 안중근에게 항변을 해보지만, 안중근의 말은 단 하나다. “생명에 우선순위는 없다”는 것. 그건 의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지만 인간적인 판단은 아니다.

그런 안중근에게 사태는 더 복잡하게 돌아간다. 살인용의자가 그를 지키는 경찰과 담당의인 봉달희를 칼로 찌르고 도망친 것. 자신이 살린 살인용의자 때문에 아이가 사망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던 안중근에게는 자꾸 마음이 끌리는 봉달희까지 상처를 입은 상황에 이르자 의사로서의 냉정을 찾기 어렵게 된다. “의사는 의학적 판단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안중근에게 “아이가 우선”이라는 게 의학적 판단이었다고 이건욱이 추궁하자 결국 안중근은 속내를 드러낸다. 자신의 판단에 이건욱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가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도망친 살인용의자가 결국 쓰러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것. 이건욱과 안중근은 순간 인간적인 판단, 즉 이 살인용의자를 살려야 하는가를 생각하지만 결국 의사로서 그를 살려낸다. 그것이 의사로서의 자기 존재 증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가진 미덕
외과의사 봉달희’는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 ‘인간으로서의 의사’는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인간 대 인간의 감정이 섞일수록 그 의사는 더 위험해진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라도 자기 자식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칼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의사가 칼을 쥔다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고민하고 더 신중해지는 봉달희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어떤 위대한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봉달희는 의사를 의사답게 만드는 것이 환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녀가 이 모진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신의 아팠던 과거와 스스로도 환자로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던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포기하려했던 의사의 길로 다시 돌아오게 만든 존재 역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환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위험천만한 의사에게서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환자의 입장에 섰던 봉달희야말로 진짜 환자의 아픔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이 ‘외과의사 봉달희’는 왜 이런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철학적이고 심각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순수외과에 지원하는 의사들이 점점 줄어들고 성형외과 같은 돈 되는 과에 지원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태, ‘인간으로서의 의사’니 ‘인술’같은 말들이 과거의 가치가 되어버리고 이제는 오로지 부의 축적이 한 목적이 된 세태 속에서 어쩌면 이런 질문들은 아무런 현실성을 띄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더더욱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당신이 처음 의사를 선택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던 시절의 그 마음을 드라마라는 틀 속에서 찾아보게 하려는 지도 모른다.
(www.ohmynews.com)

장준혁이란 환타지를 위해 버려진 캐릭터들

‘권력을 향한 이전투구 끝에 외과과장이 된 장준혁(김명민)의 무한질주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느껴졌던 최도영(이선균). 그러나 최도영이란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장준혁의 까칠한 눈빛 속에 가려져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소송을 포기하려는 고 권순일씨의 처를 막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갈 때만해도, 또 거기서 장준혁에게 “왜 내가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나도 내 소신대로 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법정에 선 최도영의 모습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란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최도영이란 캐릭터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기대감 → 실망감’은 이번만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 초기부터 내내 있어온 것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명민의 카리스마 연기가 더 돋보여서가 아니다. 한 회 분량에서 거의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김명민과 잠깐 잠깐씩 등장하는 이선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연기력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것은 캐릭터의 성격이라든지 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연기자 같은 캐릭터 내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캐릭터의 비중을 설계할 때부터 의도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최도영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 설정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라는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드라마가 캐릭터를 그려내는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모든 카메라의 시선은 장준혁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장준혁이 그냥 주인공이 아닌 ‘악역을 해야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캐릭터의 경우, 그 주인공이 왜 그렇게 되었나가 드라마 전편에 깔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악마적인 캐릭터 중간에 간간이 인간적인 고뇌 같은 모습을 끼워 넣어 자신이 이런 이전투구를 하는 것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대부분 범법자가 주인공인 드라마, 영화에서 캐릭터를 세우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니 이주완(이정길) 과장과의 초기 대결구도는 장준혁의 이런 캐릭터를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설정이다. 장준혁은 여러 번 “내가 왜 이렇게 외과과장이 되려고 하는 지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드라마는 가끔 시골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하면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 속시원한 이유를 말해주진 않는다. 막연히 배경도 돈도 없는 집에서 어렵게 자라 성공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인상만을 줄뿐이다. 그러나 3대째 의사집안인 이주완이 장준혁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설정이 엮이자 이 막연한 설정은 힘을 발휘한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장준혁의 성공을 위한 무한질주에 동참하게 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비호감으로 만드는 것들
그런데 반면 최도영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었을까. 장준혁이 수술대 앞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위험하고 공격적인 수술을 하고 있을 때, 최도영은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초반 드라마에서 최도영이 맡은 최대의 역할은 소아암 환자 ‘진주’를 돌보는 일이었다. ‘하얀거탑’에서 환자가 보이지 않은 것은 보다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캐릭터였던 최도영을 초반부에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진주에게만 집착하는 최도영이란 의사 캐릭터는 비현실적이고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이런 캐릭터가 진지한 얼굴로 생명이니 뭐니 하는 ‘공자님 말씀’을 하는 모습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서 ‘선한 의사’의 캐릭터를 구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난 척하는’ 비호감 캐릭터의 면면을 형성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불리하게 만든 건 환자뿐만이 아니다. 이윤진(송선미)이란 또 다른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엮이면서 그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진짜 운동가도 아니면서 운동하는 척 하는’ 이윤진은 직업도 없고 오지랖 넓은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드라마의 한 편에서 벌어지는 숨가쁜 정치싸움이 시청자들의 두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별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왜 이윤진이 진주라는 환자 때문에 병원에 나오고 그 옆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는 지는 드라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 이윤진과 최도영의 멜로가 사라졌나
게다가 드라마는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묘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는 장면들을 삽입하는데 이것 역시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환자 때문에’ 시간이 없어 며칠에 한 번 겨우 집에 돌아와 아내와 얘기할 시간도 없는 최도영이 전혀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윤진과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법정드라마로 변신한 지금에 와서도 계속 이어진다. 왜 이윤진이 갑자기 권순일 환자의 일에 뛰어들게 되었고 지금처럼 그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전전하는 지는 여전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이런 구도로 흘러갈 것이었다면 애초의 설정대로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멜로 라인을 끼워 넣었어야 옳다. 그렇다면 최도영을 쫒아다니는 이윤진이란 캐릭터에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윤진이란 캐릭터의 최초 설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인술을 펼치는 학구파 의사 최도영을 만나게 되면서 그를 사모하게 된다. 그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있는 유부남. 이성적으론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최도영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간다.” 우리는 이윤진의 최도영에 대한 깊어만 가는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혐의는 찾을 수 있다. ‘하얀거탑’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 나온 폭발적인 반응, ‘멜로 없이도 된다’는 포지셔닝이 그 둘 간의 멜로를 막아버린 건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자 이윤진이란 캐릭터도 버려지게 되었다.

대결구도보다는 환타지에 집중하는 ‘하얀거탑’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현재 법정드라마 속에서 장준혁에 맞서는 순일 처(김도연)라는 캐릭터이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이 의료사고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그저 눈물로 호소하는 것. 하지만 이 드라마에 몰입되어 있는 시청자들에게 눈물은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좀더 이성적인 대응이었다면 그녀의 캐릭터는 공감과 호감을 끌어냈을 것이다. 반면 그녀 앞에 ‘피도 눈물도 없이’ 선 장준혁이란 캐릭터는 점점 공고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런 싸움에서 누가 이긴들 그것이 드라마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만일 장준혁이 진다면 사필귀정의 의미보다는 그 캐릭터에 대한 동정심만 더 커질 것이다. 장준혁은 이겨도 이기고 져도 이긴다는 말이다.

‘하얀거탑’이 최도영이란 캐릭터에 비중을 주지 않은 이유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윤리적인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장준혁이라는 환타지를 통한 카타르시스에 더 초점을 맞춘 결과이다. 집안도 배경도 없는 장준혁이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 하는 모습. 거기서 부서지고 망가지더라도 한번 끝까지 가보는 것. 우리 같이 매달의 생활을 걱정하는 소시민들이 선이든 악이든 한번 미친 듯이 해보고 싶은 그 상승욕구를 드라마 속에서 풀어보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치열한 대결구도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장준혁의 독주를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 나타나는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들을 싸워 이기든지 혹은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장준혁은 계속 높은 거탑을 향해 올라간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이 최도영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면서 대결구도로 드라마를 읽어보게 되는 이유는 속에서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권력에 대한 욕망 속에서도 ‘정말 이래도 되나’하는 자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샬롯과 글쟁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
밤이 되면 샬롯이란 이름의 거미는 여러 개의 다리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면서 거미줄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밤이면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텅 빈 거미줄 같은 화면을 글자들로 채워 넣는 모습. 그것은 영락없는 글쟁이의 모습 그대로다. 샬롯이 그렇게 글자를 새기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웰버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돼지를 위해서이다. 가만 두면 햄이 될 운명을 가진 웰버는 심지어 비천하기까지 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비천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거미줄이라는 빈 원고지를 가진 거미 샬롯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미줄의 두 가지 용도, 밥벌이와 창조
웰버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샬롯이듯, 또한 샬롯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웰버다. 웰버가 나타나기 전까지 샬롯이 하는 일이라곤 거미줄을 치고 포획된 먹이에서 피를 빨아먹는 일이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일일지는 몰라도 ‘가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농장의 동물들은 그런 샬롯을 두려워하고 역겨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호기심의 눈길을 던져준 것은 웰버. 웰버의 출연은 샬롯의 삶을 바꿔놓는다.

햄이 될 비천한 운명의 소유자 웰버를 위해 샬롯은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 한다. 그 동안 먹고살기 위해만 쓰던 거미줄을 한 생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샬롯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부합한다. 웰버가 식용이 되지 않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 즉 이 샬롯의 선택은 자신이 살아온 ‘그저 먹고사는 삶’의 부정인 동시에, 생산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세태와의 전면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네 글쟁이들의 선택과 거기서 오는 딜레마와 맞닥뜨린다.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려 선택한 길에서 결국 밥벌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글쟁이들도 자기의 거미줄을 그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먹고살기 위해 쓰는 글과 가치창조를 위해 쓰는 글. 샬롯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줄의 거미줄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예술가들의 초상이다.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 기적을 바라지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글은 사실 무력해 보인다. 더욱이 글보다는 돈의 가치를 더 맹신하는 사회 속에서는 글 자체도 돈으로 사고 팔 수도 있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애초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만만한 글쟁이들의 초심은 차라리 기적을 바라는 편이 나을 정도로 무력해진다. 샬롯이 하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밤, 농장 한 구석에서 열심히 글자를 만든다. 그것으로 저 생산성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리겠다는 것.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거미줄에 새긴 글자는 ‘Some pig(멋진 돼지)’였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구간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고, 기자들은 웰버를 앞에 놓고 연실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 관심으로 웰버의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잠시 뿐, 사람들은 무관심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농장의 동물들이 모여 밤새 회의를 한다. 그래서 나온 글자가 ‘Terrific(굉장하다)’. 그리고 기적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회에 나간 웰버를 위해 마지막으로 ‘Humble(겸손하다)’이란 글자를 새겨 넣는다.

여기서 이 세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멋지다’, ‘굉장하다’와 같은 자기 자랑형 문구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히려 주목을 끄는 것은 ‘겸손하다’와 같은 자신을 낮추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겸손’같은 가치마저도 하나의 홍보성 문구로 활용되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웰버를 위해 샬롯이 쓴 ‘겸손하다’는 결코 홍보성 문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성이 담긴 글자였는데 그 증거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샬롯이 쓴 문구를 보며 웰버가 말한다. “그런데 내가 저 멋진 표현에 어울리는 지 모르겠어.” 그러자 샬롯이 말한다. “바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너한테 딱 어울리는 표현이야.”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소원
그런데 이런 샬롯의 노력으로 웰버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웰버의 소원은 겨울까지 살아남아 첫눈을 보는 것. 그러니 그가 얻은 것은 생존이다. 그런데 그 생존을 막는 요인은 욕망이다. 돼지 한 마리에게는 생존인 것이 그 돼지로 만든 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화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돼지를 그저 진짜 돼지로 읽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돼지와 거미와 동물들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과 동일선상의 가치로서 생명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는 웰버라는 돼지로 상징되는 비천한 존재와 그를 비천하게도 만들고 특별하게도 만드는 또 다른 존재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생존과 욕망 사이에 서서 한 돼지의 가치를 비천함에서 특별함으로 끌어올리려는 한 거미의 노력은 이 세계의 총체적인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좀더 섬뜩한 현실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그저 아이들 영화라고 치부할 수 없는 구석이 생긴다. 오히려 ‘샬롯의 거미줄’은 우화라는 아이들 영화의 형식을 차용해 어른들의 세계를 꼬집는 영화라 할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 손잡고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영화관에서 아이가 볼까 숨기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리가 있을까. 그저 글쟁이가 동병상련식으로 느끼는 감정과잉이라 하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이 영화 속에는 있다.(www.ohmynews.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