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캐릭터들, 행복을 꿈꾸기 시작하다

'대장금'의 장금이(이영애)는 남다른 욕망을 갖고 있는 캐릭터였다. 수많은 모함과 함정을 벗어나면서 최고의 수라간 상궁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그 모습은 당시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다. 많은 이들이 '동이'의 동이(한효주)가 장금이를 닮았다고 한다. 실제로 비슷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닮은 구석이 많아도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동이가 장금이처럼 최고 상궁이 되기 위한 강력한 욕망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이는 물론 천비 출신인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매일 매일을 긍정하며 밝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무엇이 되기 위한 욕망보다는 현재의 행복 또 앞으로의 행복을 꿈꾸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성공에 대한 캐릭터들의 욕망은 과거 시대극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사랑과 야망'이 대표적이고, 가깝게는 '에덴의 동쪽'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과거 욕망의 시대의 '사랑과 야망'은 성공적이었지만 다시 리메이크된 '사랑과 야망'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물론 '에덴의 동쪽'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최근에 방영되었던 이른바 남성드라마들도 이 계보에 속한다. '로비스트'나 '태양을 삼켜라' 같은 작품들. 성공의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캐릭터들을 내세운 이 드라마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이것은 어쩌면 성공을 추구하던 시대가 가고,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한 탓인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현재 방영되는 수목드라마들 속의 캐릭터들은 모두 성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다. '신데렐라 언니'의 은조(문근영)는 물론 능력이 있고 대성도가를 크게 키우는 인물이지만, 그녀는 성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행복이다. 늘 욕망에 휘둘리며 속물근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엄마 송강숙(이미숙)의 그늘 아래서 그녀는 가족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을 꿈꾼다. 그래서일까. 성공을 향한 욕망에 휘둘리는 엄마와 대결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성공이라는 과거적 가치에 포획되어 있는 엄마의 삶에서 벗어나 행복을 향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검사 프린세스'의 마혜리(김소연)는 경제적이나 사회적인 위치로 봤을 때 부족한 것이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미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행복하지 못하다. 그녀는 공주로 남아 있고 싶어 하지만, 그런 삶은 그녀의 사회적인 삶과 부딪친다. 검사로서의 삶은 공주로서는 해보지 못했던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즉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녀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삶으로서의 여성적인 행복을 쥐고 있으면서도, 검사라는 사회적 직무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검사 프린세스'는 모든 걸 다 가져도 결국 행복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말하는 드라마고, 그 행복이 타인과의 공존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개인의 취향'은 아예 이 성공이라는 가치 기준을 살짝 옆으로 밀어놓고 시작한다. 동성애로 오인된 전진호(이민호)와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박개인(손예진)이 동거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이 드라마는, 결국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가는 로맨틱 코미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다루는 취향의 문제다. 동성애자라는 오인에도 불구하고 그 취향을 인정하고 나자, 박개인은 전진호가 가장 편안한 남자친구로 다가온다. 전진호는 남자로서 박개인에게 연애비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결국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 서로 소통하는 이 이야기 역시 그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행복이다.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

주말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가족드라마들이 늘 다루기 마련인 혼사장애 속 신데렐라 이야기는 빠져있다. 이 집의 막내인 양초롱(남규리)은 자신을 따라다니며 돈 자랑을 해대는 남자친구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같이 있어주는 것"조차 싫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행복에 대한 가치를 가장 잘 말해주는 대목일 것이다. 동성애도 그 연장선으로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신분상승이니 성공이니 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현실 속에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넘쳐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 지긋지긋한 성공을 향한 욕망의 질주에 좀 지친 듯하다. 혹 어쩌면 이제야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에는 성공이 따르기도 하지만, 성공이 행복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검사 프린세스’가 일과 사랑을 다루는 방식

"나처럼 예쁘고 젊고 날씬한 여자가 좋다는데 왜 그렇게 튕겨요. 기분 나쁘게. 아니. 진짜로 진짜로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마혜리(김소연)는 순수하지만 개념이 조금 없다. 자식 딸린 홀아비인 윤세준(한정수)이 자신을 밀어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 거기에 대고 윤세준이 한 마디 쏘아댄다. "한번 자고 싶단 생각은 들어. 그런 생각 들라고 이러고 다니는 거 아냐?" 늘 공주처럼 차려입고 다니는 마혜리를 에프엠 검사 윤세준이 이해할리 만무다. 거기에 대해 마혜리는 말한다. "나는 소중하니까요. 내 몸이,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아니까요. 남이 뭐라든 남이 어떻게 보든 그따위 거 개나 물어가라고 그래요."

1백 킬로에 육박하는 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사실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연인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그 참혹함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피나는 노력으로 살을 뺀 자신의 몸이, 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그래서였을까. 검사라는 직업을 얻게 된 마혜리에게 여전히 소중한 것은 조직도 아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 피해자도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다.

미니스커트 차림의 첫 출근에 진정선(최송현) 검사가 시정을 요구하자, "시정했어요. 어제 입었던 치마보다 1센티 길어요."하고 답하고, 6시면 칼퇴근 하는 마혜리를 윤세준 검사가 나무라자, "제가 왜 야근을 해야 돼요? 저 공무원이구요. 공무원 법정근무 시간 있구, 야근한다고 월급 더 나오는 것도 아닌데요?"하고 당당히 무개념의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또라이'도 아니고 '능력 없는 사람'도 아닌 셈이다.

그녀는 검사라는 직업을 얻었지만 여전히 공주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윤세준의 말대로 그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일도 아니다. 여성으로서 자신을 예쁘게 가꾸겠다는 것이 왜 나쁜가. 물론 그녀의 과한 자기애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조직생활이 처음이고 상황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녀는 윤세준 검사의 말처럼 "한 사람의 인생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자신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공주로서의 삶과 검사로서의 삶은 부딪치기 시작하고, 그녀는 공주로서의 즐거움만큼 검사로서의 보람도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검사 프린세스'는 공주가 검사가 되는 성장 과정을 다루는 드라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주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윤세준 검사가 따라주는 와인을 함께 마시는 달콤한 꿈을 꾼다. 하지만 윤세준 검사는 3년 전 상처(喪妻)한 후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사랑에 담을 쌓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그는 어쩌면 마혜리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지도 모른다. 그가 과거의 뚱뚱했던 마혜리가 겪었던 일과 그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피를 깎는 다이어트를 했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아마도 '자신을 아끼고 노력하고 이뤄내는' 마혜리를 진정으로 "멋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를 놔줘야 그 자리에 미래가 오는 거야." 윤세준 검사는 이렇게 말하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 "윤세준 니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냐?"고 되묻는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과거 속에 있기 때문이다. '검사 프린세스'는 따라서 마혜리가 공주에서 검사가 되는 그 성장과정만을 다루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또한 과거의 고통 때문에 검사로서 만의 삶을 살아가는 윤세준이 다시 사랑을 해나가는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러니 마혜리의 성장드라마와 윤세준의 성장드라마가 겹쳐지는 지점은, 이 드라마가 꿈꾸는 세상이 검사와 공주 어느 한 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검사와 공주. 이 두 존재는 여성의 입장으로 보면 일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은 이 두 가치가 사실은 상충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충되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일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키고, 사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강요는, 마치 직장 내에서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처럼 떠다닌다. 또한 당당한 여성성으로서의 승부라기보다는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틀에서 승리하기 위해 남성화되어버리는 여성이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판타지로서 과장된 면이 있지만, 검사와 공주 둘 다를 희구하는 마혜리의 고군분투가 의미 있어 보이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사랑을 넘어 인간애로 가는 멜로드라마

수목의 밤, 방송3사가 동시에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것들은 모두 멜로드라마다. '신데렐라 언니'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를 언니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따라서 그 안에 사랑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드라마는 매번 새로운 남자를 갈아 치우는(?) 엄마 덕분에 이집 저집을 전전해온 은조(문근영)가 엄마가 마지막이라고 한 효선(서우)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 자매는 한 남자를 두고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애증의 과정 속에서 차츰 성숙해져간다는 이야기다.

'신데렐라 언니'는 그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의 선악구도를 뒤집는다. 즉 신데렐라는 늘 착하고 옳고 그 언니는 늘 악하며 옳지 않다는 그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나려는 것이 이 설정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신데렐라 언니도 언니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며, 동생인 신데렐라도 어떤 면에서는 그 언니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는 것. 즉 이것은 어찌 보면 신데렐라와 신데렐라 언니를 동등한 위치로 바라보면서 그 둘의 갈등과 화해를 모색하는 드라마로 볼 수 있다. 결국 사랑을 두고 벌이는 멜로의 갈등 속에서 똑같은 눈높이로 서로의 성장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의 틀을 넘어선다. 사랑 끝에 인간을 세워두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 역시 마찬가지.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구조를 갖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려는 이야기는 멜로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쩌다보니 게이 행세를 하게 된 남자, 전진호(이민호)라는 존재다. 장차 이 완벽남이지만 게이라는 너울을 쓰게 된 인물은 솔직하고 내숭 없는 어리버리 박개인(손예진)과 동거를 하며 가까워지게 되는데, 여기서 사랑과 우정은 미묘해진다. 게이 남자친구와의 우정인지, 아니면 그를 남자로서 바라보는 사랑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 이 유쾌하고 발랄한 해결과정 속에 나올 수 있는 것은 결국 두 인물의 성장을 통해 갖게 되는 남녀라는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즉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찬란한 유산'의 후속작으로 소현경 작가가 들고 온 '검사 프린세스'는 얼핏 보기에는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 속에 깃든 사회(의 정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검사 프린세스'는 검사라는 직업이 가진 사회정의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그 직업의 외적인 것에 혹한 '프린세스' 마혜리(김소연)가 차츰 진짜 검사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즉 프린세스로 시작해 검사로 성장하는 마혜리의 이야기는, 좌충우돌의 멜로에서 차츰 사회로 넓혀져 갈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수목극의 방송3사가 모두 멜로드라마를 그리고 있지만, 또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멜로에 머물지 않고 차츰 인간애로 그 관심을 확장해나가는 것은 왜일까. 이것은 어쩌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넘기 위해 일과 사랑에 대해 고민했던 청춘 멜로드라마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즉 이제는 멜로드라마의 관심이 남녀 간의 사랑에서 차츰 성장해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을 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는 진지하고(신데렐라 언니), 하나는 로맨틱하며(개인의 취향), 다른 하나는 따뜻한(검사 프린세스) 이 세 멜로드라마들은 각각의 서로 다른 재미를 내포하면서도 저마다 하나씩의 성장드라마를 담는다는 점에서 작금의 달라진 멜로드라마의 태도를 잘 드러내준다. 멜로드라마를 통해 멜로 그 이상을 담아내려는 이런 시도는, 매번 늘 같은 남녀 간의 그저 그런 시시한 사랑타령에 머물던 멜로드라마를 또한 성장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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