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시상식이 남긴 한계들

 

지상파 3사의 <연예대상><연기대상>은 연말 대미를 장식하는 방송사들의 중요행사다. 한 해의 성과들을 돌아보고 오는 해를 기원하는 의미가 이 시상식들에는 들어있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여지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 잡음들이다. 그 잡음들에는 시상의 공정성을 묻는 목소리도 있고, 시상방식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때로는 시상식 진행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왜 방송사들의 연말 최대 행사에서 매년 이런 잡음과 논란들이 나오는 걸까.

 


'KBS연기대상(사진출처:KBS)'

한동안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사라진 듯 보였던 공동수상이 올해는 꽤 많이 쏟아졌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경쟁자들이 치열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상에서 공동수상이 나온다는 건 어딘지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중들은 공동수상에 대해 팬들은 물론이고, 상을 수상하는 당사자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질타의 목소리를 높인다.

 

<SBS 연예대상>이 유재석과 김병만을 공동수상 시킨 것은 그나마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공동수상이라는 그 자체는 여전히 어떤 불편함을 만들지만, 그래도 유재석과 김병만이 아닌가. 두 사람의 독보적인 위치를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KBS 연기대상>에서 고두심과 김수현이 공동으로 대상을 수상한 것에는 이견들이 많다. 고두심이라는 대배우와 김수현이 한 자리에 선다는 건, 물론 각각은 대상감이지만 KBS로서는 확고한 자신들의 색깔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KBS 연기대상>은 어쩌면 한류스타라는 현재의 트렌드와 연기력이라는 연기대상 본래의 잣대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은 양쪽의 손을 들어준 격이 되었다. 물론 그 고충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자신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KBS 드라마가 어떤 고유의 색채를 잘 보이지 못하고 있는 점은 연기대상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보여진다.

 

누가 대상을 수상했는가를 두고도 논란의 목소리들은 쏟아져 나온다. 이번 <KBS 연예대상>에서 이휘재의 대상 수상은 한 마디로 말해 이휘재 당사자에게도 곤혹스런 수상이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주는 상의 대표격이라고 해도, 이 프로그램을 이끈 진짜 장본인들이 아닌 이휘재가 그 자리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대중들은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 후보로 거론됐던 김래원이 대상의 후보들이 서는 자리라는 ‘10대 스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두고 불만의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외스케줄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김래원에게 불이익이 돌아간 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결국 김래원은 프로듀서상하나를 받는 것에 그쳤다.

 

시상식 진행에 대한 논란도 이어졌다. 올해는 유독 전현무의 진행에 대한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SBS 연예대상>에서 시상식의 재미를 위해 무관의 강호동에게 지나치게 깐족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화근이 됐다. 그는 다소 듣기에 따라 불편할 수 있는 무례한 언사들을 툭툭 던짐으로써 실제로 웃음을 유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못내 불편했다는 이야기들이 솔솔 흘러나오며 논란으로 이어졌다.

 

결국 바로 다음날 전현무가 직접 이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 그 날 있었던 <KBS 연기대상>의 진행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적들이 쏟아졌다. 김수현에게 차태현과의 커플 뽀뽀를 요구하는가하면, 특종이라며 김수현의 주량을 집요하게 묻는 모습도 이어졌다. 전현무의 이런 돌발적인 요구와 질문들은 시상식 참석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상파의 연말 시상식이 이런 많은 논란들을 매년 남기고 또 그 다음해에도 똑같은 논란을 발생시키는 이유는 그 태생적인 한계에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아무래도 방송사의 자기 식구 챙기기가 그 바탕에 깔릴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팬들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대상수상이 결과로 올라오기도 한다. 또 진행자들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보니 진행도 피로하고 식상해질 수 있다. 올해의 방송3사 진행은 전현무, 신동엽, 이휘재가 독식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지상파의 연말 시상식은 자사의 다음해를 위한 포석에 가깝다. 그러니 잡음이 나와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하지만 그래도 연기자들을 배려하는 만큼 최소한 시청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그런 연기자들이나 시상식 또한 그 존재가 가능한 것 역시 시청자들이 있어서니 말이다. 제발 새해의 연말 시상식에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군림 하는 작가와 감사 표하는 작가

 

SBS <펀치>의 종영을 앞두고 박경수 작가가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진심어린 편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그는 부끄러운 대본을 부끄럽지 않은 영상으로 만들어주신 이명우 감독님, 김효언 감독님, 윤대영 촬영감독님, 그리고 모든 스태프분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한정환 EP,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출연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목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펀치(사진출처:SBS)'

“<펀치>의 박정환은 래원 씨가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전 래원 씨가 만든 박정환을 따라간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훌륭했어요. 래원 씨.” 박경수 작가는 극중 주인공인 박정환을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 연기자 김래원이 만든 걸 자신이 따라간 것뿐이라고 말했다. 또 이태준 역할의 조재현에게는 한 수 배웠습니다. 카리스마와 유머러스함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이태준을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활자의 인물이 어떻게 실제의 인간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어요라고 했다.

 

박경수 작가는 신하경 역할을 한 김아중에 대해서도, 윤지숙 역할의 최명길에게도, 최연진 역할의 서지혜에게도, 또 조강재 역할의 박혁권에게도 또 이 드라마에 출연한 모든 출연자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낮췄다. “<펀치> 대본 작업을 하면서, 부끄러웠던 제 자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훌륭했던 여러분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감사의 글을 마무리했다.

 

박경수 작가의 이 편지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드라마에서 작가라고 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처럼 받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의 의해서 작품 속의 인물들이 살고 죽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경수 작가는 그것이 자신이 만든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거기에 살을 붙이고 숨 쉴 수 있게 해준 이들은 다름 아닌 연기자들의 몫이었다는 걸 감사의 마음으로 전해왔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의 패러디로까지 등장하고 있는 임성한 월드의 데스노트 이야기가 씁쓸함을 전하는 것은 거기에서 마치 신적인 지위를 가진 듯 휘둘려지는 갑의 권력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제 아무리 극중 인물을 잘 소화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어느 날 갑자기 푹 쓰러져 죽음을 맞는 건 허무하고도 쓸쓸한 일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금의 서민들이 가진 정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 노력하는데 대우는커녕 진짜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

 

박경수 작가의 편지가 깊은 감동을 전하는 것은 이 천재 작가의 겸손이 죽을 듯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수치로 표현되는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라면 그 성과를 고스란히 작가와 주인공 몇몇이 가져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영역이 어디 그런가.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조명 하나, 소품 하나까지도 작품을 빛나게 해준 소중한 누군가의 손길이 묻어나는 것이다.

 

갑질 하는 세상이다. 어디에서든 우리는 그 갑의 힘을 느끼며 살아간다. <펀치> 같은 좋은 드라마를 써준 것도 고마운 마당에, 이런 훈훈한 마음까지 읽게 해준 박경수 작가에게 새삼 놀라게 된다. 그 천박한 숫자의 시청률을 내세워 많은 이들이 작가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게 작가라는 존재의 증명으로 완전할까. 작품과 작품의 인물 하나하나와 그 인물을 살아있게 만들어준 배우들과 또 그것을 잘 담아내준 모든 제작진들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한 박경수 작가. 그가 바로 진정한 작가다.

 

<강남1970>은 왜 이민호를 캐스팅했을까

 

<강남1970>은 제목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그대로 집어넣었다. 1970년대의 강남.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것은 지금의 강남이라는 공간이 막연히 표징하는 의미와 맞닿아있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도열한 빌딩들과 회사들은 우리네 상류층의 막강한 자본을 상징하고, 도곡동에서 대치동, 압구정동에 들어찬 천정부지의 집값을 자랑하는 아파트들은 부동산 버블을 타고 커버린 개발시대의 경제에 맞닿아 있다. <강남1970>은 현재의 강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그 시원을 따라가는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강남1970>

어찌 보면 자못 탐구적이고 탐사적일 수 있는 이 영화를 유하 감독은 누아르로 풀어낸다.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우울함에 <영웅본색>의 핏빛 액션이 그 겉모습이고, 그 이면에는 강남이라는 공간으로 표징되는 부동산 경제가 어떻게 경제와 정치 그리고 폭력의 야합으로 만들어졌는가가 다뤄진다.

 

그러니 이 영화는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가 밑바닥에서부터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올라가는 그 액션 누아르에 초점을 맞춰 즐기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어지는 형제애와 욕망의 줄다리기는 전성기 시절의 홍콩 영화처럼 때론 속 시원하고 때론 긴장과 이완을 덧붙이는 연출로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민호라는 꽃미남으로 이미지화된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그래서 다분히 모험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의도라고 판단된다. 이민호는 자칫 의미 과잉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멋진 액션 영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배우가 조폭들 사이에서 화려한 액션을 보일 때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 영화는 결코 1970년대의 강남이라는 우리네 현대사에 대한 의미화를 버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말끔해 보이는 그 강남이라는 공간은 마치 이민호가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는 있지만 그 자리에까지 오기 위해 무수한 피들이 그의 손에 묻혀졌던 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강남1970>은 그렇게 피로 세워진 이 도시의 한 시절을 그려낸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개발시대의 군부독재와 그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 그들과 손대려는 자본가들 그리고 몸뚱어리 하나가 부서져도 욕망을 쟁취하려는 조폭들의 커넥션이 있다. 그 단단한 커넥션은 결국 맨 꼭대기의 권력자들만을 남긴 채 그 밑은 끊임없이 희생되고 대치되는 시스템의 세계다. 시스템을 운용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제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그들은 끝내 쥐고 있지 못한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유하 감독이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에 이은 <강남1970>으로 이른바 폭력 3부작을 통해 일관되게 다룬 것은 권력 시스템과 부딪쳐 깨지는 개인의 문제였다. 그들은 모두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거나 혹은 그 시스템을 장악하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그렇게 몸뚱어리 하나를 갖고 부딪친 개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시스템의 주인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강남1970>의 마지막 장면은 이 70년대의 이야기가 현재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과거 70년대 손에 피를 묻혔던 그들은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 말끔한 양복 아래 숨겨진 잔인함은 강남이라는 공간의 말끔함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유하에게 강남은 그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강남1970>은 그래서 1970년대를 향수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지금의 문제가 1970년대의 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펀치>, 짜장면 한 그릇에도 담기는 은유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른 뉘앙스로 읽힌다. ‘먹는다는 건 가장 기본적인 삶의 본질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것은 또한 욕망의 다른 표현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SBS 월화 드라마의 <펀치>먹는다는 표현이 그렇다. 이 드라마에서는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그 먹는 행위에 남다른 은유가 담긴다.

 

'펀치(사진출처:SBS)'

검찰총장이 된 이태준(조재현)과 그를 검찰총장 만들었으나 그에게 배신당한 박정환(김래원) 검사가 함께 먹는 짜장면은 그들의 관계를 그대로 상징한다. 처음에는 같이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상징하던 짜장면이지만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서로 다른 중국집의 짜장면이 맛있다고 의견이 갈린다. 그렇게 영원히 틀어질 것 같았던 두 사람이지만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을 공동의 적으로 세우며 연합할 때는 또 같이 앉아 짜장면을 먹는다.

 

음식은 하나의 기호와 취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걸 같이 먹는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이태준 총장과 윤지숙 장관의 입맛이 다른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다른 욕망으로 엇나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는 식당은 그들의 관계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홍어를 좋아하는 이태준 총장이 윤지숙 장관에게 홍어를 한 점 얹어 먹으라고 권하는 장면은 이태준 총장이 권력의 우위를 잡게 된 상황을 말해주고, 반대로 윤지숙 장관이 스파게티집으로 이태준 총장을 부르는 장면은 반대의 상황을 말해준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이처럼 <펀치>에서는 권력 관계의 은유로서 사용된다. 윤지숙 장관과 이태준 총장이 서로의 비리를 하나씩 잡고 공동운명체가 되는 순간, 이태준 총장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가야되는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떤다. 윤지숙 장관이 까만 커피에 프림을 넣는 장면을 은유해 깨끗한 검찰을 만들겠다고 하는 장면이나, 박정환 검사가 커피에 검은 설탕과 하얀 설탕을 넣으며 (윤지숙 장관이나 이태준 총장이나)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또 이태준 총장의 형 이태섭(이기영)이 자살 직전에 동생과 칡뿌리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그 칡뿌리는 이태준 총장의 책상에 간직되어 두 사람의 형제애를 표징하는 도구가 된다.

 

<펀치>의 박경수 작가는 이처럼 음식에 대한 은유를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단 자칫 이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드라마의 권력 관계들을 가장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누구와 연합하고 또 누구와 대립하는 정치적인 관계의 변화는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함께 밥을 먹는 장면만으로도 그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효과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건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박경수 작가 특유의 사유가 거기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밥 한 끼 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꽤 많은 목적들이 담기기 마련이다. 욕망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들이라면 그러니 그 밥 한 끼의 의미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목적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것이 <펀치>의 인물들이 밥을 먹는 장면이 맛있다기 보다는 탐욕스럽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이유다.

 

최근 나영석 PD<삼시세끼>가 화제다. 도시를 떠나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삼시세끼를 챙겨먹는 그 행위에 대중들은 뜻밖의 열광을 보낸다. 차승원과 유해진이 만재도의 한 집에서 챙겨먹는 밥 한 끼에는 아무런 목적성도 탐욕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밥 한 끼에는 두 사람의 진심이 담긴다. <펀치>의 삼시세끼와는 너무나 다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하지만 그 먹는다는 행위가 삶의 본질에 닿아있지 않고 어떤 욕망과 목적성을 내포할 때 그 밥 한 끼는 우리네 삶의 피와 살이 되지 못할 것이다. <펀치>의 목적화된 음식들은 그래서 그 관계의 피폐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좋은 사람과 만나 진심이 담긴 밥 한 끼 챙겨먹는 일. 어쩌면 진정한 삶과 관계의 회복은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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