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성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과 <그 겨울>

 

조인성의 연기에 대한 대중들의 기억은 오래도록 <발리에서 생긴 일>에 멈춰져 있었다.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이 흉내 내곤 했던 입에 주먹을 넣을 듯 눈물을 삼키며 전화를 거는 장면으로. 이렇게 된 것은 그 역할이 조인성이 가진 이미지와 가장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찌질하다고 표현될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한 그가 전화를 통해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상대방 몰래 솟구치는 눈물을 흘리는 연기에는 연약함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고통스럽게 참아내야 하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났던 것이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바로 그 겉으론 강한 척(심지어 나쁜 척) 하면서도 사실은 그 연약하리만치 섬세한 감정이 터져 나올 때 조인성이라는 연기자는 자신의 매력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이랄까. 드라마적으로 이런 장면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려면 조인성과 상대역 사이에 어떤 차단막이 필요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전화기가 그 소통과 차단막의 역할을 해주었듯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는 오영(송혜교)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이 그 차단막 역할을 해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상대인 오영과 오수(조인성)가 엮어가는 멜로가 가슴 아픈 것은 그들 간의 소통이 거의 말로 이뤄질 수 있지만 시청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하는 말 이면에 놓여진 숨겨진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오영 앞에서도 심지어 오수는 짐짓 나쁜 척, 쿨한 척 하지만 자꾸만 솟아나는 먹먹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려 한다. 그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장면이 주는 소통의 일시적인 단절은 시청자들을 애타게 만들 수밖에 없다.

 

물론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 이외에도 이 드라마는 꽤 많은 차단막들을 설치해두었다. 예를 들어 돈 때문에 접근한 오수라는 겉면과 점점 돈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는 오수의 속내도 조인성이라는 연기자의 애써 다문 입술과 힘준 눈빛을 통해 드러나고, 잠자는 오영의 입술에 닿을 듯 멈춰서 있는 그의 입술은 연인 감정을 느끼지만 결국 오빠라고 속일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의 차단막에 의해 머뭇거린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과 속내 사이에 놓여진 이러한 차단막은 오수와 오영이 가진 삶에 대한 태도 속에도 들어가 있다. 사랑 따윈 필요 없고 살고 싶지 않다는 오영과 삶의 의미 따윈 필요 없고 그저 살아 있으니 살아봐야겠다는 오수는, 서로 만나 감정을 나누면서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왜 날 이렇게 자꾸 약하게 만들어 넌. 왜 날 자꾸 살고 싶게 만들어 넌.” 겉으론 화를 내고 있지만 오영은 오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다.

 

오영에게 “살고 싶다”는 얘기를 들으려는 오수와, 오수에게 자꾸만 오빠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는 오영. 결국 이 오영과 오수의 사랑을 더 절절하게 만드는 순간은 이들의 단단한 겉껍질이 벗겨져나가고 서로의 진짜 알맹이가 드러날 때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으나 그 앞에서 애써 쿨한 가면을 써오던 두 사람이, 바로 그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마음을 열고 더 아프게 서로를 껴안는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네 삶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아닐까.

 

조인성이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특히 그만의 매력을 폭발시키는 이유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차단막(시각장애, 오빠동생 설정, 돈과 사랑 같은)이 워낙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인성이라는 연기자가 가장 자신의 매력을 끌어낼 수 있는 영역이니까. 그가 미간을 찡그리고 시선을 살짝 피하며 입술을 앙다물면서 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할 때 그 아픈 감정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바람을 불게 만든다. 마치 차가울수록 자그마한 따뜻함에도 눈물 흘리는 겨울처럼.

힘겨운 현실, 위대한 사랑, '휴먼다큐 사랑'

틴틴 파이브의 멤버로 대중들의 사랑을 담뿍 받아왔지만, 결혼 직후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이동우씨, 재혼해 행복을 꿈꾸다가 폐암 말기라는 판정을 받고 마지막 아름다운 나날들을 보내고 떠나버린 안은숙씨, 성탄절 버려져 같은 이름을 얻은 성탄이, 찾아온 친부모에게 "엄마 안 좋아"를 연발하지만 뒤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그토록 기다려왔던 다현이, 어느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가 그 가족을 행복하게 변화시킨 윤아, 아버지의 이혼으로 함께 살게 되었다가 이제 힘겨운 이별을 한 산골 소녀 가은이와 눈물 많은 할머니.

올해도 '휴먼다큐 사랑'이 바라본 것은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벌써 이 코너가 시작된 지 5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또 달라져서도 안되었다. 왜냐하면 '휴먼다큐 사랑'은 세상 속에 부재한 듯 보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랑을 찾아나서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멀리서 관망하면 그저 쿨하게 움직이는 듯 보이는 세상, 하지만 조금만 다가서서 바라보면 그 안에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휴먼다큐 사랑'은 그 특별하지만 또 어쩌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보편적인 사랑을 매년 찾아 나선다.

'휴먼다큐 사랑'이 가진 인물에 대한 집중은 그러나 인물 속에만 매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동우씨를 통해서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안은숙씨의 사연 속에 스며있는 재혼가정의 이야기를 바라본다. 아동복지센터를 배경으로 버려지고 거둬지는 성탄이와 서진이 그리고 윤아의 이야기는 힘겨운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여전히 희망처럼 남은 사랑을 통해 입양의 문제까지 환기시키며, 가은이와 할머니의 이야기는 내리사랑 속에 교육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휴먼다큐 사랑'의 카메라는 인물에 집중하면서 빛나는 그 인물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잡아내지만, 그것은 또한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차가운 현실을 말하기도 한다.

그 현실은 그들에게 상처를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상처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더욱 끌어안는다. 프레임 속의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생각하며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갑자기 부여된 힘겨움을 서로 껴안아주면서 더 사랑할 수 없음에 미안해 했던 것뿐이다. 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 바깥에 존재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세상이 아무리 힘겨워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서 '휴먼다큐 사랑'이 줄곧 보여주는 것은 가족애다. 보이지 않는 눈을 대신해주는 이동우씨의 가족들, 안은숙씨의 마지막 나날들을 아름답게 해준 남편과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을 사랑으로 껴안아준 아이들의 새 가족들, 자신의 힘겨움을 뒤로한 채 자식의 힘겨움까지 끌어안은 내리 사랑을 보여준 가은이의 할머니. 그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상처받은 이들을 단단히 동여매준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휴먼다큐 사랑'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매번 다르면서도 같다. 다른 것은 당대에 벌어지는 현실들이고, 같은 것은 가족애다. 매년 우리를 찾아와 잊고 있었던 눈물과 감동을 어김없이 선사하는 '휴먼다큐 사랑'. 우리의 눈에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은 그 사랑이 아무리 달라진 세태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 가슴 속에 늘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년에도 또 그 앞으로도 이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우리는 기원한다. 이것이 '휴먼다큐 사랑', 그 고마운 존재의 이유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슬픈 이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은 세 번 자살을 시도한 대학교수 유정과 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 윤수의 만남을 다룬다. 학생시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한 유정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분노를 밖이 아닌 안으로 터뜨리는 중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한편 용서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윤수 또한 빨리 사형이 집행되기만을 기다린다. 한쪽은 피해자고 다른 한쪽은 가해자다. 그런데 그 둘은 모두 소통의 창을 닫고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우행시는 그런 둘이 만나 닫았던 창을 열고 소통하면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이야기다. 스타일은 휴먼드라마이고 진행은 전형적인 멜로 신파를 따라간다. 관습적인 장면들과 상투적인 사건전개가 대부분이지만 ‘울고 싶어’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100% 이상의 만족을 주는 영화다. 그런데 이 한 영화 속에 여러 층위의 눈물이 있어 주목을 끈다.

첫 번째 눈물 - 멜로
‘우행시’의 설정이 사회극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그저 남녀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사형수 남자와 자살을 꿈꾸는 여자가 만나는 것이다. 그 어느 한 캐릭터만을 선택해도 하나씩의 사회극이 탄생할 정도의 인물들이다. 그런데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사회극을 포기하고 멜로 라인을 따라간다. 물론 그 멜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 같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형대에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얘기하는 그 장면들이 이 영화가 멜로와 사회극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을까. 강동원이라는 존재감 있는 배우가 “사는 게 지옥 같았는데 이젠 살고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나왔던가. 아니면 사형대에서 “유정씨 내 얼굴 까먹으면 안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던가. 굳이 사형대 시퀀스를 일일이 보여준 것은 ‘사형제에 대한 부당성’ 혹은 ‘인간을 죽이는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고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극적인 멜로를 위한 장치로서 사형대라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불치병이라는 신파 멜로의 틀을 사형대라는 장치로 변용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이 클라이막스에서의 눈물은 어딘지 깊은 울림이 없다.

두 번째 눈물 - 관습적 장면들
영화가 멜로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좀더 사회적인 접근을 요하는 장면들은 관습적인 장면들로 채워졌다. 영화가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두 사람간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이지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 하는 사회적인 고민이 아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소개되는 장면들은 너무나 상투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우리는 굳이 그 상세한 전후사정을 몰라도 눈먼 동생을 데리고 추운 거리를 떠도는 어린 윤수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슬픔을 느낀다. 아니 눈먼 동생의 때에 절은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슬픔은 영화가 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가졌던 슬픔을 영화는 슬쩍 가져온 것뿐이다. 폭력 아버지에 매맞는 엄마로 대변되는 윤수 형제가 처한 상황 역시 관습적이다.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고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또한 그렇다. 이러한 눈물은 영화 자체의 힘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환기능력, 혹은 이 불합리한 사회가 준 눈물이다. 사회적 문제에서 끌어온 눈물이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대해 어떤 문제제기까지는 하지 못한다. 게다가 ‘가난한 삶이 범죄를 불렀다’는 가난과 범죄의 운명적 도식을 단순화해놓는다.

세 번째 눈물 - 인간에 대한 용서
멜로도 관습적인 장면들도 깊은 울림을 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무언가 다른 눈물이 있지는 않았을까. 이 영화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장면들을 계속 내보내는 중간, 단 한 시퀀스가 시선을 끈다. 그것은 바로 윤수가 돌발적으로 살해한 파출부의 어머니인 박 할머니(김지영 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살인범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용서하는 이 어머니의 장면은 가장 리얼하면서도 독창적이며 영화의 주제에 단숨에 접근하는 힘이 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을 뛰어넘는, 모성애적인 용서는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려했던 것이다.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오마... 제발 살아있어라”라는 박 할머니의 말 한 마디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멜로 신파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한 용서’라는 좀더 깊은 감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래 하려던 이야기는 바로 ‘용서’였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멜로에 가려진 몇몇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유정이 윤수에게 자신이 학생시절 당했던 이야기를 했을 때, 윤수가 “미안하다” 고 말하는 장면은 용서와 사랑이 남녀관계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다. 박 할머니의 이야기는 좀더 영화 뒤쪽으로 밀어둘 필요가 있었다. 영화 중반부에 이미 하려는 이야기를 다한 영화는 이후부터 멜로 라인을 향해 달려간다.

세 종류의 눈물이 말해주는 것
그것이 멜로이든, 관습적 장면이든, 용서든 간에 ‘우행시’는 분명히 사회의 불합리함을 꼬집는다. 결국 이 영화 속에서 우리는 사회가 한 사람에게 어떻게 고통을 주고 그를 죽이는가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윤수를 고통스럽게 했던 아무런 안전망 조차 없는 사회에 대한 질타와 유정을 세 번 자살 시도하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게 사랑이던 종교이던 용서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은 존재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위로하는 장면들은 슬프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역설적 제목에는 사회의 책임의식에 대한 비판과 체념이 모두 들어 있다. 사회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지만 그들은 그런 사회에 보복하듯이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할 건 그 “행복하다”고 말하는 많은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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