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방송환경과 붕괴되는 아나운서라는 직종

그들은 연예인인가, 아나운서인가. 혹은 아나운서 출신의 연예인인가, 혹은 연예인인 아나운서인가. 최근 들어 끊이지 않는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은 마치 겉으로 보기엔 아나운서 자신들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대부분 아나운서들의 연예활동(물론 그 영역을 어디까지 봐야할지 알 수 없지만)에 대해 그것이 적절하냐 아니냐에서 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력이라는 도덕적인 잣대만을 아나운서들에게 들이대는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다.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아나운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달라진 방송환경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
먼저 아나운서의 위치에 있어 과거와 비교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나운서를 뉴스진행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 활동영역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킨 착각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아나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쇼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교양프로그램에도 나왔으며,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오래도록 ‘가요무대’를 진행했던 김동건 아나운서, 오랜 세월 ‘아침마당’을 이끌어온 이상벽 아나운서, ‘명랑운동회’로 유명한 변웅전 아나운서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아나운서의 연예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최근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이미 과거부터 죽 진행되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달라진 것이 있다. 진행자로서의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력이 좁아졌다는 점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 전체를 장악하고 조정하는 역할보다는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진행자가 아닌 출연자로서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한다. 이 현상은 마치 아나운서들의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더 많은 분야에 투입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진행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들은 여기저기에서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미지가 과거 김동건이나 이상벽, 변웅전 만큼 명료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일관된 이미지 구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퓨전 프로그램으로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
그들이 전문 진행자가 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은 달라진 프로그램의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프로그램들이 융복합을 통해 다양한 퓨전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느낌표’는 연예오락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고 ‘비타민’은 교양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상상 플러스’의 ‘올드 앤 뉴’나 ‘말달리자’, ‘스펀지’, ‘도전 골든벨’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양과 오락의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고 어느 순간에는 오락쪽으로 어느 순간에는 교양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러한 인포테인먼트 경향의 프로그램들이 야기한 것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이며, 동시에 연예인들의 아나운서화이다. 이 중간지대는 이제 치열한 아나운서와 연예인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은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의 혼란이다. 과거 전문화된 아나운서들이 특유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장악했던 것에 비교하면 지금의 아나운서들은 연예인과 동격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과거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요무대’를 진행하던 모습과, 노현정 아나운서가 ‘올드 앤 뉴’를 진행하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연예인화된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방송사들은 분명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에 연예인과 같이 끼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끼가 있는 아나운서를 필요로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 말해주듯 이들 아나운서들은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외모와 지성과 교양을 두루두루 갖춘 이들은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시청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공신력 있는 아나운서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 같은 아나운서로 갈 것인가.

그 한 가운데 놓여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인기를 끌고는 일찌감치 줄에서 내려온 아나운서가 바로 노현정이다. 노현정은 과감하게도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라는 공신력을 잡아먹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연예인 같은 인기를 끌면서도, 끝끝내 아나운서의 줄을 놓지 않고 동시에 뉴스 프로그램도 진행한 아나운서다. 방송사는 그가 연예인이든 아나운서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최대한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보낼 의무(?)가 있으므로, 스타 골든벨에 유사한 방식으로 노현정을 출연시켰다. 노현정의 줄타기는 점점 더 위험해졌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인기는 더 높아갔다. 최정점에서 줄을 내려온 노현정은 시청자들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잘된 일이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어떻게 봐야 하나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행운아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공신력의 선을 넘어 연예인화 되어버린 아나운서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아나운서의 생명이 공신력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방송사에 소속되어 아나운서로서 계속 있어야할 명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나운서는 급격한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공신력을 바탕으로 좀더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연예인은 그 생명력이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강수정 아나운서나 임성민 아나운서의 프리 선언은 그들이 이제 아나운서의 길보다는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걸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을 아나운서로 부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다. 성경환 문화방송 아나운서국장의 말대로 그들은 ‘방송인’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의 전직 아나운서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이미지로서 연예인이 되어도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쇼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는 그들을 보며 “어 아나운서가 이젠 연예인 다 됐구만”하는 오해를 하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보고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 후배 아나운서들이다. 그들은 달라진 방송환경에 아나운서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시도를 추구한다. 문화방송 이정민, 한국방송 김경란, SBS 김지연 아나운서의 남성잡지 모델 출연이나, SBS 김주희 아나운서의 미스 유니버스대회 참가 등은 이렇게 달라진 아나운서들의 인식을 말해준다.

떨어지는 공신력, 생존경쟁의 시작
이것은 또한 아나운서들의 생존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는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말이 나오는 직종이다. 한 아나운서의 행동이 전체 아나운서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재는 연예인의 길을 걷는 이들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이로써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아나운서들의 공신력은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몇몇 뉴스 프로그램에 남은 아나운서들을 제외하고는 이제 연예인들과 똑같이 아나운서들도 생존경쟁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쇼 진행자가 되기도 하고, 교양 프로 진행자가 되기도 하며 때론 연예인이 되기도 하는 모습에서 아나운서의 길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아나운서라는 본래의 직업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개그맨이나 가수가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고, 아나운서가 연예인이 되는 상황은, 아나운서만의 고유영역이 가진 공신력이라는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나운서들은 이제 ‘좀더 넓어져 보이는 길 위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점점 아나운서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송환경, 기회처럼도 보이고 위기처럼도 보이는 이 달라진 방송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김래원표 액션 드라마,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말 그대로 딱 정해진 공식을 걸으며 조금치의 곁길을 넘보지 않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다. 과거에 엄청나게 악명 높았던, 그래서 감옥에 가야했던, 그리고 감옥에서 후회하고 나와서는 ‘술 마시지 않고, 싸우지 않고, 울지 않겠다’며 바보처럼 행세해야 했던, 그러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는 현실 속에서 다시 과거의 그 길을 걸어가야 했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 이 정도면 영화 ‘해바라기’에 대한 대충의 설명은 끝이다.

하지만 그런 뻔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거나, 어떤 뭉클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오로지 김래원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김래원은 정말 김래원표의 드라마와 김래원표의 액션을 섞어 공식적인 신파 속에서 어떤 반짝거림을 발견하게 만든다.

감옥에서 나와 옛 동네로 돌아온 오태식을 연기하는 김래원의 모습에서는 노틀담의 꼽추가 떠오른다. 엄청난 괴력과 악마성을 그 속에 품고 있으나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더 이상 상처받는 걸 원치 않는 내면. 자신 속으로 틀어박혀 누가 때리기라도 하면 그 속을 들킬까 더 움츠러드는 몸. 맞는 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이나 되는 듯 무덤덤해지는 얼굴. 그것들은 저 노틀담의 꼽추의 비극적인 존재를 닮았다.

김래원의 눈빛은 늘 초조하게 상대방의 시선을 바라보지 못하고 몸짓 또한 잔뜩 상처 입은 짐승 마냥 위축되어 있다. 그가 왜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지 영화가 설명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슬픔에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 동물적인 울림이지만 그것만으로 영화는 관객들을 그에게 이입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제 김래원이 사회에서 받는 굴욕과 아픔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며 마지막 숨겨졌던 괴물의 분노가 드러나는 그 순간까지 관객의 마음 속에서 감정은 켜켜이 쌓여간다.

영화는 특별히 오태식이라는 괴물의 탄생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인간이 되려하는 오태식이라는 괴물을 다시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자가 조판수라는 두목이라는 것이다. ‘부동산 활극’이라 불리는 ‘짝패’, ‘비열한 거리’의 조폭들처럼 조판수 역시 바로 그 재개발에 뛰어든 작자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밀어버리고 자신들의 건물을 올려 이권사업에 뛰어드는 그들이 최소한 오태식이란 괴물을 다시 불러낸 장본인이다.

‘해바라기 식당’과 그 식당 주변에 심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불도저에 사라져버린 해바라기들은 이 영화의 제목이 발원한 곳이기도 하고, 또한 영화가 말하려는 소박한 주제(사실 이 영화는 주제의식보다는 장르적 재미에 치중한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 속의 해바라기들은 단지 그런 배경만이 아니다. 바로 김래원과 그의 엄마를 자청하는 덕자씨(김해숙 분), 그리고 그녀의 딸인 희주(허이재 분)가 바로 해바라기들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해바라기들을 짓밟아버린 그들에게 오태식이 괴물로 돌아오는 장면은 설득력을 얻는다.

폭발적인 라스트신에서의 김래원의 모습은 따라서 그간 숨겨온 악마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지만, 또한 관객들이 마음 속에 쌓아온 감정이 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길을 뒤로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야차처럼 걸어가며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또 한번 보게 된다. 노틀담의 꼽추. 그 비극적인 몸을 가진 존재를.

김래원은 광기와 감성의 양면을 적절히 가진 배우다. 어떨 때는 한없이 소년 같다가도(청춘, ...ing, 어린 신부) 어느 순간에는 악마 같은 눈빛을 뿜어낸다(미스터 소크라테스). 이런 감성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 ‘해바라기’의 오태식이란 인물이다. 김래원은 소박한 일상이 어색하기만 한 상처받은 짐승이 작은 행복을 찾았을 때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얼굴(심지어는 바보 같은)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의 야수성을 연기한다. 아마도 김래원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투사부일체>의 각본을 쓴 강석범 감독이 찾던 바로 그 인물이었을 것이다. 두 작품이 보여준 가족애를 찾는 드라마성과 액션물이 모두 가능한 그 인물.

다소 장르 관습적인 장면들의 과다와, 신파적 구도, 몰입을 방해하는 장르의 혼선 등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 영화는 김래원의 그 굵직한 연기를 통해 액션 너머의 드라마성과 드라마 이상의 강렬한 액션을 보여준다. 언뜻 보이는 김래원의 쓸쓸한 얼굴 속에서는 심지어 ‘희망노트’에 작은 소망을 적어가며 살아가는 소박한 우리네 서민들의 신산함마저 느껴진다.

시대적 트라우마를 찾아 나선 멜로들

2006년 가을을 시작으로 우리네 멜로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슬쩍 그 감성을 내보이더니, ‘가을로’에서는 얼굴을 드러냈고, 이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그것을 완성해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멜로드라마가 사회적인 문제와 만나는 지점, 멜로라는 개인적인 사건이 사회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파괴되는 지점, 아픔을 안고 있는 현재가 그 아픔의 진원지인 과거를 쫓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멜로 영화들은 왜 그 사회적인 문제를 혹은 그 아팠던 시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당신을 울린 것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파하는 기본적인 멜로의 틀은 부단히도 실험을 거듭했다. 눈물을 빼기 위한 최루성 멜로를 그려냈던 우리 식의 신파들이 비판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 일본식의 멜로드라마는 그 자체로 참신함을 주었다. ‘러브레터’로 대변되는 이 일본식 멜로드라마는 이른바 ‘가면을 쓴 멜로’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일본식 정서에 부합하는 ‘감정 숨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토로식의 신파 멜로에 식상해진 관객들에게는 세련된 멜로로 보여졌다. 물론 최루성 멜로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또 한 갈래가 헐리우드식의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눈물보다는 웃음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들 멜로드라마들은 사회극과의 퓨전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식을 도출해내고 있다. ‘우행시’에서 보여주었던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가을로’에 와서는 절제된 멜로드라마와 사회극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와서는 다시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우행시’에서의 실험을 좀더 멜로로 완성시킨다. 사회적인 아픔과 개인적인 아픔이 교차되면서 발생한 것은 눈물의 층위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멜로드라마 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시대의 아픔 같은 것을 공유하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엮어 가는 사랑의 특징은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장벽을 맞이한다는 데 있다. ‘우행시’에서 그것은 가난과 사형제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고, ‘가을로’에서 그것은 재난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해 여름’은 이제 60년대 말 사회적 상황을 그 장벽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이것도 역시 넓게 보면 신파의 한 틀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자 관객들이 가지는 감정은 단순한 슬픔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데서 오는 눈물 속으로 울컥 치솟아 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바로 분노이다. 분노의 감정과 슬픔이 교차하면서 멜로가 주는 눈물의 강도는 높아진다. 특히 시대적 아픔을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아팠던 과거를 쫓는다
영화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아팠던 시간으로의 동행을 시작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 그 시간 속에서 잠시 잊고자했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낸다. ‘우행시’에서의 과거가 달동네와 가난 같은 것에 있었다면, ‘가을로’는 구체적인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이것은 단지 삼풍백화점뿐이 아니다. 당대 있었던 각종 재난사건들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또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간첩사건과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60대 말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시대적 아픔은 그 자체로 눈물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영화가 일단 시대상황을 살짝 보인 후에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하는 방법은 최대한 시대적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우행시’는 보다 신파쪽에 무게를 둠으로써 이런 방식을 채택하지 않지만, ‘가을로’와 ‘그해 여름’은 바로 이런 ‘가리는 방식’으로 멜로를 극대화시킨다. ‘가을로’가 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장면이 잠깐 나온 연후에 바로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 사건을 빠져나와 아픔을 얘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반면, ‘그해 여름’에 와서는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시대적 아픔이라는 장벽을 맞닥뜨리게 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렇게 해서 두 영화는 모두 무거운 사회극이라는 외피를 벗고 멜로의 옷을 입는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감정 선을 따라가는 멜로 영화의 특성상 이 영화들 내내 지속되는 감정의 힘은 바로 그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돌아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이 영화들이 과거(혹은 현재도 지속되는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현재에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알게 모르게 깊이 각인된 시대적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누구도 닦아주지 않았던 그 아픔을 누군가 끄집어내 주었을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감정에 젖게 된다.

아픔을 겪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멜로라는 외피를 입었을 때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 느슨함 속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상처를 다시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들 영화들이 취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멜로적인 접근(사회문제의 개인화)은 비판의 소지가 있지만, 또한 그것은 최소한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마주보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문득 돌아보면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에,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점점 표정 없는 얼굴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이 영화들은 잠깐 돌아보라고 말한다. 그해 여름의 아픔이 지워버린 아름다운 추억까지 다시 돌아보라고 한다.

만화적 감수성과 드라마의 만남

‘풀 하우스’, ‘궁’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만화와 드라마와의 공생 관계는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 ‘타짜’, ‘아파트’, ‘다세포소녀’, ‘데스 노트’ 등의 성공은 만화가 가진 상상력의 힘과 탄탄한 드라마성, 그리고 캐릭터에다가 그 자체로서 영상화가 가능한 비주얼의 힘이 더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원작 만화의 매니아들이라면 이러한 작품들이 원작만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를 보지 못한 대부분의 시청자, 혹은 관객들은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 존재를 알게 되고 만화를 찾아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의 성공이 단순히 만화가 가진 그런 장점들 때문만일까.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에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원작 만화를 드라마화 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이 그 단초를 제공해준다.

더 이상 부정적 의미가 아닌, ‘만화 같은 이야기’
과거 드라마 작가들이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조금 난감한 말이 있다. 그것은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과도한 엄숙주의와 진지함이 배제하려 했던 이 말은 이제는 제작자나 기획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할 그 어떤 의미가 되었다.

과거 그들은 만화보다는 소설에서 그 모티브를 찾아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만화와 소설의 달라진 위상이다. 독자를 찾지 못하던 문단 중심의 소설들은 최근 독자를 찾아 나서면서 만화적인 가벼운 감성들이 무거운 주제로 엮어지는 실험적인 시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만화의 상황은 정반대다. 가벼운 만화의 특성은 이제 진지함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화의 진화와 소설의 독자 찾기는 어떤 접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만화 같다’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적 의미로 작용한다. 이제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든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든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만화 같은 드라마, ‘환상의 커플’
그런 면에서 ‘환상의 커플’은 정말 ‘만화 같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만화 같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싸가지 귀족녀, 안나 조의 일거수 일투족과 그녀의 “맘에 안 들어”라는 말 한 마디에 확확 바뀌는 화면 구성은 의도된 만화적 설정들이다.

기억상실로 인해 나상실(이름 역시 만화적이다)이 되고 장철수의 집에서 살아간다는 설정 자체도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다. 살짝 정신이 나간 강자나 빌리 박의 옆에서 나름 모사를 꾸미는 공실장 역시 현실에서 약간은 허공으로 들린 인물들이다. 이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고 대사는 말풍선만 달면 그대로 만화가 될 정도이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코믹이란 장르는 이러한 만화적 설정들을 더 잘 공감하게 만드는 장치다. 우리는 그 대책 없는 유쾌함 속에 개연성이라든지, 진정성 같은 복잡한 생각들을 접어놓고 드라마에 빠지게 된다. 마치 잠깐 만화를 볼 때 그 만화적 재미에 푹 빠져드는 것처럼.

진지한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
‘환상의 커플’은 그러므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갖는 허구적인 놀이를 하면서 그 놀이 이면의 어떤 이야기를 포착하는 드라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만화 같지만 그 만화적 전개 속에는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이 최악의 커플이 ‘환상의 커플’이라는 반어법으로 읽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다툼과 부딪침이 아닌 그 이면에서 생기는 사랑의 감정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아마도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하는 진지한 척 하는 태도가 지겨워진 것 같다. 드라마 속의 사랑이라고 하면 무언가 운명적이고 비극적이며 진지한 것이라는 태도가 갖는 상투성이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때론 그런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과거의 부정적 의미로서의)고 생각되는 건, 그만큼 그들이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더 이상 드라마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데 있다. 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게임이며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고픈 편안한 환상이기도 하다.

‘환상의 커플’은 이러한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안겨주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들과 그들의 상황들, 그런 장면들을 역시 만화적 배치로 맛을 살린 연출은 누구나 한번 보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재미를 유발한다. 한예슬을 스타덤에 올린 것은 기대 이상 보여준 그녀의 호연 때문이지만, 또한 이 드라마만이 갖는 만화적 캐릭터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던 탓도 있다. 이 드라마로써 우리의 주말 밤은 상큼 발랄 유쾌해졌다. 굳이 만화방에 가지 않고도 채널 하나만 돌리면 그 안에 만화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가 있으니.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