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공포로 다시 화제 된 영화들의 공통점

 

2013년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메르스 공포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발병자들이 많이 발생한 도시의 거리는 마치 유령도시가 된 듯 텅 비어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체접촉은 극도로 민감해진다. 물론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는 그 자체로도 우리를 압도하지만, 이보다 더 큰 공포는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 콘트롤 타워의 부재다. <감기>는 그걸 보여줬다.

 

'사진출처:영화 <감기>'

초기에 진압되어야 할 바이러스가 정부의 뒤늦은 대처로 인해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삽시간에 나라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현재의 메르스 사태를 비슷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아 소름끼친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함이라며 정보를 숨기려는 자들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혼란이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 판박이다. 이럴 때일수록 좀 더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한 마음으로 대처해 나가도 모자랄 판이 아닌가. 하지만 지지율에나 더 신경 쓰는 자들은 쉬쉬하거나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기에 바쁘다.

 

<감기>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체들을 살 처분 하는 광경이다. 그 안에는 아직도 살아있는 생명이 있지만 이미 그곳에 격리되고 버려진 이상 그들은 더 이상 생명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통제되지 않는 정부의 콘트롤 타워는 바이러스와 싸우기보다는 들끓는 민심들을 향해 오히려 총구를 겨눈다. 물론 이것은 영화가 연출한 극적인 장면일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공포를 준다는 건 실로 씁쓸한 일이다. 이건 영화가 예언한 것인가 아니면 현실이 너무나 영화 같은 것인가.

 

우리네 재난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그 문제는 재난을 일으키는 장본인보다 이에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의 엇나간 콘트롤 타워에서 비롯된다. 물론 봉준호 감독 스스로는 납치극이라고 얘기했지만 <괴물>은 적어도 관객들에게는 너무 많은 기시감을 준 영화였다. 분향소에서 가족들이 뒹굴며 오열하는 장면은 영화가 상영된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진 그 많은 재난들을 통해 봐왔던 장면들이다. 작년 세월호 참사는 안타깝게도 그 많은 재난 속 장면을 또 다시 보여주었다. <괴물>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묻고 있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2012년 방영된 <연가시>에서도 감염의 공포만큼 더 공포스럽게 등장한 건 공권력의 무능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연가시보다 재난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정부의 무능 때문에 죽어나간다. 정부의 콘트롤 타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서 위험에 처한 이들이 기대는 것은 가족뿐이다. <연가시>에서 경제적인 문제로 가족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가장은 그래서 죽어라 뛰어다닌다.

 

그런데 이 <괴물>이나 <감기>, <연가시>가 공통적으로 가족들의 사투를 그려내고 있는 걸 보다보면 참담한 우리네 현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국가나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잘못된 콘트롤 타워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포기하는 상황 속에서 이제 믿을 건 가족들밖에 없다는 이 절절함. 메르스 사태가 감염자를 병수발하다 또 다른 감염자를 낳으며 더 확산됐던 그 이면에는 이 믿을 건 가족뿐이라는 절망적인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보건당국은 스스로 격리하라고 하고 스스로 손발을 씻고 개인위생에 철저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가급적 야외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뭘 자꾸만 하라고 하고 또 하지 말라고 하지만 과연 그들은 국민들을 위해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가 예언한 건 재난 그 자체가 아니다. 그건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였다. 지금 이 정부의 자세는 마치 현실이 아닌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맨홀>이 끔찍한 건 그것이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맨홀>의 배경은 강북의 한 마을이다. 어둑한 밤길 마치 공무원들처럼 복지부동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공권력 속에서 그나마 행인들을 지켜주는 것이라면 가로등과 CCTV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맨홀>의 연쇄실종사건이 벌어지는 강북의 그 마을에는 그 가로등과 CCTV를 공권력이 아니라 살인자가 쥐고 있다.

 

'맨홀(사진출처:화인웍스)'

가로등을 마음대로 꺼버리고 그 어둠 속에서 살인자는 일종의 인간사냥을 벌인다. CCTV? 그것은 범죄자들을 찍는 사회적 안전장치가 아니라 사냥감이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범죄자의 천리안이다. <맨홀>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적인 위치를 만들어낸다. 살인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공권력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한 치 알 수 없는 어두운 지하의 그 미로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건 우리에게 끔찍한 경험을 선사한다.

 

<맨홀>은 스릴러 장르지만 그래서 공포에 가깝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단지 자극적인 장면들 때문에만 생겨나는 건 아니다. 이 맨홀로 상징되는 어두운 지하세계가 현실의 무언가를 자꾸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밑에서는 끌려 들어간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건 우리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맨홀>의 피해자들을 보면(당연히 그 배경이 강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서민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택시기사가 아버지인 딸이 있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가진 동생과 부모를 여의고 그 동생을 돌보는 착한 언니가 있다. 만일 피해자가 기득권층이었다면 이 영화를 통해 그나마 어떤 사회적 분노를 발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피해자들을 그저 선량한 서민들로 보여준다. 심지어 가해자마저 폭력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즉 이 <맨홀>이라는 세계에는 지워져 있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한쪽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데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기득권층의 세계다. <맨홀>은 그래서 피해자들끼리 벌이는 약육강식 같은 느낌을 보여준다. 강북이라는 맨홀 위의 공간과 그 맨홀 밑의 공간은 또 그 안에서도 어떤 위계를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맨홀 위와 아래가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를 다룬다. ? 살아남기 위해서.

 

<맨홀>은 그래서 영화적인 통쾌함을 선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네 현실이 그러하듯이 없는 자들이 없는 자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풍경을 거칠게 담아낸다. 영화는 어두울 수밖에 없고, 때로는 그 공포의 시간이 차마 쳐다보기 힘든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나마 그 안에서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서로간의 끈끈한 가족애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조차 처절한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맨홀>이라는 영화 속에서 정유미, 정경호, 김새론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사실 이 영화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건 이들의 호연 덕분이다. 정유미는 단단한 연기로 영화에 추진력을 만들어낸다. 동생 역할을 하는 김새론은 아마도 괴물을 다루는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만들어낸 배우가 아닐까 싶다. 정경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독특한 비주얼의 살인마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이 세 명이 만들어내는 연기의 합은 이 지하세계에서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바라보는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마지막 맨홀 바깥으로 카메라가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세상이 낯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토록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는 지하에 비해 너무나 평온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마치 맨홀 속 같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 살아가면서도 문을 꼭꼭 닫아걸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그 삶의 무시무시함을 이 영화는 맨홀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혹성탈출> 변칙 개봉 논란과 영화의 공존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하 혹성탈출)>에서 시저는 유인원 종족들을 이끌고 인간들 앞에 서서 서로의 영역에 대해 말한다. 숲은 유인원들이 사는 공간이고, 도시는 인간 생존자들이 사는 공간이라는 것. 시저는 각자의 영역에서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즉 인간과 유인원 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혹성탈출>20세기 내내 인류를 전쟁으로 내몰았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사진출처: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10여 년을 각각 살아가던 인간과 유인원이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해 총성이 울리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인간은 낯선 숲에서 갑자기 마주친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유인원에게 느낀 공포로 인해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인원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잡혀 갖가지 실험을 당했던 유인원 코바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다른 선택도 있다. 시저와 말콤이 유인원과 인간이라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어 신뢰와 우정으로 나아가는 선택이 그렇다. 말콤이 유인원들의 숲에 죽음을 불사하고 들어간 것은 그 두려움을 공존의 의지로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공존에 대한 노력은 양자 간의 대결이 아니라 평화를 깨려는 내부의 적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블록버스터이면서도 진지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혹성탈출>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개봉에 있어서 아이러니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즉 이 영화는 공존을 이야기 하지만 이 같은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를 점령하다시피 하는 상황은 작은 영화들에게는 공존은커녕 생존을 얘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같은 변칙개봉 논란은 이 거대한 몸집의 영화가 개봉일 변경 하나만으로도 작은 영화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되는 현 영화 생태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논란을 단지 할리우드 vs 우리 영화로 구분해 대결구도를 갖는 건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혹성탈출>의 이야기가 인간 vs 유인원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과 유사하다. 시저는 영화의 말미에 유인원이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그것은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할리우드와 우리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네 영화는 상당 부분 할리우드를 닮아가고 있다. 우리 영화에 있어서도 끝없는 스크린 독점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개봉되면 작은 영화들은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 버린다. 그러니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의 문제는 우리 영화를 포함한 블록버스터들의 독점적인 스크린 장악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이제 자본이 장악하고 있다. 자본 아래 국적성이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진정 <혹성탈출>이 주제로 보여주는 것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전 세계의 영화관을 거의 독점 하다시피 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욕하면서도 우리의 자본은 그 시스템을 철저히 배워 우리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결국 <혹성탈출>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은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은 영역과 종족 구분 없이 전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인간의 총을 가져와 유인원들에게조차 총구를 겨누는 코바의 모습은 그래서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저 할리우드의 습격을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잣대를 내세워 욕할 자격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그 총을 들여와 우리 영화계를 향해 겨눈 것은 우리네 거대자본이 아니던가.

 

시저와 말콤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존을 꿈꾸면서도, 시저의 말대로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유인원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다. 공존하겠다는 의지와 모든 걸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현재 우리네 영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크린 전쟁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 논란은 할리우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현재 처한 문제이기도 한 셈이다.

<스플래시>, 클라라의 탈락이 안타까운 이유

 

스타 다이빙쇼 <스플래시>에서 클라라는 출연한 이유에 대해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 방송에서 그녀가 말한 대로 ‘몸매’ 혹은 ‘노출’이 그것이다.

 

'스플래시(사진출처:MBC)'

실제로 <스플래시>에서 그녀의 수영복은 여타의 연예인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의상에 신경을 썼다고 미리 말했고, 옆쪽이 터져 있어 골반 부분이 훤히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고 나왔다. 눈에 띌 정도로 긴 속눈썹을 붙이고 나온 것처럼 비주얼에 특히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것은 <스플래시>라는 프로그램이 클라라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적당한 노출이 있는 만큼 비주얼로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클라라는 거기에 적임자인 셈이다. 출연자 소개 장면에서도 ‘섹시’를 유달리 강조한 모습들이 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이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는 MC들 역시 클라라의 노출 부분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게다. 신동엽은 가운을 굳이 벗어달라고 요청했고 클라라는 수영복의 골반 부분을 가리키며 “여기가 포인트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MC인 전현무도 마찬가지다. 다이빙대에 올라온 클라라에게 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였다.

 

제 아무리 노출이 포인트가 아니라고 해도 ‘노출의 아이콘’인 클라라를 출연시켰을 때부터 이런 전개(?)는 이미 예상된 일이다. 노출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클라라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스플래시>라는 다이빙 콘셉트 리얼리티쇼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선정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몸에 대한 찬사는 문제될 것이 없다.

 

즉 클라라가 <스플래시>라는 프로그램의 출연을 수락했을 때 이제 그 열쇠는 클라라에게 넘어온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클라라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노출만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다.

 

물과 고소에 대한 공포가 있는 이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클라라는 노출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절실했을 수 있다. 하지만 연습 도중 당한 허리 부상으로 부상 트라우마를 겪음으로써 훈련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차 심사위원 점수에서 24.5점이라는 최하 점수를 받았다. 현장 관객 투표에서 가까스로 샘 해밍턴을 이겨 살아남았지만 2차 도전에서 결국 심사위원 결정으로 탈락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갖게 된 기회를 놓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중들이 여전히 그녀를 노출의 아이콘으로 소비하고 있고, 방송 역시 그것을 활용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다이빙대에 섰을 때는 어떤 반전의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 한 걸음이 클라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았다는 점에서 이번 <스플래시>의 첫 회 탈락은 그녀에게 너무 안타까운 결과가 되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클라라는 ‘노출’로만 소비된 채 다이빙대를 내려오게 되었다. 클라라가 주목해야 할 이들은 이 날 <스플래시>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 임 호와 여홍철의 투혼일 게다.

 

사극을 찍다가 익사의 공포를 느끼고는 물 공포증이 생겼다는 임 호는 훈련 때문에 온 몸이 멍 자국 투성이었다. 그는 공포를 이겨내고 10미터 높이에서 멋진 자세로 뛰어내려 박수갈채를 받았다. 모두가 강력한 우승후보라고 말했지만 체조와 다이빙의 쓰는 감각이 달라 오히려 고생한 여홍철은 심지어 고막 염증을 일으킬 정도의 귀의 통증을 이겨내면서 멋진 다이빙을 선보였다.

 

바로 이런 점은 현재 노출로만 소비되는 게 두려워 심지어 눈물을 쏟아냈던 클라라가 스스로도 밝혔듯 여배우로서 온전히 서기 위해서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일 게다. 임 호의 온 몸에 난 멍 자국처럼 말이 아닌 실제 결과로서 보여줄 때 그 진정성은 대중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

 

최고의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영역을 확연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클라라는 지금 어떤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한계를 넘어 여배우로서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길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미 소비되고 있는 노출의 아이콘으로 주저앉을 것인가.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클라라로서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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