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2’로 돌아온 김민하, 더 단단해졌다

파친코2

“너는 정말 강한 사람인 것 같아.”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에서 젊은 선자 역할을 연기하는 김민하는 무려 4개월 동안 8차례에 걸쳐 이뤄진 오디션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정작 본인은 내성적인 성격이고 어려서는 누가 말을 걸어도 땀이 날 정도로 소심한 아이였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구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고 한다. 이건 무얼 말해주는 걸까. 자신이 가진 진가는 어느 순간 누군가 혹은 어떤 계기에 의해 드디어 꺼내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김민하는 그런 점에서 보면 ‘파친코’의 선자라는 인물을 통해 그 숨겨져 왔던 매력이 드디어 꺼내진 배우가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영도 어시장에서 어린 선자(유나)는 일본 경찰 앞에서 모두가 고개를 숙일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는 당찬 아이다. 그 아이는 성장해 사업가인 한수(이민호)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까지 갖게 되지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그에게는 이미 일본에 아내가 있다는 것. 결국 홀로 아이를 낳은 선자(김민하)는 마침 다 죽어가는 몸으로 선자네 하숙집을 찾아왔다가 겨우 살아난 이삭(노상현)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와 부부가 된다. 갖은 일본인들의 핍박과 차별 속에서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는 오사카에서의 삶. 노동자들을 돕다가 이삭은 감옥에 끌려가고 결국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선자는 길거리로 나가 김치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선자는 끝없이 무너지고 내팽개쳐지는 삶의 바닥에서도 끝내 다시 일어나 그 삶을 버텨내는 인물이다. 

 

아마도 ‘파친코’의 원작 소설을 쓴 이민진 작가는 바로 이런 끈질긴 생명력이 한인들의 정체성이라고 본 것 같다. ‘역사는 우리를 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failed us, but no matter)’라는 다소 도발적이고 인상적인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바로 선자라는 캐릭터에 그대로 녹아있다. 낯선 타지에서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무너질 것 같은 그 삶 속에서도 끝까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선자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래서 ‘선자’라는 이름은 당대의 조선인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김민하는 오디션에서 들었던 이야기처럼, 마치 제 안에 숨겨져 있던 선자를 찾아낸 양 강렬한 눈빛과 앙다문 입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 위대한 인물을 표현해낸다. ‘파친코2’에서도 밤이면 굶주린 아이들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를 듣는 엄마들이 못할 게 뭐가 있냐며 위험한 밀거래에도 나서는 강인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되어 함께 부부의 연을 맺고 한수의 아이까지 자신의 아들로 보듬는 이삭에 대한 무한 신뢰와 애정 그리고 의리를 잊지 않는다. 늘 선자와 아들에 대한 동태를 살피고 있던 한수가 감옥에 들어갈 처지에 놓인 선자를 꺼내주고, 이제 곧 대규모 공습이 있을 거라며 떠나라고 하자 선자가 단호히 선을 긋는 모습에서는 서릿발이 느껴진다. “옥살이 중인 남편 두고 내 어디 못갑니더. 그 사람 두고 내 어디 안갑니더. 못가예.” 여기서 선자는 똑바로 한수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그것이 마치 돌맹이 같은 단단한 의지를 느끼게 만든다. 이 장면은 김민하라는 배우가 얼마나 깊이 선자라는 인물 속에 들어가 그 자체가 되어 있는가가 실감나는 대목이다. 

 

끝까지 남편 없이는 떠나지 않는다는 선자의 단호함에 결국 한수는 힘을 써 오래도록 감옥살이를 해온 이삭을 빼내준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이삭이 그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 선자와 마주하는 장면은 ‘파친코’의 두고두고 남을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점점 힘이 빠져가지만 살고 싶어하고 또 그 와중에도 아이들 걱정을 하는 남편을 선자는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다. 늘 헌신적으로 아내와 아이 그리고 남들을 위해 살았던 남편이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하자 또 그 선자 특유의 단호한 표정과 말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뭘 용서합니까. 안 계신 몇 년 동안 내한테 와가 당신이 자기들한테 잘해줬다고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예.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더. 14년 전에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예. 시상은 변했어도 당신은 안변한 거라예.” 그러면서 이삭에 대한 사랑 또한 드러낸다. “내는 내 남편한테 사랑받고 존중받았으예. 전부 다 받은 거라예.”

 

사실 선자 역할에서 드러나는 김민하의 이런 강렬한 인상은 ‘파친코’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물론 영화 ‘킬러스웰:아워 스페이스’의 유진이나 ‘봄이 가도’의 현정 같은 인물 모두 이처럼 단단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들이지만, ‘파친코’의 선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김민하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났다고나 할까. 이건 배우들이 어떤 캐릭터를 만나느냐에 따라 본인도 잘 몰랐던 가능성의 영역이 열린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친코2’에서는 이제 이삭을 떠나보낸 선자와 그의 앞에 나타난 한수가 보여주는 애증의 관계가 이어질 전망이다. 즉 선자와 한수는 두 사람의 아들인 노아(김강훈)가 그 중간 매개가 되는 셈이다. 무기 사업으로 성공한 비즈니스맨인 한수는 노아에게는 일종의 ‘출생의 비밀(?)’이 되는 것이지만, 선자는 여기에도 단호하게 선을 그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선자는 일제로 대변되는 차별과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또 한수로 대변되는 자본의 힘 앞에서도 굳건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 지점은 ‘파친코’라는 작품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즉 권력과 자본의 힘이 마치 시대의 가치인 양 이야기되는 현재에, 이를 거부하는 선자라는 인물의 강렬한 생명력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가치라는 걸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민하가 배우로서 보여준 가치 역시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내면에 깃든 단단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었다. 주근깨가 매력적인 이 배우는 선자라는 기회를 통해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진짜 매력을 꺼내놨다.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지만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뿐인 내면의 단단함은 그 어떤 외적 잣대로도 깨질 수 없는 거라는 걸 김민하는 그 연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글:국방일보, 사진:애플TV+)

왜 그토록 <너의 이름은>의 공감에 간절해졌을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에 대한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 겨우 개봉한 지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애니메이션이고 그것도 우리 대중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런 흥행은 이례적인 느낌이다. 물론 대중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데 있어서 국가 간의 정서가 앞세워질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사진출처: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이런 국가 간의 정서를 떼놓고 오로지 작품만으로 들여다보면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다. 꿈을 통해 타인의 몸과 자신의 몸이 바뀐다는 판타지 설정은 사실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스위치> 같은 영화가 그런 소재를 다룬 바 있고, 우리에게도 <시크릿 가든>으로 익숙해진 소재가 아닌가.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해온 일련의 작품들이 가진 극도로 현실적이고 섬세한 감정들이 심지어 문학적으로까지 느껴지던 전작들을 염두에 놓고 보면 이런 판타지 설정은 조금은 과하게 다가온다. 몸과 몸이, 그것도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바뀌는 그 상황은 유머러스하게 전개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으로 보면 너무 복잡하고 장황하다.

 

물론 그런 변화는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만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 중 <언어의 정원>이나 <초속5센티미터>를 본 관객이라면 너무나 스펙터클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게다. <언어의 정원> 같은 작품이 놀라웠던 건 사실 그 안에 담겨진 스토리가 지나치게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거기 있는 인물들의 감정표현이 그 어떤 스펙터클보다 더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속5센티미터>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는 같은 학교에서 지내던 두 아이가 어쩌다 서로 떨어져 멀리 전학을 가게 되고 서로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다 어느 눈 오는 날 그 먼 거리를 달려가 서로 만나는 이야기가 전부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이야기 속에 여자 아이를 만나러 가는 남자 아이의 감정은 마치 문학작품 속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깊게 요동친다. 이런 내적인 감정 표현들이 빛의 마술사라고도 불리고 배경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섬세한 붓놀림에 의해 완성된다. 그의 작품은 실로 인물이 내면을 직접 말하기보다는 그 인물이 서 있는 배경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놀라운 공감대를 만들어낸다.

 

이런 점을 두고 보면 <너의 이름은>은 이런 내면의 이야기보다는 훨씬 행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이건 아마도 단편과 장편의 차이일 수 있지만 그래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문학적인 그림들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많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너의 이름은>이 우리네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건 그 나마 이 작품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추구하는 또 하나의 지점으로써,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주제의식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의 몸이 바뀌어진 것을 알게 된 남녀가 서로의 입장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그 과정은 사실 이 애니메이션이 그리고 있는 스펙터클의 스토리보다 더 우리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이 서로에 대한 공감은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사적인 차원을 넘어 공적인 차원으로까지 나아간다. 세월호 참사 같은 아픈 기억을 가진 우리에게 바로 이 부분은 특별히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타인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는 그 마지막 장면의 간절함은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적인 사랑의 차원을 뛰어넘어 공적인 마음으로까지 간절하게 읊조리는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우리 안의 말들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하다.

 

공감에 대한 간절한 마음. 아마도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에게 이만큼 큰 건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지워버리려 하고 또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지울 수 없고 기억 하겠다 다짐하게 되는 그 간절한 공감의 마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도호쿠 대지진을 겪으며 갖게 된 트라우마를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내려 했다고 한다. 그건 그가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지금껏 들여다봤던 바로 그 방식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들도 알고 있다. 바로 이 트라우마 역시 공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통해 겨우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도깨비> 신드롬, 그 밑바닥에 깔린 아재파탈의 실체

 

어쩌면 이건 아재파탈의 극점이 아닐까.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를 보다보면 한 회에 아저씨라는 말을 부지기수로 듣게 된다. 지은탁(김고은)은 함께 살아가는 도깨비 김신(공유)에게도 또 저승사자(이동욱)에게도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건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의식하지 않으면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의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아저씨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오던 이미지를 아주 조금씩 깨겠다는 의도처럼 보인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도깨비는 나이가 무려 939. 사실 여기서 9백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의미가 아닐까. 오히려 남은 39살이라는 숫자는 그래서 현재의 김신이 보여주고 있는 육신의 나이처럼 보인다. 중년이고, 아저씨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는 나이. 하지만 이 중년의 아저씨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던 그 늙수그레한 모습이 아니다. 이른바 아재파탈의 면면을 바로 이 도깨비라는 캐릭터는 거의 극점으로까지 보여주고 있다.

 

잘 생긴 외모에 도깨비 방망이만 휘두르면 금덩이를 척척 내놓을 수 있는 재력, 무엇보다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서 캐나다로 훌쩍 날아가 (스테이크)’ 한 접시 정도는 먹고 올 수 있는 능력... 김신은 도깨비라는 판타지 설정이지만 어찌 보면 아저씨라는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판타지의 극점이다. 잘 관리된 몸과 스타일 있는 외모, 재력, 능력 등등 그가 갖추지 못한 건 없어 보인다.

 

이건 도깨비와 함께 브로맨스의 짝패로 등장하고 있는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뭐든 원하면 다 할 수 있는 능력자에다 역시 조각 같은 외모에 스타일도 여성들의 눈을 잡아끌 만큼 독보적이다. 그들은 각각 저승사자 하면 떠오르던 갓 대신 멋진 모자를 쓰고 있고, 도깨비 하면 떠오르던 어딘지 투박해 보이는 도깨비방망이 대신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칼을 쥐고 있다.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아저씨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누가 봐도 아저씨라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 철철 아재파탈의 면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깨비>에서 더 흥미로운 건 이 아재파탈의 면면이 단지 외적인 것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도깨비 김신은 시를 읽는다.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이란 시는 김신이 지은탁을 바라보며 깔리는 목소리로 흘러나오며 시청자들의 눈과 귀와 가슴을 사로잡았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 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 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김신이라는 아재는 이토록 감성적이다.

 

게다가 이 아재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안다. 9백년을 넘게 살아온 자의 통찰이랄까. 그는 다가오는 지은탁을 멀리서부터 바라보며 생각한다. ‘생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죽음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생으로 사로 너는 지치지도 않고 걸어온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야 말하고 마는 것이다. 서럽지 않다. 이만하면 되었다. 된 것이다, 라고.’

 

<도깨비>라는 작품에 깔려있는 무게감은 바로 이 아재들이 가진 캐릭터에서 나온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삶과 죽음. 죽음을 옆구리 정도에 끼고 살아가기 때문에 동시에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아는 자들의 사랑. 가슴에 칼이 꽂혀 있는 존재는 그래서 이제 생이 그저 즐거움만으로 구성된 것도 또 그렇다고 고통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도 아닌 그 두 가지가 섞여있어 살만하다는 것을 아는 성숙된 자를 캐릭터화 한다. 죽음을 끼고 살아가는 자(도깨비)와 누군가의 죽음을 인도하는 자(저승사자)의 삶은 그래서 청춘들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노년들과도 다르다.

 

사실 그간 아재파탈이라고 부르면 외적인 면면들이 가장 먼저 부각됐다. 즉 나이가 중년인데도 여전히 탱탱한 젊음을 유지하는 관리된 몸이나 그 나이에 걸맞는 부와 능력과 지위를 갖고 있는 이들을 먼저 떠올린 것. 하지만 <도깨비>가 공유와 이동욱을 통해 그려내는 아재파탈의 면면은 훨씬 더 철학적이다. 물론 잘 생긴 외모와 능력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 깔려 있는 내적인 성숙은 이들의 아재파탈이 다른 이들과는 다른 묵직한 느낌을 다가오는 이유다

자숙했던 이태임과 방송 강행했던 예원이 만든 차이

 

사실 이태임과 예원 모두 잘한 건 없다. 방송 프로그램을 찍던 중에 발생한 태도와 욕설 논란은 정확히 보면 두 사람 모두 일정 부분 잘못이 있다. 물론 그것은 사적인 영역이라 공적인 잣대를 갖고 뭐라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노출되기 마련인 연예인이라는 특성과 최근 리얼리티 예능이 들여다보는 것이 이제는 겉면만이 아닌 그 내면이라는 사실은 이 사안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폈다.

 


'띠동갑내기 과외하기(사진출처:MBC)'

사적인 영역이지만 어쨌든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모두 잘한 것이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모두 서로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이태임과 예원은 서로 다른 대중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처음 후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사실만 대서특필되면서 그 인성까지 의심받았던 이태임에 대한 지금의 대중들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일정기간 자숙의 시간을 가진 후 방송복귀를 결정한 그녀에게 대중들은 응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그것은 실제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나온 반전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욕설 부분만 강조해서 호도된 이태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실제 동영상 속의 예원이 눈을 치켜뜨고 던진 "제가 마음에 안 들죠?"라는 말 한 마디에 녹아버렸다. 대신 그간 마치 모든 잘못이 이태임에게만 있다는 듯 침묵하고 사과 받아주는 모습을 보여줬던 예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예원 역시 이 반응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방송이었다. 이태임이 잠시 방송에서 물러나 자숙했던 반면, 예원은 자신이 출연하고 있던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끝까지 하차하지 않고 방송을 마무리했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이런 사안들을 문제 삼아 하차시킨다는 것이 과도한 선택이라 여겼을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시청자들이 불편함을 호소했다는 점이다. 실제 동영상을 본 시청자들로서는 <우리 결혼했어요>가 가진 알콩달콩함이 거짓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그 안에서 쏟아내는 눈물이 자칫 이미지를 바꾸려는 의도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사안이 터지고도 몇 주 동안 계속 강행한 방송은 고스란히 예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더 쌓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실상 논란이 벌어지면 그 사안의 진위와 상관없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대중들의 정서에 반하는 결정들이다. 만일 이런 선택을 하게 되면 그것은 자칫 사안을 떠나 대중들과 대결하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만일 예원이 이 사안이 터졌을 때 그냥 지나치거나 덮으려 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잠시 방송을 떠나는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난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태임과 예원. 둘 다 잘한 건 없는 사안이었지만 그 대처에 있어서 너무나 다른 선택이 너무나 다른 결과를 낳았다.

 

자숙이란 잘못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있지만, 잘잘못을 떠나 불편한 이미지가 생겨난 연예인 당사자를 위한 회복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숙했던 이태임과 달리 방송을 강행했던 예원은 그 회복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태임과 예원 해프닝은 자숙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려보게 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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