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둘수록 더 커지는 '무한도전'의 감동, 왜?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최근 들어 ‘감동’은 TV 콘텐츠의 한 트렌드가 되었다. 과거 이 용어는 드라마에 주로 등장했었지만 이제는 다큐멘터리, 예능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예능이 웃음을 넘어서 감동을 추구하는 경향은 특히 두드러진다. 웃음을 전하기 위해 슬픔이나 고통조차 숨기고 있는 그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과거라면 용납되지 않는 장면이다. 심지어 부친상을 당한 사실을 알면서도 광대 분장을 한 채 무대에 섰던 코미디언들의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눈물을 흘리거나 상황을 토로하거나 아니면 아예 양해를 구하고 무대에 서지 않는 게 상식적인 게 되어 있다. 이른바 ‘리얼’을 추구하는 예능은 이제 눈물 또한 숨길 이유가 없게 된 것(어쩌면 숨기면 안 되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감동이나 눈물은 물론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는 위험한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즉 어떤 감동은 때론 지나치게 교조적이며 계몽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억지 감동'이라고 표현한다. 때론 '병맛'이라고도 하고 '오글거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억지 감동'. 감동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서 그런지 그게 무슨 큰 문제일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이 '억지 감동'이 가져오는 재미의 반감은 실로 작지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아름답다!'고 자막을 붙이는 것이 무슨 차이일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그냥 내보내는 것과 자막이 붙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경관 자체를 보는 이들이 저마다의 감흥으로 받아들이게 하느냐와 굳이 한 방향으로 감상하게 하느냐의 차이다.

'1박2일'이 주는 감동과 '무한도전'이 주는 감동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1박2일'은 조연특집의 마무리에 계속해서 후기를 달아놓는다. 그들이 다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을 조명하면서 그들의 삶을 상찬한다. '명품조연'이 갖는 의미는 물론 상찬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끝없이 자막을 달아가면서 그 의미를 풀어내는 일은 때론 과잉처럼 여겨진다. 반면 '무한도전'의 자막은 대부분(물론 어떤 경우에는 '무한도전' 역시 과잉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상과의 거리감을 유지한다. 특히 게스트가 출연했을 때 그 거리감은 더 철저히 지켜진다.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그 많은 게스트들이 등장하면서도 그들을 상찬하는 자막이나 연출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1박2일'의 자막을 통해 드러나는 일종의 과잉은 TV라는 대중매체를 타는 프로그램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TV 프로그램은 시청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시청률은 특수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보편성에서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지나치게 친절한 자막은 바로 그 보편성에 대한 강박인 셈이다. '우리는 이렇게 감동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 감동을 느끼시라.' '1박2일'은 그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말하고 있다.

'1박2일'이 시청률이 높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대중들의 마음을 따라간다. 자신들이 느낀 감동을 고스란히 대중들이 느끼기를 바라며, 또 그 전달에 있어서 능숙하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다르다. '무한도전'은 보편성이 아니라, 그 특정한 한 지점을 그대로 뚝 떼어내서 되도록 그 자체로 보여주려 애쓴다. 물론 자막은 여기서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자신들이 느낀 감동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고 객관화시키려는 의도가 더 짙다.

'무한도전'이 마니아 예능 같은 느낌을 주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뭔가 설명이 없기 때문에 대중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해 자신들만의 해석을 달아야 한다. 일반적인 TV 시청자들에게는 수고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이 주는 감동은 주어진다기보다는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자막을 통해 어떤 의미도 전하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이 그 조각들을 맞춰서 저마다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침묵할수록 더 커지는 의미와 감동. 그 역설을 보여주는 게 바로 '무한도전'이다.

'남자의 자격'이 보여준 하모니의 매력

'남자의 자격' 합창단원들은 왜 대회에 참가한 할머니 할아버지로 구성된 실버합창단의 하모니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을까. 방송 자막에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눈물'이라고 그 감동의 실체를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눈물에는 합창만이 갖고 있는 매력이 응축되어 있었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실버합창단을 통해 언뜻 보게 된 것은 하모니의 진짜 의미였기 때문이다.

대회에 참가하기까지 '남자의 자격' 합창단원들은 꽤 긴 시간 동안 연습을 해왔고, 그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안되는 성량과 훈련되지 못한 목소리, 게다가 몸치에 박치까지 있었지만 합창단원들은 차츰 노래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합창단으로 묶여지기까지 서로 잘 몰랐던 그들처럼, 각자 놀던 목소리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기 시작할 때 그들이,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들의 가슴이 먹먹해졌던 것은 그 마음들의 교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회는 대회인지라, 그리고 너무나 높아진 기대감에 부담감도 큰데다, 그것도 첫 번째 대회출전 경험인지라 아마도 숨 가쁘게 달려온 그들은 바로 이 '합창의 본질'을 잠시 잊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객석의 자리에 앉아 거기 출전한 다른 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들은 다시 합창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다른 마음이 모여 노래 하나로 한 마음이 되는 그 순간의 감동.

특히 두 번째 참가자였던 60세 이상으로만 구성된 '한사랑 실버 합창단'은 합창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소박할수록 아름다운' 마음들이 거대한 하모니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회라는 경쟁적 의미는 사라지고, 그저 그렇게 마음들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합창 본연의 힘을 느끼며 어찌 '남자의 자격' 합창단이 눈물을 참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남자의 자격' 합창단 스스로 합창을 하면서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감동의 실체이기도 하니까.

멋 내지 않은 수수한 곡들과, 나이 같은 것은 마음을 나누는 데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하모니의 어우러짐,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보여준 진지함에서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진 것은, 그것이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하나가 되기를 희구한다. 그 하나됨의 기쁨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남자의 자격'이 알려준 하모니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생면부지였던 그들이 이제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들로 서로에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모니를 통해 그 각자 존재들의 소중한 삶을 우리가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달라도 모두 서로가 하나 되길 원하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노래를 조금 못 불러도, 나이가 들어도 그것은 바꿀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힘겨운 현실, 위대한 사랑, '휴먼다큐 사랑'

틴틴 파이브의 멤버로 대중들의 사랑을 담뿍 받아왔지만, 결혼 직후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이동우씨, 재혼해 행복을 꿈꾸다가 폐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마지막 아름다운 나날들을 보내고 떠나버린 안은숙씨, 성탄절 버려져 같은 이름을 얻은 성탄이, 찾아온 친부모에게 "엄마 안 좋아"를 연발하지만 뒤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그토록 기다려왔던 다현이, 어느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가 그 가족을 행복하게 변화시킨 윤아, 아버지의 이혼으로 함께 살게 되었다가 이제 힘겨운 이별을 한 산골 소녀 가은이와 눈물 많은 할머니.

올해도 '휴먼다큐 사랑'이 바라본 것은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벌써 이 코너가 시작된 지 5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또 달라져서도 안되었다. 왜냐하면 '휴먼다큐 사랑'은 세상 속에 부재한 듯 보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랑을 찾아나서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멀리서 관망하면 그저 쿨하게 움직이는 듯 보이는 세상, 하지만 조금만 다가서서 바라보면 그 안에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휴먼다큐 사랑'은 그 특별하지만 또 어쩌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보편적인 사랑을 매년 찾아 나선다.

'휴먼다큐 사랑'이 가진 인물에 대한 집중은 그러나 인물 속에만 매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동우씨를 통해서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안은숙씨의 사연 속에 스며있는 재혼가정의 이야기를 바라본다. 아동복지센터를 배경으로 버려지고 거둬지는 성탄이와 서진이 그리고 윤아의 이야기는 힘겨운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여전히 희망처럼 남은 사랑을 통해 입양의 문제까지 환기시키며, 가은이와 할머니의 이야기는 내리사랑 속에 교육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휴먼다큐 사랑'의 카메라는 인물에 집중하면서 빛나는 그 인물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잡아내지만, 그것은 또한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차가운 현실을 말하기도 한다.

그 현실은 그들에게 상처를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상처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더욱 끌어안는다. 프레임 속의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생각하며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갑자기 부여된 힘겨움을 서로 껴안아주면서 더 사랑할 수 없음에 미안해 했던 것뿐이다. 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 바깥에 존재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세상이 아무리 힘겨워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서 '휴먼다큐 사랑'이 줄곧 보여주는 것은 가족애다. 보이지 않는 눈을 대신해주는 이동우씨의 가족들, 안은숙씨의 마지막 나날들을 아름답게 해준 남편과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껴안아준 아이들의 새 가족들, 자신의 힘겨움을 뒤로한 채 자식의 힘겨움까지 끌어안은 내리 사랑을 보여준 가은이의 할머니. 그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상처받은 이들을 단단히 동여매준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휴먼다큐 사랑'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매번 다르면서도 같다. 다른 것은 당대에 벌어지는 현실들이고, 같은 것은 가족애다. 매년 우리를 찾아와 잊고 있었던 눈물과 감동을 어김없이 선사하는 '휴먼다큐 사랑'. 우리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은 그 사랑이 아무리 달라진 세태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 가슴 속에 늘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년에도 또 그 앞으로도 이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우리는 기원한다. 이것이 '휴먼다큐 사랑', 그 고마운 존재의 이유다.

'지붕킥'의 황정음과 신세경

술에 만취해 한 여인은 끊임없이 웃고, 한 여인은 끊임없이 울어댄다. 웃는 여인은 신세경이고 우는 여인은 황정음.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핵심적인 두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왜 똑같은 술을 먹고 신세경은 웃고 황정음은 우는 것일까. 여기에는 이 시트콤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알다시피 술이란 놈은 참으로 요상한 물건이다. 평상시에 억눌렸던 감정을 거침없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이 술을 통해서 웃고 있는 신세경과 울고 있는 황정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는 시트콤 속에서 우울한 상황에 놓여진 존재로서 그려진다. 아버지가 부재중인 상황에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이순재네 집에서 식모로 살아가는 처지. 그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을까.

한편 황정음은 신세경과 비교해 늘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실제 속은 역시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서운대 출신이라는 서러움과 돈이 없어 남자친구에게 늘 얻어먹는다는 자괴감 속에서도 늘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당당함 속에는 숨겨진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슬픔이 있다. 그러고 보면 황정음이나 신세경은 내면적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 힘겨움의 강도가 다르고, 그것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황정음의 슬픔과 신세경의 슬픔을 다루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시각이 다르다. 황정음은 슬픔을 웃음으로 전화시킨다. 그녀가 떡실신녀가 되고, 서운대라는 사실 때문에 버스의 서운대 광고에 들어간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해대는 상황은 그녀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그것이 시트콤의 과장된 연출과 연결될 때, 보는 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삐에로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웃음을 터뜨리게 하듯이.

반면 신세경은 슬픔을 슬픔 그대로 그려낸다. 이것은 시트콤의 시각이 아니라 정극의 시각이다. 물론 이 '지붕 뚫고 하이킥'의 본질은 시트콤이기 때문에 신세경을 다루는 시각이 모두 정극의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다른 어느 캐릭터들보다도 진지한 편이다. 따라서 신세경의 캐릭터는 시트콤과 정극을 오간다. 동생을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는 신세경이 우스우면서도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여타의 시트콤들과 달리 웃음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감동까지 선사하는 것은 황정음과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지듯이, 시트콤의 시각과 정극의 시각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그 자유자재의 연출력이 대중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웃음은 이 시트콤의 재미를 극대화시켜주고, 감동은 거기에 어떤 의미까지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이 두 코드는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황정음과 신세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붕 뚫고 하이킥'만의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웃을 때 눈물을 주기도 하고, 그들이 울 때 웃음을 주기도 하는 그 반어법 같은 이 시트콤만의 쿨한 자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닐 때, 보는 이들은 그 웃음의 과장됨과 눈물의 질척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웃음과 감동의 강도도 세진다. 거꾸로 말해 웃기기 위해 웃기는 것과 울리기 위해 울리는 것은 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즉 이런 상반된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세련되게 웃음과 감동을 그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음과 신세경이 보석 같은 캐릭터인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두 캐릭터는 실로 시청자들이 이 시트콤을 보며 웃고 울게 되는 그 핵심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다. 이렇게 잘 운용된 시트콤의 캐릭터는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이미지까지 제고시킨다. 황정음과 신세경의 주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은 이 시트콤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연기자들에게도 잘 만들어진 시트콤은 기회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정극도 해내지 못한 매력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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