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대중화 논란에 대하여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 2> 개봉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 예고편을 보러갔다. 예고편이 시작되기 전에 간단한 국민의례가 있었다. 일동기립! 동해물과 백두산이∼ 장중하게 흘러가던 애국가가 갑자기 락 버전으로 바뀌면서 극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애국가에 맞춰 머리를 흔들고 춤을 췄고, 어떤 이들은 그 행태를 보며 혀를 찼다. 락의 강렬한 리듬과 애국가의 장중한 가사가 만나자 사람들은 깊은 혼동에 빠졌다.

일류극장과 삼류극장 사이
그 광경은 오래 전 흑백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극장에서의 한 장면을 끄집어낸다. 당시 죄지은 게 많은 군인출신 대통령들은 국민의례를 강화했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부터 배운 것이었다. 애국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퍼졌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저녁에는 온 나라사람들이 멈춰서서 애국가를 듣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 각종 경기는 물론이고 영화관까지 애국가가 들어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다. 그런데 이때도 이른바 일류극장과 동네삼류극장의 풍경이 달랐으니, 일류극장은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반면에, 동네삼류극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애국가가 흐르는 동안, 발을 떡 하니 앞좌석에 얹어놓고 잡담을 하거나, 심지어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 극장 안에 흐르던 아나키즘적인 분위기는 혼자만 서서 국민의례를 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일동기립하는 일류극장에서 혼자만 앉아있지 못하게 하는 파시즘적인 구석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매국과 애국 사이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극장에서의 애국가는 사라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촌스러운 애국가 소동은 더이상 먹혀들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경기장에서 애국가를 들었지만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국가대표들이 나서는 국가간 스포츠는 달랐다.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 축구는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애국가를 하나의 장엄한 의식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축구장에서 거대한 태극기가 펼쳐지며 울려퍼지는 애국가는 앞으로 벌어질 타국과의 경기를 앞둔 우리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불끈불끈 솟아오르게 했다.
하지만 이제 애국은 과거 파시즘의 그늘을 벗어야 했다. 사람들은 국기게양대에서 찬양받던 태극기를 두건으로도 쓰고, 치마와 브래지어로도 만들어 입었다. 애국은 보다 일상화되는 면모를 보였다. ‘국민’이라는 타이틀은 명품이 되었다. 국민스포츠인 축구는 국기인 태극기를 브랜드로 만들었고, 국가대표 축구팀응원단인 붉은악마 역시 브랜드가 되게했다. 애국은 잘 팔려나갔다. 나라를 파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이익이 나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그건 매국이 아닌 애국이었다. 매국과 애국의 차이는 그 이익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그 어지러운 틈바구니 속에 윤도현이 있었다. 그는 ‘오 필승 코리아’를 부르며 ‘국민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익과 이익 사이
월드컵의 엄청난 이익은 기업으로 돌아갔다. 당시 SKT는 또 하나의 브랜드가 된 붉은악마를 잘 활용해 엄청난 홍보효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붉은악마에게도 이득이 되었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자 SKT는 붉은악마와 약속했던 축구에 대한 지원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더이상 순수한 응원모임이 아닌 이제는 하나의 기업이 되어가고 있던 붉은악마는 뒤늦게 자신들이 너무 순진하게 사업(?)을 추진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붉은악마와 SKT는 서로 등을 돌렸다. 붉은악마는 SKT를 ‘월드컵에만 반짝하는 거대기업’으로 몰았다. 이런 기회를 틈타 KTF가 붉은악마와 손을 잡았다. SKT는 붉은악마의 이미지를 자사의 이미지로 만들면서 붉은악마를 소외시키는 전략을 썼다. 그들은 ‘세계적인 응원문화를 SK텔레콤이 창출했다’고 발표했다.
그 틈바구니 속에는 또다시 윤도현이 있었다. 그는 ‘오 필승 코리아’를 다시 부르고 싶었지만 노래에 대한 저작권 분쟁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2002년 당시, 붉은악마 서포터즈들이 형님 도와달라며 편곡자인 이근상 씨에게 편곡을 맡긴 ‘오 필승 코리아’는 순식간에 대박상품이 되었고, 그러자 이 곡은 편곡자인 이근상 씨와 붉은악마 회원인 강모, 김모 씨의 공동저작물이 되었다. 윤도현측은 이 곡을 새롭게 편곡해 응원가로 부르고 SKT의 광고CM으로도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작권자인 강모, 김모 씨와 협의는 결렬되었다.
초기의 순수함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 월드컵 홍보전쟁 속에서 누가 먼저 포문을 여느냐가 관건이었다. SKT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월드컵이라는 전쟁에서 제일 잘 팔리는 아이템인 애국을 가장 드러낼 수 있는 곡, 누구나 아는 곡, 한 때는 장중한 음악으로만 불리던 곡, 애국가를 락으로 편곡해 CM에 넣자는 것이었다. 애국가에는 저작권이 없었으므로 그건 바로 채택되었다.

애국가와 안티애국가 사이
애국가와 락의 만남은 기묘했다. 락의 정신은 주로 반사회적이고 반체제적인 정서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렇다면 윤도현의 애국가는 애국가인가, 아니면 애국가를 비판하는 안티애국가인가. 사람들의 혼동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 나라의 애국가는 장엄한 그 어떤 것이기에 마음대로 가볍게 만들어버리면 안된다는 이들이 있었고, 지루하기만 했던 애국가를 보다 다이나믹하게 편곡해서 더 많이 부르게 하자는 게 뭐가 나쁘냐는 이들이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군인이 대통령이던 시절, 일류극장과 삼류극장을 오가는 것 같았다.
그 중심에 다시 윤도현이 있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윤도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노브레인이나 조용필이 불렀다면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늘상 체제전복적인 발언과 노래를 해온 노브레인이 부르면 분명 안티애국가가 될 것이고, 이제는 부동의 국민가수가 된 조용필이 부른다면 애국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가수의 색깔 혹은 이미지와 관련이 있는 얘기였다. 하지만 윤도현은 달랐다. 그가 밟고 있는 곳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중간의 어느 지점이었다.

락과 대중가요 사이
윤도현은 <정글스토리>에서 록커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시골청년이었고, 콘서트 연습을 할 곳이 없어 황량한 벌판에 세워진 비닐하우스에서 맹연습을 했던 배고픈 록커였다. <윤도현밴드 Vol.3>라는 첫 앨범에서 <먼 훗날>이라는 곡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래도 윤도현이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히 세운 것은 두번째 앨범으로 나온 <한국 락 다시 부르기>에서였다. 윤도현밴드의 이미지는 다소 거칠고, 하드하며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던 당시 락 밴드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면서도 윤도현만의 강한 힘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 약간은 어정쩡한 중간지대 때문에 윤도현밴드는 초기, 락 팬들과 가요팬들 양자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가요팬들에게 여전히 락은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락 팬들에게 윤도현밴드는 너무 곱상해 보였다.
그는 <한국 락 다시 부르기>에서 우리네 한국 락의 정령들을 끌어모았다. 그가 선택한 노선은 역시 독특했다. 락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신중현은 물론이고, 배철수, 전인권, 강산에, 옥슨80, 샌드페블즈, 심지어는 송창식에 러시아 락의 전설인 빅토르 최에 이르기까지 우리 귀에 익숙한 다양한 노래들이 들어있었다. 그것들은 상당히 락의 저항정신을 담고 있는 노래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모든 노래를 윤도현밴드만의 색깔로 편곡한 것이었다. 이러자 락 팬들은 ‘한국락’에 주목했고 가요팬들은 그 친숙한 노래를 부르는 깔끔한 이미지의 윤도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윤도현은 락으로 부르는 응원가의 강렬한 힘과 대중적인 어필을 동시에 해내면서 국민가수가 되었다.

애국가 논란은 윤도현 밴드가 가진 힘
그런 그가 애국가를 불렀다. 그걸 가지고 애국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느니, 잘 만든 ‘애국가 다시 부르기’라느니 하는 건 사실 윤도현밴드의 문제가 아니다. 올림픽 같은 걸 보면 외국가수들이 자기네 국가를 R&B 스타일로 부르는 모습을 왕왕 볼 수 있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는 여기에 민감한 것일까.
윤도현밴드의 애국가 논란은 애국에 대한 우리네 정서가 심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밖에는 안된다. 윤도현밴드의 소속사인 다음기획 김영준 대표는 윤도현밴드가 애국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전후사정을 설명하면서 소속, 단체 등을 떠나서 함께 응원가를 소개하고 부를 수 있는 쇼케이스를 마련하자는 제안을 했다. 응원가가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모습은 마치 과거 수업시간 빼먹고 단체로 모여 응원연습을 했던 시절의 회색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정이야 어떻든 윤도현 밴드는 애국가 논란에서는 무죄다. 오히려 이 논란은 윤도현 밴드가 가진 힘을 거꾸로 말해준다. 돈과 이익에 얽힌 문제는 별개다. 윤도현 밴드도 자신의 상품가치를 정당하게 팔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다만 의도했든 안했든 논란을 야기해 주목을 끌고있는 기업들의 행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마치 과거 군인출신 대통령이 국민의례를 통해 세뇌시키려고 했던 애국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제는 돈이 절대권력이 된 세상이다.

상상플러스 그 처절한 오락프로의 세계

이런 상상을 해본다. 실로 연예계를 하나의 무림으로 본다면 지금 그 무림은 수많은 고수들이 출몰해 일순 빛을 발하다가 새로운 고수를 만나 스러지는 혼돈기임에 틀림없다고.
과거의 무림은 정돈되어 있었다. 한 계파가 다른 계파를 넘보는 일이 있기는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계파 간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네모난 TV 속 무림계에서는 음악을 하던 이들이 연기를 하고, 연기를 하던 이들이 노래를 한다. 그들은 또한 너무나 팔방미인인 탤런트(talent)이기 때문에 각종 예능프로에 출연해 개그를 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을 홍보하면서 인간적인 이미지까지 확보한다.

문제는 개그계이다. 그들도 가끔 노래도 하고, 음반도 내며, 때로는 연기자로 변신하지만 그게 그렇게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가수와 연기자들이 개그맨들보다 낫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이곳은 하루 입 한번 잘못 뻥긋하면 퇴출되는 무시무시한 무림이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나 다양한 자칭 타칭 ‘입담 좋은 고수들’이 모여들고 있는 개그계, 지금의 개그맨들이 딛고 있는 땅이 너무나 좁아 보여 하는 말이다. 이 시대의 개그맨, 그들은 양극화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네 중간층(middle class)을 닮아있다.

KBS의 독주에는 의미가 있다?
TNS미디어코리아에서 조사한 지난 13일부터 19일 사이의 예능프로 전국가구 시청률을 보면 상상플러스(1위 28.3%), 개그콘서트(2위 21.5%), 해피투게더 프렌즈(3위 21%) 등 KBS의 독주체제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밖에도 비타민(5위 17.9%), 스타골든벨(7위 16.4%), 스펀지(16.4%)를 포함해 10위 중 총 6개 프로그램을 KBS가 독식했다는 것이다. 창사부터 연예와 오락을 모토로 했던 SBS는 비교적 오래된 프로그램인 진실게임(4위 20.9%), 야심만만(6위 17.3%)으로 겨우 체면만 살렸고, 반면 MBC는 꼭 한번 만나고싶다(9위 14.9%), 섹션TV연예통신(10위 14.9%) 등이 순위에 있긴 하지만 본격 연예오락프로그램인 ‘일밤’, ‘토요일’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등이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혹자는 KBS의 독주를 의미 있게 해석한다. 상상플러스의 올드 앤 뉴 같은 프로그램과 스펀지를 ‘인포테인먼트(인포메이션 + 엔터테인먼트)의 개가’로 보기도 하고, 해피투게더 프렌즈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식 감동’이라고 해석한다. 개그콘서트는? 당연한 얘기지만 개그콘서트는 개그콘서트니까 독주대열에 낀다. 즉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 첫 번째 개그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사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의미 있는 해석이 독주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까? 이미 최초의 의도였던 인포테인먼트는 희석될대로 희석되었고 이제는 말장난에 가까운 출연자들의 멘트가 그 자리를 차고앉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인기의 비결이 출연자에 있다고 말한다. 탁재훈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 말도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기는 하다. 하지만 상상플러스에서의 탁재훈이 맡은 역할에 비하면 해피투게더 프렌즈에서의 역할은 상당히 적다. 프로그램의 기획단계에서 출연자까지 기획에 포함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인기의 비결에는 아무래도 출연자보다는 기획에 힘이 실린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상상플러스의 독주를 이끌었던가.

시스템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개그맨들
어떠한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는 그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고, 직간접적인 이익 때문인 것처럼, 예능프로의 의미 역시 사실 순위가 만든 것이지, 그 자체가 인기비결은 아닐 것이다. 시청률은 사실상 재미가 판가름한다(물론 재미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겠지만). 시청자들은 이제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순간적인 즐거움에 익숙해있다. 가끔 어른들은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말한다. “저들끼리 나와서 웃고 떠드는 걸 뭐가 재밌다고 보냐”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웃음에 중독되어있다. 토크쇼는 예능프로그램의 대세이다. 물론 개그콘서트류가 남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다. 개그콘서트는 그 컨텐츠 자체의 성공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성공으로 보는 것이 맞다. 편집이라는 칼날 아래 끊임없는 경쟁을 유도하는 개그콘서트의 시스템은 보는 이들에게는 그저 재미지만, 개그를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작두 위에서 추는 춤처럼 위험하기만 하다.

요인은 폭로와 무너지기에 있다
그렇다고 토크쇼가 개그맨들에게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개그맨 혹은 개그맨에 준하는 재담을 가진 이(탁재훈 같은)가 MC를 맡고 매번 출연자들을 초대해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플러스 같은 토크쇼가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 프로그램의 폭로성과 무너지기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상상플러스에서 먼저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야심만만에서 야심차게 해왔던 일들이다. 출연자들은 자신의 사생활은 물론이고 동료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 들춰낸다. 가만히 보면 출연자들은 어떻게 하면 무너질까 고민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프로그램 속에서 스타로서의 고고함이나 신비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바로 ‘재수없음’으로 통하게 된다. 그들은 강박적으로 무너지기에 몰두하고, 시청자들은 그 모습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아나운서를 세워놓고 하는 독특한 구성은 마치 이 프로그램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지만 사실은 다르다. 아나운서가 누구인가. 뉴스를 전달하기도 해야 하는 아나운서는 철저한 공인으로서 표정은 물론, 말까지 조심스러운 직업이다. 아나운서를 세워놓고 놀리거나,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가학적 행위는 그 자체로 시청자들의 욕구를 풀어주면서도, 피해자(?)에 대한 묘한 동정심과 애착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스스로 가해자들도 무너지기를 통한 바보가 되면서 가해와 피해의 균형을 맞춘다.

이것은 비단 상상플러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비타민(스타들의 사적인 몸 상태 드러내기), 해피투게더 프렌즈(스타들의 어릴 적 개인사 드러내기) 등도 형태는 다르나 내용으로 보면 유사하다.

개그맨들의 자가당착과 우리네 중간층들
프로그램은 끌어내리기의 연속이다. 출연자도 마찬가지고, 고정MC도 마찬가지다. 다만 개그맨은 본래부터 밑에 있었기에 그다지 끌어내려진 것 같은 느낌이 없다. 반대로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연기자나 가수는 다르다. 따라서 프로그램의 귀추가 무너지기에 의한 웃음에 있기에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건 개그맨이 아니라 초대된 출연자들이다.

이제 출연자들은 개그맨을 압도하는 웃음을 만들어낸다. 탁재훈(물론 고정 MC지만 과거엔 주로 출연자로 시작했다)이나 최근의 김수로 같은 인물들은 개그맨 이상의 웃음을 선사한다. 게다가 그들은 개그맨이 아니라는 이점도 갖고 있다. 즉 개그맨은 웃기면 당연한 거지만, 못 웃기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반면 연기자나 가수는 웃기면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사람’이 되고 못 웃기면 그냥 본업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인 개그맨들은 매번 새로운 복병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나는 치열한 전장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복병들을 돕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면 누가 이런 시스템을 제공했던가. 그것은 당연히 정책 결정자이다. 인물과 연기력에다 이제는 웃음까지 걸머지는 부자들의 시스템 속에서 달랑 무너뜨릴 몸 하나를 갖고 처절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 개그맨들은 우리네 중간층을 닮아있다. 정책은 본래부터 중간층이 바랬던 대로 그들을 상류층으로 끌어올리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층으로 끌어내리는데 있었던 것이다.

처절한 개그맨들, 스스로 무너지기로 하다
<개그 콘서트>로 비롯된 개그맨들의 부속화는 개그맨 스스로를 처절한 개그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편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한없이 무너뜨렸다. 갈갈이는 무를 갈았고, 옥동자는 바보짓을 했으며, 세바스찬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생존하려 했지만 그들에게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 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생존하거나 퇴출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렇다고 전쟁 바깥에 있는 고정프로그램 속의 개그맨들이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 더 웃기는 연기자들,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개그맨들은 자신의 위치를 더 낮춰야만 했다. 국민약골로 새롭게 인기를 얻게 된 이윤석과 호통개그로 주목받고 있는 박명수 등은 이 끝없는 낮춤으로 개그맨으로서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가끔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 보기가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은 그 처절함을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은 슬프다.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왜 모두들 그 길로만 걸어가야 하는 걸까. 왜 우리나라에는 우디 알렌 같은 지적인 개그맨이자 성공한 연기자, 감독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웃음은 우리의 삶을 비틀고, 슬픔을 비틀어내면서 나오는 철학적인 그 무엇이다. 왜 우리는 그렇게 웃음을 바라고 웃으면서도 웃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은 비단 개그맨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된 많은 연기자와 가수들도 처절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은 그 곳이 자신의 무림이 아니며 돌아갈 자신만의 무림이 있다는 최후의 안도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최근 극장가를 거의 장악하고 있다시피한 주인공을 무너뜨리는 코미디물들은 이제 이 처절한 개그의 시스템이 관객의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개그계의 무너지기 열풍은 이미 연예계 전반의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돈의 무림계,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거짓 웃음을 지어 보이며 끝없이 자신을 무너뜨리고 있는 수많은 중간층들이 진정한 웃음을 지을 날은 언제일까. 그 날을 상상해본다.

조선시대 연예비사, <왕의 남자>

연예계 뒷담화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관객 수 1천만의 흥행성공을 넘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왕의 남자>는 조선시대에 왕과 광대 사이에 벌어진 희대의 연예비사, 그것도 남성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만일 동성이 아닌 이성이라면야 무치(無恥 :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로 불렸던 왕에게 이건 비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대상이 평민이었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중잡배들의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는 문고리’에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빠는 술잔’인데다,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는 나룻배’였던 광대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왕이 탐했다는 점에서 연예비화가 될만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내용은 그저 만들어낸 픽션이 아니다. 물론 많은 각색이 들어갔지만 역사적 사실들에 상당부분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5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역사는 재해석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유분방한 대통령과 함량 미달의 정치인들
연산군의 비화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7년에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각색해 만들어진 <연산군>은 당대의 섹스심벌이었던 이대근이 연산군으로, 그리고 강수연이 장녹수로 출연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과거의 우리의 눈과 귀를 먹게 했던 에로영화의 코드를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1988년 임권택 감독이 만들고 유인촌이 연산군으로 출연한 <연산일기>는 보다 연산군 자체의 인간적 측면에 닿아있다. 이 영화에서 연산군은 죽은 폐비 윤씨에 대한 마더콤플렉스를 가진 인물로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그의 폭행을 정신착란에 의한 것으로 해석) 면을 강조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소재의 영화가 이렇게 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역사적으로는 87년 6.10 민주항쟁에서 6.29 항복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과거의 잔재와 변화하려는 자유에 대한 의지가 공존했던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다.
현재에 만들어진 <왕의 남자> 역시 그 시대상을 빗겨갈 수는 없다. 영화가 신드롬이 되다보니 그 신드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영화적 상황을 현실에 빗대 이야기하면서 이런 부분을 조장한 것이 사실이다. 연산군이 공길에게 중신들의 반대에도 종4품의 벼슬을 주었다는 것을 최근의 노무현 대통령이 당 안팎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한 것에 빗대 말하기도 하고, 연산군이 ‘내가 왕이 맞느냐’고 하는 말을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광대들을 끌어들여 정적을 제거하는 연산군의 모습을 두고, 어떤 정치인은 인터넷을 동원해 여론몰이를 하거나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내는 노 대통령을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위기 때마다 그걸 뒤집는 장생의 언변으로 시골 마을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궁궐로 가는 장생의 입신 역시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들이다.
물론 <왕의 남자>의 감독이 이걸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적어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분방하면서 탄핵까지 받을 정도로 힘이 약한 대통령과, 그렇다고 대통령을 욕할 버젓한 자격이 있는 정치인도 없는 답답한 현실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선시대 개그맨, 정치코미디의 재미
답답한 현실, 이제 그 마이크는 당대의 개그맨이었던, 광대가 잡는다. 장생(감우성 분)은 조선시대 김형곤 같은 정치코미디의 일인자였던 것 같다. 민중들의 애환을 속 시원히 풀어주던 당대의 연예인들, 연희패들은 오늘날의 연예인들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TV라는 매체는 파급력이 좋은 반면, 통제하기도 쉬운 법이다.
강력한 왕권 하에서도 연희패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질펀한 농담을 풀어놓는데, 그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풍자가 당연했다. <왕의 남자>의 도입부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누는 장생과 공길의 대화는 성적인 농담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당대의 연예인들인 광대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기예를 팔고 몸을 파는 것이 일이었다. 이것은 당대 여사당(女社堂)이 받는 돈을 화대(花代)라고 불렀던 것만 봐도 쉬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신들의 이런 처지를 웃음으로 돌려 풍자하던 장생은 이제 그 말의 칼날을 정치인들을 향해 든다. 그는 왕이 기생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밝히는 건 왕이나 벼슬아치나 평민들이나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왕과 녹수의 애정행각을 빗댄 정치코미디를 시작하고 이건 공공연한 소문을 눈앞의 현실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치인이 어느 연예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인터넷 입소문 만큼 빠르게 전파된다. 민중들은 이 놀이판에서 장생과 공길을 통해 왕과 녹수의 비밀스런 침소를 엿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왕을 잡놈이라 했더니 좋아하더라
어떤 연예인은 대머리에 용모가 비슷하다 하여 집권기간 내내 방송출연을 못했던 사람도 있는 마당에, 강력한 왕권통치의 조선시대에 왕을 빗댄 정치코미디가 성했을 리 없다. 의금부로 압송된 장생은 그러나 또 한번의 당찬 발언으로 궁궐로 들어가는 영광을 얻는다. 그것은 ‘왕을 웃기면 왕을 모욕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묘한 논리에 근거해 있다.
사실 장생 조차도 왕이 웃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연희마당으로 나서면서 ‘어차피 살 판 아니면 죽을 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천상천하의 왕을 잡놈으로 치부하면서 ‘윗 입을 주랴, 아랫입을 주랴’하는 질문에 점잖은 체, 왕을 빗댄 연기를 하던 장생이 ‘윗 입’을 달라고 하자, 그 뜻을 알아차린 녹수 연기를 하던 공길이 ‘물구나무를 서며 윗 입 대령이오’라는 말에 왕은 웃음을 터뜨린다. 왕은 공감했던 것이다. 중신들 모두 법도니 뭐니 하며 윗 입 타령을 하지만 사실은 다들 아랫입을 탐하던 것을 알았던 왕은 공길의 물구나무에서 중신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읽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다. 사실은 그 윗 입 아랫 입 퍼포먼스에 등장한 비판의 대상에는 중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왕 또한 포함된다. 왕은 그 위선적인 법도를 벗어나려는 자학적인 잡놈 행세를 했던 것이고, 이들의 퍼포먼스를 보며, 이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었다. ‘너도 광대이고 나도 허수아비 광대’라고 말하는 왕은 왕이 싫었고, 궁궐을 벗어나 잡놈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왕은 광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중독되게 되고 그들의 퍼포먼스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연희 속의 환상은 왕에게 현실이 되어버린다.

왕의 환타지 속에서 살고 죽고
왕을 농락하는 광대들을 비판하는 중신들로 인해 왕은 더더욱 광대들에게 고착된다. 이제 왕은 광대들을 자기동일시 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광대들이 왕과 조우하면서 그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중신들을 갖고 노는 것이다. 그러자 왕은 이 놀이판을 현실로 바꾸면서 중신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한편 녹수와는 달리, 진정으로 왕을 이해하게 된 공길은 폐비 윤씨의 사건을 재현해내고 이 과정에서 왕은 선왕의 여자들을 살해한다. 왕은 장생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신 속의 강한 왕(선왕)과 동일시하며, 공길을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시한다. 그러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왕은 어머니를 사랑하듯 공길을 사랑하지만, 선왕만을 받들고 죽게 됐던 어머니처럼 공길 역시 장생만을 따른다. 왕은 어린 시절로 퇴행한다.
왕의 환상 속에서 장생은 아버지, 선왕이며, 왕은 어린 시절로 퇴행한 자신이고, 공길은 연산의 어머니가 된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모는 아버지와 어쩔 수 없는 어린 자신의 상황을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장생이 연산에게 한 “어느 잡놈이 그 놈 마음 훔쳐 가는 걸 못 보고...”라는 말에, 공길이 “야 이 잡놈아! 거기가 어디라도 올라가느냐!”라고 하며 그 잡놈이 장생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장생은 미소짓고 있었고, 연산은 살의를 느꼈다. 질투에 불타는 왕은 장생의 눈을 지지는데, 눈을 지지는 이 모티브는 여러모로 보나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왕>에서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죽게 한 오이디푸스왕이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눈 먼 개그맨, 세상이 보이다
눈이 먼 장생은 이제 눈뜬 장님으로 살던 시절을 본다. 자신이 사랑해왔던 공길을 본다. 자신이 살아왔던 길이 사실은 살 판이 아닌 외줄에 가까스로 의지한 죽을 판이었다는 것을 본다. 살기 위해 자유의지를 꺾었던 자신을 본다. 그러나 그 외줄 위에 서는 그 짧은 순간만이 자신이 왕보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던 자유인이었던 것을 알게된다. 그 줄 위에서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는 선언을 한 두 사람은 높이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그 하늘에 붙박여 정지된 장면 속에서 장생의 손에 삶의 지긋지긋한 애착처럼 꼭 쥐여있던 부채는 놓여진다.
연산은 자신이 스스로 허수아비 광대였다는 것을 알게된다. 마치 사이코드라마처럼 자신을 상처 주었던 선왕을 눈멀게 한 연산은, 이제 어머니가 따르던 선왕과, 어머니의 외줄타기 사랑(왕이라는 굴레 속에서)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웃음 뒤의 또 다른 얼굴, 개그맨과 정치인
<왕의 남자>는 마치 개그콘서트 류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 같다. 조선시대의 광대들은 각종 기예와 웃음들을 갖고 궁궐로 찾아들어 경연을 벌인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바로 이 조선시대에 벌어진 개그콘서트를 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유랑연예인집단인 남사당의 연희 종목인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같은 놀이들이 질펀한 개그와 곁들여지니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는 또 다른 얼굴들이 있다. 자신의 고통이나 신체적 장애까지 이용해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들의 애환이다. 그래서 개그맨들의 웃는 모습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저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네와 똑같이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텐데 그래도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구나, 하는 감회에 젖게된다. 하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의 얼굴도 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얼굴이다. 그들의 웃는 얼굴, 혹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포커페이스 뒤에는 뭔가 뒤틀리고 꼬인 실타래 같은 욕망이 숨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말 몇 마디로 욕망을 채우려는 부정한 정치인의 이미지들이다.
개그맨이나 정치인이나 둘 다 입으로 먹고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지향하는 바는 이렇게 다르다. 가장 낮은 입이 가장 높은 입과 한판 걸판지게 붙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가십거리의 연예 비사를 뛰어넘어 억눌린 민중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저 윗분들의 잘못 이면에 대한 이해 또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소비계층의 폭을 대폭 넓혀놓았다. 그러나 이 양극점의 해소는 저 외줄을 타고 있는 장생, 공길과, 녹수를 끼고 높은 곳에 앉아 외줄타기를 보고 있는 연산의 거리만큼 멀다. 다만 그것을 가깝게 하는 것은 연산에 반기를 든 세력들에 의해 연산 또한 같은 운명을 갈 것이라는 예감이다. 높은 놈이나 낮은 놈이나 어차피 가는 것이고, 그러니 이 한 판 자유롭게 살다 가는 게 낫지 않는가. 영화는 ‘자유로운 잡놈’과 ‘자유 없는 왕’이라는 두 측면에서 균형을 잡으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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