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 차차차’, 캐스팅과 로케이션만으로도 힐링되는 휴먼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홍반장’이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안타깝게도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나버린 고 김주혁으로 기억되는 영화 <홍반장>이 tvN 토일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김주혁이 했던 홍두식 반장 역할을 이 드라마에서는 김선호가 맡게 됐다. 과거 KBS <1박2일>의 맏형으로 ‘구탱이형’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매주 따뜻한 모습을 보여줬던 김주혁의 역할을, 현재 <1박2일> 멤버로서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김선호가 맡아서인지 이것이 그저 우연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1박2일>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바닷마을 공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갯마을 차차차>는 이처럼 캐스팅과 로케이션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면이 있다. 제목에 담긴 것처럼 저 멀리 펼쳐지는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 그리고 둥둥 떠 있는 구름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코로나19 때문에 어딘가로 떠났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이라면 그 풍경이 선사하는 편안함에 먼저 마음을 빼앗긴다. 그 공간을 배경으로 역시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신민아와 김선호가 캐스팅되어 서 있다. 또 첫 회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상이도 곧 모습을 보일 예정이다. 이러니 로케이션과 캐스팅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렐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갯마을 차차차>가 시청자들을 힐링시키게 만드는 캐스팅, 로케이션은 끝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시작점일 뿐이다. 진짜 힐링은 드라마 속 인물 캐릭터와 이들이 그려나갈 휴먼드라마의 따뜻한 서사로부터 나올 예정이다. 고깃배를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돌아오는 첫 등장에 어부인가 싶었는데, ‘홍반장’으로 불리며 마을에서 안하는 일이 없는 인물. 갑자기 통신선이 끊겨버리자 동네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가 걱정하지 않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찜질방 아르바이트, 경매사에 부동산중개까지 어디든 나타나는 인물이 바로 홍두식(김선호)이다. 

 

도시에서라면 이런 인물을 ‘오지라퍼’라 불렀겠지만, 이 작은 갯마을에서 그는 홍반장이라 불린다. 그만큼 마을 일에 적극적이고, 누군가 곤경에 처하거나 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의 사람됨은 공진의 정신적 지주인 김감리(김영옥) 할머니를 대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다리를 다쳤다는 소리에 한 달음에 달려와 걱정해주는 그는, 혼자 TV보기 싫다며 마을회관에 가고 싶다는 할머니를 업고 데려다준다. 

 

홍반장은 한 마디로 이 공진이라는 갯마을을 그대로 닮아있는 인물이다. 마을의 많은 이들에 늘 그가 등장하지만 딱 봐도 무언가 하나의 직업을 갖고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때론 바다 위 서핑보드에 누워 있고, 그 때 그 때 일이 생기면 일을 하는 전형적인 알바생이다. 그런데 그 삶이 별 걱정도 없어 보이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해결사처럼 바라본다. 흘러가는 대로 벌어지는 대로 살아가는 인물. 그 갯마을의 자연을 닮은 이가 바로 홍반장이다. 

 

도시에서 사고를 치고(?) 어쩌다 이 공진으로 들어와 치과를 개원하게 되는 치과의사 윤혜진(신민아)은 홍반장과는 정반대다. 그는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하는 사람이고 또 길거리에서 이빨이 부러진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심성을 갖고 하지만, 도시인들이 가진 성공, 경쟁 같은 삶에 익숙해져 있다. 누가 어떻게 볼까 신경 쓰고, 무시하거나 오해한다 싶으면 애써 치과 전문의 명함을 꺼내 내민다. 

 

그렇지만 그 명함을 받아 든 홍두식은 그 직함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는 그런 명함으로 내세워지는 직함보다는 진짜 사람들과 일하며 갖게 되는 신뢰가 더 중요한 사람처럼 보인다. 도시에서는 그저 오지라퍼이고 사실상 백수 아르바이트생으로 불릴 수 있는 그가 이 곳 갯마을에서는 ‘홍반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도시에서 성공과 경쟁의 지표처럼 꺼내지는 명함과는 상반되는 ‘진짜 일(수입만이 아닌 진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표징한다.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서의 일이랄까. 

 

그래서 드라마는 윤혜진이라는 도시인에 시청자들을 빙의시켜 놓은 후, 그를 저 공진이라는 갯마을에 보내 홍반장에게 ‘홍며들게’ 만드는 과정을 담을 예정이다. 그것은 또한 홍반장이 그대로 닮아버린 갯마을의 보기만 해도 힐링되는 삶에 빠져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윤혜진은 어떻게 홍두식에게 점점 빠져들게 될까. 또 그는 이 도시의 삶과는 다른 갯마을의 삶에 동화되어갈까. <갯마을 차차차>의 기대감은 인물과 공간을 은유적으로 세워놓은 것만으로도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다. (사진:tvN)

'오! 주인님', 조진국 작가가 보는 인간·공간·시간의 따뜻함

 

'작가님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MBC 수목드라마 <오! 주인님>의 4회 부제는 극중 인물인 오주인(나나)이 한비수 작가(이민기)에게 하는 대사를 가져온 것이다. 어딘지 결벽증에, 자존감 과잉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는 나르시스트처럼 보였던 한비수 작가가 알고 보니 점점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오주인이 느끼게 됐다는 것.

 

물론 이 구도는 멜로에서 늘 등장하는 코드 중 하나다. 까칠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지만 알고 보니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가게 되는 그런 관계의 발전. 하지만 뻔한 코드라고 해도 이걸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느냐 하는 건 시청자들에게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 <오! 주인님>을 쓴 조진국 작가는 한비수 작가가 치매를 앓는 오주인의 엄마 윤정화(김호정)를 대하는 그 '인간적인 면모'를 통해 그에 대한 '호감'을 이끌어낸다.

 

한비수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는 오주인이 집 냉장고에 가득 붙여 놓았던 엄마를 위한 메모들을 문구점에서 일일이 코팅을 해 반듯하게 붙여 놓는 장면을 통해 어떤 예감을 준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그의 결벽증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문구점 아저씨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코팅해간 걸 보고 치매환자가 집에 있느냐며 외면하고도 싶고 골치 아프기도 하지 않냐고 말하는 아저씨에게 한비수 작가는 오주인이 들으라는 듯, "가족이 아프면 더 신경 써야지 골치 아프면 어쩌자는 거예요?"하고 따뜻한(?) 비수를 날린다.

 

한비수 작가는 어쩌다 윤정화가 자신을 죽은 남편이라 착각하게 되자,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함께 식물원에도 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그렇게 데이트도 해주고 도와준 것에 대해 오주인이 감사함을 표하자, 한비수 작가는 도와줄 생각 같은 거 없었다며 엄마는 환자가 아니라는 의외의 말을 한다. "엄마한텐 보통 사람한텐 없는 능력이 하나 있는 거야. 과거를 지금의 시간으로 불러들이고 그걸 진짜로 만드는 능력. 운 좋게도 그런 능력 있는 엄마를 내가 하루 빌린 거고." 그날의 말과 행동들은 어딘가 퉁명스럽게만 보이던 한비수 작가가 사실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게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건 <오! 주인님>을 쓴 조진국 작가의 면면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을 조진국 작가는 인간, 시간, 공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찾아낸다. 한비수 작가는 퉁명스럽게 말하긴 하지만, 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놓지 않는다. 신경 쓰이고 걸리적거린다는 게 그의 표현이지만, 사실은 무관심하지 않게 그 입장을 들여다보려는 따뜻함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치매라는 병증을 '과거를 지금의 시간으로 불러들이고 그걸 진짜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하는 조진국 작가는 '시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또한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는 지나간 과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관점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오주인이 어린 시절 살았던 한옥집에 깃들어 있는 과거나, 오래된 LP판을 파는 가게, 그 가게를 운영하며 그 LP판처럼 사람 좋은 아저씨로 나이든 김창규(김창완), 그를 오랜만에 찾아와 '오빠'라 부르며 순식간에 과거 청춘의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놓는 한비수의 어머니 강해진(이휘향), 그 강해진이 오주인의 엄마 윤정화와 다시 만나 이어가는 우정의 이야기까지, 기억과 추억으로 덧칠해진 따뜻한 시간들이 묻어난다.

 

게다가 어려서는 오주인이 한비수가 살던 집을 그의 어머니에게 사서 들어감으로서 두 사람이 얽혀지는 관계는 다름 아닌 그 한옥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려진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에 강박적으로 문을 닫으려는 한비수와,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마음을 열 듯 문을 열어두는 오주인이 한 공간에서 서로를 이해해하는 과정도 다름 아닌 공간으로 은유된다. 누군가 살고 있는 공간이 그 살았던 사람의 마음처럼 은유되고, 그 공간을 통해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그래서 닫혔던 그 문 속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이야기로 표현된다.

 

<오! 주인님>은 전형적인 멜로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꾸만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드라마가 같은 상황을 그려도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 시간,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투영되어서다. 그래서 <오! 주인님>을 보다 보면 나나가 한비수를 보듯, 작품을 쓴 작가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보는 이들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갖게 될 정도로.(사진:MBC)

‘기생충’, 공간 대비만으로도 빵빵 터지는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

 

정말 오랜만에 깔깔 웃었다. 첫 장면으로 등장하는 반지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웃음이 터졌다. 그것이 봉준호 감독의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취를 한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시작부터 이 영화가 너무 정곡을 콕 찔러서였다. 그 반지하에서 간만에 가족이 모여 맥주 한 잔을 하려 할 때 마침 취객이 나타나 토악질을 해대고 노상방뇨를 하려는 모습을 보며 기택(송강호)이 짜증을 확 내는 장면에서 터지는 웃음. <기생충>은 그런 영화였다. 무언가 비극적 상황의 꼬질꼬질함이 오히려 웃음으로 터져 나오는 블랙코미디.

 

봉준호 감독이 ‘봉테일’이라 불리는 게 허명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는 대목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공간, 경계, 침범, 파국 같은 것들이 공간과 빛 같은 시각적, 미술적 장치들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라는 공간은 그래서 자본의 양극화가 만들어낸 계급사회의 한 계급을 상징한다. 영화가 그 반지하 공간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그 시점을 따라 우리 사회의 비극적이지만 우습게도 보이는 계급적 특성을 해부해 보이겠다는 의지처럼 읽힌다.

 

햇볕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반지하라는 공간은 그 경계가 애매하다. 그래서 이 지점이 어떤 다른 계층으로 침범해 들어올 때 그건 ‘계급의 충돌’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봉준호 감독은 바퀴벌레에 비유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 없는 것처럼 치부하며 살아가지만, 분명 저 지하에 존재하는 바퀴벌레가 문제를 만들어내는 건 그 경계를 넘어 지상으로 튀어나왔을 때다.

 

<기생충>은 이러한 평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자본의 양극화가 어떤 선을 넘어갈 때 만들어내는 마찰음을 특유의 블랙코미디식 유머로 담아낸다. 기택이 사는 반지하에 마치 왕좌처럼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장실 변기마저 웃음이 터지는 상징처럼 다가오고, 그 집과 비교되는 글로벌 IT기업 박사장의 대저택은 그 비교점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표징하는 지적 웃음을 준다.

 

그 공간들을 우 몰려 올라갔다가 우 몰려 내려오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위 아래로 넘나드는 사회구조 속으로의 모험담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냄새처럼 분명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경계를 침범해 들어온 흔적이 주는 긴장감이나, 물을 뿌리면 숨어있던 바퀴벌레들이 튀어나오듯, 폭우 속에서 인물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절박하고 비극적이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이 터진다. 높은 지대에 있는 대저택에 사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는 아이가 텐트를 치고 놀 정도로 낭만이 되기도 하지만, 그 시간에 낮은 지대에 사는 이들은 물난리를 겪는 곳. 그곳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게 하나의 살아있는 블랙코미디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계획’이란 걸 세워봐야 그 구조 때문에(누구는 높은 곳에 살고 누구는 낮은 곳에 사는) 폭우 하나에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그 양극화된 세상에서 ‘무계획’이 최선의 계획이 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기생’을 선택한다. 저들 옆에 달라붙어 그들이 던져주는 무언가를 받아먹거나, 혹은 몰래 훔쳐 먹는 삶. 이토록 비극적인 현실을 이토록 웃음 터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역시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거장의 여유로운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이다.(사진:영화'기생충')

언어, 국적을 넘어 우리는 과연 소통할 수 있을까

연일 방탄소년단의 이야기로 연예계가 들썩거린다.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사실은 전 세계의 유력 매체들에 의해 긴급 타전되었고, 국내에서 이례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축하 메시지를 보낸 사실 역시 빌보드의 뉴스에서 다뤄졌다. 게다가 모두가 기대하던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K팝 그룹 최초로 10위로 진입한 사실 역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빌보드의 뉴스는 이들이 보여주는 행보를 ‘현상(Phenimenon)’이라고 표현한다. 즉 단순한 음악적 성취 그 이상의 ‘사건’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영어권의 음악으로서 방탄소년단이 만들어낸 전 세계적인 열광은 ‘신드롬’이라고 불러야 비로소 합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의 무대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관객들이 보인 반응은 실로 과거 영국의 비틀즈가 미국을 ‘침공’했을 때 벌어졌던 열광적인 모습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는 영어권이라는 공통의 바운더리가 있었다면, 이번 방탄소년단은 국적은 물론이고 언어까지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현상이라 부를 만했다. 

생각해보면 이미 새로운 시대는 인터넷이라는 전 세계를 엮어낸 네트워크를 통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유튜브 같은 공간을 통해 조금씩 글로벌 문화를 공유해왔다. 거기에 국가나 언어는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해외에서 올려진 어떤 영상들도 우리는 그 공간 속에서 동일하게 누리기 시작했다. 마찬가지의 흐름은 정반대로도 이어졌다. 싸이가 ‘강남스타일’이라는 곡으로 보여준 건 미국 시장으로 강제진출하게 된 것만이 아니라,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는 글로벌 문화의 가능성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소거된 이 네트워크 공간의 빠른 소통과 전파 속에서 방탄소년단이 이번 빌보드 차트 입성으로 보여준 것 역시 글로벌 문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다. 그간 문화란 국적, 언어와 떼놓을 수 없는 한계를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한류’니 ‘K팝“이니 하는 용어 속에 국적의 의미들이 담기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문화적 교류의 단계는 이제 국적과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방탄소년단이 보여주는 음악의 특징은 이런 경계를 넘어선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거기에는 K팝 특유의 색깔(아이돌이니 군무니 하는 것들)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힙합, 댄스, EDM 심지어 라틴 음악까지 공존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 이미 보편화된 음악적 장르가 사실상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새로운 ‘글로벌 언어’로서 자리하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방탄소년단의 성취를 보면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그간 시간과 공간(국적과 언어를 포함한)의 제약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문화가 이제는 디지털에 의해 융합되는 ‘글로벌 문화’로 나아가고 있는 그 흐름이다.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또 20세기적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적 틀에 얽매여 있을 일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구촌이라는 새로운 글로벌 문화지대에 걸맞는 관점과 문화적 콘텐츠들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방탄소년단 ‘현상’은 그 새로운 세계를 음악이라는 ‘글로벌 언어’를 통해 우리 앞에 증거해 보이고 있다. 그러니 물론 자랑스럽고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단지 그 놀라운 성취에 도취될 것만이 아니라, 이제 그 세계에 어떻게 모두가 동참하고 공감해갈 것인가를 생각해봐야할 시점이다.(사진:빅히트엔터테인먼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