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넘어 인간애로 가는 멜로드라마

수목의 밤, 방송3사가 동시에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것들은 모두 멜로드라마다. '신데렐라 언니'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를 언니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따라서 그 안에 사랑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드라마는 매번 새로운 남자를 갈아 치우는(?) 엄마 덕분에 이집 저집을 전전해온 은조(문근영)가 엄마가 마지막이라고 한 효선(서우)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 자매는 한 남자를 두고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애증의 과정 속에서 차츰 성숙해져간다는 이야기다.

'신데렐라 언니'는 그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의 선악구도를 뒤집는다. 즉 신데렐라는 늘 착하고 옳고 그 언니는 늘 악하며 옳지 않다는 그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려는 것이 이 설정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신데렐라 언니도 언니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며, 동생인 신데렐라도 어떤 면에서는 그 언니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는 것. 즉 이것은 어찌 보면 신데렐라와 신데렐라 언니를 동등한 위치로 바라보면서 그 둘의 갈등과 화해를 모색하는 드라마로 볼 수 있다. 결국 사랑을 두고 벌이는 멜로의 갈등 속에서 똑같은 눈높이로 서로의 성장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의 틀을 넘어선다. 사랑 끝에 인간을 세워두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 역시 마찬가지.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구조를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려는 이야기는 멜로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쩌다보니 게이 행세를 하게 된 남자, 전진호(이민호)라는 존재다. 장차 이 완벽남이지만 게이라는 너울을 쓰게 된 인물은 솔직하고 내숭 없는 어리버리 박개인(손예진)과 동거를 하며 가까워지게 되는데, 여기서 사랑과 우정은 미묘해진다. 게이 남자친구와의 우정인지, 아니면 그를 남자로서 바라보는 사랑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 이 유쾌하고 발랄한 해결과정 속에 나올 수 있는 것은 결국 두 인물의 성장을 통해 갖게 되는 남녀라는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즉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찬란한 유산'의 후속작으로 소현경 작가가 들고 온 '검사 프린세스'는 얼핏 보기에는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 속에 깃든 사회(의 정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검사 프린세스'는 검사라는 직업이 가진 사회정의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그 직업의 외적인 것에 혹한 '프린세스' 마혜리(김소연)가 차츰 진짜 검사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즉 프린세스로 시작해 검사로 성장하는 마혜리의 이야기는, 좌충우돌의 멜로에서 차츰 사회로 넓혀져 갈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수목극의 방송3사가 모두 멜로드라마를 그리고 있지만, 또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멜로에 머물지 않고 차츰 인간애로 그 관심을 확장해나가는 것은 왜일까. 이것은 어쩌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일과 사랑에 대해 고민했던 청춘 멜로드라마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이제는 멜로드라마의 관심이 남녀 간의 사랑에서 차츰 성장해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을 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는 진지하고(신데렐라 언니), 하나는 로맨틱하며(개인의 취향), 다른 하나는 따뜻한(검사 프린세스) 이 세 멜로드라마들은 각각의 서로 다른 재미를 내포하면서도 저마다 하나씩의 성장드라마를 담는다는 점에서 작금의 달라진 멜로드라마의 태도를 잘 드러내준다. 멜로드라마를 통해 멜로 그 이상을 담아내려는 이런 시도는, 매번 늘 같은 남녀 간의 그저 그런 시시한 사랑타령에 머물던 멜로드라마를 또한 성장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연예인들의 자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

고 최진실씨가 간 그 길을 동생 최진영씨도 따라갔다. 우발적인 자살이라고 하지만 그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어찌 그저 갑작스레 다가온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 한 방울로 물이 넘치기 전까지 이미 마음이라는 사발에는 계속 해서 물이 차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겉으로는 가까스로 웃고 있었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바라봤던 그 마음 속에는 한없이 쏟아지는 우울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흔히들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는 우울증은 사실은 감기처럼 경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다가오지만 심지어 목숨마저 앗아가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측근의 이야기로는 고 최진영씨가 제대로 된 우울증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우울증'이나, '정신과' 같은 단어는 사실 일반인도 꺼리게 되는 것들이다. 하물며 대중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연예인들은 오죽할까.

연예인들은 특히 우울증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직업적 특성을 갖고 있다. 먼저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생활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는 상황이 그렇다. 사적인 공간은 개인에게 어떤 쉼터로서의 역할을 해주는데, 연예인들의 경우에는 이것 역시 늘 외부에 드러내질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 게다가 작금의 매체 환경은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조차 보호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연예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쉽게 겪는다. 늘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과는 달리, 연예인들은 인기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간다. 극단적인 포커스를 받아온 이들은 그 카메라 세례가 사라지고 나면 마음 한 가운데 텅 빈 공허를 지독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고 최진영씨가 공백기에 일이 없어 힘들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털어 놓은 것은 그 박탈감의 강도를 잘 말해준다. 또한 이런 공백기 이후에 새롭게 연예활동을 들어갔을 때 역시 그 스트레스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미 공백기의 힘겨움을 겪었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연예인들의 노동이 육체적인 노동보다 정신적인 노동에 더 가깝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대중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킨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정체성의 혼란과 스트레스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신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연예인들을 위한 '정신건강 프로그램'은 마치 우리가 예방주사를 맞듯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것은 연예인들의 모습이 사회적인 롤 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정신과'라는 특정 진료과에 대한 대중들의 잘못된 인식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감기에 걸리면 내과에 가고 상처가 나면 외과에 가면서 마음이 아프면 왜 정신과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은 오래된 정신과 의사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정신과'라는 이름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을 연예인들의 자발적인 '정신건강 참여 프로그램'으로 바꿔나갈 수 있지 않을까. 연예인들도 마음이 아프면 당당히 찾아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거꾸로 일반인들의 정신과 문턱까지 낮출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예인은 현 변화해가는 사회 속에서 도드라진 존재들로서, 일반인들의 삶을 좀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란 점에서, 그들의 자살은 단지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장차 일어날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일반인들도 똑같이 겪어야할 상황으로 다가올 것이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일반인들 역시 사생활과 공적 생활의 경계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연예인들의 자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패떴2'가 가진 공감 없는 스토리의 문제

새로운 구성원으로 시작한 '패밀리가 떴다(이하 패떴)'. 그 추락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주말 예능의 지존의 자리까지 있었던 '패떴'은 차츰 하향세의 길을 걸어오다 결국 구성원 전원을 교체하고 '패떴2'로 변화를 꾀했다. '패떴2'의 첫 방은 16% 남짓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기대감을 높였으나 현재는 반 토막에도 못 미치는 7.5%에 머물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걸까.

먼저 지목되는 것은 유재석, 이효리 같은 '패떴' 1기 멤버들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지금 '패떴2'에는 전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할 수 있는 이들 같은 존재가 없다. 김원희가 나서서 상황을 이끌려는 노력이 보이나, 그것은 유재석이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아 마치 리얼 예능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는 듯한 어색함이 있다. 지상렬은 거의 목숨을 걸고(?)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열성을 보이지만 그걸 효과적으로 받아주는 멤버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한다는 느낌만을 전할 뿐이다.

애초에 기대했던 조권, 윤아, 택연은 이미 프로그램밖에 있던 캐릭터를 프로그램 속으로 가져와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이미지 소모가 너무 빨라지고 있다. 조권은 여기서도 여전히 깝춤을 추고, 윤아는 '분장실의 강선생님' 흉내를 내며, 택연은 초콜릿 복근을 과시한다. 매화아가씨-매실총각을 뽑는 장면에서 이들이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조권의 여장은 결국 깝춤으로 이어졌고, 윤아의 남장은 의외의 보이쉬함을 통한 털털함을 재확인해줬으며, 택연은 결국 근육 과시로 마무리되었다.

거의 전 멤버가 프로그램 속에서 캐릭터를 세우지 못하고, 대신 이미 갖고 있던 캐릭터를 반복하는 것은 '패떴2'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패떴'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예인들이 유사가족으로 뭉쳐졌을 때,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의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미를 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외부의 캐릭터를 그저 내부로 가져올 때, 그것은 '패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해주는 게 아니고, 그 캐릭터를 반복하는 출연자의 정체성만 소비하게 된다. 즉 '패떴2'에서 고유의 특징을 만들어내기 어려워지게 되는 셈이다. 유일하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인물은 윤상현이지만 예능 초보로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연출의 문제다. 지금 '패떴2'에는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부재하다. 어느 마을에 가는 것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 곳에서 게임을 반복하는 것에도 어떤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이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의미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 하나를 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시청자가 그 게임에 빠져들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맥락 없는 게임은 시청자들의 맥빠지게 만든다. 아침에 기상시켜 갑자기 차에 타라고 한 후, 강변에서 씨름을 시키는 것은, 출연진을 고생시키는 것 이외의 공감을 찾기 어렵게 한다. 씨름부 아이들과의 아침 대결이 준비되었다면(어차피 이건 인위적인 것이다), 사전에 왜 그들이 대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 정도는 암시되었어야 한다.

이것은 매화아가씨-매실총각 콘테스트나 벗굴 채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곳의 명물인 매화와 매실 그리고 벗굴을 홍보하기 위한 것은 알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이 왜 게임을 통해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는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금 '패떴2'는 이처럼 공감이 형성되기 이전에 인물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님으로써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효과는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패떴1'에서는 저녁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주었는데, 지금은 눈밭과 진창에 뒹굴고, 벗굴 채취를 위해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도 그다지 재미를 주지 못한다.

이것은 '패떴1'이 가졌었던 공감대를 '패떴2'가 가져오지 못한 결과다. '패떴1'은 그 따뜻한 가족적인 분위기가 가장 큰 공감대였다. 그 분위기 위에서 서로 툭탁대지만 그것이 장난 같은 즐거운 놀이처럼 아기자기한 맛을 주었던 것. 하지만 '패떴2'는 너무 비장하다. 윤아나 조권, 택연, 윤상현 같은 좋은 멤버들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마음에 저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떠올려야할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야심만만'이다. '야심만만'은 설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초대 손님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재미를 선사했다. 어찌 보면 폭로의 우회형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설문을 통해 바탕에 깔린 공감대가 있었다. '아 나도 저랬었지'하는 공감을 통해 출연자의 이야기에 시청자가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야심만만2'로 오면서 그 공감이 사라지고, 대신 자극적인 설정만 남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패떴2'는 왜 안타깝게도 '야심만만2'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일까.

역사가 외면한 낮은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추노’는 왜 그토록 많은 죽음을 보여주었을까. 혜원을 호위하던 백호(데니안), 명나라 출신 여자 자객 윤지(윤지민), 원손을 지키던 궁녀 필순(사현진)의 죽음은 소소한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을 저주한 천지호(성동일)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가장 안타깝게 했으며, 태하의 심복 한섬(조진웅)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울렸다. 본래 죽을 운명이었던 최장군(한정수)과 왕손이(김지석)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순진하게 ‘노비들의 세상’을 꿈꾸던 개놈이(이두섭)나 끝봉이(조희봉)를 위시한 노비당 인물들은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 업복이(공형진)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경식(김응수)과 그 분(박기웅)을 죽이고 결국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주인공 대길(장혁) 역시 사랑하는 여인 혜원과 이제는 같은 길을 걷게 된 송태하(오지호) 그리고 원손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위해 죽는 길을 선택했다.

이처럼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줄초상을 당한 경우가 있을까. 캐릭터는 일종의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대리자라는 점에서 그 캐릭터들의 연속된 죽음은 실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따라서 ‘추노’의 줄초상에 대한 일부 시청자들의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추노’는 엔딩에 공을 들였다. 실제 엔딩은 대길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초복(민지아)과 은실이 해를 바라보는 장면(이를 통해 이 실패한 혁명이 실패가 아니라는 전언을 남겼다)과 대길이 해를 향해 화살을 먹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것도 아쉬웠는지 드라마가 완전히 끝난 그 자리에 왕손이와 최장군이 땅을 일구는 장면까지 삽입되었다. 그만큼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고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캐릭터들은 죽었지만, 그 캐릭터들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생생히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캐릭터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결국 새드엔딩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이 사극이 가진 메시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사극 속에서 우리의 시선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많은 낮은 자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쟁 사극 속에서는 한 신에 수십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말 그대로 ‘높은 자들’, 주인공들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그런 사극과 비교해볼 때, 이 사극 속의 죽음은 실로 그 수가 적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저들과는 달랐을 뿐이다. 그저 산 속 나무 둥치에 쓰러져 죽어간 낮은 자들을 ‘추노’는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타의 사극이 지나쳐버린 이름 모를 낮은 자들의 죽음에 대한 조명. 역사가 외면한 그들을 기억하라는 것. ‘추노’의 줄초상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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