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가 주는 결코 작지 않은 위로와 위안

 

기다려... 우리가 꼭 데리러 갈게...” 영화 <히말라야>의 포스터에는 꽁꽁 얼어붙은 황정민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사진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황정민은 그 포스터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만 같은 얼굴이다. 그런데 그 얼굴은 슬픔이라기보다는 반가움이 서려있다. ‘우리가 꼭 데리러 간다는 문구와 이 슬픔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황정민의 얼굴은 명쾌하게 <히말라야>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드러내준다. 거기에는 눈물이 있고 감동이 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깊은 공감까지.

 


사진출처 : 영화 <히말라야>

<히말라야><스타워즈> 같은 대작보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은 건 당연한 일이다. <스타워즈>는 본래부터 우리네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킬러 콘텐츠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된 건 여러 에피소드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것이 일련의 흐름으로서 대중들이 꿸 수 있을 만큼 우리네 극장가에서 화제가 되지 못했고, 또 개봉시기도 들쭉날쭉 했기 때문이다. 이번 <스타워즈-깨어난 포스>는 사라진 스카이워커를 찾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네 관객에게는 스카이워커를 찾는 일이 그다지 절박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반면 <히말라야>는 엄홍길 대장의 휴먼원정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절박감이 훨씬 피부로 와 닿는다. 그 절박감은 보통의 산악영화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정상에 오르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절박감은 정상에 오르는 일과는 상관없이 그 언저리에서 쓰러져 방치되어 버린 동료를 시신이나마 수습하려는 그 인간애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절박감은 지금 현재 우리네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우리네 현실에서 어떤 성취를 하고 정상에 오르는 일은 이제 어려운 정도를 떠나 심지어 포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하루가 죽을 것 같은데 정상을 쳐다볼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현실은 점점 더 팍팍해지고 위로 오르지 않으면 도태될 것만 같은 공포감으로 가득하다. 서로가 서로를 살벌한 경쟁자로 내모는 사회에서 함께 한다는 의미는 점점 퇴색해간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히말라야>가 심지어 산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 고인이 된 그들을 찾아내 산 아래로 함께 내려가기 위해 심지어 목숨을 거는 모습에 눈물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은. 도대체 이 삭막한 현실 어디에서 그런 동료애를 발휘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예를 얻는 일도 아닌 단지 동료와(그것도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함께 산에서 내려오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함께라는 단어는 아마도 지금의 대중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는 단어가 아닐까. <응답하라1988>이 신드롬에 가까운 화제를 내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이 함께라는 단어가 그 안에서 큰 울림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쌍문동 골목의 이웃들이 마치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대중들이 느끼는 그 엄청난 감동은, <히말라야>에서 함께 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산악인들을 통해서도 똑같이 느껴진다.

 

대중들은 울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를 보듬고 싶지만 서로를 경쟁자로 만드는 이 삭막한 현실에서 마음이 무거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가 건드리고 있는 함께라는 뇌관이 눈물로 터져버렸을 것이다. <히말라야>가 주는 결코 작지 않은 위로와 위안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포스터에 황정민이 하고 있는 그 얼굴, 슬픔과 반가움이 영화를 보는 내내 똑같이 교차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빅브라더가 아닌 <빅프렌드>, 그 참신한 역발상

 

2회 짜리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MBC <빅프렌드>는 참신한 기획이 돋보이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미 <마이 리틀 텔레비전>TV와 시청자의 직접적인 소통의 물꼬를 열어 놓았다면 <빅프렌드>는 그 바탕 위에서 이렇게 모인 시청자들이 그저 수동적으로 방송을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방송의 주역이 될 것을 요구한다.

 


'빅프렌드(사진출처:MBC)'

첫 회가 얼미남얼굴이 미안한 남자들을 출연시켜 500인의 빅프렌드가 제안하는 갖가지 조언들을 통해 그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바라보는 이야기로 이 콘셉트가 가진 재미의 일면을 보여주었다면 2회는 현장에서 고생하는 한 소방관의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주기 위해 직접 현장으로까지 달려와 저마다 그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는 훈훈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늘 출동대기를 위해 5분도 채 걸리지 않고 뚝딱 밥을 때우기 일쑤고, 언제 출동할지 알 수 없이 작업화를 벗지 않으며, 현장에서는 곧 무너질 듯한 집에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제 한 몸을 기꺼이 던지는 소방관. 그 사연은 마치 휴먼다큐의 한 장면처럼 감동적이다. 그러니 이를 본 500인의 빅프렌드가 기꺼이 이 소방관의 웃음을 보기 위해 나선다는 건 그 자체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다.

 

사실 <빅프렌드>가 떠올리게 하는 건 빅브라더혹은 SNS 상으로 군집하는 대중들의 이미지다. 빅브라더가 미디어의 권력화를 얘기한다면 군집한 대중은 그렇게 모여 세상을 바꿔나가는 긍정적인 의미와 또 때로는 한 개인을 파괴하기도 하는 부정적인 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빅프렌드>는 뉴미디어 시대에 방송 권력이 빅브라더가 되는 것을 탈피하고, 또한 대중의 힘이 긍정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실로 SNS의 힘이란 대단하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게 해주고 하나의 뜻으로 이어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의외로 거대한 힘이 되어 살만한 세상을 꿈꾸게 해준다. 방송은 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것이고, 사실상 <빅프렌드>는 이 땅에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마음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빅프렌드>의 힘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백지연이나 장동민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날의 주인공인 소방관 아저씨나 의기소침해 있는 얼굴이 미안한 남자가 가진 삶의 이야기에서 그 힘이 생겨난다. 여기에 그들에게 공감하거나 그 삶에 개입하고픈 500인의 타인들이 나머지 반의 힘을 만든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그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를 확인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프로그램은 보는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최근의 예능 프로그램 트렌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간 스튜디오 예능 프로그램들로서 연예인 토크쇼가 그 트렌드를 소진하면서 대신 등장한 건 일반인들이다. 그래서 그 일반인들과 연예인이 공존하는 새로운 예능들이 선전하고 있다. 그 대표격은 SBS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같은 프로그램. 일반인의 사연과 그 사연에 대해 각주를 달아주는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빅프렌드> 역시 <동상이몽>처럼 그 새로운 트렌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현재 방송 프로그램의 관건은 어떻게 하면 저 모래알처럼 많은 일반인들의 이야기들을 방송의 소재로써 끌어올 것인가가 될 것이다. 여기에 연예인들의 역할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동조해주는 것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빅프렌드>는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괜찮은 형태의 예능 프로그램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너무 과한 개입은 때론 시청자들의 자연스러운 감동을 오히려 저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SNS 하면 먼저 떠오르는 무수한 악플들의 이미지를 역발상으로 풀어낸 <빅프렌드>의 기획의도는 실로 참신하다 할 것이다



내 일 같은 <동상이몽>, 과한 편집도 수긍되는 까닭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눈꽃열차를 타는 거라고 말하는 엄마는 강원도가 미지의 세계라고 하셨다. 광주에 살면서 고작 강원도를 미지의 세계라고 하게 된 이유는 이런 여행조차 갈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거의 뛰듯이 하루 종일 일 속에서 사셨다.

 


'동상이몽(사진출처:SBS)'

딸은 그런 엄마를 걱정했다. ‘눈꽃열차를 좋아할 정도로 예쁜 걸 좋아하시던 엄마가 일 때문에 그런 감성조차 잊고 사시는 걸 걱정했다. 새벽에 녹초가 되어 쓰러진 엄마 대신 마치 우렁각시처럼 집안일을 해놓고 잠이든 딸은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가 들려준 이야기는 빠른 엄마와 느려터진 딸 사이의 갈등이었지만 거기에는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두 사람의 입장이 있었다. 가족을 위해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일하는 엄마와 그 엄마를 걱정하며 조금은 느리게 살았으면 하는 딸의 입장.

 

이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은 지금 우리네 보통 서민들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쉬지 않고 달려야 되는 결코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옆을 돌아보거나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부모들의 노동. 그래서 몸이 아파도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네 서민들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입만 열면 자식 걱정 가족 걱정이지만 정작 자기 걱정을 하지 않는 엄마가 그러나 딸은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한 삶이 몸에 배어버린 엄마와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그 엄마를 걱정해주는 건 역시 딸뿐이라는 이야기는 힘겨운 현실을 마주한 서민들의 삶이 그래도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잘 말해준다. 결국 그 힘겨움을 넘어서게 해주는 것 역시 가족의 힘이라는 것.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마트를 운영하며 정육 일을 하면서 몸에 익어버린 칼질에는 <생활의 달인>에서 느껴지곤 하는 그 삶의 신산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놀라운 정육 기술에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지만 그 달인이 되어버린 기술 이면에 그 엄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들게 노력하며 살았을까.

 

문이 닫힌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마트를 운영하는 엄마에게 여전히 눈꽃열차는 이루기 힘든 꿈처럼 다가온다. 예쁜 하이힐을 좋아하지만 그것보다는 뛰어다닐 수 있는 운동화를 신어야 되는 엄마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 엄마가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해주는 건 그 마음을 낡은 운동화와 예쁜 하이힐에 담은 그림을 선물해주는 딸이 있기 때문이다.

 

딸이 엄마에게 가장 바라는 건 그냥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건 아마도 지금의 대다수 서민들이 바라는 것일 게다.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가족끼리라도 함께 조금의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는 그런 여지. 강원도 눈꽃열차가는 소소한 일이 심지어 꿈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는 그런 삶.

 

<동상이몽>은 때로는 짓궂은 편집으로 우리의 뒤통수를 치곤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차례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앞부분은 과도하게 편집되어 비난받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또 다른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그 비난을 뒤집어 감동으로 바꾸는 반전을 연출해낸다. 물론 때때로 이 편집은 과도해져서 불편한 악마의 편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 간의 숨겨진 사랑과 소통이 전제되기만 한다면, 조금 과한 편집조차 수긍되지 않을까. ‘눈꽃열차타는 게 꿈이라는 엄마와 그 엄마를 걱정하는 딸의 입장에 숨겨진 가족애가 모두 공감되었던 것처럼.



입소문이 대세라면, <슬로우비디오>는 만만찮다

 

요즘 과도한 홍보는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다. 과도한 홍보가 만들어낸 잔뜩 커진 기대감을 작품이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 그 실망감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태현이 동체시력(남들은 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까지 보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하는 <슬로우비디오>는 그 첫발을 잘 디딘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사진출처:영화 <슬로우비디오>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차태현이 <슬로우비디오>의 김영탁 감독에게 천만 영화 죽어도 안 나올 거다라고 일종의 셀프 디스를 한 것은 어쩌면 대단히 적절했다고 여겨진다. <슬로우비디오>는 그의 말대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현란한 영화가 아니다. <라디오스타>에 차태현과 함께 나온 김영탁 감독이 자신은 돈 벌면 지루한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얘기는 틀린 말이 아니다. <슬로우비디오>는 블록버스터들의 틈바구니에서 보면 지루한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영화가 지루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슬로우비디오>는 재미있다. 이것은 김영탁 감독이 말하는 지루한 영화라는 뜻이 진짜 지루하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자극의 방정식 같은 영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슬로우비디오>는 독특한 영화이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 충분히 대중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다 나아가 사회적인 의미에서부터 감동까지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지나친 설레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차태현이 출연해 입소문으로 대박을 터트렸던 <과속스캔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슬로우비디오>도 만일 그 입소문이 작용한다면 충분히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영화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바탕으로 깔려 있고, 그 위에 휴먼드라마의 따스함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것은 그저 사적인 로맨틱 코미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와 삶의 본질까지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차태현의 시선을 따라 남상미와의 멜로 구도를 차근차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편안한 로맨틱 코미디의 바탕 위에 감독이 가진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덧칠해 놓았다.

 

CCTV라는 관찰 카메라의 시대에 차태현이 그려 넣는 동네와 사람들의 그림들은 영화 연출적으로도 참신하고, 그 자체로도 괜찮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주인공의 동체시력이라는 설정과 CCTV, 그리고 그림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모든 곳을 카메라가 들여다보는 시대에 본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는 꽤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카메라를 통해서만 비춰지고, 그렇게 비춰진 것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 전시가치의 시대에, 카메라 바깥으로 탈주하고 차츰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온기를 느끼게 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유쾌하면서도 따뜻함을 선사한다. 그 따뜻함은 거창한 것이 아닌 소소한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움직이는데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슬로우비디오>의 세계가 얼마나 디테일의 감동을 포착하려 애쓰고 있는 지를 느낄 수 있다. 차태현의 동체시력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가 지나쳐버리는 세상의 기적 같은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영화적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태현의 전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슬로우비디오>는 그렇게 요란하지 않다. 마치 모든 영화가 천만영화가 되어야 할 것처럼 만들어지고 홍보되지만 <슬로우비디오>는 언감생심 천만을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이 작지만 훈훈한 감동이 전해지는 느린 세계를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슬로우비디오>는 그 요란하지 않음이, 또 그 속삭임이 더 잔잔하면서도 먹먹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영화다.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천만영화같은 거창한 영화들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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