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쓸신잡2’가 보여준 역사의 묘미

사실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tvN <알쓸신잡2>가 천안에서 펼친 수다 속에 등장하는 박문수의 이야기는 어쩐지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단지 수업을 통해 배우는 역사가 아닌 수다로 들려주는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역사 이야기에서도 현재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이 덧붙여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사라는 직종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감시’라는 관점에서 장동선 박사가 질문을 하자 유시민이 ‘보고하는 자’가 ‘보고받는 자’를 콘트롤하면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사례를 소비에트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고, 유현준 교수가 ‘권력’의 기제가 ‘나를 숨기고 다른 사람을 훔쳐볼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에서 나온다는 이야기와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가 그만큼 멀리 있는 것까지 들여다본다는 권력을 얘기하는 대목이 그렇다. 

어사 박문수에 관한 일화들을 들은 적은 있지만 어사라는 직종이 가진 권력의 구조를 풀어서 이야기하고, 거기서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풀어냈던 파놉티콘의 감시구조를 끄집어내 암행어사라는 직종이 가진 효과가 일종의 파놉티콘 감시구조와 같다는 걸 유추해낸다. 실제로는 어사들이 많이 활동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시체계가 기능했다는 것. 여기서 유시민은 당시 어사들이 몇 백 명씩 있었지만 알려진 인물이 박문수 정도인 이유일 수 있다고 추론했다.

어사 박문수의 이야기에서 권력과 감시의 기제까지 풀어나가는 <알쓸신잡2>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역사란 과거의 기록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면의 이야기들을 들여다봐야 하고 또 그것이 현재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를 생각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아마도 우리는 이 불운한 가족사를 대부분 알고 있지만 <알쓸신잡2>는 여기에 부모 자식 간의 교육적인 관점과 가족이 만들어줄 수 있는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감성적인 이야기를 덧붙인다. 

영괴대를 다녀온 유현준 교수가 그 짠한 마음을 전하면서 꺼내놓은 사도세자의 이야기에서 유시민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훈육했던 방식은 너무 지나쳤다는 걸 지적했다. 하고픈 걸 못하게 하고 과도한 요구를 함으로써 자식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했다는 것. 결국 파행을 저지르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그 상황을 통해 유시민은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지금의 부모 자식 간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당대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였던 홍대용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사실 세종대의 장영실 같은 놀라운 과학자의 성취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후대에 거의 사라져버린 사실에서 유시민은 조선이 “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한탄했다. 그것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천대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장영실의 사후에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고, 마지막 기록으로 남았던 가마가 망가져 장 100대를 맞았다는 그 기록의 미스터리에서도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만큼 과학자를 천시하는 분위기였다는 것. 이 이야기에서는 실리적인 학문에 대한 천시 같은 시대착오적 생각들이 한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다는 현재적인 울림이 느껴졌다.

<알쓸신잡2>를 보다 보면 과연 우리의 역사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저 역사의 기록만을 적시하고 그것을 암기해 시험문제를 푸는 것으로서 역사교육을 가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역사 교육이라면 이처럼 사료로 남은 몇 줄의 글귀 속에서도,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도 새로운 현재적 의미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흥미진진한 <알쓸신잡2>의 역사이야기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사진:tvN)

인어의 바다와 대비되는 인간의 바다

 

왜 하필 바다일까. 또 기억, 약속 같은 것들이 떠올리는 것은. 시국이 시국이어서인지 어떤 장면이나 대사들마저 그저 드라마의 한 대목으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물론 드라마 제작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의도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공기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을 보다보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남다르게 다가오는 바다와 기억 그리고 약속 같은 단어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푸른 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를 가져온 것처럼 담령과 인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된 담령과 인어지만 사람은 뭍에서 살아야 하고 인어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는 그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바다는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다.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어린 담령에게는 죽음이지만, 그런 담령에게 다가와 그를 구해준 인어에게는 생명이다. 인어를 사랑하게 된 담령이 억지로 치른 혼사 첫날 밤 말을 달려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 건 그래서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는 인어가 그를 구해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인어는 그를 구해주었다.

 

우리에게 바다란 그 의미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이전만 하더라도 낭만적인 어떤 곳이고, 생명과 풍요의 의미였던 바다가 아닌가. 하지만 참사 이후 바다는 잿빛의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구해줄 것이라 믿었던 그 신뢰들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통곡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된 건 사랑이니 믿음이니 하는 순수한 언어들이 그걸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인어 같은 존재가 실제로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럼에도 어우야담 같은 전설로나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고 그걸 잊지 않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까닭은 인어이야기가 주는 그 순수나 사랑, 믿음 같은 좋은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함이었을 게다. 그저 포획되는 물질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바다가 그저 착취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을 살려주는 대지모 같은 곳으로 믿으려는 그 마음.

 

<푸른 바다의 전설>은 여기에 기억을 지우는 장치 하나를 더했다. 인어가 사람에게 키스를 하면 그 사람의 기억에서 인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이야기를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망각하는 존재다. 그래서 아픈 기억들은 지워내려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들이 죽음의 선을 넘어서 아픈 기억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 망각의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인어는 잊지 않고 기억한다. 아픈 기억들까지 모두 다. 그리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먼 바다를 헤엄쳐온다. 사람은 점점 아픈 기억이 지워져 가지만 바다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왜 최첨단의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인어 같은 동화적 존재를 얘기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어라는 순수의 존재를 세워둠으로써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돈을 뜯어내는 여고생들을 보며 그걸 똑같이 따라하는 인어가 오히려 어린 꼬마 아이에게 훈계를 듣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인어란 존재가 우리 사회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인어의 바다와 인간의 바다가 다르다. 인어의 바다는 풍요롭고 모든 걸 품어주는 곳이지만 인간의 바다는 탐욕으로 피폐해진 곳이다. 인어의 바다는 기억하지만 인간의 바다는 망각한다. 인어의 바다는 약속을 지키지만 인간의 바다는 약속을 저버린다. 이런 대비효과는 아마도 <푸른 바다의 전설>이 인어란 존재를 굳이 도시 한 복판에 세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준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건 분명 과잉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네 대중들의 기억의 트라우마 속에서 바다만 쳐다봐도 떠오르는 잔상을 지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바다와 기억과 약속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런 남다른 의미들로 다가온다

<로봇소리>, 이성민의 연기 속에 담긴 희생자들의 절절한 판타지

 

영화 <로봇소리>는 우리네 영화사에서는 독특하게도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다. 위성에서 뚝 떨어져 나온 로봇.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고 소리를 내기도 한다. 영화 속 설정으로는 갈수록 인지기능이 높아지고 어떤 인간적인 감정까지도 슬쩍 내보이는 그런 로봇이다.

 


사진출처: 영화 <로봇소리>

하지만 이것은 영화 속 캐릭터로서의 로봇 설정이지 실제 과학적으로 엄밀히 따져보면 허술한 면이 꽤 많은 로봇이다. 기판을 다 드러낸 채 바닷물에 빠져도 고장이 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거의 모든 전화 기록들을 감청하고 저장한다는 설정도 과학적으로 따지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만일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로봇에 현실감을 주려 노력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실제 과학적으로 구현될 법한 개연성을 로봇의 캐릭터에 넣으려 했을 것이다. <터미네이터>처럼 가능하면 감정까지 보여주는 그런 캐릭터. 하지만 <로봇소리>는 애초에 이러한 과학적 개연성을 추구하는 SF 영화를 지향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능력을 가진 로봇이 있다면 하는 가정 하에 한 아버지의 절절한 부성애를 그리려 했다.

 

그러니 과학적인 허술함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살짝 살짝 들어가 있는 유머코드는 이 과학적 허술함을 웃음으로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집중하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 다른 것은 다름 아닌 실종된 딸을 10년 간 찾아다닌 해관(이성민)이라는 아빠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해관과 로봇이 그럴 듯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극의 설정 상 로봇은 갈수록 해관과 마치 친한 동료처럼 가까워지고 교감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토록 찾으려 애쓴 실종된 딸의 모습과 겹쳐지는 단계로까지 가야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로봇은 연기를 할 수가 없다. 그 몫은 오로지 해관을 연기하는 이성민에게 돌아간다.

 

이성민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로봇과의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심도를 만들어가는 그 지점이다. 이성민은 처음에는 그 로봇의 낯설음에 놀랐다가 차츰 어쩌면 이 로봇이 자신의 딸을 찾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로봇과 툭탁대기도 하고, 투덜거리며 핀잔을 주기도 하는 그 자연스러운 이성민의 모습은 그래서 이 어찌 보면 차가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로봇이 점점 따뜻함을 가진 존재로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성민은 이 차갑기만 한 로봇에 소리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마치 10년 전 실종되어 버린 딸에게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을 소리를 통해 풀어내보려 한다. 그가 딸이 사라진 지하철 철로에 내려가 그 차가운 철로를 매만지며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 말해주듯, 해관의 절절한 딸에 대한 마음은 그래서 그가 소리라는 로봇을 마치 딸이나 되는 듯 보호해주고 말을 건네는 장면에 아무런 이물감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정도 없는 무생물인 로봇이 그 함께 있는 연기자의 연기를 통해 하나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 것은.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로봇 소리에게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사실 알고 보면 이성민이라는 든든한 연기자 덕분이다. 그의 연기는 차가운 로봇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성민의 연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사건 사고가 유달리 많은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그 많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이 사라져갔던가. 그 부채의식은 이성민의 절절함 속에서도 또 심지어 로봇이라는 조금은 과한 설정 속에서도 그 판타지를 긍정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저렇게라도 해서라도 희생자들의 아픔과 고통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판타지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테니.

<장영실>에서 떠오르는 헬조선과 탈조선

 

장영실은 별에 미친 조선의 노비 놈이다.” 장영실(송일국)은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소리친다. 그 자조 섞인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가득하다. 조선에서 별을 본다는 것. 아니 조선에서 노비로 태어나 별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그의 사촌인 양반 장희제(이지훈)는 일찍이 이 현실을 장영실에게 뼛속까지 느끼게 해준 바 있다. “노비는 아무 것도 몰라야 한다.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야.” 그것이 별에 미친 조선의 노비 놈의 운명이다.

 


'장영실(사진출처:KBS)'

하늘에는 귀천이 없다. 별에도 귀천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그저 자연의 법칙일 뿐 그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별을 바라보는 이들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때론 그 의미는 과학이 아니라 미신에 가깝다. 형제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김영철)이 일식과 월식을 통한 구식례(일식과 월식을 맞는 예식)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떨쳐내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디 하늘의 움직임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까. 일어나지 않는 일식과 월식을 두 차례나 허망하게 맞이한 왕은 하늘에 사죄를 올린다.

 

조선에서 과학이란 이처럼 순수한 것이 아니다. 하늘의 운행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달이 세성(목성)을 가렸다는 과학적 사실은 임금이 백성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는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세성은 다름 아닌 복과 덕을 책임지는 별로 의미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운관 제조 유택상(임혁)달과 별은 임금과 백성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며 세성을 범한 달이 의미하듯 태종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간언한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고, 과학이라고 해도 중국의 과학이다.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장영실은 아버지 장성휘(김명수)와 관기인 은월(김애란) 사이에서 태어나 관노가 된 노비다. 하루 종일 고단한 노비의 삶을 살면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하늘의 별들이다. 그는 노동 속에서도 해의 변화를 보며 과학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의 평생의 친구인 석구(강성진)는 장영실이 산에 지어놓은 일종의 관측소에서 별을 보여주자 그에게 말한다. “영실아. 고마워. 하늘보고 살게 해줘서.” 땅만 죽어라 파며 살아야 하는 노비 신세에 하늘을 보고 산다는 의미는 그렇게 크다. “죽을 듯이 힘든데 이렇게 하늘보고 살 수 있어서 좋구나.”

 

하늘을 쳐다보는 것에 귀천이 없을진대, 조선은 심지어 그 하늘을 보는 것마저 귀천을 따진다. “있잖아. 난 저 하늘의 별들이 매달려 있는 이치만 알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아. 근데 조선 땅에서 노비로 사는 한 그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목숨 걸고 조선을 떠나야 해. 반드시.” 순수하게 학문의 뜻을 펴는 일은 노비인 장영실에게는 조선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을 떠나고 싶어 한다.

 

<장영실>이라는 사극은 역사 과학 드라마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거기서 솔솔 피어나는 문구는 이 정부가 그토록 주창하는 창의 융합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다. 그래서 <장영실>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하지만 <장영실>은 그 첫 주 방영분을 통해 그가 왜 조선을 떠나고 싶어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처럼 던졌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는 제 아무리 하늘의 이치를 들여다보고 싶어 해도 이뤄지지 않는 세상이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아마도 장영실이라는 청춘에게 딱 어울리는 현실이었을 게다.

 

사극이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다루게 된 것은 그가 다룬 과학과 그가 처한 현실이 현재에 던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게다. 장영실은 그 신분과 태생이라는 현실을 깨치고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지금에도 통용될까. 과연 꿈을 향해 끝없이 정진하는 것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장영실이 그 낮은 신분에도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던 건 그의 가치를 보고 인정해준 세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세종 같은 인물이 있을까. 나아가 장영실 같은 존재의 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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