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공포의 '도가니'가 아프게 전하는 말

'도가니'(사진출처: 삼거리 픽쳐스)

침묵의 대가는 크다. 이 말은 듣는 이에 따라서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혹자는 침묵함으로써 얻게 되는 현실적인 이득을 떠올릴 수도 있고, 혹자는 잃게 되는 양심을 떠올릴 수도 있다. '도가니'는 바로 이 침묵이 가진 이중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묻는 영화다. 당신은 과연 이 진저리처질 정도의 참혹한 사건 앞에서 현실이라는 이유로 침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침묵이 가져오는 양심의 가책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도가니'. 사전적 의미로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을 뜻하지만 우리는 흔히 '침묵의 도가니' 혹은 '공포의 도가니' 같은 표현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애초에 제목을 거기서 가져왔기 때문일까. 이 영화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역시 '침묵의 도가니'와 '공포의 도가니' 이 두 표현이다.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무려 5년 간 교장과 교사들이 청각장애아들을 대상으로 벌인 성폭력과 학대는 '침묵'과 '공포'를 그대로 영화 속에 담는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장애를 가진 피해자들이 침묵을 강요받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인들조차 침묵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없는 짓을 버젓이 저지르는 상황도 그렇지만, 그걸 그 누구도 나서서 막지 않는 상황은 더 큰 공포다. 즉 '도가니'는 '침묵의 도가니' 같은 표현이 그런 것처럼 이 정의니 진리니 하는 추상적인 상황을 지극히 즉물적인 눈앞의 상황으로 낱낱이 보여주는 영화다. 그래서 추상으로 덧씌워져 가려져 있는, 몇몇 글자들로는 도무지 표현하기 어려운 이 짐승 같은 상황을 고스란히 발가벗겨 보여준다. 게다가 법 역시 돈과 권력의 힘에 휘둘리며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공포가 저 어느 지방학교에서 벌어진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영화가 어떤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니'는 참혹할 정도로 보는 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역시 침묵하고 있었던 우리들의 눈과 귀를 아프게도 찌른다. 그럼으로써 가슴으로 담으려 하지 않았던 우리들을 분노하고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끝끝내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영화 속 무진이라는 도시를 뒤덮고 있는 안개처럼 답답하게 가려진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라고만 한다.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고 여전히 그 때의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교편을 잡고 있는 현실에서 영화가 어찌 감히 비전을 보여주겠는가.

하지만 이 비전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 영화가 주는 비전이다. 모두가 침묵하고 덮으려고 했던(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아픈 현실을 영화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럼으로써 법이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그 현실을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 이 영화의 비전이다. 모든 것이 은폐되는 상황 속에서는 그것을 직시하고 잊지 않는 것이 때로는 그 어떠한 행동보다도 더 적극적인 참여가 되기도 한다. '도가니'는 그런 점에서 보는 것이 그 자체로 인권을 향한 한 걸음이 되는 영화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바라보고 우리 기억의 감옥 속에 그들을 가둬두는 것으로, 법이 풀어준 그들을 영원히 봉인시키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침묵'과 '공포'의 도가니를 느꼈다면 그 아픈 고통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도가니'가 그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우리에게 아프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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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전설의 고향’, 그 재미요소와 관전 포인트

하얀 소복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 속으로 핏빛 한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 마치 TV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실 “지나갔어?”하고 물어보던 그 귀신이 돌아왔다. 다름 아닌 ‘전설의 고향’의 재림이다. 77년부터 무려 12년 간 매주 570여 편을 방영했고, 96년부터 99년까지 70여 편이 방영되었으며 이제 2000년대 들어 다시 방영되고 있으니, 이 드라마는 세대를 뛰어넘는 고전 중의 고전인 셈이다.

‘전설의 고향’의 특별한 공포
이렇게 된 데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형식이 가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각 지방마다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傳說)를 극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특이한 자연물에 대한 유래나 인물에 얽힌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이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데다가, 지방의 연원이나 특색을 담고 있고, 또한 적정한 교훈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컨텐츠로서 그만일 수밖에 없다.

‘전설의 고향’의 상징이 된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나, “내 다리 내놔”란 유행어로 잘 알려진 ‘덕대골’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기본 힘은 공포에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공포물이면서도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끔찍한 피와 살점이 튀는 요즘의 공포물들과 비교해보면 ‘전설의 고향’의 영상은 그저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공포감은 직접적인 장면의 잔혹함보다는 간접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의 무서움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한 속에는 저마다 복수의 이유들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스토리들이 권선징악의 보편 타당한 교훈들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 “이 이야기는 ○○○에서 전해져오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라는 정리 멘트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퓨전사극 시대, ‘전설의 고향’은?
초창기의 ‘전설의 고향’이 이런 모든 장점들을 다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조악했던 특수효과와 영상기술 덕분이다. ‘전설의 고향’만이 갖는 공포에는 사실 어색한 분장이나 연출 같은 것에서 비롯되는 촌스러움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치 처음 봤을 때는 화들짝 놀라고 나서, 다음에는 ‘내가 이런 어설픈 것에 놀랐어?’하는 안도감으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과거 조악했던 괴기전의 공포와 유사하다. 90년대에 새롭게 제작된 ‘전설의 고향’은 CG효과를 너무 쓰다가 오히려 이러한 ‘전설의 고향’만의 특별한 공포체험을 잃게 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전설의 고향’은 어떨까. 일단 컨텐츠는 과거의 것들 속에서 나온 것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본래 전설이란 그 화자의 이야기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재미를 주게 마련. 공포와 액션과 스릴러와 해학까지 겸비한 ‘전설의 고향’의 새로운 버전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사극 그 자체다. 이제 사극은 좀더 현대적인 퓨전사극의 시대로 가고 있다. 이 새로운 사극을 주도한 ‘한성별곡-正’의 곽정한 PD(구미호 편 연출), ‘쾌도 홍길동’의 이정섭 PD(오구도령 편 연출)의 연출이 기대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최수종, 안재모, 이덕화, 이민우 같은 걸출한 사극 연기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다시 돌아온 ‘전설의 고향’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한 여름의 킬러 컨텐츠가 분명하다. 거기에는 우리 식의 토속적인 공포와 해학이 있고, 권선징악의 보편타당한 정서가 있다. 이 기본 골격 위에 새로운 뉴웨이브 사극 감독들이 펼치는 연출의 묘미와 걸출한 사극 지존들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된다. 어쩌면 ‘전설의 고향’ 같은 컨텐츠는 스토리에 목말라하면서, 사극에서조차 고증보다는 상상력을 더 요하게 만드는 지금 같은 시대에 더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설의 고향’이 다시 전설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거의 전설로만 남게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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