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이 하면 다르다, 토토가 특집이 재조명한 것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이하 토토가)’ 특집은 과거 90년대 가수들을 재조명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건 SES의 슈다. 사실 과거 SES 시절에 슈는 상대적으로 유진이나 바다의 존재감에 가려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무한도전> 토토가에서 바다보다 더 주목된 이는 슈였다. 그녀가 가수로서의 여전한 노래실력과 춤을 선보인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세 아이의 엄마로서의 를 보여줬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슈에 대한 반응이 폭발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이것은 <무한도전>만이 갖고 있는 과정에 주목하는 특징이 슈라는 인물의 재조명에 가장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은 결과 그 자체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프로그램이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모토는 물론 지금은 이미 최고가 된 그들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열심히 하는 그 진정성이 더 중요하고, 어쩌면 실패하더라도 그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더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이 된다.

 

그러니 여전히 전성기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여전히 폭발적인 가창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바다보다 이제는 세 아이의 평범한 엄마가 된 슈의 변화가 더 대중들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녀의 는 그래서 과거 아이돌이 보여줬던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평범한 아줌마들이 가끔 일상을 벗어났을 때 보여주는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평범한 시청자들로서는 공감대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90년대 젊은 시절을 살았던 시청자라면 그 때 팬으로서 있었다 하더라도 누구나 청춘의 찬란함을 떠올릴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나이 들어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되어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그런 변화를 똑같이 보여주는 슈의 모습에서 얼마나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슈는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무대 위에 올라 한 때의 즐거운 시간여행을 체험한 후 내려와 전하는 감흥은 아마도 이 토토가를 찾은 관객들이 콘서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시즌2’는 언제 할 거냐는 얘기가 나오는 건 그래서 당연하게 다가온다. 그 모습에 급기야 바다가 눈물을 터트리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얼마나 시간을 멈춰 무대 위에서만큼은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을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무화시켜버리는(사실 토토가는 노래를 잘하고 무대를 잘 꾸미는 것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무대를 경험한 그녀에게는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무한도전> 토토가는 말 그대로 이 프로그램에도 대박을 만들었다.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이 토토가의 형식이 이제 <무한도전>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달려온 <무한도전>은 이제 그 시간의 변화를 오롯이 담아내는 프로그램이 되기도 했다. 과거 대한민국 평균 이하였던 구성원들이 이제 최고의 위치에 올라 저마다 가정을 꾸린 가장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은 <무한도전>의 팬들과 마찬가지의 변화일 것이다.

 

<무한도전>은 그 변화를 자연스럽다고 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미 나이든 결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줌으로서 거기서 의미를 발견해주기 때문이다. SES 슈나 터보의 김정남이 새롭게 조명되는 건 그래서다. <무한도전>은 이제 그 존재 자체가 시간의 변화를 담아내는 프로그램이 되고 있다. 한 시대와 세대의 감성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무한도전>, 결과는 실패했지만 과정은 성공했다

 

찾아와 주신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요. 미혼모들의 전화가 많이 왔어요.” “결과보다는 과정이 너무 훌륭했다 생각하고요.” “열심히 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죠.”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 크고 작음이 없고 고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저희에게 마음으로 이렇게 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우리 시각장애아동들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줬다는 것 그리고 그런 관심 갖게 해줬다는 게 얼마나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셨는지 몰라요.” “1등을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했다는 게 중요하죠.”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무한도전> 스피드 레이서 특집에서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KSF)에 나갔지만 단 한 사람도 완주를 못한 출연자들을 오히려 격려한 건 그들이 도와주려 했던 후원단체들이었다. 스폰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폰서를 해주기 위해 대회에 참가했던 <무한도전> 멤버들은 후원단체를 찾아 일제히 죄송하다며 완주를 못한 것에 대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무한도전> 멤버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것은 비록 도전에 실패했지만 이들 후원단체들이 그 마음 씀씀이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5개월 동안의 질주. 하지만 그 질주는 그저 스피드를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자동차에 붙여 놓은 광고 스티커들처럼 후원단체들의 꿈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모두가 완주를 못한 결과에 결국 터져 나온 눈물에는 아쉬움과 함께 미안함, 고마움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하는 모습과 약속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무한도전>의 실패가 더 이상 실패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사실 성공과 실패가 뭐 그리 중요할까. 다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달리려고 했던 그 마음들이 소중한 것이고, 그 마음의 이면에 놓여진 책임감과 따뜻함이 더 중요한 것이다. 결과는 실패했지만 과정은 성공했다.

 

실패한 성공이 환기시키는 것들은 실로 크다. 성공한 후 과정의 마음을 다 잊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리더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들보다는 실패한 자의 변함없는 마음이 더 뭉클하게 다가오는 현실이다. 특히 정치인들이라면 이 <무한도전>이 보여준 실패한 성공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만일 끝까지 마음을 다해 그 진심을 보여준다면 비록 실패했다고 해도 충분히 격려 받을 수 있다는 것. 후원단체가 사과하러 온 <무한도전> 멤버들을 격려해준 것처럼.

 

흔히 지금을 승자가 모든 걸 가지는 승자 독식 사회라고들 말한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넘쳐나는 게 성공담이지만 우리 사회에 더더욱 필요한 건 어쩌면 성공적인 실패담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성공만이 아니라 어떻게 아름다운 실패를 했는가 하는 이야기에 대한 가치부여는 그래서 이 시대에는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완주를 못한 아쉬움 앞에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유재석과, 애써 웃으려하다 그를 보고는 눈물을 터트린 노홍철, 그리고 어떻게든 완주를 하려고 했던 하하나 정준하 모두 그런 면에서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다. 또 그들과 함께 대회를 준비했던 모든 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나눔의 집을 찾은 유재석에게 할머니가 전하는 말은 그래서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일 것이다. “우리가 미안해요. 고생했죠? 건강한 모습 보고 기뻤어요.”

 

<세결여>의 선택, 공감 받지 못하는 이유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에서 왜 태원(송창의)은 모든 짐을 지고 가게 되었을까. 자신의 딸에게 폭력까지 휘두른 계모 채린(손여은)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던 태원이 갑자기 돌변한 것은 엄청난 반전이었다. 채린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연민을 느낀 태원이 마음을 바꾸게 되는 것.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태원이 채린에게 이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부친의 폭력으로부터도 지켜주겠다고 하자 채린은 아이처럼 태원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개과천선한 채린은 슬기(김지영)와도 가까워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태원네 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도 순식간에 풀어버렸다. 또한 태원은 전처인 은수(이지아)를 만나 자신이 이혼하지 않고 가정을 지켜내겠다는 이야기로 둘 사이를 마무리 지었다.

 

태원의 용서라는 선택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김수현 작가가 생각하는 결혼관을 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남과 남으로 만나 한 가족을 꾸려나가는 결혼이라는 일에서 누군가의 희생과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 고치기 위해 파국으로 상황을 몰고 가기보다는 한 때의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주는 자세가 보다 성숙한 선택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청자들은 이 태원의 용서라는 선택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까. 그것은 이 선택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뤄지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답지 않게 그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딘지 우유부단하고 미성숙하게 보였던 태원이 드라마 막바지에 이르러 거의 성인같은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결국 채린이라는 막장 계모라는 카드와 성인으로 돌변한 태원의 선택은 이 드라마가 가진 완성도의 흠결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드라마 중반에 채린을 다루던 이 드라마의 방식을 떠올려 보라. 거의 미저리에 가까운 막장 캐릭터로 채린은 일방적으로 몰아세워졌다. 친엄마의 육성동화를 듣는다고 녹음기를 발로 밟아 부숴버리는 장면이나 심지어 아이를 때리고도 그깟 한 대 때린 걸 갖고...” 운운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극성을 한껏 높여놓은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채린이란 캐릭터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한 이유나 근거는 애초에는 보여주지 않았다. ? 그것이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작 2회 분량을 통해 갑자기 채린의 부친이 저질러온 상습적인 폭행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때문에 태원이 마음을 바꿔먹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이로써 채린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뀐다. 그리고 태원은 갑자기 피해자에서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 또한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물론 손보살(강부자)의 말처럼 부처님 말씀 같은 결론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갑자기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하다가 성인군자의 말씀처럼 끝을 맺는 건 너무 허무한 느낌마저 준다.

 

태원은 이로써 모든 걸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희생하는 인물이 된다. 물론 인물의 성장은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인물의 변신은 그 선택의 이유를 의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모든 갈등과 대립이 태원의 희생 하나로 급히 봉합되는 결말은 그래서 그 선택의 의미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공감 받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다 이런 결과가 만들어진 걸까. 의도는 이해되지만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자극보다는 상상력, 결과보다는 과정

 

<1박2일>은 언제부터 복불복만 남게 되었을까. 본래 <1박2일>은 게임 버라이어티가 아니다. <무한도전>이 시도했던 여행 특집의 한 지류로서 ‘여행’이라는 소재를 본격적으로 다뤄왔던 여행 버라이어티가 <1박2일> 아니던가. 그런데 최근 <1박2일>을 보면 여행지에 대한 기억보다는 거기서 벌인 복불복 게임만 떠오른다. 어떤 벌칙을 받았고 누가 밥을 굶었으며 누가 야외취침을 했는가만이 반복되는 느낌이다.

 

'1박2일(사진출처:KBS)'

물론 복불복 게임이 자극적인 재미를 주는 건 사실이다. 이 재미의 핵심은 단순한 게임과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에서 생긴다. 즉 가위바위보나 돌림판 같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게임을 하지만 그 결과로 누구는 따뜻한 방안에서 자고 누구는 혹한에 야외취침을 하는 데서 나오는 자극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간단하게 상황을 긴장으로 만들고 그 결과로 인해 생고생을 하는 모습이 우습기 때문에 복불복 같은 게임은 <1박2일>만이 아니라 <무한도전> 같은 여타의 예능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복불복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했을 때는 프로그램을 보는 맛을 높여주지만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면 프로그램의 색깔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미료와 같다. 라면스프는 어떤 음식도 되살려내는 ‘마법의 가루’ 역할을 해주지만 너무 많이 쓰면 음식은 기억나지 않고 라면 스프 맛만 기억나게 하는 법이다. 결국 복불복의 과잉 사용은 <1박2일> 본연의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1박2일> 복불복 대축제 특집은 바로 그 복불복 게임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돌림판을 돌려 거기 나와 있는 대로 복불복을 행하는 이 단순한 놀이는 그 자체로는 웃음을 주었을 지 몰라도 <1박2일> 본연의 유쾌함이나 즐거움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돌림판이 지정하는 대로 여름에 파카를 입기도 하고,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며, 낙오자가 된 이는 미스코리아 분장을 하고 연예인에게 등목을 받는 미션을 수행하지만 이것이 여행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연예인들이 하는 이벤트나 행사처럼 보일 뿐이다.

 

서울이 공간으로 지정되었지만 이 특집을 통해 서울만의 여행지로서의 맛이 얼마나 느껴졌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한계를 실감할 수 있다. 과거 <1박2일>에서 경복궁을 재발견하고, 북촌의 한옥마을과 개구리가 뛰어노는 개울을 찾아 나섰던 여행들과 비교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때 <1박2일> 멤버들이 어떤 복불복을 했던가는 기억하지 못해도 어떤 곳을 찾아가고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무계획 여행이라는 것이 하나의 아이템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장소와 상관없이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설렘이나 낯선 곳에서 느끼는 한가로움, 또 새로운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 주는 왁자지껄함 같은 여행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파고들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저 복불복의 연속은 당장의 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만 가득 친 결과만을 만들 뿐이다. 처음 이 형식을 만들었던 이명한 PD는 복불복은 재미와 자극을 위한 부수적인 것일 뿐 핵심은 아니라고 밝힌 적이 있다. 결국 <1박2일>의 핵심은 여행에 있다는 얘기다.

 

또한 복불복 게임의 남용이 씁쓸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이런 형식의 놀이가 지나친 결과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외침은 물론 예능적인 재미를 위한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도 읽힌다. 놀이가 과정의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결과만 탐닉할 때, 그것은 자칫 문화의 퇴행을 만들어낸다. 한 때 어떻게 놀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남자들이 폭탄주 문화에 빠져 들었듯이 취하면 다 똑같지 어떻게 취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결과주의에 복불복 게임이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게임을 고민하고 그 게임에 새로운 스토리를 입혀 그 과정을 즐기는 <런닝맨> 같은 게임 버라이어티가 가진 가치가 새삼스러워진다. 108개의 CCTV를 활용해 데스노트에 적힌 순서대로 런닝맨들의 이름표를 떼려는 사신 정우성과, 그 108개의 CCTV를 다 꺼버리고 그와 맞서려는 런닝맨의 대결은 그 결과만 보면 허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과정들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그만큼 가치가 있다. 게다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지하게 몰입하는 정우성의 모습은 놀이에 빠져드는 것 자체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환기시킨다.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놀이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논다’는 것을 ‘게으르다’거나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는 ‘불량’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과 동의어로 인식할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막상 놀라고 하면 어떻게 놀아야할 지 갈피를 못잡는 것일 게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삶은 놀이의 과정일 수 있다. 그 놀이가 결과만을 추구할 때 우리네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삶에 복불복식의 놀이가 주는 잠깐의 즐거움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극이 본질을 뒤집을 때 삶은 무미건조해져 버린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만 집착하는 복불복은 그 적절한 선을 유지하지 못할 때 독이 되기 십상이다. <1박2일>의 그 재미있던 복불복이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반면 <런닝맨>의 놀이는 낯설고 때론 유아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가진 놀이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여겨진다. <1박2일>의 복불복과 <런닝맨>의 게임 속에는 이처럼 우리가 놀이를 바라보는 너무나 다른 시선의 차이가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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