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저씨’, 공간에 담긴 이 드라마의 진심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이지은)의 캐릭터는 몇 가지 특징으로 제시된 바 있다. 집으로 돌아와 배고픔과 정신적 허기를 자위하듯 마시는 두 봉의 믹스커피, 한 겨울인데도 추워 보이는 옷차림에 유독 시려 보이는 발목이 드러나는 단화, 그리고 이력서에 특기로 적어 놓은 ‘달리기’ 같은 것이 그것이다. 

믹스커피와 단화 그리고 ‘달리기’. 언뜻 보면 별 상관이 없는 요소들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지안이라는 캐릭터는 혹독한 겨울 같은 현실에 내몰려 몸도 마음도 춥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몸을 데우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발이 시려도 신을 수밖에 없는 그 단화를 신고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렇게 ‘추운’ 이지안을 바라봐주고 이해해준 인물이 바로 박동훈(이선규)이다. 동훈은 회사에서 믹스커피를 챙기는 이지안을 보고서도 그저 눈감아주고, 단화를 신고 다니는 그의 발목이 시릴 것을 걱정해준다. 또 무엇보다 이력서에 스펙 한 줄 없이 특기로 적어놓은 ‘달리기’라는 항목에 담긴 어떤 절실함 같은 걸 읽어내고 그를 채용한다.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고, 이지안이 자신을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드러났지만 박동훈은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거지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이지안을 후계동 아저씨들이 늘 모이던 아지트 정희네로 데려가 잠시 그곳에서 지내게 해준다. 이지안은 마치 오래도록 쉴 곳을 찾지 못하고 그 추운 겨울 길바닥을 헤매다 이제 겨우 둥지를 찾아 돌아온 새처럼 정희 옆에서 잠이 든다. 

<나의 아저씨>에서 후계동이라는 동네도 또 그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드는 정희네라는 선술집도 어찌 보면 현실에 존재할까 싶은 판타지 공간이다. 하지만 이 공간은 바로 판타지이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은 다름 아닌 ‘사람이 사는 공간’이다. 지위도 위치도 빈부도 남녀도 상관없이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기를 나눌 수 있고, 서로의 상처를 위로해줄 수 있는 그런 판타지 공간.

이지안은 여러 차례 거처를 옮겨 다닌다. 사채업자인 광일(장기용)이 찾아내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집이라고 하면 자신만의 쉴 공간이어야 하지만, 그 곳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버리는 광일 같은 타자는 결코 그에게 쉴 틈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봉애(손숙) 같은 부양해야할 할머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어린 청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현실이다. 

그나마 그런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건 다름 아닌 박동훈과 정희네에서 만난 아저씨들 그리고 정희(오나라)였다. 그들은 함께 이지안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근처 사는 후배에게 혼자 사는 그를 챙겨주라는 부탁까지 해준다. 차가웠던 그의 공간이 조금은 따뜻해진다. 하지만 박상무(정해균)를 좌천시킨 일이 발각되면서 쫓기는 신세가 된 이지안은 다시 고시원을 전전하며 떠돌게 된다. 그러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져 춘대(이영석) 할아버지를 찾아오고, 다행스럽게 동훈을 만나 정희네로 오게 된다. 그 먼 여정이 고단하지만, 그래서인지 정희네로 온 이지안이 그토록 안심될 수가 없다. 어찌 보면 드라마가 담으려는 것이 바로 이 여정이었던 것처럼.

공간을 통해 <나의 아저씨>가 담은 진심은 ‘사람의 온기’다. 상처받았어도, 또 망했어도 함께 모여 있어 느껴지는 그 따뜻함. 동훈이라는 인물은 바로 그 ‘온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 미운 짓을 해도 사람을 알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는 그런 존재. 그래서 이지안이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밉지 않냐고 물었을 때 동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그런 동훈에게 이지안은 비로소 ‘사람의 온기’를 느낀다. 도청을 통해 들었던 동훈의 모든 소리들에게서 느껴지던 그 온기를. “아저씨 소리 다 좋았어요. 아저씨 말, 생각, 발소리. 사람이 뭔지 처음 본 것 같았어요.” 그는 지금껏 살아오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을 비로소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가 말하는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를 얘기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정희네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나듯, 힘겨워도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며 버티고 서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너무나 외롭고 괴로워 홀로 제정신에 잠드는 것이 힘들었던 정희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둥지로 돌아온 듯한 이지안을 만나 비로소 어떤 편안함을 느낀다. 서로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별 이야기 없이도 이해되는 그런 편안함.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온기. 그것이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사람’이 아닐까.(사진:tvN)

‘흑기사’가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KBS 수목드라마 <흑기사>, 이 드라마 수상하다. 판타지 로맨스인데 난데없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자본화 현상이 거론된다.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등장하는 이 용어는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고 결국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을 뜻한다.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문수호(김래원)가 한국에 들어와 벌이고 있는 사업이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벌어지는 공간에서 원주민들을 지켜내는 사회사업이다. 그는 특색 있는 전통을 유지한 동네에 건물과 집들을 사들여 예술가들에게 장기 임대를 해주고 이를 여행 상품으로도 만들겠다고 했다.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드라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그렇게 맥락 없는 설정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정해라(신세경)가 절망하게 되는 사건으로 이모가 반전세금을 빼고 대출까지 받아 오래된 한옥집을 덜컥 사버린 일이 이미 이 드라마가 공간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는 사전포석이었기 때문이다. 재개발 자체가 묶여버린 그 한옥집을 결국 문수호가 사고 정해라와 이모가 머물 셰어하우스를 제공하는 스토리 전개도 그래서 그냥 전개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된 것이라 보인다. 

도시 한 가운데 남아있는 샤론양장점이라는 다소 고풍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판타지적인 공간도 그래서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양장점’이라는 문구가 드러내는 전통적인 방식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버린 기성품의 자본적 냄새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곳을 지키고 있는 샤론(서지혜)은 그래서 그 공간과 하나 된 인물처럼 보인다. 200년을 죽지 않고 살아온 불멸의 존재. 물론 죽고 늙고 하는 생멸의 문제는 다소 세속적인 것일 수 있지만, 어쨌든 지켜지고 있는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그 공간의 상징은 남다르다.

그러고 보면 슬로베니아에서 문수호와 정해라(신세경)가 만난 기사의 성이 그런 공간이다. 사람은 100년을 넘어 살기가 힘들지만 그런 성은 몇 백 년을 그 모습 그대로 버텨내기도 한다. 물론 그 성 이전에 공간은 더 오랜 세월들을 머금었을 게다. 다만 그 위에 인간들이 나타나고 누군가는 집이나 성을 짓고 또 누군가는 그걸 부수고 새로 짓고 하는 걸 반복했을 따름이다. 

불멸의 존재와 수백 년을 버티고 있는 건물들은 그래서 그 존재 자체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벌어지는 도시의 자본화 현상을 마치 허망한 짓이라는 듯 비웃는다. 100년을 못사는 인간의 얕은 욕망이 만들어내는 안타까운 파괴의 양상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문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메시지에는 그래서 이 드라마의 공간에도 어떤 울림을 만든다.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려 욕망과 자본이 몰리고 그래서 예술가들 같은 원주민들이 밀려나지만, 알고 보면 그 곳이 그렇게 생기를 갖게 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가들의 혼 같은 것이다. 만일 공간과 건물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사람의 흔적이나 온기 혹은 사랑 같은 것들이 퇴적해 만들어진 총체라고 생각한다면 함부로 그걸 밀어버리거나 그 안의 사람들을 내모는 짓은 할 수 없으리라. 

이것은 <흑기사>가 그려내는 판타지적인 사랑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많은 것들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지만, 또한 거기에는 사랑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있어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한다. 자기 존재의 귀함과 아름다움을 잊은 채 살아가던 정해라에게 문수호가 당신은 귀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건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그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말도 안되는 판타지를 꿈꾸고 그게 마치 실제 있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빠져드는 건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비정한 세상이 그저 전부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비참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꿈꾼다.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어찌 보면 결국은 모두가 사멸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저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몇 세기를 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불멸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흑기사>의 판타지 로맨스가 젠트리피케이션을 얘기하는 건 엉뚱한 일이 아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눈에 보이는 세속적 현상이라면 판타지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일 수 있으므로.(사진:KBS)

‘윤식당’, 누구나 한번쯤 꿈꿨을 공간·시간·인간

“저런 곳에서 지낼 수 있다면...” tvN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이 주는 가장 큰 로망은 바로 그 공간이 주는 판타지가 아닐까. 요즘 같은 황금연휴에 여행은커녕 일을 하고 있거나, 여행을 가고 싶어도 여유가 없어 TV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라면, <윤식당>의 그 발리의 외딴 섬이 주는 막연한 로망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게다. 단 며칠이라도 모든 걸 잊고 울려대는 전화기 따위는 커버린 채 바닷바람 맞으며 해먹에 누워 느긋한 독서와 낮잠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윤식당(사진출처:tvN)'

“저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하지만 <윤식당>이 주는 로망이 단지 공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 공간에 깃들여진 여유로운 시간이 없다면 무용지물. <윤식당>이 그 섬에서 연 가게도 원할 때 열고 원할 때 닫는 그 여유가 없다면 이 곳 도시의 치열한 회사생활과 다를 게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이 <윤식당>의 사장님 윤여정은 장사로 돈을 벌려는 그런 욕망이 거의 없다. TV프로그램이기 때문이지만, 자신이 만든 요리를 손님들이 맛있게 먹어주기만을 바란다. 그래서 기다리다 오랜만에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접시에 더 정성을 깃들이고 덤에 덤을 얹어준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맛있게 먹어주니 너무 고맙다”는 것이다. 이런 사장이 있는 가게에 여유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희한한 것은 이렇게 여유를 갖고 하는 장사에 오히려 손님들이 더 몰린다는 점이다. 손님들도 안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것과 진짜 맛있는 음식을 내놓으려고 애쓰는 그 차이를.

“저런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하지만 무엇보다 <윤식당>의 가장 큰 로망은 윤여정 사장님으로부터 느껴지는 좋은 사람들이다. 보조인 정유미를 잘 한다 잘 한다 다독이고, 영업과 마케팅을 맡은(?) 이서진이 신 메뉴를 얘기할라치면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다가도 나중에는 본인이 더 나서서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적극성을 보인다. 처음 여는 가게라 긴장과 부담이 있지만 그래도 손님이 많아 정신없이 바쁠 때 활짝 펴지는 그 얼굴을 보면 시청자들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새 내 장사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사장님이라니. 

아이디어 많고 추진력도 좋으며 위기 상황에서도 척척 대처해내 기댈 수 있는 상무, 이서진의 든든함도 그렇고,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그리도 잘 아는지 말 하지 않아도 척척 옆에서 준비를 해주고 마음을 써주는 정유미 보조의 싹싹함, 그리고 가장 연장자지만 아르바이트라는 위치에 맞게 늘 손님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신구의 친절함까지 <윤식당> 사람들은 모두가 함께 일하고픈 그런 좋은 느낌을 준다.

연휴를 맞아 어딘가 떠나지 못하고 심지어 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윤식당>이 보여주는 공간, 시간, 인간에 대한 로망은 아마도 누구나 꿈꿔왔을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이 그 소망하는 대로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 세 가지라는 걸 말해준다. 괜찮은 공간에서 여유 있는 시간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픈 소망. <윤식당>이 우리를 꿈꾸게 하는 이유다.

 '시카고 타자기', 임수정에 더 집중해야 산다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져가는 시청률이다. 2.4%(닐슨 코리아)로 시작한 tvN <시카고 타자기>. <해를 품은 달>과 <킬미 힐미>의 진수완 작가의 신작인데다, 유아인이 출연했다는 소식만으로도 기대감은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수준이었다. 하지만 2회에 잠깐 2.8% 시청률로 정점을 찍은 후 줄곧 시청률이 빠지더니 5회에는 1.9%까지 떨어졌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작품의 완성도나 유아인, 임수정, 고경표의 연기 모두 명불허전인 건 사실이다. 특히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지금껏 드라마 소재로는 잘 다뤄지지 않은 세계를 담는 실험을 하고 있다. 1920년대 경성과 현재를 넘나들고 타자기와 회중시계가 일종의 판타지 장치처럼 활용되며 작가인 한세주(유아인)와 진짜 유령인 유령작가 유진오(고경표)라는 존재의 관계는 상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마저도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가상과 현실을 말 그대로 ‘종횡무진’하는 <시카고 타자기>는 그래서 굉장한 야심작이다. 그 안에는 스릴러에 판타지 로맨스 같은 다양한 장르들의 편린이 녹아 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일반 시청자들에게 이 드라마는 ‘종을 잡을 수 없는’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하는 그 목표의식이 5회가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어서다.

이건 5회에 이르러 유진오가 그저 유령작가가 아니라 실제 유령이었다는 사실을 깜짝 밝히는 반전을 보여주는 그 장면에 잘 드러나 있다. 드라마는 지나치게 반전에 집착하며 어떤 이야기로 튈지 알 수 없게 현재 상황을 숨기고 있지만 시청자들은 그것이 궁금하기보다는 다소 복잡하고 나아가 답답하게 여겨진다. 드라마에서 반전 장치란 터트릴 때는 효과가 있지만 터지기 전까지 숨길 때는 이야기 전개의 원활한 흐름을 오히려 막아 시청자들을 답답하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유진오가 유령일 거라는 추측은 이미 대부분 시청자들이 알고 있었던 사안이다. 이러니 반전의 효과는 줄어들고 대신 반전을 보이기 위해 그간 숨겨놓고 눌러놓았던 이야기 전개만 더 복잡하게 보이는 역효과가 생길 수밖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시청자의 몰입 포인트를 드라마가 제대로 콕 집어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세주라는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세워져 있지만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 소설가가 겪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지점은 그다지 큰 공감대를 만들지 못한다. 물론 창작자들에게는 이 드라마의 문제의식이 흥미롭게 다가올 테지만 말이다. 

대신 이 드라마에서 대중들이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인물은 바로 한세주의 뮤즈로 나타난 전설(임수정)이라는 평범 속에 비범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어째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는지’ 늘 하던 일이 어그러지는 그런 인물. 그러면서도 끝까지 한세주 작가의 초심을 믿고 신뢰함으로서 그를 진정한 창작자로 살게 하는 존재. 

한세주와 전설의 관계는 그래서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지금 현재 어떻게 역전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과거의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는 창작자에서 독자로 향하는 일방향적 힘이 더 우세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독자가 창작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는 뮤즈가 되기도 한다는 것. 

<시카고 타자기>가 좋은 실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이 ‘몰입의 대상’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어서라고 생각된다. 창작자의 고민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시청자들이 관심을 갖는 사항은 아니다. 대신 시청자들이 더 주목하는 건 독자의 확장된 역할이 아닐까. 전설의 활약이 중요해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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