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스릴러와 복수극이 가미된 ‘돼지의 왕’, 훨씬 쫄깃해졌다

돼지의 왕

2011년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끔찍한 학교 폭력을 통해 들여다본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피지배자 등의 관계를 직설적으로 풀어낸 애니메이션. 물론 특유의 인간의 어두운 내면과 부조리한 사회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연상호 감독의 세계는 이미 <지옥(2002)> 같은 단편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엿보였던 것이지만, 사실상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린 건 <돼지의 왕>이었다. 

 

그 작품이 드라마로 리메이크 된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건, 애니메이션이 가진 압축적인 서사를 12부작 드라마로 늘려놓았을 때 어딘가 느슨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점과, 특유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자칫 장르물의 틀에 희석되는 건 아닌가 하는 점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첫 시작이 중요했다. 드라마 <돼지의 왕>은 과연 그 첫 시작을 어떻게 열었을까. 

 

먼저 눈에 띠는 건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달리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황경민(김동욱)은 디어넷이라는 회사 대표로 나오지만, 드라마에서는 남기철이라는 가명을 쓰는 신석운수 대표로 등장한다. 신석운수는 택시 70대를 보유한 회사로 그 회사명은 그가 다녔던 신석중학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또 원작에서 정종석(김성규)은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작가로 나오지만 드라마에서 강력계 형사다. 

 

이렇게 직업을 달리 설정한 부분에서 드라마가 원작 애니메이션과 어떤 점을 달리하고 있는가가 드러난다. 그것은 범죄스릴러와 복수극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지독한 학교폭력을 겪었던 황경민은 아내를 만난 후 트라우마와 우울증을 상당 부분 호전시켰지만, 어느 날 본가의 창고에서 발견된 중학교 단체사진을 보게 되면서 다시 트라우마가 깨어난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그 감정은 결국 황경민을 파탄으로 몰고 간다. 

 

회사마저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되고, 힘겨운 가정생활을 버티다 못한 아내가 황경민과 동반자살을 시도하다 죽게 되면서, 황경민은 자신을 그런 파탄 지경으로 만들어낸 자들과 세상에 대해 칼을 꺼내든다. 중학교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자로 카센타를 운영하고 있는 안정희(최광제)에게 택시 정비 아웃소싱을 주겠다 접근한 황경민은 아내가 사망한 후 안정희를 찾아와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드러낸 후 처절한 복수를 안긴다.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던 것처럼, 그를 죽여 성기를 잘라낸 후 벽에 전시하듯 매달아 놓은 것. 

 

원작에서는 이러한 복수극 서사가 들어 있지 않고 대신 양극화되고 계급화된 사회의 서열구조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러한 억눌린 분노 감정들을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적 틀을 가져와 복수극 서사로 폭발시키는 장치를 더했다. 물론 범죄스릴러이기 때문에 이 살인 복수극을 펼치는 황경민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여기서 정종석이 왜 강력계 형사라는 직업으로 달리 설정했는가가 설명된다. 

 

정종석은 살인 현장에 황경민이 자신을 향해 남긴 메시지들을 보고는 놀라면서도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지만, 안정희의 시신 옆에 쓰여진 메시지에 충격을 받는다. ‘종석아, 우리 중학교 때 기억 나? 너도 우리랑 함께 해야지.’ 황경민과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지만, 지금은 형사가 되어 그 때 일을 기억에서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던 정종석이다. 그런 정종석에게 황경민은 앞으로 살인을 통해 메시지를 던지며 그 때의 기억을 환기시키려 한다. 

 

범죄스릴러와 복수극이 강화되면서, 원작에는 없던 팽팽한 대결구도가 만들어졌다. 정종석은 황경민이 벌일 살인사건들을 추적하면서 점점 과거 그와 있었던 기억들을 떠올릴 것이고 그것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과정이 될 것이다. 정종석 옆에 돼지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괴 인물도 마찬가지다. 미스테리한 이 괴 인물은 과거에 이들이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는가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한다. 또한 원작에는 없던 강진아(채정안)라는 형사는 여성 캐릭터를 보강하면서 범죄스릴러의 구도를 명확하게 해주는 인물로 자리해있다.

 

사실 호평 가득한 원작을 리메이크한다는 건 그 자체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너무 많이 재해석하면 원작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 마련이고, 그렇다고 원작에만 충실하면 굳이 리메이크를 봐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돼지의 왕>의 리메이크는 원작의 색깔을 상당 부분 유지해내면서도 범죄스릴러와 복수극을 강화함으로써 드라마만의 몰입요소들을 잘 풀어냈다고 보인다. 원작을 본 시청자들도 그 변주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사진:tvN)

tvN 월화드라마 ‘너는 나의 봄’, 멜로와 스릴러의 교차점

너는 나의 봄

tvN <너는 나의 봄>의 포스터에는 주영도(김동욱)와 강다정(서현진)이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들의 배경에는 초록빛 풀들이 가득 채워져 있고 눈 감은 두 사람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다. 누가 봐도 봄날의 설레는 멜로의 한 광경을 기대하게 만드는 포스터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그런 달달한 멜로를 풀어내지 않는다. 대신 차 위로 떨어져 죽은 채준(윤박)으로 인해 흘러내리는 붉은 피와 강다정의 일곱 살 때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력이 드리워진 불행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동화 <인어공주>를 공주가 “잘 알지는 못하는 놈한테 미쳐서 형제 부모 다 버리고 딴 세상 가서 몸 버리고 마음 버리고 고생만 드럽게 하다가 인생 종쳤다”는 얘기라고 말해주는 엄마 문미란(오현경)과 그 끔찍한 곳에서 동생과 함께 탈출해 나오던 기억이다. 당시 문미란은 남편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곤 아이들과 도망친다. 

 

그리고 그 일곱 살의 기억에서 도망쳤다 생각한 서른넷의 강다정은 다시 그 기억 앞에 서게 된다.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의문의 남자 채준이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하고, 사실은 본명이 최정민이었으며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만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최정민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 이안 체이스(윤박)가 등장한다. 혼란스런 사건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강다정과 주영도는 점점 가까워진다. 강다정이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겪는 정신적 고통을 주영도는 정신과 의사로서 또 한 남성으로서 들어주고 바라봐주고 기대게 해준다. <너는 나의 봄>은 그래서 장르적으로 멜러와 스릴러가 교차된다. 강다정을 중심으로 이안 체이스와 연결되어 있는 사건들은 스릴러지만, 주영도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휴먼 멜로다. 

 

물론 <너는 나의 봄>의 장르적 결합은 자연스럽지 않고 특히 스릴러는 너무 충격요법으로만 활용되는 한계를 보인다. 그래서 이종 장르의 결합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생겨나는 호불호가 만들어진다. 즉 멜로에 집중하는 이들은 스릴러가 영 생뚱맞게 느껴지고, 스릴러가 궁금한 이들은 멜로로 채워지는 부분들이 너무 극을 늘어뜨린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점은 시청률 지표로 드러난다. 이제 몇 회 남지 않은 드라마는 1-2% 사이의 시청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종 장르의 접합점이 자연스럽지 않은 한계가 아쉽긴 하지만, <너는 나의 봄>이 그리려는 세계와 메시지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 드라마는 어떤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걸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일곱 살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정신적 상처를 입은 강다정이 서른넷에 다정하고 배려 깊으며 밝고 자신감 있는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알고 보면 그의 주변에 존재하던 봄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였다. 퉁명스러워 보여도 그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고, 그 어린 시절의 아픔을 같이 겪어내며 누나를 걱정해준 동생이 있었다. 또 가족만큼 그를 챙겨주는 박은하(김예원) 같은 친구도 있었다. 주영도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차가운 날씨에도 꽃을 피우는 나무를 “미쳤다”고 말하지 않고 그 나무가 건물에서 나오는 따뜻한 온기에 봄을 느껴서 라고 말해주는 사람. 하지만 이안 체이스는 따뜻했어야 할 가족에서조차 차가운 겨울을 느껴야 했던 인물이다. 어려서 쌍둥이로 이름조차 없이 버려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난 이안 체이스에게는 냉정함이 묻어난다. 살인사건이 주변에서 벌어져도 그다지 놀라지 않을 정도로.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래도 <너는 나의 봄>이 던지는 질문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 안도현 시인이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물었듯, “너는 누군가에게 봄인가 겨울인가”를 묻는 듯해서다. 혹은 멜로인가 스릴러인가를.(글:PD저널, 사진:tvN)

‘그 남자의 기억법’, 이렇게 진중한데 발랄한 드라마가 가능하다니

 

“하진씨 좋은 사람이에요.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까칠하게 굴던 이정훈(김동욱)이 하는 그 말에 여하진(문가영)은 고마워하면서도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을 받는다. 마치 마지막으로 볼 사람처럼 얘기한다는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은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정훈은 하진에게 선을 긋는다. “앞으로 이렇게 연락하고 만나는 일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요.”

 

MBC 수목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에서 정훈의 이런 말은 그 부분만 떼어놓고 들으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좋은 사람이라며 행복을 빈다더니 다신 만나지 말자니. 하지만 정훈이 처한 앞뒤 사정을 놓고 보면 그 말이 너무나 공감된다. 그것은 과잉기억증후군으로 결코 지워내지 못하는 첫사랑 서연(이주빈)과 하진이 둘도 없던 절친 사이였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서연이 죽은 후 하진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깨어난 하진은 서연을 기억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뇌가 그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 사실을 하진의 주치의인 태은(윤종훈)에게서 들은 정훈은 그 기억이 되살아난다면 하진이 겪을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 고통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는 정훈으로서는 하진의 상황에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한편으론 부럽고, 한편으론 안 됐고. 어떤 기분인지 상상도 안 가. 소중한 기억을 잊고 살아야 한다는 거. 어느 쪽이 더 가여운 걸까? 영원히 잊지 못하는 내가, 아니면 살기 위해 잊어야 했던 여하진씨가.”

 

그가 하진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한 건, 서연의 죽음을 그토록 아프게 겪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듯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선 긋기는 다른 말로 하면 하진이 다시 그 아픈 기억 속으로 들여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정훈의 말에 우리가 깊게 공감하게 되는 건, 갑작스레 떠나버린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자신이 겪은 고통과 그것을 똑같이 겪었을 하진에 대한 배려가 그 속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사실은 그걸 겪어본 이들만이 공유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한다는 것만큼 우리 시대에 화두가 있을까. 그 많은 사건과 사고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남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파하지 않았던가. <그 남자의 기억법>은 그런 고통 앞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정훈과 하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아파도 잊지 않고 기억한 채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너무 아파서 기억을 봉인해버리고 살아가는 이도 있다.

 

물론 너무나 큰 고통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영원히 잊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삶이나, 그렇다고 아예 회피하듯 지워버린 채 살아가는 삶 모두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게다. 여기서 이 드라마는 이 양자가 서로를 들여다보며 고통을 함께 껴안아가는 과정을 통해 어떤 해법을 제시하려 하고 있다.

 

정훈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무거운 짐을 등에 이고 살아가는 캐릭터라면, 하진은 기억을 지워버려 너무나 가볍게 살아가는 캐릭터다. 이 무거움과 가벼움의 균형은 드라마가 너무 침잠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날아가지도 않는 중심 추를 잡아주는 이유가 된다. 기억이나 상처 같은 무게감 있는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어딘지 상큼발랄한 경쾌함을 이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건 그래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무거움과 가벼움의 적절한 조화에 이들이 처한 문제의 해법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결국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그 과정을 통해 그려질 것이지만.(사진:MBC)

기억과 상처, ‘그 남자의 기억법’의 멜로가 독특해지는 이유

 

남다른 기억 능력을 가진 이가 그려나가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류의 멜로일까. MBC 수목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은 잘 나가는 방송국 앵커 이정훈(김동욱)과 SNS 팔로워 860만명이 넘는 연예인 여하진(문가영)의 만남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점에서 먼저 그런 선입견을 갖게 된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정훈이 진행하는 ‘뉴스라이브’에 여하진이 출연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의해 생겨난다. 늘 그렇듯 까칠하게 여하진의 일관성 없는 행동을 지적하는 이정훈에게 여하진이 별 생각 없이 툭 던진 말 한 마디가 방송 사고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정훈의 죽은 첫 사랑 정서연(이주빈)이 자주 했던 “나는 복잡한 게 싫다. 그냥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세면서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

 

순간 정서연의 말을 떠올려 생방송 중 멍해지는 바람에 생겨난 방송 사고는 그러나 평소 평판이 좋은 이정훈이 아니라 악플이 많았던 여하진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이정훈의 질문에 화가 나서 밖으로 뛰쳐나가 잠시 방송이 끊어진 것이라 소문이 난 것. 그렇게 된 게 미안해 최희상(장영남) 국장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이정훈과 여하진은 다시 만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스캔들로 이어진다. 화가 난 여하진은 대놓고 이정훈과 좋은 만남을 갖고 있다고 언론발표까지 해버린다.

 

이처럼 ‘그 남자의 기억법’은 첫사랑을 잃고 마음을 닫아버린 이정훈과 그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여하진 사이의 멜로를 로맨틱 코미디의 스타일로 그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이정훈이라는 색다른 캐릭터는 모든 걸 기억하는 것이 행복한 능력이 아닌 지독한 고통일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인물. 망각의 능력(?)이 없는 그는 죽은 첫사랑의 기억 속에 갇혀 살아간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그저 기억의 문제를 하나 더해 그려내는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건 의외로 아무런 걱정조차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하진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다. 알고 보니 첫사랑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해 이정훈을 놀라게 했던 여하진은 서연의 절친이었다. 친한 사이여서 나눴던 말들이 불쑥 불쑥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이정훈을 놀라게 했던 것.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하진은 정서연에 대한 아무런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어떤 지울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여하진으로 하여금 정서연과 관련된 기억을 지워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정서연의 죽음은 어딘지 여하진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바로 거기에 여하진의 망각의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그 남자의 기억법’이 담고 있는 멜로가 흥미로워지는 건, 정서연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정훈과 여하진의 기억이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정훈은 그 순간 하나하나를 낱낱이 기억하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반면, 여하진은 그 기억을 지워버린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고 있다. 그 어느 것도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두 사람이 그 기억을 매개로 만나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과정은 어쩌면 치유의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멜로의 차원을 넘어 우리가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 어떤 거대한 상처를 어떻게 마주하고 보듬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 남자의 기억법’이 단지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의 경쾌함을 담은 드라마가 아니라, 의외로 진중한 문제의식이 담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사진:MBC)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