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래시>, 클라라의 탈락이 안타까운 이유

 

스타 다이빙쇼 <스플래시>에서 클라라는 출연한 이유에 대해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 방송에서 그녀가 말한 대로 ‘몸매’ 혹은 ‘노출’이 그것이다.

 

'스플래시(사진출처:MBC)'

실제로 <스플래시>에서 그녀의 수영복은 여타의 연예인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의상에 신경을 썼다고 미리 말했고, 옆쪽이 터져 있어 골반 부분이 훤히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고 나왔다. 눈에 띌 정도로 긴 속눈썹을 붙이고 나온 것처럼 비주얼에 특히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것은 <스플래시>라는 프로그램이 클라라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적당한 노출이 있는 만큼 비주얼로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클라라는 거기에 적임자인 셈이다. 출연자 소개 장면에서도 ‘섹시’를 유달리 강조한 모습들이 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이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는 MC들 역시 클라라의 노출 부분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게다. 신동엽은 가운을 굳이 벗어달라고 요청했고 클라라는 수영복의 골반 부분을 가리키며 “여기가 포인트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른 MC인 전현무도 마찬가지다. 다이빙대에 올라온 클라라에게 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였다.

 

제 아무리 노출이 포인트가 아니라고 해도 ‘노출의 아이콘’인 클라라를 출연시켰을 때부터 이런 전개(?)는 이미 예상된 일이다. 노출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클라라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스플래시>라는 다이빙 콘셉트 리얼리티쇼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선정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몸에 대한 찬사는 문제될 것이 없다.

 

즉 클라라가 <스플래시>라는 프로그램의 출연을 수락했을 때 이제 그 열쇠는 클라라에게 넘어온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클라라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노출만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닌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다.

 

물과 고소에 대한 공포가 있는 이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클라라는 노출 그 이상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절실했을 수 있다. 하지만 연습 도중 당한 허리 부상으로 부상 트라우마를 겪음으로써 훈련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차 심사위원 점수에서 24.5점이라는 최하 점수를 받았다. 현장 관객 투표에서 가까스로 샘 해밍턴을 이겨 살아남았지만 2차 도전에서 결국 심사위원 결정으로 탈락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갖게 된 기회를 놓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중들이 여전히 그녀를 노출의 아이콘으로 소비하고 있고, 방송 역시 그것을 활용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다이빙대에 섰을 때는 어떤 반전의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 한 걸음이 클라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았다는 점에서 이번 <스플래시>의 첫 회 탈락은 그녀에게 너무 안타까운 결과가 되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클라라는 ‘노출’로만 소비된 채 다이빙대를 내려오게 되었다. 클라라가 주목해야 할 이들은 이 날 <스플래시>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준 임 호와 여홍철의 투혼일 게다.

 

사극을 찍다가 익사의 공포를 느끼고는 물 공포증이 생겼다는 임 호는 훈련 때문에 온 몸이 멍 자국 투성이었다. 그는 공포를 이겨내고 10미터 높이에서 멋진 자세로 뛰어내려 박수갈채를 받았다. 모두가 강력한 우승후보라고 말했지만 체조와 다이빙의 쓰는 감각이 달라 오히려 고생한 여홍철은 심지어 고막 염증을 일으킬 정도의 귀의 통증을 이겨내면서 멋진 다이빙을 선보였다.

 

바로 이런 점은 현재 노출로만 소비되는 게 두려워 심지어 눈물을 쏟아냈던 클라라가 스스로도 밝혔듯 여배우로서 온전히 서기 위해서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일 게다. 임 호의 온 몸에 난 멍 자국처럼 말이 아닌 실제 결과로서 보여줄 때 그 진정성은 대중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

 

최고의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영역을 확연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클라라는 지금 어떤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한계를 넘어 여배우로서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길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미 소비되고 있는 노출의 아이콘으로 주저앉을 것인가.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클라라로서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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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남자>는 어떻게 <늑대소년>이 되었나

 

실로 대단한 송중기다. 그저 예쁘장한 꽃미남이라는 편견을 <뿌리 깊은 나무>의 젊은 이도 역할로 깨버리더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에서는 순수한 사랑과 복수의 양면을 가진 얼굴로 그만의 독특한 멜로를 그려냈다. 그리고 이제는 <늑대소년>이다. 대사가 거의 없고(전체 영화에서 한두 마디밖에 없다) 오로지 몸의 언어로, 표정으로 그 감정을 전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역할. 그러나 송중기는 그 역할도 자신이 가진 독특한 이미지로 구축해낸다.

 

사진출처: 영화 <늑대소년>

<늑대소년>은 현재 <광해>를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단숨에 87만 관객을 돌파하고 1백만 관객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사실 허술한 구석이 많은 영화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설정들과 여러 장르의 결합이 매끄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폐가 좋지 않아 산골집으로 이사 오는 순이(박보영)의 모습은 저 <마루 밑 아리에티>의 쇼우를 연상케 하고, 늑대소년이란 설정은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등장해 인간과의 사랑과 질투를 다룬 <트와일라잇>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들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늑대소년>이 저패니메이션의 정교함이나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달리 좀더 B급감성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늑대소년>은 공포 장르처럼 시작해서 코미디로 넘어갔다가 스릴러로 이어지고 멜로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수많은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이미 장르에 대한 이해와 허용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장르의 변주는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제작비와도 관련이 있을 듯 싶은데, 예를 들어 늑대소년 철수와 순이의 사랑을 막는 적들이 너무 전형적이고 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악역의 캐릭터 구축이 평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악역의 스케일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대체 이 괴력의 늑대소년을 어떻게 단 십수 명의 사내들이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런 빈약한 구석을 영화는 코미디적인 설정으로 넘어서려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그리는 장르가 코미디도 공포도 스릴러도 아닌 멜로라는 점이다.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늑대소년의 지고지순한 사랑. 흔히 늑대개와 인간의 우정을 그린 영화들의 감성이 여기서는 늑대개를 인간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세월을 뛰어넘는 충성스런 사랑의 이야기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장르적인 특성들, 이를테면 코미디와 공포와 스릴러와 멜로의 다양한 변주를 송중기가 잘 버텨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한없이 웃기고, 때론 무섭게 돌변하며, 긴박감을 주면서 동시에 아련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의 아이콘이 되어 준다. 영화적인 허점들이 만들어내는 균열을 송중기라는 연기자가 하나 하나 메워주는 인상이다.

 

전형적인 청춘 멜로에 적합할 것이라는 편견은 <착한남자>를 거처 <늑대소년>을 통해 완전히 깨져버린다. 그는 여전히 청춘 멜로에 적합하지만, 그의 스펙트럼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늑대소년>의 철수는 보여주었다. 송중기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주는 영화, 바로 <늑대소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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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아랑사또전>은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걸까. 보면 볼수록 기묘한 사극이다. 판타지 멜로인 줄 알았는데 액션에 미스테리에 심지어 공포까지 장르를 넘나든다. <전설의 고향>에서 봤던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과 그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사또 이야기처럼 시작했지만, 그것은 이 사극의 1%도 안되는 전제에 불과했다.

 

'아랑사또전'(사진출처:MBC)

귀신을 보는 사또 은오(이준기)는 처녀귀신 아랑(신민아)이 가진 비녀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줬던 것임을 알아채고 그녀의 죽음을 밝히는 일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갑자기 홍련(강문영)이라는 미스테리한 존재가 등장하면서 복잡해진다. 인간을 해하는 절대악이자 요괴인 홍련은 등장인물들과 모두 관련을 맺고 있다. 그녀는 은오의 어머니(아마도 죄를 짓고 쫓겨난 선녀 무연이 몸을 빌린)이고, 저승사자 무영(한정수)의 동생이며 아랑의 죽음과 관계된 인물이다.

 

홍련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는 미스테리하고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야기가 하나씩 단서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흘러가며 알 듯 모를 듯한 대사 몇 마디로 단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곤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점이 은오나 아랑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인물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옥황상제(유승호)나 염라대왕(박준규)의 시점이지만 이들은 좀체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에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극이 갖는 인물들 간의 계층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은오는 자기 스스로 “귀신들린 얼자”라고 표현하며 출신이 만든 한계와 설움을 드러내지만, 정작 이 사극에는 양반과 상놈 사이도 수평적 관계로 그려진다. 은오와 그의 하인 돌쇠(권오중)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이 사극은 인간과 귀신 혹은 인간과 천상의 인물들(옥황상제나 염라대왕, 저승사자 같은) 사이에도 위계를 그다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양 사이에 걸쳐진 인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은오는 인간이면서 귀신을 보는 존재이고 아랑은 귀신이면서 시한부 생을 부여받은 인간이다. 홍련은 혼은 타락한 선녀이면서 동시에 육체는 은오의 어머니인 인물이다. 이 사극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은오와 아랑, 홍련이 이렇게 걸쳐진 인물이기 때문에 천상과 인간세계의 경계가 깨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 인간세계의 반상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랑은 “죽으면 다 똑같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계 짓기가 무의미하다는 걸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랑사또전>은 이 구별 없는 세상을 그리려 한 것일까. 귀신과 인간이 공존하고, 천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를 그림으로써, 인간 세계 속의 구별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부질없는 욕망의 소산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경계가 없는 기묘한 사극, <아랑사또전>은 그래서 불친절한 문제작이다. 액션이면 액션, 멜로면 멜로, 공포면 공포까지 각각의 장르들은 그 자체로 보면 꽤 괜찮은 완성도를 갖고 있지만 이것을 한꺼번에 이어 붙이고, 단계별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동시다발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이야기는 복잡해졌다. 이렇게 단서들을 꼭꼭 숨김으로 해서 반전을 노린 면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반전효과가 적은 것은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지면서 기대감 또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전은 기대감을 배반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이해시키고 몰입시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렇게 끊임없는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빠뜨린 후, 결국에는 간단한 액션으로 문제를 풀어내거나 아랑과 은오의 멜로로 이야기를 끝맺음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허무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청자들을 미로 속에 넣고 한껏 혼란에 빠뜨리는 작가의 악취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아랑사또전>은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좀체 알려주지 않는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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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한 연애', 오싹 상큼 로맨틱 코미디

'오싹한 연애'(사진출처:상상필름)

공포영화 여주인공은 왜 사랑을 안 할까. 주인공이 사랑을 하면 무섭지 않기 때문이란다. 곁에 누가 있는데 무서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로맨틱 코미디에 공포물에나 나올 법한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자칫 잘못하면 로맨틱 코미디의 그 달달한 분위기를 살벌한 귀신이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와 공포는 이렇게 이질적인 장르다. 그렇다면 이 두 장르의 결합은 불가능한 것일까.

'오싹한 연애'는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영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멜로와 공포는 결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어쩌면 틀에 박힌 식상한 장르적 문법들을 뒤집는 새로움을 전해줄 수 있다. 오싹하지만 상큼하고, 살벌하지만 웃음이 쿡쿡 나오는 이 기발한 영화는 그래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멜로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공포가 주는 긴장감이 로맨틱 코미디가 풀어내는 이완으로 이어질 때, 그 양극단의 경험은 더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여리(손예진)가 바로 그 공포영화 속의 여주인공이다. 절대로 웃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는 귀신과 함께 살아간다. 너무나 공포스러워 가족이 떠날 정도니, 애인은 언감생심이다. 귀신을 보는 체험을 견뎌낼 수 있는 남자가 어디 그리 많겠는가. 이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듯이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그런 공포영화 같은 삶 속에 살아가는 여리의 공간으로 뛰어든 조구(이민기)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인공 같은 캐릭터다.

어딘지 소심하지만 세심한 면이 있고, 사랑을 위해서는 기꺼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그런 남주인공. 흥미로운 건 이 남주인공 조구의 직업이 마술사라는 것이다. 그것도 여리를 통해 영감을 얻어 만든 호러판타지 마술로 인기를 얻은 마술사. 마술이라는 것이 공포가 주는 긴장감과 그것이 마술로 풀어졌을 때의 이완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호러 판타지적 정조를 그대로 대변한다.

마술이 아무리 공포를 소재로 갖고 오더라도 바로 '마술'이라는 안전한 바탕 위에 섬으로써 적절한 이완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오싹한 연애'도 공포보다는 로맨틱 코미디를 바탕으로 한다. 즉 '오싹한' 보다는 '연애'에 더 방점이 찍히는 영화라는 얘기다. 남주인공인 마술사 조구는 그래서 공포 위에서도 그것을 이완시켜주는 마술을 손에 쥐고 있는 캐릭터다. 공포가 멜로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이 캐릭터 속에 들어있다.

조구는 여리의 공포스런 환경 속으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멜로를 한다. 그녀의 귀신 나오는 집에서 조구가 여리와 춤을 추고, 키스를 하는 장면, 그리고 점점 여리가 마음을 열고 조구와의 사랑을 이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하나의 마술처럼 여겨진다. 공포를 멜로로 바꾸는 마술.

어쩌면 이것은 우리네 사랑에 대한 하나의 우화인지도 모른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우리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낯선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갖고 있다. 바로 이 두 두려움을 넘어서게 되는 것은 두려움을 사랑으로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두려우며, 그 감정을 통해 타인도 똑같이 외롭고 두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공감'의 힘이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꾼다. 공포를 멜로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오싹한 연애'는 바로 그 흥미로운 지점을 마술처럼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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