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과 ‘오십억 게임’ 그리고 아빠 찬스

오징어 게임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 된 <오징어 게임> 속 말일뿐.” 곽상도 국민의 힘 의원의 아들 곽병채씨가 퇴직금 명목으로 50억 원을 수령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에 갑작스레 <오징어 게임>이 등장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현재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전 세계 83개국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드라마. 아마도 곽상도 의원의 아들 역시 이 드라마를 봤던 모양이다. 

 

그가 ‘오징어 게임 속 말’이라고 했던 건 이 드라마에서 기훈(이정재)은 노모의 카드를 빼내 현금 서비스를 받은 돈으로 경마를 한다. 드라마 첫 회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오징어 게임>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고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제 456억을 두고 이른바 VIP들의 재미를 위해 경주마가 되어 죽고 죽이는 데스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질 거라는 예고. ‘오징어 게임 속 말’은 그래서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경쟁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박하게 목숨을 걸고 달릴 수밖에 없는 보통 서민들을 은유한다. 물론 저 경쟁 시스템을 만든 기득권자들에 대한 환멸에 가까운 냉소를 포함해.

 

하필이면 <오징어 게임>의 비유를 들었지만, 대중들은 그것이 결코 적확한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6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는 일이 상식적일 수 없어서다. 게다가 이런 그가 진정으로 ‘오징어 게임 속 말’처럼 절박한 청년이라 보기도 어렵다. 곽씨는 “제가 입사한 시점에는 화천대유는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며 “돌이켜 보면 설계자 입장에서 저는 참 충실한 말이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운전 중에, 또 한 번은 회사에서 쓰러져 회사 동료가 병원으로 이송하기도 했다”며 “일 열심히 하고, 인정받고, 몸 상해서 돈 많이 번 것”이라고 했다. 그가 <오징어 게임> 운운한 건, 설계자는 따로 있고 자신은 그 안에서 열심히 달린 것뿐이라는 걸 피력하기 위함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오징어 게임> 속 기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드라마를 본 분들은 알 수 있듯이 기훈이 그런 결과를 얻게 되는 건 보이지 않는 설계자의 손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운’이다. 하지만 곽씨가 하필이면 그 회사에 입사해 6년 가량 일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은 걸 어떻게 운으로 볼까. 본인 스스로도 ‘설계자’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대중들이 이 사안을 ‘아빠 찬스’로 보는 이유다. 

 

곽상도 의원은 공석에서 취준생들의 박탈감을 대변한 일이 있다. “수십 수백 대 1 경쟁 뚫고 어렵게 입사한 직원과 채용에서 탈락한 취업준비생과 그 부모들은 가슴을 치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평등, 공정, 정의를 물었다. 놀랍게도 <오징어 게임>에서 456억을 두고 벌이는 게임에 룰로서 제시되는 가치들이 바로 평등, 공정 같은 것들이다. 그것을 어기면 즉결심판에 처해진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을 끝까지 보다 보면 평등, 공정 같은 가치들이 일종의 ‘선언’일 뿐, 결코 실현되는 가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경쟁사회라는 시스템 자체가 이런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게 한다. 특히 시스템 꼭대기에서 오징어 게임의 말들을 내려다보는 기득권자들의 선언과는 다른 ‘내로남불’이 존재하는 한 더더욱.

 

며칠 전 벌어진 장제원 의원의 아들 노엘 사건 역시 청년들에게 <오징어 게임>을 떠올리게 했을 게다. 무면허 운전, 음주측정 불응, 경찰관 폭행 게다가 그는 이미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2017년 래퍼로 데뷔한 후 지금껏 그만큼 많은 범죄행위들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연예인도 드물다. 하지만 그는 그 때마다 버젓이 활동을 이어갔다. 이것이 어떻게 노엘이라는 한 연예인의 힘만으로 가능할까. 보통의 연예인이라면 수년을 자숙해도 복귀가 가능할까 싶은 수준이 아닌가. 여기서도 청년들은 두 단어를 떠올린다. ‘내로남불’과 ‘아빠 찬스’. 한때 조국과 그 딸을 ‘부모찬스’를 언급하며 맹공했던 장제원 의원에게 이제 고스란히 그 화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오징어 게임>은 ‘오십억 게임’이 되었다. 누군가 시작한 패러디는 지금의 청년들이 느끼는 분노와 허탈감을 가득 담은 일종의 놀이처럼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 뉴스 속 댓글들도 “미안해 아빠가 곽상도가 아니라서...”, “곽상도 아들로 못 태어난 죄”라는 글이 유행처럼 번져간다. “곽씨와 화천대유는 깐부 사이냐”,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은 목숨을 걸었는데, 곽씨는 무엇을 걸었나” 같은 <오징어 게임> 속 이야기를 꺼내와 분노를 표한다. 

 

지금 <오징어 게임>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건, 그 세계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대신 현실을 똑 빼닮은 그 세계를 냉소하고 있어서다. 어쩌면 우리는 저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결코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공정이나 평등을 부르짖는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기훈이 설계자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듯이, 태생적으로 계급이 나뉘어져 ‘아빠 찬스’가 그 사람의 ‘운’처럼 치부되는 경쟁사회 속에서 <오징어 게임>은 불쾌하지만 적어도 폭로의 쾌감을 선사한다. 

 

청년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그 정서 속에는 분노와 허탈감, 조롱, 냉소 같은 감정들이 깔려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징어 게임>은 지금 현재 현실 버전으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니 그 누가 이 냉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건 어쩌면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게다. 전 세계의 청년들이 <오징어 게임>의 냉소에 열광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진짜 말처럼 뛰고 또 뛰는 서민들은, 게임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현실 버전의 경쟁 게임 속에서 몇몇 기득권자들의 즐거움(행복)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으니.(사진:넷플릭스)

<함부로 애틋하게>, 김우빈과 수지의 냉소적 사랑

 

너 나 몰라?” “알아 이 개XX.”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렇게 호통치고 욕하는 걸로 과거의 관계를 현재로 이어나갔다. 눈이 쌓인 혹독한 겨울, 얼마나 걸어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도로 위를 노을(수지)은 비틀대며 걸어가고, 멀리서 그 모습을 발견한 준영(김우빈)은 그녀를 외면하지 못한다. 그냥 돈이나 몇 푼 집어 던지고 돌아서려던 그였지만, 그녀의 무언가가 그를 잡아끈다. 그건 다름 아닌 애틋함이다. 그 애틋함이 함부로그의 가슴을 건드린다.

 

'함부로 애틋하게(사진출처:KBS)'

KBS 수목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에서 노을도 준영도 한가한 사랑 타령을 하기는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노을은 아버지가 뺑소니를 당하고 어이없게 다른 사람이 대신 뺑소니범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돈이면 뭐든 함부로되어버리는 현실을 알아버린다. 죽은 아버지 앞에서 고인에 대한 애도는커녕 그 자식들에게까지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려는 빚쟁이들처럼. 현실은 그렇게 냉정하기만 하다.

 

준영의 엄마 영옥(진경)은 가방끈 짧다는 이유로, 검사가 된 최현준(유오성)에게서 스스로 물러나 그의 아이인 준영을 혼자 키워낸다. 영옥은 준영을 검사 만들어 그의 아버지인 현준에게 자신이 아들을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준영은 검사가 되진 못했다. 대신 톱스타가 됐지만 그것 때문에 엄마인 영옥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채 1년을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톱스타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고, 게다가 유일한 세상의 끈인 엄마와 데면데면한 준영에게 사랑 따위는 사치스런 이야기다. 죽은 아버지에게서 빚만 잔뜩 물려받은 노을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 하는 세상 중의 을이다. 그녀 역시 사랑 같은 건 다른 나라 이야기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그녀가 툭 내뱉은 알아 이 개XX.”라는 말 속에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냉소와 함께, 그에 대한 일말의 마음 같은 것이 들어가 있다.

 

<함부로 애틋하게>의 준영과 을이 보여주는 냉소적인 시선은 사랑 따위는 개나 줘버릴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건 돈이거나 스펙으로 모든 게 결딴나는 그런 세상이다. 돈만 있으면 뺑소니를 쳐 사람을 죽이고도 다른 사람을 대신 감옥에 가게하고 자신은 해외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세상.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어린 자식들이 그 모든 걸 떠안아야 하는 그런 세상. 돈과 권력이 있는 집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정의롭게 행동하고도 벌을 받아야 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사랑 따위의 감정은 허위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함부로 사람에게 예의 따위는 차리지 않는 세상 앞에서 준영은 막돼먹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노을은 돈 앞에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비굴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진심일까. 어쩌다 보니 스스로를 막 대하게 된 청춘들의 작은 반항이 아닐까. <함부로 애틋하게>는 그러나 바로 그런 세상 속에서 여전히 남은 작은 희망을 바로 그 사랑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다. 어찌 보면 요즘 세태와는 조금 다른 옛사랑의 느낌이 묻어나는 건 그래서다.

 

애틋하다애가 타는 듯이 깊고 절실하다는 뜻이다. 주로 사랑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지금의 청춘들에게 애틋함이란 어쩌다 보니 가져서는 안 되는 현실 속에서 함부로쑥 들어오는 그런 감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갑자기 함부로 들어온 감정은 넘어서는 안 된다 여겨왔던 그 선을 넘게 됨으로써 더더욱 애틋해진다.

 

<함부로 애틋하게>의 조금은 구식처럼 보이는 옛 사랑은 과연 시청자들에게도 어떤 선을 넘어 애틋하게다가올 수 있을까. 함부로 슬금슬금 넘어오는 이 사랑이야기가 어쩌면 희망 없는 세상에 작은 훈훈함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하녀’의 냉소, ‘시’의 관조, ‘하하하’의 유머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처럼,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절망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몸부림을 하고 있을까. 칸느가 주목하고 있는 우리 영화 세 작품, 임상수 감독의 ‘하녀’, 이창동 감독의 ‘시’,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이 절망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하녀’가 5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견고한 시스템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면, ‘시’는 그 도저한 시간의 흐름 위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로 승화해냈고, ‘하하하’는 본래는 무의미한 절망적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의미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우리의 실존을 과거와 현재를 병치함으로써 홍상수 특유의 유머로 그려냈다.

김기영 감독이 ‘하녀’를 만들던 1960년도에서 50년이 지난 2010년,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하녀’라는 텍스트가 50년을 넘어서도 그대로 다시 리메이크되는 현실은 그 질문에 답을 준다. 공장여직공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중산층 가정에서 초상류층으로, 폐쇄공포증을 느낄 만큼의 좁은 저택에서 실제 공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판타지화된 대저택으로, 욕망의 화신에서 그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으로 바뀌어졌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이 ‘하녀’라는 계급이다. 자본의 시스템이 견고해진 현재에 ‘하녀’는 그 속에서 상류층에 살아가는 이들까지도 하녀로 부속화한다. 자본의 하녀다. 그래서일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는 다른 처절한 절망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세상은 좀체 변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그 변하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이 삶의 본질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본질을 계속 쳐다보려는 노력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어딘가에서는 억울하게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세상은, 제 아무리 누군가의 죽음에 죽을 듯이 절망감을 느껴도 그저 아래로 흘러가기만 하는 강물을 닮았다. 즉 철저히 타인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은 그 타자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킨다. 따라서 그 아프고도 고통스러운 시를 쓰는 행위는 그 절망적인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이창동 감독은 말한다. 점점 시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 그 어떤 통렬한 비판보다 ‘시’가 우리를 울리는 것은 그 미사여구 없이 그대로 바라본 듯한 현실의 관조 덕분이다.

‘시’가 무심한 세상에 대한 의미화에서 시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를 발견해냈다면, ‘하하하’의 시는 무의미한 세상에 대한 농담 같은 의미화가 사실은 우리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해주는 소재다. 문경(김상경)과 중식(유준상)이 같은 시간대에 통영에서 겪었던 며칠을 그려내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이 두 사람의 막걸리 자리의 안주거리에 다름 아니다. 두 사람의 겪은 일들은 사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가지 이야기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입장에서 각각의 이야기로 전한다. 즉 과거를 해석하고 의미화하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삶을 한바탕 술자리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제목처럼 하하하 웃게 만들지만 한편으론 허허로운 뒤끝을 남긴다. 홍상수 감독은 이제 삶의 절망감마저 유머로 승화시키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칸느에서 주목받은 이 세 작품은 모두 우리네 삶의 절망감을 다루고 있다. 그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절망감을 향해 누군가는 냉소적인 시선을 던지고, 누군가는 그 속에서 외면하지 않고 절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의 마음을 발견하며, 누군가는 그 절망감마저 하하하 막걸리 한 사발의 유머라고 달관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들 영화들이 우리는 물론이고 칸느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마치 절망이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허위들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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