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마돈나>와 소수자의 문제

천하장사와 마돈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할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이미지는 그러나 오동구라는 한 뚱보 소년 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근거 없이 가졌던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천하장사와 마돈나, 남성성과 여성성, 소년과 기성세대, 꿈과 현실, 소수자와 다수자 등등. 전혀 한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결구도를 보여 전혀 결합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편견에 의한 것이라는 걸 꼬집는다.

마돈나와 동구 사이
영화는 어린 동구의 허밍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마돈나의 ‘like a virg다. 그의 귀에는 헤드셋이 끼워져 있다. 그가 듣는 마돈나의 노래와 자신이 따라 부르는 ‘like a virgin’ 사이에는 이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마돈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꿈을 꾸는 동구의 작은 방 한 켠으로 화려한 조명이 환상처럼 돌아간다. 동구는 꿈을 계속 꾸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 동구는 마돈나가 되기에는 너무 뚱보다. 살이 쪄 가슴이 나왔다는 것과 젖꽃판이 크다는 것 외에 동구가 마돈나와 닮은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가 된다고 해도 어울리지 않을 몸을 갖고 있다. 게다가 동구는 마돈나처럼 가녀린 여자가 아니다. 인천항 하역장에서 남들은 두 개씩만 올려도 힘겨워하는 짐을 다섯 개씩 올려도 끄덕하지 않는 괴력의 소유자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마돈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동구를 앞에 세워놓고 의아해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하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동구의 힘을 앞세워 그의 마돈나가 되고픈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오동구는 여자가 되기 위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금이 걸린 씨름대회에 나가게된다. 도무지 그의 꿈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괴력(남성성) 또한 그의 꿈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오동구의 마돈나가 되려는 노력을 보면서 그 거리만큼 그의 강렬한 욕구를 읽게된다. 그런데 그것은 막상 동구에게는 그다지 거창한 꿈이 아니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며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단짝친구 종만에게 동구는 말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라고.

동구와 아버지 사이
그랬다. 동구에게 여자가 되는 것은 욕망이 아닌 생존이었다. 이야기가 존재의 문제로 확장되자 주변인물들이 여기에 호응하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 거대한 포크레인의 등장과 그 앞에 선 동구는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측면을 말해준다. 동구의 아버지는 동구에게는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현실과 같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포크레인이며,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면서” 싸워야 버텨낼 수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현실 역시 동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동구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사실 꿈을 포기하고 뛰어든 저 노동현장에서부터 가져온 것이다. 편안한 가족의 품을 제공해줘야 할 집은 아버지가 밖에서 가져온 현실로 동구를 압박한다. 아버지의 훈계와 폭력은 사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동구가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권투의 꿈이 꺾이는 순간부터 더러운 현실과 마주한다. 주먹은 꿈을 위해 링 안에서 휘둘렀을 때에만 그 가치를 발휘한다. 현실은 주먹이 아닌 때론 교활하고 때론 비겁한 처세를 요구한다.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의 주먹은 애꿎은 동구에게까지 향한다.
하지만 동구는 포기(그것은 생존이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편안한 현실보다 힘겨운 꿈을 선택한다. 여장을 하고 아버지 앞에 선 동구에게 아버지는 현실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동구는 결정적인 순간, 아버지를 들어 날려버린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모래판 위에 남을 수 있었고, 따라서 그의 괴력은 꿈을 위해 건강하게 사용된다.

동구와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아버지를 넘어선다’는 전통적인 통과의례적 의미도 담고 있다. 아버지가 가진 권위에 맞섬으로서 동구는 저 스스로 성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앞에는 아버지가 싸워왔던 현실이 놓여지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라”는 정도밖에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이 지점이 꿈과 현실에 대해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와 동구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동구와 씨름부 사이
아버지도, 사랑하는 일어선생님도,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단짝친구 종만조차 동민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철저히 소수자로서 혼자 살아가야 될 삶을 감지한다. 하지만 동구가 꿈을 이루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씨름부원들과 감독을 만난 동구는 거기서 일종의 ‘소수자의 연대’를 느낀다. 말만 번지르르 하고 씨름은 뒷전에다 오히려 동구에게 춤을 배우려는 친구, 겨드랑이가 너무 민감해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쓰러지는 친구는 물론이고, 설명은 없어도 출세와는 비껴있는 감독, 손이 터져라 연습해도 늘 지는 주장까지 모두 ‘다수자의 지지’에서 비껴난 소외된 인물들이다.

씨름부라는 남성적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구가 쉽게 그들과 어우러지는 것은 그들이 이 같은 소수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덩치 큰 동구가 회식자리에서 날렵하게 춤을 추며 렉시의 ‘애송이’를 부를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특히 덩치 트리오 중 문세윤이 연기한 덩치는 동구와 같은 여성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동구를 통해 자신의 감성을 하나하나 발견해나가는 듯 하다. 춤을 배우고 ‘요즘 내가 너 때문에 헷갈린다’고 할 정도로. 이 무거운 주제의 영화가 전체적으로 밝고 시종일관 웃음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소수자들의 유쾌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만큼 먼 거리를 한 몸에 안은
영화가 말하려는 남성성과 여성성, 현실과 꿈, 소수자와 다수자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인천이라는 공간성에도 나타난다. 동구가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의 현장인 땅과, 그 위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비행기가 떠있는 하늘, 그리고 동구가 소주를 마시는 차이나타운의 계단과 저 멀리 보이는,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배들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동구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하나로 쓸어 담는다(이것은 류덕환이라는 놀라운 연기자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리고 영화 끝에 우리는 무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부르는 동구를 만나게 된다. 이제 동구는 어린 시절 그 때처럼 혼자가 아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에는 씨름부원들도 있고 어머니도 있다. 영화는 여성이 되려는 동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그 영역을 아버지가 맞닥뜨린 현실로 그리고 소수자들이 서 있는 현실로 확장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성적 소수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일상으로 파고든다. 남성성과 여성성, 소수자와 다수자 같은 양자의 대결구도는 무장해제 된다. 그리고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들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ohm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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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시각으로 각설탕 보기

‘각설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달리는 천둥이일까, 아니면 그 말 위에 있는 시은이일까. 반려동물영화라면 당연히 그 포커스는 천둥이와 시은 양쪽에  맞춰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드라마 흐름은 그 포커스를 시은쪽에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는 참혹하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퇴색되고 ‘우정을 빙자한 동물 학대’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이 영화는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극처럼 보여진다. 눈물을 나오지 않고 대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달콤한 이미지의 ‘각설탕’이라는 제목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화적 맥락 속에서 그 제목은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동물’의 주종관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포커스를 받지 못한 천둥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천둥이는 자신의 부모, 장군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면서부터 인간들의 굴레 속에 평생을 견뎌내야 할 운명을 부여받는다. 자신이 태어나는 날, 부모를 저 세상으로 보낸 천둥이는 단지 일어서지 못한다는, 그래서 달릴 수 없을 거라는 기능적인 이유(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읽자면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를 따라갈 위기에 처한다(달리지 못하면 말이 아니라는 사고는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인가!). 그런데 천둥이를 구해내 달리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시은이다. 하지만 살았다 해도 앞으로 인간들의 굴레 속에 살아갈 천둥이의 운명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천둥이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나이트클럽에서 학대받는다. 그런 천둥이를 다시 만난 시은은 이제 자신이 받는 억압을 천둥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다. 천둥이를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는 경마장, 그 인간들의 순위 경쟁 속에 내세우는 것이다. 천둥이는 경마장에서 달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저 인간 없는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둥이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저 천둥이와 비슷하다는 사회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알아주지 않고 나이트클럽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천둥이의 모습은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경마장이라는 서기 싫었던 생존경쟁의 장에서(그것도 내가 아닌 저들의 머니게임을 위해)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천둥이의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가 하는 얘기를 닮아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둥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시은에게 포커스를 더 주고 있는 이 영화 속에는 그 악역이 명백하다. 시은과 윤 조교사의 대척점에 있는 철이와 김 조교사가 그들이다. 그들은 과도한 경쟁에 경도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악역만으로 보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경쟁사회에서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채찍이 아닌 각설탕으로 살아가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채찍이든 각설탕이든 그것은 게임의 룰을 쥐고 있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다루는 방법의 문제일 뿐, 근본적인 지배-피지배 구조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단순화된 채찍보다 은근히 본질을 숨기는 각설탕이 더 무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달콤한 중독으로 사로잡는 현대적 의미의 또 다른 채찍이 되기 때문이다. 천둥이는 왜 마지막 순간에 수술을 받고 더 오래 사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부분은 모호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천둥이의 의지가 무엇 때문이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그렇게 해석된다. 그 자의적 해석은 천둥이의 비극을 가져온다.

영화가 진정으로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다루고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 순위 경쟁으로 다시 내몰아 1등으로 골인점을 통과하고는 죽는 천둥이와 그 앞에서 오열하는 시은을 그리기보다는, 이 경쟁사회의 경마장에서 탈출하는 천둥이와 시은의 모습이 그려졌어야 옳다. 천둥이의 죽음은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비극적인 운명과 닮았다는 맥락에서 슬프지만, 천둥이의 죽음 앞에 눈물짓는 시은의 모습에서 전혀 슬픔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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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속 이미지의 문제


해변이 주는 이미지는 발랄하다. 그래서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이란 제목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강요한다. 여름, 바닷가,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등등.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단 몇 분만 지나면 알게될 것이다.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들은 사실 우리들의 해변에 대한 잡다한 기억들이 만든 편견이라는 것을. 홍상수 감독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흔히 극장 안은 환상의 세계고 극장 밖이 현실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홍상수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아직까지 황사가 날리는 봄이다. 바닷가? ‘서해 최고의 해변 신두리’. 말 그대로 정말 멋진 곳이지만 우리가 이미지적으로 해변이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그런 해변은 아니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는 백사장에서 보이는 바다가 나오지 않는다. 물 빠진 뻘 위를 걷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영화감독 중래(김승우 분), 영화음악작곡가 문숙(고현정 분), 영화세트미술가 창욱(김태우 분), 그리고 이혼을 결심한 유부녀 선희(송선미 분) 이들의 하룻밤은 전혀 낭만적인 냄새가 없다. 그런데 이건 왠일일까. 이 일상적인 이미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 영화가 시종일관 관객들을 웃기는 것은.

홍상수 감독은 아무래도 영화 속에서 철저히 관객들을 배반하고 싶었나 보다.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것은 창욱의 애인으로 온 문숙이 바닷가에 도착해 “우리 애인 아니예요”라고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바닷가가 비추는 을씨년스런 풍경들 속에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거슬러올라가 그것은 어쩌면 고현정이라는 배우가 캐스팅 되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현정의 새로운 면모에 놀랄 것이다. 그것은 예견된 것이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우리가 가진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영화가 말하려는 일상적 이미지의 허구성을 드러내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고현정은 마치 “연기하지 말라”는 감독의 지시를 들은 연기자처럼 연기한다. 고현정이 쌍소리를 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일종의 ‘즐거운 배반’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을 웃기는 개그 코드와 맞닿아 있다. 마치 노을지는 바닷가 앞에서 뭔가 사랑얘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연인이, 실상은 온통 살이 그을려 서로의 살을 건드리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줄 때 나오는 웃음과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웃긴다.

그런데 웃으면서 자꾸 뒷덜미를 당기는 것이 있다. 머리 속에 그려진 일상적인 이미지가 자꾸 깨지고 현실의 뒤틀린 모습을 자꾸 보면서 삶이 비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래가 자신이 과거의 ‘나쁜 이미지들’(실상은 아내가 바람핀 것)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일일이 도형까지 그려가며 ‘나쁜 이미지’들이 어떻게 우리를 교란시키는가를 진지하게 설명하는 중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이중성을 보게 된다. 그의 설명은 아이디어로 넘치고 재미있는 해석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변명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 그 간극 사이에서 관객들의 웃음은 터진다. 그런데 그 웃음의 뒷맛이 쓴 것은 그 모습에서 언뜻 관객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냉소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감독이 그런 일상에 던지는 진지한 시선 때문이다. “무슨 영화를 구상하고 있냐”는 창욱의 질문에 중래는 자신이 구상하는 대충의 영화 스토리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음악이 세 번 반복되자 그것을 기적으로 여긴 주인공이 몇 십 년에 걸쳐 그 기적의 비밀을 캔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영화는 중래의 말처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같은 술집과 펜션, 밤늦게 물 빠진 해변에서 만나는 남녀, 잠자리, 개를 데리고 해변을 걷는 남녀 등등. 그걸 통해서 영화는 마치 중래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일상적인 이미지로 뭉뚱그려 보던 것들을 하나하나 재발견하게 된다. 상황은 반복이지만 그 속의 내용들은 조금씩 다 다른 구체성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가진 이미지마저 깨뜨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영화를 어렵게 느껴왔던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실컷 웃어도 좋다. 그렇게 웃다보면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뇌를 장악하고 있는 일상의 이미지들이 너무나 굳건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즐겁고 재미있는 대중성을 확보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건넨다.
박찬욱, 봉준호 같은 자기 세계가 투철한 작가들이 동시에 대중성을 획득하는 줄타기에 성공한 것처럼,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역시 자신의 세계와 대중성이라는 양끝의 균형자를 들고 줄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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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vs 괴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 ‘1000만’ 관객을 ‘단 21일만’에 돌파한 괴물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며 너도나도 ‘괴물 보자’고 달려가는 지금의 현상은 숫자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것은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숫자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괴물을 보지 않으면 수준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딜 가도 화제가 되는 그 이야기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결과적으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기저에는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일반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날아온 ‘영화제에서의 호평’이라는 외신은 전문가 집단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대감이 대부분이었겠지만 한 편으로는 강박적인 두려움도 한 몫 했다. 그저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면 그런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호평을 받았다면 그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작품 앞에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는다.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 블록버스터이지만 ‘의미 있는 블록버스터’.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힘은 기자들에게 지대하다. 모두들 달려가 보는 영화에 적어도 전문가인데 한 마디 곁들여야 전문가로서 소외 받지 않는다는 의식 때문이다. 이렇게 전문가 집단이 여기저기서 강박적으로 쓴 기사들은 온통 매체들을 뒤덮는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괴물’의 존재감을 느낀다. ‘보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 이상한 의식의 괴물이 우리 마음 속의 한강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영화 ‘괴물’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탄생처럼, 우리 의식의 한강 속에 누군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것은 아닐까.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부터 우리를 들뜨게 했던 수치들, 수출목표, 아시아 몇 위라고 하는 GNP, GDP 수치, 툭하면 등수를 매기는 경제지표들에서부터, 올림픽 메달 수와 월드컵 몇 강이라는 스포츠의 수치들, 그리고 그 저변에 죽 깔려왔던 성적표와 등수와 점수로 일관되는 입시교육, 그로 인해 의식화된 엘리트주의. 그 소수에 들기 위한 안간힘들…. 그렇게 숫자로 대변되는 소수엘리트주의라는 포름알데히드는 우리 의식 속에 괴물을 키워왔던 건 아닐까. 포름알데히드 방류에 난색을 표하는 김의 모습은 우리가 숫자라는 괴물에 포획되기 이전,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라며 망설였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 입시교육의 선봉에 서야 했던 선생님들은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인생은 길다. (지금 몇 년은 짧다.) 보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지자.” 저 영화 속의 더글라스 부소장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 속에 자라난 숫자라는 괴물은 백주대낮에 영화가를 습격해 아수라장을 만든다. 전국 1400여 개의 상영관 중 620개를 싹쓸이한 것이다. 거의 영화관 2개 중 하나는 괴물을 틀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괴물의 등장 이면에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뉴스는 연일 괴물의 기록행진, 그 선정적인 수치보도에만 열을 올렸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백주대낮에 버젓이 괴물이 등장(사실 괴물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그 실체는 밤에 가려져 있었다)하면서 그간 그토록 괴물의 실재를 호소하며, 자신들이 겪은 상처를 토로하는 영화인들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피해자 가족들 중에는 김기덕 감독도 있었다.

괴물의 실재와 딸 현서의 생존을 토로하는 박강두를 이상하게만 보는 것처럼,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곡해됐다. 김기덕 감독은 말을 극도로 아꼈고, 그러다 보니 해석이 분분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과거 10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총 관객이 100만 명이 되지 않았던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것도 해외에서는 각광받는 영화가!). 그것은 마치 박강두네 가족이 그 한강변의 매점으로까지 떠밀려 내려온 사연과 비슷하다. 박희봉이 아무리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떠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쿨쿨 잠만 잘 테니. 오히려 수치를 들어 얘기하면 이해가 될까. 제목 - 괴물 : 활(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 개봉관수 - 620 : 1 관객수 - 1000만+∝ : 1398명! 그는 극장이 자신의 영화를 틀어주지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나서서 수치라는 괴물과 싸우는 방식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의 경우처럼 여러모로 실패의 요소를 안고 있다. 가장 첨예했던 발언은 영화 ‘괴물’에 대해 “우리나라 관객 수준과 영화 수준이 최고점에서 만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의 해석을 두고 “우리나라 관객 수준이 낮다는 것이냐”,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준이 높다는 것이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뒤늦게 김기덕 감독은 ‘최고점’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발화점은 높고 낮다는 의미의 해석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준’이라는 단어에 있다. 그 단어는 저 마음 속 은신처에 숨어있던 괴물을 꿈틀대게 만들면서 저마다 분분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김기덕 감독의 이 발언에는 함정이 있다. 그 발언을 긍정적으로 읽어 이 영화가 최고점에서 관객과 만났다고 해석한다면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 발언을 부정적으로 읽는다면 스스로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은 “괴물은 훌륭한 영화”라고(100분 토론에서) 함으로써 스스로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00분 토론에 나와 편중된 수치게임과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김기덕 감독, 강한섭 교수)은 저 영화 속 박강두 가족처럼 무기력해만 보인다. 그들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처럼 각자의 얘기만 할 뿐, 어떤 연대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 

다. 특히 강한섭 교수는 “그 부분은 김기덕 감독님이 해결하시고….”라는 식으로 각자의 선을 그어놓는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입장만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며, 강한섭 교수는 이해할 수 없는 권위적 태도를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저 마음 속에 굳게 뿌리내린 괴물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영화 ‘괴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의 사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강두 가족의 괴물과의 사투에서 주목해보지 않은 한 인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영화 끝 무렵에 느닷없이 나타난 행려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괴물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인물은 바로 그이다(괴물은 화살 한방으로 죽진 않는다. 여기에는 휘발유와 불이 필요했다.). 그는 괴물에게 어떤 피해를 입은 적도 없는 방외인이다. 그는 이 사태의 이해 당사자가 아니다.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며 왜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이것은 갑작스런 봉준호 감독의 개입이랄 수밖에 없다. 봉준호 감독의 사회인식은 어둡고 비관적이며 냉소적이다. 그는 전혀 힘없는 한 인물을 집어넣어 괴물을 해치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냉소적 시선이자 스스로 만들어 놓은 괴물을 없애야만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다. 그런데 괴물이 죽었으니 강두네 가족의 승리일까.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사실 괴물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강두네 가족이 원한 것은 괴물의 죽음이 아닌 잡혀간 현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괴물은 죽었지만 현서 역시 구할 수 없었다. 만일 이 영화가 작금의 영화현실에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알게 모르게 풍기고 있다면 그 전망은 밝지 않다.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 숫자는 허상이고(괴물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중요한 영화(살아있는 현서)는 구하지 못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다지 어둡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괴물을 경험한 후의 강두의 변화이다. 그는 거기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졸고만 지내던 그가 총을 옆에 두고 늘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영화 ‘괴물’이 일으킨 싹쓸이 논란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속에 수치와 엘리트주의가 뒤범벅된 괴물이 꿈틀거린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해주듯 허상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영화라는 것.

이런 면에서 보면 다시금 괴물이라는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며 놀라운 작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스스로 블록버스터라는 괴물이 되어버린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 같은 괴물과 싸우고, 그 존재에 대한 경각심은 늦추지 말라는 것이니 말이다. 이 정도가 되면 괴물이란 영화는 영화의 장르를 넘어서 하나의 행위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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