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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 예능의 시작, <삼시세끼>의 성공비결

 

도대체 이 세계의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마음 훈훈하게 만들었을까. 과거 나영석 PD<12>유목 예능(?)’의 문을 활짝 열었다면, <삼시세끼>는 이른바 정착 예능의 시작을 알리는 듯하다. 아무 것도 하는 일 없고, 그저 잠시 멈춰서 있는 것처럼 보인 이 <삼시세끼>라는 정지의 시간은 우리가 그토록 바쁘게 움직이고 이동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시켰다. 거기에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시간들이 비로소 손에 잡히는 기적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유목 예능이나 정착 예능이나 도시를 떠난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두 다른 성격의 예능은 시간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유목 예능은 끝없이 움직이고 이동함으로써 도시의 삶이 우리에게 부여한 시간의 일상화를 깨는 힘을 발휘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살아온 도시인들에게 여행의 의미는 바로 그 일상 탈출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삼시세끼> 같은 정착 예능은 그렇게 부유하며 끝없이 바쁘게 떠돌 듯 시간을 살다보니 정작 손에 잡히지 않고 하나로 묶여지지 않는 시간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찾아보는 것이 목적이다. 도시를 떠나 정선의 한 공간에 들어간 두 남자는 가을에서 겨울까지를 지내며 도시에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시간들을 한 웅큼 잡아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쌓여가는 것들. <삼시세끼>라는 정착 예능이 놀라웠던 것은 그 쌓여가는 시간을 우리 앞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집 한 쪽 옆으로 가득 메워져 수수노예들을 양산했던 거대했던 수수밭이 어느 순간 다 거둬져 그 수수가 껍질이 벗겨지고 빻아지고 수수부꾸미로 재탄생하는 그 과정은 시간이라는 마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작은 상자 속에 누워있던 밍키가 어느새 훌쩍 자라 집을 기웃거리는 동네 개들을 쫓아내며 제법 역할을 하게 만든 것도 그 시간의 힘이고, 처음에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던 밥상이 차츰 채워지며 이 초보 농부들에게도 그 밥상을 더 채우고픈 마음을 들게 만든 것도 그 시간이 가능하게 한 일들이다.

 

여행과 농사는 마치 인류가 유목을 하다가 정착함으로써 문화를 만들어냈던 그 원천이다. 멈춤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그저 산개하고 날아가 버리던 시간을 축적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삼시세끼>는 물론 그것을 의도하고 만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정착을 통해 하나하나 쌓여진 시간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들인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찾아왔던 사람들과의 즐거웠던 기억 하나하나는 그 삼시세끼집 구석구석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최지우가 담가놓았던 김치를 서진과 택연이 꺼내 김치찌개를 끓여먹고, 서진이 갖다놓은 화목 난로에 먼저 도착한 택연이 불을 피운다. 하다못해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 넣을 때마다 그들은 어쩌면 어르신들이 오셨을 때 끓였던 곰탕과 고아라와 택연이 그 앞에서 알콩달콩 보냈던 그 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시간의 진정한 의미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도시에서 살며 시간의 향기를 잃어버렸다. 매일 매일 반복적으로 시간을 쓰고 하루를 보내다보니 정착해 있어도 그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점점 잊게 된 것이다. 물론 잠시 동안의 피곤을 풀어주는 왁자지껄함이 있지만 그것도 어떤 손에 잡히는 시간의 묶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한다. <삼시세끼>는 그 시간의 묶음으로 한 다발 우리에게 선사했다.

 

<삼시세끼> 같은 정착 예능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그만큼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 우리들의 마음 한 구석이 어떤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사실 삼시세끼 먹는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메뉴가 아니라고 해도 누군가와 진정한 소박한 한 끼를 나누는 그 진정한 시간에 대한 희구. <삼시세끼>가 이토록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다.

 

Posted by 더키앙

<미생><삼시세끼>, 결국은 노동에 대한 이야기

 

<미생><삼시세끼>는 같은 날인 1017일 시작해 각각 1221, 1220일 시즌을 끝냈다. 마치 tvN의 짝패처럼 두 프로그램이 동반상승했다가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로 달라 보이는 두 프로그램에서는 의외로 비슷한 느낌이 묻어난다. 그것은 이 두 프로그램이 모두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치열한 일의 세계 그 안쪽을 들여다봤다면, 다른 하나는 그 치열한 일의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보여주었다.

 

'미생(사진출처:tvN)'

<미생>은 결말에 이르러 결국 떠나는 자와 떠나게 될 자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팀장까지 잘 버텨왔으나 사업의 실패로 인해 희생양이 되어 회사를 떠나게 된 오차장(이성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왔지만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나게 될 장그래(임시완). 이 두 직장인이 보여주는 그림은 지독할 정도로 비극적이다. 아예 일의 세계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젊은이가 우리 세태의 한 면을 보여준다면, 그렇게 들어와 제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결국은 회사의 희생양이 되어 쫓기듯 나가게 되는 차장, 부장들이 우리네 현실의 또 다른 면이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그 쉼 없는 일중독을 스스로 강요하며 살아간다. <미생>의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는 그래서 때때로 거대한 괴물의 뱃속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 괴물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은 끝없이 괴물처럼 일해야 한다. 그 힘이 다하거나, 아니면 괴물과 이질감이 느껴지는 존재가 되는 순간, 그들은 그 뱃속으로부터 퇴출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유지만, 끝없이 일 속에서 중독적으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배제의 뉘앙스로 다가온다.

 

<피로사회>의 한병철은 우리네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하며, 바로 그 성과사회에서는 누군가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을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굴러간다고 한다. 원작 <미생>에서 왜 오차장이란 캐릭터가 빨간 눈으로 그려졌는지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는 끊임없이 일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물론 그것은 가장으로서의 깊은 책임감 때문이지만, 밥 먹듯이 야근하고 주말마저 반납하며 일에 빠져드는 건 지극히 강박적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일 하지 않으면 스스로 미칠 것만 같은 오차장들을 소진시키며 굴러가고 있다.

 

바로 이 개인을 자발적으로 소진시켜 굴러가는 성과사회의 극단에 서게 되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삼시세끼> 같은 정반대의 삶에 대한 로망이다. 강원도 정선의 벽지라는 도시에서의 거리는 어쩌면 일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의 거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떨어져 고립되어야 겨우 일에서 벗어난 금단현상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삼시세끼만 챙겨먹으라는 유일한 미션의 공간은 그래서 이 일중독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낯설면서도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부러움을 사는 장소가 된다.

 

밍키나 잭슨 같은 동물들과의 교감을 보여주고, 조금씩 자라나는 채소들의 성장을 바라보고, 지천으로 떠 있는 별과 드디어 들리기 시작한 시골의 소리들을 들려주는 건 그래서 마치 일중독을 치유하는 하나하나의 처방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렇게 처방전이 주어져도 그 안에 들어온 잠재적 일중독자들은 노동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노예라고 부르는 대목에서는 그래서 벗어나도 스스로 노동을 찾아가는 자신들을 희화화 한다. 그 안에는 씁쓸한 자조도 섞여있다.

 

이서진이 독특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일을 한다는 점이다. 그는 마치 일 중독 사회가 만들어내는 소진을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결국은 그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수수지옥으로 불리는 공간은 그래서 자못 상징적이다. 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일 속으로 들어간다. 다만 그 일이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그것을 마치 일이 아닌 놀이처럼 받아들인다. 성과주의 바깥에서의 일이란 그처럼 놀이화된다. 노예놀이 혹은 소꿉장난처럼.

 

<미생><삼시세끼>가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이처럼 노동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우리가 늘 그 안에서 살아가며 벗어나지 못하는 일의 세계에 대해 <미생>은 그 괴물 같은 시스템의 전모를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소진되어가는 이들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그 버티는 삶을 긍정해주는 시선에서는 보는 이들을 똑같이 위로해주는 힘이 생겨난다. <미생> 신드롬은 바로 그 공감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삼시세끼>는 그 노동 바깥으로 빠져나와 자연 속으로 고립됨으로써 일중독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의 행위는 그래서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는 로망이 된다. 그들은 일 바깥에서 비로소 발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드러낸다. 결국 이 두 프로그램의 성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성과사회의 두 측면을 담아낸 데서 비롯한 것이다. 11주 동안 우리는 그 노동의 두 얼굴을 마주했던 셈이다.

 

Posted by 더키앙

<삼시세끼>, 수수밭에 수수노예들은 없다

 

<삼시세끼>는 드디어 수수지옥을 벗어났다. 이서진과 옥택연에 이승기와 김광규라는 두 노예(?)를 충원한 노예 수수F4’는 끝끝내 수수밭에 남은 수수들을 모두 베었다. 그 과정에서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을 보다 못한 제작진까지 모두 수수밭에 투입되기도 했다. 일을 해본 나영석 PD는 뒤늦게 노동 강도가 외외로 세다는 걸 깨닫고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왜 그들은 굳이 그 수수밭을 끝까지 베었을까. 수수를 갖고 뭔가 만들어먹는 것도 아니다. 설혹 그 수확한 수수를 내다 판다고 해도 그런 돈벌이가 프로그램에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수에 그렇게 집착했는가가 궁금해진다.

 

그 의문은 그러나 의외로 쉽게 풀린다. 그 수수밭을 베는 장면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수수밭 앞에 마름처럼 나타난 나PD고기 한 근에 수수 한 가마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우습다. 그것은 물론 예능의 코드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제작진과 출연진 사이에 일종에 암묵적으로 허용된 놀이를 하는 듯한 뉘앙스도 들어있다. 고기를 먹으려면 수수를 베어야 하는 놀이.

 

여기에는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놀라운 매력의 원천이 숨겨져 있다. 많은 이들이 <삼시세끼>가 시골 라이프를 권장하는 귀농 프로젝트처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사실 <삼시세끼>와 귀농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나영석 PD 또한 인터뷰를 통해 밝힌 사실이다. <삼시세끼>는 시골에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쁜 도시생활에 지쳤을 때 나도 하루 정도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단순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그 소박한 소망을 채워준다.

 

이것은 생활이라고 하기 보다는 23일 정도의 작은 여행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그것은 아마도 나영석 PD가 일관되게 해온 여행이라는 소재의 또 다른 버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삼시세끼>는 이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실생활과는 조금 거리를 둔 프로그램이다. 거기서 출연자들은 <12>처럼 한 끼를 먹기 위해 돈을 벌거나 미션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읍내에 나가 음식 재료들을 사와도 된다. 나영석 PD는 의외로 거기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어준다.

 

만일 <삼시세끼>귀농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리얼리티를 갖고 만들어졌다면 이처럼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현실 자체보다는 그것을 잠시 벗어나 소소한 삶이 주는 또다른 풍요로움을 누려보게 한 것이 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성공 포인트다. 그래서 그들이 하루 종일 삼시세끼를 챙겨먹으며 하는 일들은 하나의 어른들을 위한 소꿉장난의 성격을 갖는다.

 

소꿉장난이라고 하면 어딘가 너무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일이나 생산성에서 벗어나 온전히 놀이로서 접하는 <삼시세끼>의 세상은 우리에게 그동안 잊고 있던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면이 있다. 그토록 외치던 생산성이 사실은 우리를 삶의 주인이 아닌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거기서 깨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성과 무관한 수수밭 베는 일에 투입된 네 사람을 노예라 부르고 수수 F4’라고 부르지만 거기 진짜 노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을 했다기보다는 하나의 게임 같은 놀이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수밭은 그래서 노동의 공간을 놀이의 공간으로 바꿔놓은 <삼시세끼>의 상징물처럼 보인다. 그들은 물론 허리가 빠지게 수수를 베었지만 그것이 고기 한 점이라는 흥미로운 놀이 때문이라는 점은 이 수수밭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늘 일과 생산성 관점으로만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이런 놀이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을 위한 소꿉장난은 그래서 어쩌면 그 어떤 위로나 위안보다도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Posted by 더키앙

<12>부터 <꽃할배>, <삼시세끼>까지, 이서진의 매력

 

이서진씨가 완전히 물이 올랐어요.” <삼시세끼>의 승승장구에 대해 나영석 PD는 이렇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신기한 일이지만 이서진이라는 인물은 나영석 PD만 만나면 반짝반짝 빛난다. 최근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 <참 좋은 시절>은 최근 <삼시세끼>로 인해 재조명되는 느낌이다. 이 드라마에 출연했던 이서진을 중심으로 함께 삼시세끼를 해먹는 옥택연과의 조합이 만들어졌고 윤여정, 최화정, 김광규, 김지호가 연달아 출연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참 좋은손님들은 이 MSG 없는 예능 프로그램에 괜찮은 양념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양념으로서 기여하게 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 이서진이라는 손맛이 있었다는 점이다. 열심히 하려는 택연에게 노예근성운운하는 말로 캐릭터를 부여한 것도 이서진이고, 김광규가 왔을 때 수수밭만 베라고 그를 자꾸 부추긴 것도 바로 이서진이며, 김지호에게 뱃속에 거지 앉았냐고 투덜대며 텃밭 브레이커의 탄생을 알린 것도 이서진이었다류승수는 이서진에게 속아 아궁이 일꾼이 되었다. 이서진은 하다못해 염소 잭슨과의 러브라인(?)까지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나영석 PD 말대로 물이 오른 것(?)이 분명하다.

 

이서진의 가능성을 처음 나영석 PD가 발견한 건 <12> 때다. <12>에서 이서진은 미대 형이라는 캐릭터로 불렸다. 전혀 웃길 것 같지 않은 진지함을 보이는 인물이지만 엉뚱한 면으로 웃음을 주었다. 이 때부터 투덜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러면서도 특유의 선한 이미지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기도 했다.

 

<꽃보다 할배>에서 이서진은 조커 역할을 했다. 어르신들에게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상황을 나영석 PD는 이서진을 중간에 놓음으로써 해결했다. 이서진을 끊임없이 힘겹게 만들고 또 깐족대는 것으로 나영석 PD는 이 어르신들의 여행에 톡톡 튀는 재미를 만들어냈다. 이서진의 매력은 투덜대면서도 할 건 다 하는(심지어 아주 잘 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어르신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나영석 PD에게는 으르렁대는 모습에서 이서진의 양면적 매력이 탄생했다.

 

<삼시세끼>는 악덕 마름 같은 나영석 PD와 투덜대는 노예 같은 이서진 캐릭터의 조합이 흥미진진한 재미를 만들어낸다. 고기 한 점에 수수 빚을 받는 마름 나영석 PD, 빚이 불어남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점점 고기를 찾게 되는 이서진이 곤란해지는 그 상황을 한껏 즐기는 모습이다.

 

즉 이서진이라는 대체 불가의 매력이 탄생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 악역을 자처한 나영석 PD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악역처럼 보인다. 물론 그 악역에게서 실제 악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하다. 나영석 PD는 악당이라기보다는 악동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그저 순응하기보다는 투덜대는 캐릭터가 훨씬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결국은 시키는 일을 하는 캐릭터는 더더욱 재미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점점 노예처럼 길들여가는(?) 악동 캐릭터는 마치 시청자들의 욕구를 반영하듯 은근한 쾌감까지 선사한다. 하지만 이들의 전체 그림이 주는 느낌은 살풍경한 것이 아니라 참 좋은훈훈함이다. 이렇게 좋은 캐릭터들이니 승승장구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서진이 나영석 PD만 만나면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다.

 

Posted by 더키앙

<삼시세끼>가 묻는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런 걸로 예능이 될지 누가 알았을까. 고추 장아찌를 담근다며 항아리를 사다가 고추를 넣고 간장 양념을 끓여 넣는다. 장아찌가 잘 되게 하기 위해 눌러 놓을 돌을 구하러 간 이서진은 소식이 없다. 알고 보니 뭐든 과한이서진이 짱돌 하나를 구하려고 별 고심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어찌어찌해 고추 장아찌를 담아낸다는 이야기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이 아무 것도 아닌 짧은 에피소드는 그러나 <삼시세끼>라는 예능 신세계에서는 충분한 예능 소재가 된다. 가져온 짱돌이 항아리 구멍에 맞지 않아 투덜대는 이서진과 다 채워넣고 고추에 미리 냈어야할 구멍을 안내 다시 꺼내 고추 자르게 만드는 옥빙구 택연이 있으니 금상첨화다. 어떻게 이런 소소함이 예능이 될까.

 

그것은 메인으로 내세울만한 극적 내러티브가 없는 <삼시세끼>라는 신세계 덕분이다. 도시와 유리된 이 곳에서는 뭐든 하나하나가 작은 모험(?)처럼 다가온다. 사실 곰탕 한 그릇 먹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도시에서라면 유명한 곰탕집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삼시세끼>에서는 다르다. 가마솥에 밤새 우려낸 국물에 기름을 덜어내고 직접 담근 깍두기와 텃밭에서 갓 뽑은 파를 썰어 가마솥 밥과 함께 내놓는 곰탕. 하나하나 손길이 닿은 그 일련의 과정들은 곰탕 한 그릇의 맛은 물론이고 그 훈훈함까지 더해준다.

 

없다는 것은 <삼시세끼>에서는 이 새로운 공간에서의 설렘과 모험의 시작이다. TV가 없어 할 게 서로 떠드는 일이고, 보일러가 따로 없어 군불을 때며, 커피 메이커가 없어 맷돌로 갈아 커피를 한약 내듯 뽑아낸다. 물론 해야 될 일들이 많아 바로 눈앞에 펼쳐진 구름 낀 옥순봉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렇게 옥순봉 풍경 한 번 쳐다보고 지나갈 도시인들이 느낄 수 없는 시골 체험의 묘미가 거기에는 있다. 하다못해 이 곳에서는 강아지 밍키의 성장 하나도 볼거리다.

 

갓 딴 텃밭 채소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솥뚜껑에 기름 뿌려 만든 달걀프라이를 솥밥에 얹어 참기름, , 고추장을 넣고 썩썩 비벼먹는 맛은 그래서 그대로 도시인들에게는 로망이 될 수밖에 없다. 생김에 숟가락으로 기름을 살살 칠하고 소금을 뿌려 숯불에 직접 구워낸 김은 또 어떤가. 비록 손은 많이 가지만 그렇게 한 장 한 장 구워내 한 통 가득 담긴 김이 주는 느낌은 말 그대로 뿌듯하다. 석쇠에 구운 고등어 한 점이 주는 훈훈함. <삼시세끼>는 멀리서 바라보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곳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매번 새로운 사건(?)들이 벌어진다.

 

여기에 수수밭 베기같은 노예 놀이는 마치 <12>의 복불복처럼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분위기에 팽팽함을 만들어낸다. 노동이 만들어내는 땀의 힘은 <삼시세끼>에서도 여지없이 효력을 발휘한다. 그저 삼시세끼 챙겨먹는 시골 생활의 소소함을 클로즈업하고 거기에 강도 높은 노동을 얹으니 나영석 PD만의 균형 잡힌 예능 신세계가 탄생한다. 마치 소꿉장난하는 듯한 설렘은 이 세계가 건네는 꿀잼의 덤이다.

 

여기에 이서진처럼 전혀 과하지 않은 나영석 PD만의 스타일로 재미에 의미가 덧붙여진다.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러 군청에 들어간 택연을 차에서 서진이 기다릴 때 마치 맞춘 것처럼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내레이션.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 행복은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고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이며 지향점이다.” 힘든 하루의 노동에서 잠시 허리를 펴고 거실에서 뒹굴대는 이서진과 택연의 모습이 그 내레이션 위에 겹쳐진다.

 

조지 오웰.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단정 짓지 말아야 행복할 수 있다.” 서진이 수수를 베는 모습이 이어지고, “빅토르 위고.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라는 멘트에 백일섭이 이서진에게 무언가를 먹여주는 장면이 보여진다. 그리고 자막. ‘아아 나는 정말 노예인가 아닌가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 자막의 목소리는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되지 않았을까.

 

마침 군청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돌아온 택연이 패트병에 담아온 물을 서진에게 건네자 그가 물을 마시는 장면에 이런 자막이 붙는다. ‘아 역시 난 행복해..’ 이것은 나영석 PD<삼시세끼>가 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는 이들을 훈훈하고 흐뭇하게 만드는가를 잘 보여주는 편집 영상들이다. 이제 나영석 PD는 시골의 짱돌 하나로도 예능을 만들어내는 놀라움을 보여주고 있다.

 

Posted by 더키앙

<개콘>, 노예, 거지 캐릭터 전성시대 왜?

 

“지가 마님 옷을 떨어뜨렸슈.” “우리 목도 떨어지겄구만.” “옷이 찢어졌슈.” “내 사지도 찢어지겄어.” <개그콘서트(이하 개콘)>의 새 코너 ‘노애’는 드라마 <추노>의 상황을 패러디한다. ‘분수도 모르고 종놈들끼리 눈 맞으면’ 개죽음을 당하는 그 상황에 송영길과 허안나는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액션(?)으로 표현한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빨려던 마님의 옷을 떨어뜨린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신들의 목도 떨어질 거라고 말하는 송영길의 모습은 그 과장된 처절함 때문에 웃음을 준다. 하지만 고작 웃전의 옷 하나 때문에 사지가 찢어질 것을 걱정하는 이 노비들의 죄를 들은 마님의 반응은 이들의 상황을 더 처참하게 만든다. “나 이 옷 안 그래도 질려서 버리려던 참인데. 이거 개집에나 깔아줘라.”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물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개집에 버리는 그런 물건. 하지만 그렇게 버리려는 물건을 허안나는 굳이 자신이 챙겨 입겠다고 한다. 그러자 송영길은 만류하며 이렇게 말한다. “글쎄 입지 말라면 입지 말란 말여. 그거 입으면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릴 거잖여. 너는 선녀니께.”

 

분노의 빗자루질로 사랑을 표현하는 송영길과 먹다 버린 고기를 챙겨먹으려는 허안나의 처절과 분노가 과장되게 뒤섞인 이 개그는 그러나 어느 한 사극 속의 한 대목을 패러디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웃음 속에는 양극화로 시름하는 현실의 처절함이 공감대로 깔려 있다. 우리는 이 웃전들의 옷 한 벌에 또 고기 한 점에 온 몸을 떠는 노비들의 삶에 빵 터지지만, 그 뒤에 남겨진 씁쓸함을 공감하게 된다.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원.” 이 대사 하나로 대중들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된 ‘거지의 품격’이 거지가 되어버린(어쩌면 과거에는 어떤 품격을 갖추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삶을 유쾌하게 뒤집어 웃음을 주었다면, ‘노애’는 그 노예가 되어버린 처절하며 분노에 찬 삶을 과장되게 드러냄으로써 웃음을 준다. 그래도 ‘거지의 품격’이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면 ‘노애’는 그런 여유가 보이지 않는 절절한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제 첫 코너로 등장한 ‘노애’가 주목받는 것은 그 캐릭터가 공감가기 때문이다. 웃전이 씹다 질겨서 뱉어버린 고기를 서로 먹으려 아옹대는 모습에서는 날선 풍자가 느껴진다. 한 편에서는 ‘정여사’ 같은 이들이 질려서 버리며 흥청망청 살아가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바꿔줘”를 연발하는 천민자본주의가 횡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돈 한 푼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현실이 아닌가.

 

“아들 아들 아빠 회사에서 잘렸어. 너도 곧 유치원에서 잘릴 거야.” “저는 아들 갈비도 못 사주는 쓰레기니까요.” ‘갑을컴퍼니’의 홍대리(홍인규)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던지는 이 말은 그래서 그 공감 때문에 웃음이 터지지만 한참을 곱씹어보면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진다. 도대체 그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극과 극의 삶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이건 해도 너-무한 삶이다. 그러니 ‘정여사’의 말을 빌어 한 마디 던져볼밖에. “바꿔줘.”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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