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의 단순한 권선징악에 시청자들이 호응한 건

 

누가 봐도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빈자리가 만든 영향이라는 게 분명하다. KBS 월화드라마 <암행어사-조선비밀수사단(이하 암행어사)>의 시청률이 9.7%(닐슨 코리아)까지 치솟았다. <펜트하우스>가 방영되던 시점에 5~6%대를 오가던 시청률이 <펜트하우스> 시즌1이 끝나고 한 주만에 9.7%까지 올라선 것. 

 

<암행어사>의 이런 급반등은 이 퓨전사극이 가진 <펜트하우스>와의 상반된 느낌을 떠올려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즉 마라맛의 너무나 강력한 자극이 피로감마저 주었던 <펜트하우스>와 비교해 <암행어사>는 순하디 순한 맛의 퓨전사극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중간부터 보는 데 하나도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암행어사>의 스토리텔링은 익숙하다. 

 

탐관오리들이 출몰하고, 그래서 고을에 갖가지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해결이 요원해 민초들만 곤경에 처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하는 상황 속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성이겸(김명수), 홍다인(권나라) 그리고 박춘삼(이이경)의 맹활약을 그리는 퓨전사극이다. 그래서 각각의 사건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병렬적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그 해결을 담는 이야기 구조는 누구나 쉽게 이 사극을 볼 수 있게 만든다. 

 

투전방의 돈을 두고 고을수령인 장근(양현민)이 벌인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요즘의 다소 복잡하고 기상천외한 수사물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는 너무나 단순하게 다가온다. 그 몰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목격자의 등장이 사건을 해결하는 단초가 되는 것. 이런 단순 구조의 수사물이지만, 복잡하지 않고 선명한 선악 구도와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시청자들에게는 편안한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여기에는 권력자들의 비리와 갖가지 갑질들이 투영해내는 현실의 문제들이 그 밑바닥 정서에 깔려 있고, 그들을 여지없이 응징하는 암행어사를 통한 시원한 대리충족의 묘미가 담겨 있다. 복잡한 현실과 그래서 드라마들마저 복잡해진 현 시국이어서 오히려 정반대의 단순하고 소박하기까지 하며 어찌 보면 1980년대 옛 사극을 보는 것만 같은 순한 <암행어사>에 시청자들이 빠져들고 있는 것.

 

한 사건을 해결하고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는 식의 병렬식 구조에다, 단순한 권선징악의 스토리지만, <암행어사>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성이겸, 홍다인, 박춘삼이라는 서로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 덕분이다. 남다른 명민함을 가진 암행어사지만 어딘지 빈 구석을 드러내는 인간미를 갖춘 성이겸이나, 성이겸과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능동적인 다모의 활약을 보여주는 홍다인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감초로서 이 작품의 코믹한 상황들을 시종일관 만들어내는 박춘삼의 매력. 이들이 함께 암행을 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티키타카는 이들 캐릭터들의 매력에서 비롯된다. 

 

KBS라는 다소 보수적인 시청층을 가진 플랫폼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퓨전사극이긴 하지만 익숙한 권선징악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암행어사>는 이 플랫폼의 성격과 너무나 잘 어우러진다. 물론 곧 돌아올 독하디 독한 마라맛 <펜트하우스> 시즌2는 여전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순한 맛의 드라마는 저 마라 맛이 피로해진 시청자들을 어느 정도는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명징한 권선징악의 힘으로.(사진:KBS)

‘미스 함무라비’의 현실 비판의식 어째서 여타 드라마와 다를까

문유석 판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작품이 가능했을까.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법정물로는 이례적이다. 대부분의 법정물이 특정 사건을 통한 스릴러와 반전에 집중한다면, <미스 함무라비>는 사건을 통한 현실 비판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그 비판의 방식도 사뭇 다르다. 그것은 잘못된 현실을 꼬집으면서도 자신 또한 그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자아 성찰적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다. 

‘전관예우’는 우리가 법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됐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전관예우’가 판결의 향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스 함무라비>에 등장하는 판사들은 바로 이런 생각에 발끈한다. 한세상(성동일) 부장판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전관예우가 어디 있냐”고 쏘아붙인다. 

그런데 마침 재벌에게 후한 판결을 내린 권세중(김정학) 판사가 자신이 판결을 내리기 전에 다양한 ‘국민 여론’을 수렴했다고 하자 박차오름(고아라)은 도대체 그 국민은 누구를 얘기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국민 여론’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 서민들의 여론은 거기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기만 하던 감성우(전진기) 부장이 박차오름이 맡은 사건에 은근슬쩍 청탁을 하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감성우 부장이 법원에서 쫓겨나게 되는 과정은 없다고는 하지만 저 밑바닥에 항상 존재해온 ‘전관예우’가 존재한다는 걸 씁쓸하게 알려줬다. 이러니 수임자들은 돈을 더 주고도 전관 변호사를 쓰려고 하고 심지어 브로커들까지 생겨나게 된 것.

하지만 <미스 함무라비>는 그저 이 문제를 저들의 잘못으로 치부하지 않고 내 문제일 수 있다는 자아 성찰을 담아냈다.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를 업고 응급실로 달려온 임바른(김명수)이 바빠서 의사들이 엄마를 봐주지 않자 그 병원을 소유한 집안의 친구에게 전화를 해 부탁을 하는 장면이 그렇다. 결국 엄마의 증세가 요로결석으로 통증은 심해도 위급하지는 않다는 의사의 말에 담겨진 차가운 냉소를 알아차린 임바른은 자신 때문에 먼저 처치 받지 못한 더 위중한 환자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는다. 

그토록 전관예우를 비판적으로만 바라보던 자신이지만 자신 역시 위급한 상황에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임바른은 이 문제가 저들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걸 성찰하게 된다. “돈도 연줄도 없는 이들은 막연한 분노로 거리로 나서고, 돈이라도 좀 있는 이들은 브로커 말만 믿으며 전관을 찾는데, 정말 힘 있는 사람들은 굳이 로비할 필요도 없다. 이미 그들 중 한 사람이 된 판사가 그들을 재판할 테니까.” 실제로 결혼식장에 갔다가 그 빌딩 소유주인 재벌3세 민용준(이태성)을 만나게 된 임바른은 그가 법원 내부의 움직임까지 모두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러한 정보는 법원 내부 사람들과의 결탁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관예우를 소재로 다룬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미스 함무라비>는 판사들이 맡는 사건들을 통해 세상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다. 법정은 그래서 사건이 판결되는 곳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처럼 그려진다. 이전 회에서 등장했던 과중한 회사생활의 스트레스로 정신을 놓아버린 한 회사원의 이야기에서 우리 사회에 내재된 1등 지상주의의 씁쓸한 단면을 볼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하지만 법정을 통해 그려내는 현실 비판을 담아내면서 <미스 함무라비>는 그것이 또한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지적하는 것 또한 피하지 않는다. 법정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그 안에서 생활해온 문유석 판사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있어서가 아닐까. 문유석 판사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생각했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미스 함무라비’인 박차오름 같은 판사를 통해 이야기를 통해서나마 어떤 해법을 모색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진심어린 성찰의 과정이 아니었다면 <미스 함무라비> 같은 괜찮은 드라마가 탄생하기는 어려웠을 게다.(사진:JTBC)

‘함무라비’ 김명수와 고아라, 그 냉정과 온정 사이

판사라면 어떠해야 할까. 모든 사건들을 냉정하게 다루고, 오로지 법의 틀 안에서만 바라봐야 할까. 아니면 그 사건들 이면에 존재하는 사람의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야 할까. JTBC 새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첫 회는 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판사 임바른(김명수)과 박차오름(고아라)이 한 사무실에서 부딪치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임바른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판사로서의 바른 길을 고집하는 인물. 하지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암울하다. 고야의 그림을 좋아하는 그에게 사람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판사라는 직업이 좋은 세상을 꿈꾸기보다는 세상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여긴다. 그는 월급을 기다리는 샐러리맨과 판사라는 직업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된 건 해직기자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아마도 ‘입바른’ 소리를 하며 살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지만, 그렇게 기자로서 입바른 소리를 하던 아버지는 해직되어 여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만을 추구하는 무능력자처럼 살아간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임바른은 현실의 높은 벽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렇게 튀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같은 사무실로 박차오름이 나타난다. 지하철에서 쩍벌남과 시끄럽게 통화하는 아주머니를 그냥 넘기지 않고 일침을 가하고, 성추행범에게는 일격을 가하는 박차오름의 모습은 여러모로 임바른과는 다르다. 그 일이 문제가 되어 첫 날부터 한세상(성동일) 부장판사에게 끌려가 말도 안되는 “여자가 조신해야지” 같은 성차별적 소리까지 들었지만 박차오름은 다음 날 더 튀는 옷을 입고와 부장판사와 맞섰다. 조신하지 못하다는 소리에 히잡으로 갈아입고 나선 박차오름은 어느 것이 낫냐고 물어 부장판사의 뒷목을 잡게 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지내지만 “인간들이 싫다”고 생각하는 임바른과 그 인간들을 공감하는 박차오름은 너무나 달랐다. 인간의 죄를 담아낸다며 고야의 그림을 좋아하는 임바른에게 아예 대놓고 보라는 듯 다음날 이중섭의 가족 그림을 붙이고, 눈을 가린 채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을 책상 앞에 놓아둔 임바른과 달리, 천수대비의 상을 책상 앞에 두는 박차오름이다. 임바른이 판사로서 냉정을 덕목으로 생각한다면, 박차오름은 세상의 많은 약자들의 아픔에 손을 내미는 온정을 덕목으로 생각한다. 

두 사람의 부딪침은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고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할머니를 두고 벌어졌다. 증거가 없어 억울한 판결을 받은 할머니에게 이렇게 시위를 할 게 아니라 항소를 하시라고 권하는 임바른과 달리, 박차오름은 그 할머니의 사연을 눈물을 흘리며 들어주고 있었다. 판사라는 직업으로서의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하는 임바른에게 박차오름은 과연 어떤 것이 진짜 정상이고 비정상인가를 되물었다. 

<미스 함무라비>는 문유석 판사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그가 판사로서 갖게 되는 이상과 현실에 대한 딜레마를 첫 회부터 잘 담아내고 있다. 박차오름이 이상을 보여준다면 임바른은 현실을 대변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임바른과 박차오름의 멜로는 단순한 사랑이야기의 차원을 넘어서게 해준다. 그것은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치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으로 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멜로의 구도 속에 법 정의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문제를 캐릭터를 통해 녹여내고 있다는 것. 냉정한 임바른과 온정 가득한 박차오름의 케미가 특히 기대되는 이유다.(사진:JTBC)

<장영실>에서 떠오르는 헬조선과 탈조선

 

장영실은 별에 미친 조선의 노비 놈이다.” 장영실(송일국)은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소리친다. 그 자조 섞인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가득하다. 조선에서 별을 본다는 것. 아니 조선에서 노비로 태어나 별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그의 사촌인 양반 장희제(이지훈)는 일찍이 이 현실을 장영실에게 뼛속까지 느끼게 해준 바 있다. “노비는 아무 것도 몰라야 한다.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야.” 그것이 별에 미친 조선의 노비 놈의 운명이다.

 


'장영실(사진출처:KBS)'

하늘에는 귀천이 없다. 별에도 귀천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그저 자연의 법칙일 뿐 그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별을 바라보는 이들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때론 그 의미는 과학이 아니라 미신에 가깝다. 형제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김영철)이 일식과 월식을 통한 구식례(일식과 월식을 맞는 예식)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떨쳐내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디 하늘의 움직임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까. 일어나지 않는 일식과 월식을 두 차례나 허망하게 맞이한 왕은 하늘에 사죄를 올린다.

 

조선에서 과학이란 이처럼 순수한 것이 아니다. 하늘의 운행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달이 세성(목성)을 가렸다는 과학적 사실은 임금이 백성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는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세성은 다름 아닌 복과 덕을 책임지는 별로 의미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운관 제조 유택상(임혁)달과 별은 임금과 백성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며 세성을 범한 달이 의미하듯 태종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간언한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고, 과학이라고 해도 중국의 과학이다.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장영실은 아버지 장성휘(김명수)와 관기인 은월(김애란) 사이에서 태어나 관노가 된 노비다. 하루 종일 고단한 노비의 삶을 살면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하늘의 별들이다. 그는 노동 속에서도 해의 변화를 보며 과학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의 평생의 친구인 석구(강성진)는 장영실이 산에 지어놓은 일종의 관측소에서 별을 보여주자 그에게 말한다. “영실아. 고마워. 하늘보고 살게 해줘서.” 땅만 죽어라 파며 살아야 하는 노비 신세에 하늘을 보고 산다는 의미는 그렇게 크다. “죽을 듯이 힘든데 이렇게 하늘보고 살 수 있어서 좋구나.”

 

하늘을 쳐다보는 것에 귀천이 없을진대, 조선은 심지어 그 하늘을 보는 것마저 귀천을 따진다. “있잖아. 난 저 하늘의 별들이 매달려 있는 이치만 알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아. 근데 조선 땅에서 노비로 사는 한 그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목숨 걸고 조선을 떠나야 해. 반드시.” 순수하게 학문의 뜻을 펴는 일은 노비인 장영실에게는 조선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을 떠나고 싶어 한다.

 

<장영실>이라는 사극은 역사 과학 드라마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거기서 솔솔 피어나는 문구는 이 정부가 그토록 주창하는 창의 융합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다. 그래서 <장영실>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하지만 <장영실>은 그 첫 주 방영분을 통해 그가 왜 조선을 떠나고 싶어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처럼 던졌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는 제 아무리 하늘의 이치를 들여다보고 싶어 해도 이뤄지지 않는 세상이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아마도 장영실이라는 청춘에게 딱 어울리는 현실이었을 게다.

 

사극이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다루게 된 것은 그가 다룬 과학과 그가 처한 현실이 현재에 던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게다. 장영실은 그 신분과 태생이라는 현실을 깨치고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지금에도 통용될까. 과연 꿈을 향해 끝없이 정진하는 것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장영실이 그 낮은 신분에도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던 건 그의 가치를 보고 인정해준 세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세종 같은 인물이 있을까. 나아가 장영실 같은 존재의 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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