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킥'의 희비쌍곡선, 김병욱표 화학실험의 결과물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 이것은 흥미로운 김병욱표 화학실험이다. 꽤 부유하게 살아가지만 온기나 찰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순재 가족. 그 가족 속으로 두 부류의 인물들이 들어온다. 그 하나는 산골에서 갓 상경해 갈 곳 없는 순도 100% 무공해 자매, 세경과 신애이고, 다른 하나는 서운대생으로 약간의 허영기를 갖고 살아가는 황정음과 그 집에 함께 자취하는 친구들(인나와 광수, 줄리엔)이다.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전형적인 성공한 도시 청년의 표상처럼 그려지는 지훈은 늘 자기중심적인 생각 속에서 타인의 삶에 무심하게 살아왔지만, 어느 날 불쑥 자신의 마음 한 구석으로 들어온 정음을 발견한다. 서울대생이라 속인 서운대생에, 술만 마시면 떡실신에 주정을 부리는 그녀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지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집안 사정이 나빠진 정음이 이별통보를 했을 때, 지훈은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수동적으로 그 아픔을 받아들일 뿐이다.

한편, 그는 늘 자신 옆에 자신을 챙겨주는 인물로 서 있는 세경을 발견하지만, 그렇게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그 무신경함이 그녀를 상처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상처를 입은 그 상황 속에서 결국 그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말한다. 사랑이 누구와 이루어지고 누구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가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이 무신경한 사내가 이제 타인들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준혁(윤시윤)은 반항기 가득한, 그래서 누군가 새로운 인물이 자신의 세계로 틈입하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하며 살아가던 인물. 그러나 그는 정음을 통해 각별한 우정을 갖게 되고, 세경을 통해 사랑을 알게 된다. 일종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준혁은 결국 이 우정도 사랑도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절규한다. 누군가를 계속 밀어내기만 하던 그는 이제 누군가를 계속 끌어당기고 있다.

세경은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간다. 식모라는 상황은 그녀가 이순재의 집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때론 상황이 역전되어 세경과 신애로 인해 이 온기 없는 집안이 따뜻한 가족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지만(그녀는 진짜 엄마처럼 이 가족들의 밥을 챙긴다), 그것이 그녀의 종속된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끝없이 지훈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그녀의 삶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차츰 지훈과의 마음을 정리하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나간다. 이민이라는 상황은 물론 역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그것을 선택한다.

정음은 생각 없이 청춘을 소비하던 삶에서 치열한 삶으로 선회한다. 아버지의 파산선고가 그 결정적인 이유지만, 어쩌면 그녀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순재의 집으로 준혁의 과외선생을 하러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그 변화는 이미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이별과 아픈 현실의 힘겨움이 동시에 찾아왔지만, 그것이 비극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정음 역시 과거의 그 정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흘렀고, 처음 시작했던 지점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성장해있다. '빵꾸똥꾸'를 외치며 독하기만 해 보이던 해리(진지희)는 이제 떠나려는 신애를 붙들며 "넌 아무데도 못가"하는 아이로 성장해 있고, 찌질한 청춘을 연명하는 것 같았던 인나와 광수 커플도 인나가 걸 그룹으로 데뷔하면서 광수와 떨어지게 되자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김병욱표 화학실험은 이처럼 이질적인 존재들을 한 공간으로 섞어 넣음으로써 어떤 희망의 표지를 찾아내려 애쓴다.

시트콤에서 이질적인 것들의 화학반응을 통해 어떤 성장을 그려낸다는 것은 이 시트콤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규정한다. 처음 이순재의 집이 갖고 있는 도시인의 차가움은 말 그대로 시트콤이 가질 수 있는 풍자적인 웃음의 보고나 다름없다. 그 어딘지 부족한 인물들은 그대로 웃음으로 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성장하지 못한(혹은 도시생활 속에서 성장이 멈춘) 인물들은 시트콤이라는 과장의 프리즘 속에서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해리는 지독할 정도로 '빵꾸똥꾸'를 외치고, 지훈은 지나치게 무신경하며, 정음은 술만 마시면 떡실신되는 무개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웃음을 주는 차가운 현실 속의 인물들은 세경과 신애 같은 인물들이 투입되고 차츰 관계의 화학반응을 거치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멜로로 극대화되어 있는 이 정극적인 요소는 차츰 초반부의 희극을 후반부의 비극으로 이끌어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초반부의 희극이 차가운 현실의 절망을 풍자하면서 생겨난 것처럼, 후반부의 비극은 거꾸로 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의 희망을 향한 성장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절묘한 희비극의 쌍곡선이 바로 '지붕킥'을 통해 김병욱 PD가 실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후반부에 이르러 여러 악재들로 인해 일련의 흐름이 깨어지면서 그 균형에 균열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지붕킥'이 시도하려 했던 희비극을 통한 현실의 직시와 그 속에서 시도된 희망의 모색이 가진 가치는 폄훼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정극과 비교해 늘 낮게 취급되던 시트콤에 대한 편견과 그 편견을 뛰어넘으려는 김병욱 PD의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실로 뒤얽힌 남녀 관계에 대한 관심과 결론에 대한 과열된 추측은 시트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웃기던 캐릭터들은 저마다 한 차원씩 성장했고, 희극은 차츰 진지해져갔으며 그 사이 시트콤도 우리가 늘 생각해오던 그 위상에서 한 차원 높아졌다. 지붕 아래 있던 그 모든 것들은 실로 그 견고하게 굳어있던 지붕 하나를 뚫었다.

사랑의 다양한 차원을 보여준 '별을 따다줘'

멜로드라마가 사랑을 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별을 따다줘'처럼 사랑의 다양한 차원을 담는 것은 이색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별을 따다줘'의 기본적인 뼈대는 진빨강(최정원)과 원강하(김지훈)의 사랑이지만, 이 뼈대만 본다면 이 드라마의 많은 살점들을 놓치게 된다.

먼저 진빨강의 동생들이 보여주는 동심어린 사랑이 그 첫 번째다. 사실 이 동심은 '있으나 마나 미스 진'을 정신 차리게 만든 사랑의 실체이자,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없이 살아온' 원강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한 장본인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그녀에게 옹알이를 해준 막내 남이는 그녀에게 가족이 짐이 아니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아무도 침입(?)을 허락하지 않고 요새처럼 벽을 쌓으며 살아온 원강하는 어느 날 갑자기 침대로 무단 침입한 파랑(진보근)이에 의해 무장해제된다.

이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상황 속에 놓여있던 문제의 남녀는 바로 이 동심으로 인해 깨어나 비로소 사랑이란 것을 하게 된다. 진빨강은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자르며 난 이제 여자가 아니라고(아이들의 보호자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사랑의 진짜 실체를 알게 되고, 이 도무지 눈치라고는 보지 않는 아이들의 무차별적인 들이댐을 귀찮지 않게 여길 즈음, 원강하는 마음을 열게 된다. 즉 이 둘의 사랑은 단지 남녀 간의 사랑의 귀결만으로 애초부터 귀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밑바탕에는 좀 더 다른 차원의 사랑, 동심의 사랑 같은 것들이 깔려 있었다.

멜로가 깊어질 즈음, 등장하는 것이 형제애와 우정이다. 즉 원강하를 차지하려는 정재영(채영인)과 진빨강에게 자꾸만 마음이 가는 원준하(신동욱)로 인해 관계가 복잡하게 치달을 때, 원강하와 원준하의 형제애가 등장한다. 동생 없이는 살 수 없는 원강하와 늘 형의 것을 빼앗지 않고 살아가려는 착한 동생 원준하는, 진빨강을 사이에 두고 결국 두 사람의 형제애를 확인한다. 또한 원강하를 포기한 정재영은 늘 자신 옆에 있어준 원준하와의 우정을 확인한다. 실연을 당한 두 사람이 "우리 오랫동안 함께 술 마셔야겠지?"하고 나누는 대화 속에는 우정을 넘어서는 어떤 발전의 계기까지 감지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원강하와 원준하가 피가 섞이지 않은 배다른 형제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 다시 '별을 따다줘'의 사랑은 인간애로 확장된다. 늘 진빨강과 동생들의 할아버지로 주변에 서 있는 JK생명의 회장 (정국)이순재, 어딘지 덜 자란 듯 하지만 여전히 동심을 가진 채 진빨강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태규(이켠), 그리고 마치 자기 일인 양 아낌없이 진빨강을 도와주는 한진주(박현숙)와 최은말(김지영). 이들은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혈연관계 이상의 유사가족을 형성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정은 이 드라마를 단지 멜로드라마의 사랑타령 그 이상으로 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별을 따다줘'가 우리에게 따다준 것은 바로 이 다양한 차원의 사랑이다. 조금은 투박하고 조금은 트렌디한 느낌을 주면서도 우리가 기꺼이 이 드라마에 '착한 드라마'라는 수식어를 아끼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다양한 사랑들이 드라마 곳곳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래스카 간 ‘무한도전’, 남극 도전하는 ‘1박2일’

‘무한도전’이 알래스카로 날아갔다. ‘1박2일’의 남극행을 염두에 두었던 행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지만, 미션 자체는 지극히 ‘무한도전’다웠다. ‘알래스카에서 김상덕씨 찾기’라는 지극히 사소한 선택. 반면 ‘1박2일’이 남극에 가는 데는 그 프로그램 성격상 명분이라는 게 필요했다. ‘1박2일’의 취지 자체가 국내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을 구석구석 찾아가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박2일’이 남극에 가는 것은 물론 여행에 있어서 극점이라는 의미로서 어떤 로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남극에 우리의 세종기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확장해서 바라보면 남극의 세종기지는 국내의 오지 섬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반면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은 ‘무한도전’답게 의미가 아닌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 일단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김상덕씨를 찾아 알래스카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설정이었다. 거기서 김상덕씨를 찾느냐 못 찾느냐는 애초부터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말이 씨가 되는 상황’. 그것을 찬찬히 목도하면서 그 속에서 생고생을 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가 ‘무한도전’이 알래스카편에서 겨냥한 웃음과 재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로망이 있기 때문에 남극을 선택한 ‘1박2일’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들은 벌칙 수행을 하기 위해 알래스카에 갔다.

목적 없이 떠난 벌칙 여행에서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이 겪을 일은 대체로 예상 가능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좌충우돌하는 상황. 의미가 아닌 재미를 위한 선택이었기에 가중되는 웃음에 대한 강박.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상황. 유재석은 가평 번지점프대 위에서 역시 벌칙을 수행하며 하룻밤을 지내는 박명수, 정준하, 길에게 전화를 해서 “거기는 어떠냐?”고 묻는다. 그러자 길이 “완전 망했어요”라고 말하는 그 상황. 웃음을 주려고 극한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었지만 웃음을 못주는 상황이 오히려 이번 미션의 재미 포인트가 된다.

따라서 알래스카까지 가서 얼음낚시를 하겠다고 몇 시간 동안 빙판에 구멍을 뚫기 위해 낑낑대는 모습이나, 난데없는 동계올림픽을 흉내 내다가 피까지 보는 상황은 분명 이 의도된 재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개그맨으로서의 이들에게 새롭게 부여된 도전 상황으로서 ‘무한도전’의 취지와도 잘 어울린다. 웃음을 주기 어려운 상황에서 웃음을 주는 것. 늘 그렇듯이 ‘무한도전’은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재미를 주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게 무모한 듯 도전 상황에 내던져졌다는 것 자체로 재미를 준다. 즉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이번 상황은 웃음을 주었던 주지 못했던 그 도전 자체가 재미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흔히 ‘1박2일’에서 발견한다. 즉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전제 하에 어떤 미션 속에서 웃음을 주지 못하고 지나치게 진지하게 되었을 때, ‘1박2일’에서는 누군가 이런 얘길 한다. “이게 다큐지, 예능 맞아?” 예능이 다큐를 할 때 오히려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1박2일’은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것은 지나친 진지함, 어찌 보면 사소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웃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1박2일’은 늘 스스로가 다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웃음으로 전화된다. 반면 ‘무한도전’은 재미를 모토로 하기 때문에 새롭게 시도된 다큐적 재미는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거 다큐 아냐?”하고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1박2일’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어떤 한계가 지워진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강박’이다. 무엇을 하건 의미가 무엇인가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판받기가 쉬워진다. 재미를 위해 알래스카로 훌쩍 떠나는 것이 가능한 ‘무한도전’과는 달리 ‘1박2일’은 그 남극행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꽤 많은 의미부여가 필요해진다. ‘무한도전’이 주창하는 ‘재미를 위한 재미’는 ‘1박2일’에서는 부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무한도전’이 거의 매번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과도한 의미부여를 피하고 재미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의미부여는 따라서 스스로가 아니라, 시청자들에 의해 부여되곤 한다. 하지만 ‘1박2일’은 의미를 떼어낼 수가 없다. 만약 ‘1박2일’에서 ‘무한도전’이 벌칙으로 수행한 알래스카 같은 오지로의 목적 없는 여행을 했다면, 거기서도 ‘1박2일’은 어떤 의미를 끄집어내려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목적 없는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의미 같은 것 말이다.

‘1박2일’은 그 프로그램 형식상 그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여행이라는 사뭇 다큐적인 상황을 예능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1박2일’은 어쩌면 지금껏 이 의미로만 점철된 여행의 공간을 재미로 바꿔나가는 도전을 해온 셈이다. 교과서에서나 봐왔던 오지 속으로 들어가 게임을 하고 미션을 수행하면서 의미는 재미로 자연스럽게 전화된다. 그렇다고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의미만 있던 공간에 재미가 부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행이 과거 가이드가 붙는 관광여행에서 이제는 스스로 떠나는 체험여행으로 바뀌는 시대적 추세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1박2일’이 남극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마치 의미로만 점철된 그래서 딱딱하게 다큐적 의미만으로 고형화된 공간의 표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극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다큐멘터리’다. 그 다큐멘터리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의미와 함께 그것을 뛰어 넘는 재미를 찾아내려는 무한도전, 그것이 ‘1박2일’의 남극 도전 속에 숨겨진 것들이다.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과 ‘1박2일’의 남극도전이 모두 똑같이 말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아직까지는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될 ‘즐거운 삶에 대한 자유’에 대한 것이다. 알래스카와 남극은 더 이상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공간, 즉 특정인들만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여행을 꿈꾸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을 보면서 어떤 로망을 느꼈다면 그것은 생각만 하면 알래스카라도 쉬 달려갈 수 있다는 그 상상의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목적도 없이 생각하는 대로. 이것은 ‘1박2일’이 꿈꾸는 남극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능이 다큐의 영역을 넘어가는 시대, 즉 어떤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이 두 프로그램은 지금도 매주 우리 눈앞에 펼쳐놓고 있다.

20분으로 압축된 다큐, 그 일상의 미학

그릇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상차림이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때론 그릇이 어떤 형태이냐에 따라 담겨지는 음식도 달라진다. 감성다큐 '미지수'는 20분으로 압축된 3편의 다큐멘터리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다. 짧아진 분량은 단지 짧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1시간 정도의 다큐멘터리를 구상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만만찮은 분량이 부담으로 작용해 다큐멘터리 자체를 무겁게 만들기 마련이다. 여기에 다큐가 삶을 성찰하는 형식이라는 고정된 인식은 다큐 자체를 일상적인 삶과 멀어지게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20분이라는 분량은 다르다.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찍어내기만 하면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분량은 그 다큐 속에 담겨질 소재 역시 제한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부분은 소화해내기 어렵기 때문. 따라서 20분 분량 속에 들어오는 소재들은 우리 손에 들려져 삶을 바꿔나가는 휴대폰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가 되기도 하며,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던 골목길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 입고 지나쳤던 호피무늬 옷이 되기도 한다. 다큐라는 마운드에 올라서기 전, 20분이라는 분량은 그 VJ의 어깨에서 힘을 빼준다.

'미지수'가 특별해지는 것은 어깨에 힘을 뺀 투수가 오히려 더 잘 던지게 되는 것과 같다.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라면 재료가 될 수 없었던 것들이 재료로 올려지자, 그 요리법 또한 달라졌다. 다큐멘터리는 거대담론을 담기 위해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하기보다는 이 미시적 세계를 살짝 드러내주는 것으로 감성으로 무장한다. 주장하던 목소리는 권유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2010 골목길 감성지도 만들기'는 말 그대로 골목길 속으로 들어가 차츰 사라져가는 향수의 한 자락을 잡아내면서 우리에게 일상 속에 담겨진 특별한 그 무언가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어떤 고향 이태원'에서는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의 고향으로서의 이태원을 재조명한다. '실험여행, 서울로의 출국'은 서울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의 시선을 따라가기 위해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서울을 다시 바라본다.

논리적 접근이 영상을 통한 설명이라면, 감성적 접근은 그 포착된(혹은 연출된) 영상 자체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직관적인 보여줌이다. 따라서 '미지수'는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연출에 적극적이다. 다큐를 흔히들 연출 없는 영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큐만큼 연출에 고민하는 장르도 드물다. 다큐는 기본적으로 촬영자의 시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규정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비빔밥, 그 섞임에 대하여'에는 지휘자가 등장해 젓가락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장면이 나온다. 카메라가 지휘자의 앞을 휘돌아 비출 때, 그 젓가락 지휘가 비빔밥을 비비고 있는 구성은 분명한 연출이지만, 이 짧은 다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가장 짧고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려는 의도. 이것 역시 20분짜리 다큐의 압축 속에서 좀더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면서 나온 산물일 것이다.

'미지수'는 일일 다큐시대를 예고했던 '30분 다큐'의 후속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30분 다큐'보다 더욱더 미적으로 영상을 구성하고 있고, 그 단순한 일상에서 시작한 영상은 의외의 지적인 결과물로 도출되곤 한다. '30분 다큐'가 그 시간적 단축으로 다큐의 일상화를 실험했다면, '미지수'는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이 짧은 다큐를 미학적인 차원으로까지 끌고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지수'에 이르면 짧아서 쉽기 보다는 오히려 짧다는 그 형식 때문에 더 어려워지는 구석이 생긴다. 20분짜리 분량을 느슨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1시간짜리 분량을 20분으로 압축한다는 것. 따라서 이 미(美)적이고 지(知)적인 수(秀)작 다큐는 처음 그 낯설음을 따라 걷다보면 의외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거대한 외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내게 가까운 일상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 자락을 끄집어내 보여준다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다큐의 새로운 지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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