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곡', 역시 임성한 작가.. 결국 드러낸 자극적 본색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나. TV조선 토일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임성한 작가 특유의 '갑자기 사망'이 4회 만에 등장했다. 극장에서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도움을 요청하는 신기림(노주현)을 아내 김동미(김보연)가 모른 척 내버려둬 사망하게 만드는 장면이 엔딩에 등장하면서다.

 

그 한 장면은 평이한 가족드라마처럼 보였던 전개를 순식간에 호러물로 바꿔 놨다. 너무나 살뜰하게 신기림을 챙기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김동미에게 다른 속내가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죽어가는 남편을 방치한 채, 웃는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김동미의 광기어린 모습은 소름 돋는 끔찍함을 드러냈다.

 

이어진 예고편에서는 신기림의 장례식과 더불어 김동미에게 신유신(이태곤)이 손을 잡으며 "이제 나 의지하고 살아요. 아버지만큼은 못하겠지만."하고 말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그건 새엄마에 대해 아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시청자들은 그들이 혹시 불륜은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하게 만들었다.

 

신기림이 사망하자, 개 이름을 동미라 지을 정도로 김동미에게 관심을 보였던 판문호(김응수)가 슬슬 그에게 접근하고, 판사현(성훈)은 불륜을 저지른 상대가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부모를 설득시키려 한다. 아이를 원하는 자신과 부모들의 욕망이 조금씩 꺼내지면서, 사실상 피해자인 조강지처 부혜령(이가령)을 오히려 밀어내려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어느 날 갑자기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던 박해륜(전노민)이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며 불륜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도 등장했다. 그런데 박해륜이라는 인물도 어딘가 심상찮다. 조웅(윤서현) 한의사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가 쌍둥이였고 형은 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해서다. 시청자들은 박해륜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양한 추측들을 내놓고 있다. 그의 실체가 이시은(전수경)의 남편이 아니라 쌍둥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고, 심지어 그의 불륜상대가 동성이며 그 대상이 서반(문성호)일 거라는 파격적인 예측까지 등장했다.

 

물론 이건 추측일 뿐, 아직 전개된 이야기의 사실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예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건, 김동미의 남편 사망 방조 장면이 전조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가 결코 단순한 불륜의 클리셰 정도의 자극에 머무는 드라마가 아닐 거라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평범한 인물처럼 보이던 김동미가 갑자기 발톱을 드러내면서 생겨난 파장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판사현과 신유신 그리고 박해륜이 누군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드러내면서도, 그 상대가 누구인가를 숨기고 있다. 항상 그 불륜 상대의 집에서 나오는 남자들의 모습만을 비춰주고 있는 것. 결국 문 저편에 누가 서 있는가 하는 점과, 그 인물이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걸 드라마는 예고하고 있다.

 

임성한 작가가 피비라는 필명으로 돌아왔다고는 해도, 결코 평범한 드라마로서의 귀환을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런 평이한 전개는 시청자들이 임성한 작가하면 생각하는 어떤 파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일부러 깔아놓은 것이란 게 드러나고 있다. 과연 임성한 작가는 어디까지의 자극을 보여줄까. 벌써부터 19금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시청자들의 우려 섞인 추측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사진:TV조선)

김래원, 절제와 광기의 절묘한 조화

 

2006년 개봉했던 <해바라기>라는 영화 속에서 김래원의 가능성이 발견되었다면, 최근 드라마 <펀치>와 영화 <강남1970>에서의 그는 그 가능성을 최대치로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 그에게서 발견됐던 것은 광기감성을 공유한 배우였다. 그는 한없이 순진무구해 심지어는 바보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가 어느 순간 악마 같은 광기를 폭발해내는 얼굴로 돌변할 때 그 에너지를 드러낼 줄 아는 배우였다.

 

'펀치(사진출처:SBS)'

<펀치>에서의 김래원은 그 다소 단조롭던 두 가지 얼굴이 여러 개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태준(조재현)을 검찰총장으로 만들어내는 박정환은 욕망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태준의 충실한 개가 되어 검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는 냉혈한이었다. 그랬던 그가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고 그 와중에 이태준의 버림을 받게 되면서 문득 가족으로 돌아온다.

 

갑자기 찾아오는 엄청난 병의 고통을 견뎌내고, 그것보다 더 지독한 이태준과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 같은 인물들의 공격을 버텨내면서 그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 그는 병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며 가족 앞에 서는 인물이지만 그 얼굴은 좀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통증을 숨기려 자기만의 방안으로 들어가 입술을 질끈 물고, 파상 공격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숨긴다. 그리고 가족 앞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듯한 얼굴을 보여준다.

 

똑같은 무표정의 얼굴이지만 그 안에는 세 가지 다른 감정들이 요동친다. 병의 고통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을 숨기고, 자신을 희생양 삼아 권좌에 오르려는 한때는 같은 꿈을 꾸던 인물들 앞에서는 그 분노의 감정을 숨긴다. 그리고 가족 앞에서는 자신의 이 고통들을 숨기려 애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살고 싶다며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그래서 김래원 특유의 감정 폭발을 만들어낸다. 멀쩡한 듯 보이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고 눈물로 범벅이 될 때 우리는 그간 그의 무표정 뒤에 있었을 고통들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김래원이라는 배우의 특별함이다. 그는 절제의 미학을 안다. 한껏 감정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번 눌러 줌으로써 다음 장면에서 더 강한 긴장감이 유발되고 클라이맥스에서의 강렬함이 커진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얼굴은 그다지 특징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바로 그런 얼굴이기 때문에 무표정에 눌려진 감정들은 더 폭발력을 갖는다.

 

유하 감독의 신작 <강남1970>에서의 김래원은 욕망과 우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용기라는 인물을 연기한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종대(이민호)와 함께 형제처럼 추운 밤을 살 부비며 버텨왔던 그는 차츰 강남이라는 욕망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은 종대와 맞서게 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에서 김래원의 무표정은 조직 내에서의 암투를 통해 빛을 발한다.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긴 채 하나하나 조직을 잠식해 가면서 또한 형제 같던 종대와의 엇나가는 관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김래원이라는 배우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그려진다. 그의 욕망은 그래서 비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강남1970>이 그려내는 권력자들의 게임 속에 이용되던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광기의 액션과 욕망, 감성을 동시에 드러내주는 김래원만큼 맞춤인 배우가 있을까.

 

<펀치><강남1970> 같은 작품이 모두 권력과 희생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흥미로운 일이다. 그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그 앞에서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박정환이나 종대는 김래원이라는 배우를 만나 그 무표정 속에 더 아픈 감정들을 담아낸다. 그것은 어쩌면 무표정한 듯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네 보통 서민들이 갖는 욕망에 대한 양가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그 무표정에 더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힘. 이것이 김래원의 특별함이 아닐까.

 

<제보자>, 왜 모두가 아는 얘기를 영화로 만들었나

 

사실 <제보자>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줄기세포 연구로 난치병 질환을 가진 이들의 희망이 되어버린 이장환 박사(이경영),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조작되었음을 제보하는 그와 함께 줄기세포 연구를 해온 심민호 팀장(유연석), 그리고 그 제보를 받아 진실을 파헤치는 <PD추적>의 윤민철 PD(박해일).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이름만 바꿔 놓았을 뿐,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진출처: 영화 <제보자>

영화는 일찌감치 윤민철 PD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실이 우선이냐 국익이 우선이냐. 그러자 돌아오는 답변이 기막히다. “진실이 국익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말 한 마디로 윤민철 PD는 온 나라가 열광하는 이장환 박사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계는 물론이고 언론까지 쥐락펴락하고 무엇보다 마치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처럼 혹세무민하는 이장환 박사에 의해 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려는 이들은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로 치부된다.

 

이 영화는 너무나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미리 이야기를 설명해도 전혀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극화된 부분들이 있지만 결국 이장환 박사의 실체가 드러나고 진실이 승리하는 그 결과는 다르지 않다. 그러니 궁금해지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왜 굳이 다시 영화로 만들었을까.

 

<제보자>가 보여주려는 건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진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적하는 이들의 심지어 숭고하기까지 한 그 모습이다. 마지막에 결국 방송이 나가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윤민철 PD의 상사인 이성호 팀장(박원상)우리 구속되자고까지 말한다. 인터넷에 방송을 내버리고 구속됨으로써 세상에 진실이라도 알리자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숭고한 행위로 그려지지만 거꾸로 보면 진실 하나를 밝히는 것도 구속까지 감수해야 하는 이 나라에 대한 개탄이기도 하다.

 

영화는 애국주의와 경제지상주의가 만났을 때 과학마저 사이비 종교처럼 광신의 늪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거짓 희망이 불꽃처럼 일어나고 그것이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 앞에서 광기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는 건 답답하고 씁쓸한 일이다. 관객들은 그 광기의 과정들을 보며 답답해한다. 그러면서 사리사욕을 위해 인간의 생명을 갖고 장난질을 한 이장환 박사의 실체가 드러나길 간절히 기대한다.

 

이 개탄스런 현실과 간절한 기대. 이것을 <제보자>는 진실을 밝히는 이들의 편에서 서서 그려내며 관객들에게도 똑같은 감정이입의 경험을 제공한다. 제보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그래서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그 무서운 세상에서 진실 하나만을 밝혀내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똑같이 경험해보는 것. 아마로 이러한 간접경험은 누군가에게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올 섣부른 집단적 광기를 최소한 의심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제보자>는 그래도 진실의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진실보다는 국익운운하는 논리 앞에 쉽게 호도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이것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 발걸음에 대단히 씁쓸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헛된 망상에도 쉽게 흔들릴 만큼 힘들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용기를 내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것이다. <제보자>는 그래서 지금도 어느 구석엔가 현실 때문에 진실을 포기한 채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이 땅의 무수한 잠재적 제보자들에 대한 위로 같다. 어떤 상황에도 진실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이 험악한 세상의 가녀린 희망이 있다는 것.

 

한석규의 왕 연기, 어떤 점이 달랐을까

 

확실히 믿고 보는 배우 한석규는 달랐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욕하는 모습조차 인간미로 소화해낸 한석규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사극을 통해 봐왔던 왕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글을 창제하고 배포한 세종의 그 격의 없는 왕의 모습에서는 저잣거리 백성들을 향하는 그 낮은 자세가 느껴졌다. 교과서 속에 박제되어 있던 세종은 그렇게 한석규를 통해 재해석됐고 비로소 살아있는 인물로 되살아났다.

 

'비밀의 문(사진출처:SBS)'

그리고 돌아온 <비밀의 문>은 한석규의 영조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왕의 면면이 평이할 리가 없다. 따라서 한석규가 해석해낸 영조는 자상한 면과 광기어린 면이 뒤섞여 있는 왕이다. 그 광기를 <비밀의 문>은 맹의라는 비밀문서를 통해 보여준다. 노론과의 결탁을 뜻하는 그 맹의에 수결함으로써 왕이 됐다는 그 사실은 영조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걸림돌이자 두려움이다.

 

<비밀의 문>은 일반적인 사극의 시작과는 사뭇 다르게 그 문을 열었다. 짧게 맹의에 수결하는 영조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맹의를 없애기 위해 심지어 승정원에 불을 지르는 영조를 통해 맹의가 가진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또 그것을 덮으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바로 이 맹의의 존재감은 이 사극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바로 그 힘을 드라마 초반 시작 단 몇 분만에 실어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한석규의 연기다. 그는 광기와 두려움이 교차되는 모습을 통해 맹의라는 비밀문서가 가진 무게를 만들어냈다.

 

사실 <비밀의 문><뿌리 깊은 나무>의 장르적 특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을 다뤘다는 점이 그렇고, 그 안에 미스테리한 추리극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한석규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것과는 다르게 왕을 재해석해낸다는 그 지점이다. 실제로 <비밀의 문>은 아직까지 <뿌리 깊은 나무> 만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팽팽한 긴장감과 보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건 바로 이 한석규가 해석하는 영조 덕분이다.

 

<비밀의 문>이라는 사극이 가진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 500년의 가장 불행한 가족사에서 나온다. 뒤주에 가둬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왕, 영조. 제 아무리 광기를 보였다고는 하나 아비가 자식을 죽인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다. 역사는 자식을 죽인 왕의 입장에서 쓰여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식을 죽인 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식의 광기를 좀 더 극대화해야 했을 것이다.

 

<비밀의 문>은 이 부분을 재해석한다. 역사의 내용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것. 맹의는 그래서 영조가 이런 극단적인 일을 선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여기서 흥미로워지는 것은 사도세자의 광기가 아니라 영조의 광기가 이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 왜곡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 <비밀의 문>이 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 현재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면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영조는 어떻게 변화해갈까.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이 드라마에서 이 모든 궁금증을 쥐고 있는 게 바로 영조라는 인물이다. 한석규의 입체적인 왕에 대한 해석은 그 영조를 깨워내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비밀의 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변화무쌍한 영조를 재창조하고 있는 한석규의 연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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